"여보 무슨 책이길래 하와이까지 와서 경치 구경은 건성으로 하고 계속 책만 보고 있는 거예요. 경치 좀 보세요." "응" 무성의하게 대답하고는 여전히 눈은 책에서 붙어 있었습니다. 평소 책을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는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오랜만에 제대로 한 권의 책을 만난 것입니다. 하와이 여행 내내 이 책을 보았고 다 본 후에는 다시 밑줄 친 데만 한 번 더 읽으며 또 줄을 쳤습니다.
무슨 책이냐고요. 정시몬이라는 분이 쓴 <세계사 브런치>라는 책입니다. 책 제목 앞에는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습니다. 월요편지를 쓰기 위해 오늘 아침 두 번째 줄 친 데만 다시 한 번 30분에 걸쳐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세 번 읽은 셈입니다.
한번 내용을 보실까요? Nebuchadnezzar Ⅱ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한국말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입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150년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존속하였던 신 바빌로니아 왕국의 두 번째 왕입니다. 잘 기억이 안 나실 것입니다. 저도 고개를 갸우뚱하였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 사람을 모르는지 저자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바빌론 성벽을 완성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Hanging Garden of Babylon)을 건설하는 등 치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후대에 길이 남게 된 계기는 바로 유대인들과의 악연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82년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유다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이 사건이 바로 <바빌론 유수>이다. 영어로는 Babylonian Captivity of the Jews라고 쓰는데 유수(幽囚)라는 어려운 한자보다 Captivity(생포)를 쓴 영어 표현이 더 의미가 빨리 전해진다."
저자는 성경의 시편 137편을 포로로 끌려온 어느 유대인이 바빌론에 들어서기 직전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지은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영어 원문을 같이 게재하며 주의 깊게 보라고 요청합니다.
시편 137편 1절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저자가 소개한 영어 원문은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and
wept, when we remembered zion.'입니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영어 문장이 낯익은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1970년대 말 유럽과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보니 엠(Boney
M)의 노래
<리버스 오브 바빌론(Rivers of Babylon)>의 가사가 바로 이 시편의 구절을 가지고 온 것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왕과 시편 137편, 거대가 <리버스 오브 바빌론>까지 연결하는 저자의 솜씨에 그만 매료된 것입니다. 각각 알던 단편 지식을 하나로 구술 꿰듯이 연결하는 그의 이야기 솜씨에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술 더 뜹니다.
"'바빌론의 유수'를 배경으로 한 음악으로는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도 있다.
'나부코'라는 제목 자체가 이탈리아식 표현이다. 그러고 보니 한글판 성경의
<다니엘서>에서 언급되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이름은 느브갓네살이다"
어쩐지 네부카드네자르가 익숙하다 했더니 성경에 나오는 느브갓네살이었습니다.
저자의 결정타는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의 상관인 모피어스가 지휘하는 전함의 이름이 네뷰커드네저, 즉 네부카드네자르(Nebuchadnezzar)이다." 서양에서는 네부카드네자르가 팝송에서 오페라에서 영화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하나하나 접할 뿐이지요. 이러니 우리가 아는 서양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 수준일까요?
그러면 동양에 대해서는 잘 알까요?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동양 특히 중국에 대해서도 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를 영어로 옮기면 어떻게 표현할까요. 다시 이 책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Grand Historian은 사마천의 관직이었던 태사령을 옮긴 말이다."
태사령과 Grand Historian 중에 어느 표현이 더 쉽게 이해되시나요. 저는 후자입니다. 한문이 이해를 돕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해를 어렵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문에 익숙하여 한문 표현을 우리가 당연하게 이해하려니 하지만 사실 한문도 중국의 글자이고 보면 외국어라 당연히 이해하는데 장벽이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애써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할 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영어로 어떻게 번역할까요. 춘추시대는 'Spring and Autumn Period(봄과 가을의 시대)'라고 표현하고, 전국시대는
'Warring States Period(전쟁하는 나라들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그 시대의 파워 국가인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은 어떻게 표현할까요. 그 책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춘추오패는
'the Five Hegemons(5대 패권국)', 전국칠웅은
'Seven Powers(7대 강국)입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 통일을 한 진시황제는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까요.
'the First Emperor of China'입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진시황제와 'the First Emperor of China'의 두 표현을 알려주고 어느 표현이 더 쉽게 이해되느냐고 하면 아마도 대부분 후자를 들 것입니다. 한자에 약한 세대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한자어보다 그것을 번역한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가 쉽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내친 김에 몇 가지를 더 보겠습니다. 만리장성의 영어 표현은 무엇일까요?
'Great Wall of China'입니다. 바로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유비 조조 손권이 등장하는 삼국시대를 다룬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영어로 표현할까요? <삼국지>는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이고 <삼국지연의>는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입니다. 영어 표현이 더 쉽게 쏙쏙 이해가 된다고 느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저는 개별 역사적 사실과 문화 현상들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각 분야에서 역사적 사건들이나 문화적 유산들을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문화에 접목 시키고 있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별 지식을 공부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들을 관통하는 목걸이가 무엇인지 공부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한국과 중국의 자료로만 이해하려 들지 않고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자(영어 등)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지를 공부하다 보면 지금보다 훨씬 폭넓은 시야를 얻을 것 같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문득, 논어를 영어로 읽고 싶어 집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절름발이 지식이 제대로 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딱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15.11.16.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