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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1:3-11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사도는 인사말이 끝나자 바로 감사부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를 향한 감사와 기쁨.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서 차꼬를 차고 쇠사슬에 매여 있어요. 조금도 감사하거나 기뻐할 게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도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첫마디가 감사와 기쁨이에요. 그 감사와 기쁨이 얼마나 넘쳤는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뻐한다’고 합니다. 참 놀랍죠? 그 이유가 뭔가 하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사업이 실패해도, 몸에 병이 들어도,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성도는 하나님 그분 자체로 기뻐하고 그분만으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분이 주시는 것으로 감사가 아니고 그분이 문제 해결을 해주셔서 기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분이 처음이고 그분이 마지막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어떤 사건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는 거예요.
(하박국 3장)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런 감사가 있느냐고요. 한번 찾아보세요.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참 놀랍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사람이 제일 목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이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누리는 거예요. 오늘 본문처럼 성도가 하나님의 선한 일, 곧 복음에 참여된 자로서 행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착한 일입니다.
여기서 참여되었다는 단어가 코이노니아예요. 교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제한다. 말씀이신 예수와 교제하는 성도에게서 나오는 착한 일, 선한 일을 말합니다.
사도는 지금 빌립보 교회의 연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로 모인 그들이 바울의 사역에 계속해서 연보를 보낸 거예요. 그것을 바울은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 역시 좋은 환경이나 부유한 재정을 가지고 연보한 게 아니에요. 빌립보라는 도시 자체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바울을 감옥에 가두고 결국 쫓아낸 그런 곳이란 말이에요. 그런 곳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런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들이 넘치는 기쁨으로 그리고 극심한 가난이 그들에게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고후 8장)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연보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는 거예요. 그게 연보예요. 주께서 빌립보, 그러니까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가 어떤 은혜라고 해요?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게 되는 그런 은혜란 말입니다.
여러분도 환란과 시련 극심한 가난같은 그런 은혜를 받고 싶으세요? 넘치는 연보를 하는데 그게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연보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돈을 내는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주께 드리는 거예요. 그게 성경이 말하는 연보입니다.
당시 마게도니아 교인들은 빌립보를 비롯해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같은 곳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가정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그런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하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서 성도를 섬겼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의 한몸된 교회입니다. 이것이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에요.
교회는 지상에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만인이 한 사람을 섬기고 그 한 사람이 만인을 섬기는 그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믿음, 그리고 평강 가운데 실행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거예요. 여러분이 나중에 천국 가면 아실 거예요. 거기는 모든 사람이 나를 섬기는 곳이에요. 신나죠? 그리고 내가 모든 사람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게 천국 삶의 원리입니다. 바울 사도는 단순히 연보를 보낸 것에 감사한 게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실행되는 교회를 지켜보면서 그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이렇게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감추어진 교회입니다.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가 교회예요.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과 완성이 그리스도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복음을 사도는 다시 한번 빌립보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거예요.
본문 6절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에르곤 아가돈)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시간에는 그 착한 일에 대해서 좀 깊이 있게 나누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착한 일이 로마서 2장에도 나옵니다.
(롬 2장)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여기 성도가 행하는 착한 일, 선이 나오죠. 그런데 그 착한 일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이에요. 예수님의 행함에 의해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에게서 격발되어 나오는 수동적이고 필연적인 행함이 착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게 아니란 말이에요.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의 착한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새 창조입니다. 본문 6절에서 말하는 그 착한 일.
야고보서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여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은 그냥 믿기만 하고 그 믿음에 따른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 종교성을 발휘해서 행하는 그런 종교 행위들, 율법 행위들이 가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 곧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토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완성을 가리키는 토브이기 때문에 그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과 행함 안에 있는 교회에서 나오는 또 다른 선한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행함, 성도의 착한 일은 한 단어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등장할 때는 항상 행함은 아니라는 말로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우리의 착함, 우리의 선한 일이라고 여겨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착한 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 선한 일은 바로 예수 믿음이에요. 그리고 이 예수 믿음이라는 말은 ‘나는 아니다’라는 자기 부인이 전제됩니다. 나의 어떤 행함, 나의 어떤 선함도 하나님 앞에 의로 내어놓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우리의 착함과 의로움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음.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 예수를 믿는 믿음. ‘나는 아니오 십자가 지신 당신이 주님이십니다. 당신이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한 사람이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자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게 하나님이 일이다. 한 마디로 은혜의 필연성을 가르치신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율법 행위나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무릎 꿇음.
그런데 이게 우리 아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믿음, 즉 자기 부인이란 말에요.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처럼 되었기 때문에 나 외의 타자를 섬길 수가 없어요. 결국 자기 사랑, 자기 숭배, 자기 자랑이죠.
이런 자들에게서 ‘나는 아니오’가 나온다는 건 오직 은혜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만 가능한 겁니다. ‘나는 아니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분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받아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에 개입하십니다. 은혜의 경륜으로 다스리고 계신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걸 ‘믿음 안’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행함,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로서 믿음, 성령의 선물로서의 믿음, 그 예수 믿음이 바로 성도의 선한 일인 겁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이 믿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복음에 참여되었다. 이 참여되었다는 게 코이노니아, 교제란 말이에요. 말씀과의 교제, 예수님과의 교제입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실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이게 바울의 기쁨과 감사였어요. 바울은 지금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 그 열심을 바울은 지금 보고 있단 말이지요. 실제로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로마 감옥에 이 복음이 전파된 거예요. 나중에 빌립보서를 하면서 보게 될 텐데, 그런 놀라운 현실. 자기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로마를 죄수로 끌려온 바울이 결국 로마 감옥에 갇혔는데 놀랍게도 그 로마 감옥 안에 복음이 전파된 거예요. 바울은 그 하나님의 현실을 보면서 너무너무 기뻐하고 감사했단 말이에요. 그것을 전하고 싶어 했던 게 빌립보서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의 기쁨과 감사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그 십자가 복음이 전부입니다. 오직 바울은 그 복음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 하나님의 일하심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상 교회의 관심은 그 십자가 복음이 아니에요. 현실이 달라요. 종교인들의 현실과 성도들의 현실이 다르단 말이에요. 다른 층을 살고 있어요. 어떤 접점이 없어요. 그들에게 아무리 그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를 이야기해도 대화가 안 되죠. 그건 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 종교인들은 그 복음이 아닌,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에서 기쁨과 감사를 찾고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종교인들, 세상 신에게 놀아나는 종교인들. 요한계시록은 그런 곳을 사단의 회당, 귀신의 처소라고 합니다. 분명히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데 그 안을 보면 귀신의 처소예요. 다른 복음, 세상 정신, 세상 것들이 그 안에서 유통되고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그런 곳을 사람의 영혼을 매매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이죠. 사람의 영혼이 매매되는 곳.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주님이 행하시는 그 일, 그 선한 일, 그 십자가 복음에 참여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했단 말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고 너무너무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에 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거예요.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자신에게서 기쁨과 감사의 조건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의 환경과 처지와 소유가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기쁨, 이 빌립보서가 말하는 기쁨은 한 가지예요. 하나님께 아신 바 된 자들의 기쁨이에요. 다시 말하면 Why me? 하나님 왜 저인가요? 어떻게 제가 하나님께 찾은 바 된 자가 되었습니까? 왜 저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나요? 이 기쁨이에요. 이런 애통과 함께 솟아나는 기쁨, 가슴을 치는 그 애통과 함께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든 과정에서 누리게 되는 새로운 기쁨.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분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의 선함, 그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기쁨, 내가 구축해 놓은 나의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기쁨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그런 기쁨이 성도에게는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전적 의존의 자리.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가 나옵니까? 내 인생과의 결별이에요. 수고했다 인생아. 이제는 이 인생과 관계없는 자가 된 기쁨이에요. 인생과 관계가 없으면 그다음은 뭐예요? 영생이죠. 성도는 이미 이땅에서부터 영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된 자로서 영생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된 자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떠나갈 준비의 날들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의 설레임.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주가 계신 것을 알게 된 자들의 기쁨입니다. 그로 인해서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그런 기쁨과 평안입니다.
이렇게 성도에게 있어서 현실은 한 가지예요. 세상은 모르는 현실, 나에게 주가 계신다는 그 현실, 나를 지으신 분이 계신다는 그것, 그리고 나를 피로 사신 분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기뻐하고 또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짜 현실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세상과 맺은 모든 관계, 소유, 내 이름은 다 없어지는 것들이에요. 그 대신 여러분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여러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가장 먼저 내 이름이 삭제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자기 이름이 삭제된 자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예요.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서로 비교하거나 자기를 자랑하거나 하면 안 돼요. 교회는 예수 이름만 자랑하고 예수만 높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상 교회들을 보면 그렇지 않죠. 그들은 자랑할 게 너무 많아요. 제가 몇 년 전에 서울에 있는 이천 억짜리 교회 예배당 봉헌하는 장면을 봤는데 대여섯 사람이 나와서 대형 케이크를 자르더라고요.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그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들은 아마 최소한 건축헌금 몇십억씩 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거 하나님은 안 받으세요. 이천억이 아니라 이조짜리 예배당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안 받으세요. 그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누누이 말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자들, 영단번의 제사에 함께 드려진 하나님의 사람들만 받으셨다니까요. 다른 거 안받으세요 그리고 그들만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마지막 성도가 목 베어지는 그날 다 떠나갈 것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바치면서 하나님께 영광 어쩌고 하는 건 하나님을 모른다는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밖에 모르는 우리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천국의 가족들로 만들어가시는지, 그 과정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과의 결별, 찢어짐, 균열을 통해서 잠시 하늘의 것들이 나타나고 우리 눈이 조금씩 위로 들리는 거예요. 우리의 남은 날들이 그렇게 하늘 소망으로 채워져 가는 것,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가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진짜 현실을 아는 것, 평안은 그때 주어지는 평안이에요.
그럼, 우리에게 계시는 그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 각자의 주님은 어떤 주님이에요?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분,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감당하신 한분. 맞습니까? 그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뭡니까? 진짜 중요한 건 죄의 문제입니다. 죄 용서. 그리고 죄의 용서로 인해서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 화목 그 화목을 평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회복된 자기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 기쁨을 참지 못하신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셔도 이뻐 죽겠다는 겁니다. 잘 믿기지 않는 표정인데, 진짜예요. 여러분이 잘나고 똑똑하고 착해서 예수를 잘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여러분 안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의 피 뿌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구약에서부터 성경이 계속 이야기하는 거룩은 피입니다. 생명은 피에 있어요. 그 언약의 피가 창세 전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뿌려져 있기 때문에 그 뿌려진 피가 이천 년 전에 이 땅에서 다시 실현되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려진 유일한 제사, 영단번의 제사에 여러분들이 함께 참여된 거예요. 같이 드려진 거예요. 거룩한 제물로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시공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시공간이 초월 된 그 나라, 그 묵시의 현실과 이 세상 역사라는 현실을 지금 겹쳐서 살고 있어요.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성경이 평강,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오직 주 예수의 십자가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렇게 성도는 주님의 그 은혜, 용서, 오래 참으심을 알 때 마침내 그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가끔씩.. 나에게는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모든 성도의 동일한 고백이고 동일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고 우리의 영생이에요.
(딤전 1장)
16 그러나 내가 긍휼은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일절 오래 참으심에서 우리의 인내가 격발된단 말입니다.
(롬 2장)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행한 대로’는 믿음의 행함이에요. 이런 본문을 오해해서 거 봐라 착하게 살아야지 열심히 교회에 봉사해야지.. 라고 하는 데, 그런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입니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여기도 보면 참고 선을 행한다고 하죠.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일이에요. 먼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게 된 자들에게서 나오는 선한 일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고 세상도 믿지 않고 예수만 믿는 그 믿음이에요. 그들이 주를 믿어서 영생 얻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의해서 그 믿음에 묶여서 최종 목적지로 끌려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인생이기 때문에 그 길에는 중도 탈락이 없습니다. 좌초됨이 없어요. 내가 어금니 꽉 물고 참으면서 결단하고 인내하는 그런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내해 봤자 얼마나 인내하겠어요. 그거 며칠 밖에 못 갑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우리의 인내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아는 것을 우리의 인내라고 합니다.
여러분을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40, 50, 60, 70년을 살았는데, 그 살아온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만한 것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들이 더 많습니까? 거의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것들밖에 없어요. 다시 말하면 나를 위해서 산 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런 죄인들을 하나님이 지금까지 오래 참으신 거예요. 바울이 방금 마지막 편지에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일절 오래 참으신, 그 불쌍히 여기심이 바로 나의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행함에 의해서, 예수님의 참으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성도의 필연적 행함이 바로 오늘 본문 6절의 착한 일(에르곤 아가톤)이에요. 그리고 그 착한 일이 세 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작정하신 새 창조의 결과물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성도에게는 변화가 있고 자라남이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게 ‘내 안에 어떻게 이런 내가 있었지?’ 내가 봐도 신통한 그런 내가 날마다 주님이 손길에 의해서 자라나고 있는 거예요. 어제 말씀드린 대로 모든 것에 눈이 바뀌는 거예요.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역사관 이 모든 게 나도 모르게 바뀌는 이게 주님의 손길이고 터치, 다스리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는 것’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을 알게 되는 자들, 그 한 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서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자들. 그들이 여러분이에요.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들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진짜라니까요. 여러분은 그만큼 귀한 존재예요.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꾸기 싫은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한 단어로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니까요. 그걸 뭘 주고 살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느냐고요? 진짜 엄청난 신분이에요. 창조 기사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그 토브가 이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시작된 그 착한 일, 하나님의 착한 일은 우리의 행함이면서 동시에 앞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그 행함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행하심에 의해서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자기 부인, 다시 말하면 나를 믿지 않음, 세상을 믿지 않음 예수만 믿음, 그것을 우리의 선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지금 여러분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세상과 친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계속 밀어낼 거예요. 세상 끝 날까지, 육신을 벗는 그날까지. 그게 세상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 세상의 밀어냄,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함, 쫓겨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눈이 하늘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선한 행함과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그 자체로 행함이에요. 믿음이라고 하는 행함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함과 행위의 가치가 부정되면서 예수님의 행하심, 예수님의 다 이루심만 전적 의존하게 되는 그것을 성경이 성도의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 10장)
4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예수님이 행하신 착한 일은 귀신 들린 자, 마귀의 종 노릇을 하는 모든 죄인을 탈취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 새 창조입니다. 그것을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분과 그분이 하신 일을 믿고 예수의 착한 일만 꼭 붙드는 게 성도의 착한 일이에요. 다른 거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에 의해서 그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지으신 자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교회를 보시고 나는 너희를 보면서 토브, 참으로 보시기에 좋았다..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신 거예요. 그래서 복음서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일을 묻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다른 행함은 없다. 여기에 나오는 일(에르곤)이라는 단어가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선한 일(에르곤)이에요.
이와 같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고, 성도의 착한 일입니다. 또한 이 믿음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십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성경이 말하는 의는 두 존재가 서로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 그 책임을 다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걸 의, 짜다크, 디카이오수네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지으신 피조물에게 반드시 하셔야 할 일이 있어요. 창세전 약속대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 만들기예요. 그게 우리가 있기 전에 약속이 있었다니까요. 그 약속이 먼저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대로 행하셔야 합니다. 그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뭘 하셨습니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위해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그 언약의 피를 흘리셨어요. 그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에요.
그럼, 여러분의 의로움은 뭡니까? 아무 행한 것이 없고 면목 없이 빈손으로 하나님의 의를 덥석 받는 것, 이걸 하나님이 의로 여겨주세요. 네가 드디어 나를 아는구나.. 이런 우리 믿음을 하나님이 의로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이 홀로 다 이루신 그 일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빈손으로 덥석 받는 그게 바로 성도의 의입니다.
(롬 4장)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방금 말한 그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면목 없이 부끄럽지만,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의를 그 예수를 빈손으로 받겠습니다. 이의를 로마서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다 똑같이 세상에 섞여서 사는 죄인들인데, 누구는 하나님이 죄로 안 여기시는 사람이 있고 누구는 죄인이니까 죗값으로 지옥 가라고 하시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의 착함, 우리의 의는 믿음이에요. 오직 믿음. 흔히 말하는 오직 믿음 (솔라 피데) 은 그런 뜻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기준은 인간의 어떤 종교성, 어떤 율법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등장합니다. 그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이 행하신 착한 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시는 착한 일을 믿는 믿음입니다. 전적 의존. ‘주님이 다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보탤 것은 1도 없습니다.’.. 이게 전적 의존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은혜의 필연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렸지만, 은혜와 믿음은 발음은 달라도 동의어입니다.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같이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선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착한 일,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그 착한 일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그 일,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 그 믿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의 이 한 절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는 거잖아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닦달하고 자신을 깨끗이 해보려고 종교인으로 할 수 있는 걸 다했다고 하잖아요. 불교인들이 여름에 하안거 들어가면 폐관하고 면벽하죠. 화장실 가는 것을 제하고는 밖에도 안 나가요. 그들이 잡생각 들지 말라고 손가락 태우는 거나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깨끗이 하려고, 모든 부족하고 더러운 것들을 없애보려고 무릎이 까지도록 돌계단을 올라가고, 신부만 만나면 고해성사하는 게 결국 같은 겁니다. 그게 종교의 수준이에요. 그러다가 로마서 4장 이 한 절에서 루터가 그대로 깨어진 겁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해서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죠.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착한 일, 그 새 창조의 토브를 행하시는 예수님의 일이 어떤 것인지를 한번 보고 갑시다.
(요 5장)
1 그 후에 유대인이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어요. 이 안에는 깊은 내용이 들어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38년 된 병자를 비롯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중풍병자, 앉은뱅이, 귀신 들린 자, 나사로의 죽음 등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죄의 증상이에요. 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증상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에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죄를 없이하는 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일, 새 창조의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는 스스로 죄를 없이할 방법이 없으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의 저주, 하나님의 저주를 십자가로 받아내신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이일을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창세 전 약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일, 바꾸어 말하면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굳이 시비를 거는 안식일 율법을 완전케 하는 일이었어요. 당시 율법을 목숨 바쳐 지킨다고 했던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율법사들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만 그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일부러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거예요. 단순히 병을 낫게 하신 게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의미는 죄가 해결되는 거예요. 죄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행하신 그 선한 일로 인해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고발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이 사건과 또 하나의 사건이 있죠? 성전을 청소하시는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하시게 되는 그 새 창조, 즉 본문에 나오는 그 선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5장)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새 창조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그 일을 세상 속에서 다시 통일하시려고 (엡1:10) 완성하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어디에서 완성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요 5장)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의 선한 일이 뭐예요? 하나밖에 없죠. 예수님 의 다 이루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다 이루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가장 마지막인 13장 21절에도 그 선한 일이 나옵니다.
(히 13장)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선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창세전에 이루어진 일, 새 창조의 완성이에요. 그리고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질 그 착한 일에 대해서 좀 이해가 되죠?
본문 1장 7절에서 11절까지 보겠습니다.
(빌 1장)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방금 읽은 말씀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말씀보다 이해가 더 어려울 수 있는데, 왜 그런가 하면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의 내면의 세계에 함께 참여된 자들, 함께 공유하는 자들에게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한 성령 안에 있고 한 믿음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이해되는 말씀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너희 무리, 곧 빌립보 교회가 이와 같이 앞의 말씀처럼 생각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너희가 한 믿음, 한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나의 매임이 어떻게 복음을 변명하고 증거하는 매임인지를 너희가 알고 또한 복음을 확정함에도 너희가 나와 함께 그 은혜에 참여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들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나의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마음과 심장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둘은 같은 단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너희 안에 뛰고 있는 심장이 곧 나의 심장이고.. 놀랍죠? 예수의 심장이 우리 안에 똑같이 나누어졌다는 말이에요. 그 동일한 생명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 곧 너희들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이 말들이 너희들에게 똑같이 이해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예수의 심장으로 같은 생명 안에서 복음을 위한 일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있다. 공간도 다르고 시간도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한주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말씀드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누어진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하나의 교회이기에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하는 일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일에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온전한 통찰력으로 더욱더 풍성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뜻을 분별하는 일에 진실할 것과 그리스도의 오실 날까지 그 믿음의 순결이 지켜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의 열매를 가득히 맺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릴 수 있기를 나는 기도한다.
이와같이 개인적 믿음이나 감성적 측면으로 이 말씀을 접근하는 게 아니라 교회론적 접근,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로서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심장, 교회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지체에 보급되는 그 은혜와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다 동일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천 년 전의 바울이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동일한 은혜이며 동일한 선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의 성도 여러분과 사도인 나는 하나의 은혜 공동체, 복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비는 이 기도와 마찬가지로 주께서 나에게 주시는 그런 지식과 총명이 가득한 그런 사랑을 너희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주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럼, 7절부터의 내용을 한 절씩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먼저,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같은 생명을 나눈 한 몸 된 교회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되었다는 이 부분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7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가 갇혀 있을 때나,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할 때에, 내가 받은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새번역)
좀 더 이해가 쉽죠. 그런데 바울이 말한, 복음을 변호하고 입증했던 일에 같은 은혜에 참여했다고 하는 그 일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행 17장)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이 같은 은혜에 참여했다고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강론의 핵심이 뭔가 하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게 바로 복음의 변호와 확정입니다. 그 복음을 받고 믿은 자들이 바로 너희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 년 전과 다르지 않아요. 교회에 와서 예배 참석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하는 일들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복음을 변호하고 확정하는 그 은혜에 동참하는 일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한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고전 12장)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예수 못 믿는다는 말이에요.
(고전 1장)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 성령을 받은 자,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연합되고 그의 부활에도 함께 연합된 교회만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의 광채를 비추는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 행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참여되는 것은 그 주체가 성령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앞서 나누었던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착한 일에 참여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여러분, 그렇게 빌립보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도는 이 말씀에 아멘 하는 여러분을 위해서도 동일한 심장으로 동일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천 년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우리 형제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지금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히브리서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잖아요.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응원하고 있다고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라는 응원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동일한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동일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동일한 사랑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요동해도 이미 하늘에 확정되고 완료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라. 이미 확정되고 완료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아들의 나라. 그것을 함게 바라보는 기쁨입니다.
이미 여러분은 그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에요. 여러분이 인생을 개판으로 살아도 여러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있기 전에 이미 확정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아들의 나라로 이미 옮겨졌다고 해요.
그 묵시의 현실, 그 영원한 현실을 이 땅에서부터 사는 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무엇이 가장 기뻐할 것이고 또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한 가지밖에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그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피로 사신 성도인 것입니다. 그들 안에 주님의 심장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진리, 주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는 한 몸이에요. 우리보다 먼저 간 믿음의 선진들과 지금 우리를 같이 연결해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고, 그들이 묵시 안에서는 이미 지어져 있단 말입니다. 이게 믿어지십니까?그러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영원까지 이렇게 주님의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선한 일, 새 창조의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시작은 어디서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죠. 그 약속의 밑바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죠. 우리가 가끔씩 조금밖에 맛보지 못한 그 사랑, 그러나 엄청난 사랑, 창조적 사랑,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잉태되는 사랑, 그 사랑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영원 전에 확정된 사랑. 그 사랑이 부어진 자들만 살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창조의 원동력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중물로 부어지므로 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솟아나게 되고, 그 상태를 성경이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첫날에 빌립보서의 주제가 기쁨이라고 했잖아요. 사도가 말한 그 기쁨은 바로 그 사랑의 기쁨이에요. 그 영원한 사랑. 하나님 아들의 피로 완성하신 그 아들들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기쁨을 참지 못하신다고 하신 그 기쁨에 참여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나누어주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빌립보서는 이천 년 전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쓴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전달된 주님의 편지예요. 주님의 피로 쓰신 편지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달된 사랑의 편지. 영원한 사랑의 편지.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고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그런 아들들로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즐거이 부르신다. 무엇을? 사랑의 노래를.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불러주시고.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게 부를 사랑의 노래. 구약의 아가서가 전부 그 이야기입니다. 영원한 사랑의 노래.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기쁨의 찬송을 부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이 기쁨, 이 사랑의 노래로 차고 넘치기를 빌고 또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놀랍고 크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을 주시고 그 사랑만으로 충분한 그런 다른 층의 현실을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심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이 기쁨과 이 감사를 잃지 않도록 주님 저희를 지켜주시고 세상을 향해서 마땅히 해야 할 말, 그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증거할 수 있는 그런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이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주께서 저희와 동행하시며 저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또 그 마지막 목적지까지 주님이 동행하시며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의 심장과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남은 날들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