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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감옥에 갇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본론을 꺼냅니다. 이게 12절 말씀이에요. 바울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보가 되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 에베소서를 마치면서 자신이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 즉 복음 전파를 함에 있어서 더욱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고 하는 복음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를 만난 자들에게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다른 말로 정직함이에요.
20절부터 보면 지금 바울의 소원은 어서 빨리 이 몸을 벗고 주님이 계신 삼층천을 가는 거라고 합니다.
(빌 1장)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이것이 성도, 곧 그리스도인의 사생관, 인생관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사는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과 층이 달라요. 삼층천에 다녀온 사람들 (묵시의 완료된 것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사고방식, 가치관, 인생관, 사생관 등 모든 것이 달라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접점이 없어요.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단 말이에요. 갈라디아서 6장 말씀대로 십자가로 인해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다, 그리고 세상이 또한 나에 대해 못 박혔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죽어있다는 뜻이에요. 어떤 섞임도 없다, 나눔도 없다. 층이 다르단 말이에요. 바울의 육신은 비롯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서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바울의 실체는 이미 주님 곁으로 옮겨졌다는 거예요. 바울은 그걸 알아요. 이와같이 세상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 있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지만, 그 나라로 이미 옮겨진 자들이 있다.
(엡 2장)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고 하죠? 다만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너희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하게 하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바울의 소원은 어서 빨리 주님게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자기를 사도로 세우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에 살아남겠다고 아귀다툼하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행복하게 살겠다고 교회도 나가고 예수도 팔고 하나님과 거래도 하면서... 그러다 보니 세상에 개독교 소리를 듣는 거예요. 저 인간들은 욕심도 많지. 세상에서도 잘 살고 죽어서도 좋은 데 가려고 하네..
물론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시겠지만,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가 이미 세상과 간음을 해버렸어요. 다시 말하면 세상 정신과 세상 가치관이 전부 교회 안에 들어왔어요. 교회(에클레시아)란 뜻은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 부르심을 받아 나온 사람들을 말해요. 그러니까 그런 분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세상과 분리가 없고 구별이 없어요. 이것을 세상과의 간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무당 잡교가 된 게 오늘날 현실입니다.
이런 척박한 풍토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고 하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나누는 자리에 모이게 된 거예요. 비록 소수지만. 이렇게 성도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너희는 빛이고, 소금이라고. 그리고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그냥 내어버려진다.
사도 바울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나의 개인적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안목, 하나님의 목적으로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세상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에게서 나온 말이 아까 읽은 12절입니다. 내가 당한 일이 단순히 힘이 없어서 우연히 재수 없어서 감옥에 갇힌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금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기신 일이 뭐예요? 복음을 전하는 일이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십자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세상 정신,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바울의 처지가 그것과 전혀 맞지 않아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사도잖아요. 보내심을 받은 자 사도. 그러면 누구처럼 처럼 폼 나게 수행원 수십 명 거느리고 성가대까지 동원해서 집회하고 이래야 하는 거예요. 광대라고 자칭하는 소 모 목사 그런 답니다. 어디 집회를 가면 수행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 따라붙고 성가대도 따로 있고. 그럼, 폼 나잖아요.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그런데 이게 뭐냐고. 하나님의 사도라는 자가 지금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어요. 그러면서 아까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렇게 묶여 있는데 복음의 진보가 있었다. 이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복음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세상 교회에서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전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그래서 내가 하는 일도 잘되고 세상에서 성공한다. 자손들도 잘 된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어요. 걸핏하면 두들겨 맞고 광주리 타고 도망 다니고. 지금은 로마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또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는 그가 떠나면 바로 이단이 들어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단 말이에요. 디모데후서를 보면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나를 떠났다고 해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 같은 대 사도가 복음을 전했는데, 에베소 교회, 갈라디아 교회 등등 아시아의 교회들 쭉 있잖아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자기를 떠났다고 해요. 마지막 로마 감옥에서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자괴감이 들었겠습니까? 내가 헛일했구나. 마지막 편지에서 지금 내 옆에는 누가만 있다. 아, 춥다. 내 옷 좀 가져다줘. 성경책 보내라. 이게 바울의 마지막 편지라니까요. 그런데 바울의 그 말들이 오늘날 성경이 됐단 말입니다. 긴 세월 동안 주께서 보존해 두셨다가 우리 교회에 넘겨주신 성경이에요. 그렇게 성경은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나타났다고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니고..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심지어 김성수 목사 말씀방이란 것도 생겼어요. 많이 모입니다. 그들 말이 김성수 목사 말씀 외에는 진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만 죽자고 붙들어요. 그리고 AI 시켜서 요약해서 올리고 학습하고 대단합니다. 김성수 목사가 봤으면 아마 욕 나올 거예요. 그렇게도 예수를 가리키고 갔는데, 그가 가리킨 예수는 모르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대한예수교가 바로 그래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대한예수교에 예수가 없어요.
그런데 바울은 감옥 안에서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해요. 이번 여름 캠프의 주제가 ‘기쁨’이었잖아요. 기뻐하고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이에요. 우리가 이박삼일 동안 그 기쁨의 내용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앞으로도 한 1년간 빌립보서를 하면서 반복할 겁니다.
이렇게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고 기뻐한다. 너희가 내가 감옥에 갇힐 것을 기회로 어떤 일을 벌여도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이다. 내가 감옥에 갇힌 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매임, 갇힘이다. 이게 바울의 증언이거든요. 이렇게 마지막까지 증거한 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넘겨진 성경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받은 사람들은 먼저 안목이 달라집니다. 보는 눈이 달라져요. 눈이 바뀌면 생각도 달라집니다. 해석이 달라져요. 모든 현상에 대한 해석 자체가 바뀐단 말이에요. 우리가 아침에 신문을 보든지 인터넷 뉴스를 보곤 하잖아요. 성도는 해석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요. 그래서 성도에게서 나오는 말은 세상 말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셨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렇게 육에서 나오는 말과 영의 말이 다릅니다. 같은 한국말이지만 달라요. 육의 사람들은 그래서 성경을 얼마나 오해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문자로 쓰여있잖아요. 글이란 말이에요. 성경이 원래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아람어, 헬라어로 쓰였거든요. 그런데 아람어든, 헬라어든, 히브리어든 애굽어든 간에 언어는 진리를 담는 그릇일 뿐이에요. 그래서 문자 그대로 사전적 의미로 읽게 되면 반드시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성경의 진의는 누가 아느냐?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성경이 읽혀요. 오늘날 세상 교회가 성경을 문자로만 해석하다 보니.. 문자로 해석한다는 말은 교회가 이천 년간 생산한 신학으로, 인간 중심의 해석을 하다 보니 성경의 진의와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한 마디로 오늘날 기독교가 종교화되었어요. 그래서 단어 공부부터 새로 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공부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만. 성령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게 이말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돼요. 예를 들어서 오늘날 가장 많이 오해되는 말 중의 하나가 은혜(카리스)잖아요. 믿음 마찬가지예요. 사랑, 죄, 의. 심지어는 십자가, 하나님 나라 등 모든 성경의 언어를 오해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뭘 통과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채로, 내가 여기 살아있음에서부터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성경은 그들에게는 영원한 비밀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죠. 그 십자가 죽음, 예수님의 언약의 죽음, 이 세상에 있었던 유일한 죽음(생명 있는 분이 죽으신 그 죽음만 유일한 죽음이거든요)이 나누어진 자들, 그 죽음에 연합된 자들만 살아난단 말이에요. 이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라고 해요(고전1:18-21) 그렇게 살아난 자들에게만 이 성경은 진리예요. 하나의 종교 경전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란 말에요. 다시 말하면 성경이 내 이야기가 돼어야 해요.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되면 안 돼요. 요한계시록에 생명책이 나오잖아요. 그 생명책이 성경이에요. 거기에 내 이름이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만 영의 말,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자리를 세상 속에서 사모해요. 한 주 내내 세상 속에 섞여서 살면서도 성도의 마음은 말씀을 나누는 그 자리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내가 가진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서 세상과의 충돌과 분리가 일어나는 것까지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놀랍죠? 이 세상이, 심지어 귀신들이 성령 받은 성도들을 알아요. 그래서 세상 자체가 성도들을 밀어내어 줘요.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세상이 세상밖으로 밀어내 줍니다. 그것을 별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어요.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
이런 복음의 현실, 복음의 현장성. 이런 일들이 사건으로 발생하는 게 성도의 인생이에요. 세상과 계속 분리가 일어나요. 때로는 주께서 세상을 열심히 사랑해 보라고 보내주시기도 하지요. 아버지가 탕자에게 유산을 주면서 세상에 내보내듯이. 그런데도 성도라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분리가 일어납니다. 내가 이렇게 세상을 사는 게 쥐엄 열매를 먹고 사는 거구나. 돼지와 쥐엄 열매를 다투는 거구나. 거기서부터 아버지 집으로 유턴이 일어납니다.
세상은 성도에게 그런 용도로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성도 한 사람의 목에 베어지면 (우리 목이 베어진다는 말은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완성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은 불살라지고 없습니다. 세상 용도는 그것으로 끝난 겁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내가 감옥에 갇힌 건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갇힘이다. 이게 자기에 대한 사도의 해석입니다. 세상은 물론 동의하지 않고 폭망한 인생이라고 하겠지만, 사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사도 바울 개인으로 보면 인생 종 친 겁니다. 폭망한 인생이죠. 세상적인 조건과 지식, 환경 다 갖춘 바울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특정 사람을 예로 말하는 게 그렇지만, 서울대 나오고 미국 시민권도 가지고 있고 연예인도 하면서 잘 나가던 사람이 나이 오십에 가버렸잖아요. 김 모 목사. 세상적으로는 다 갖췄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습니까? 그것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데려갔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인생 완전 실패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다가 간 것뿐이에요. 이게 세상과 다른 해석입니다. 김 목사님이 자살하고 난 후에 말이 워낙 많아서 제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참 많이 했거든요. 자살이라고 다 같은 자살 아니다. 아담도 자살했잖아.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먹었단 말이에요 그거 자살이에요. 맞잖아요. 예수님도 자살하신 분이에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 위해서예요. 그럼, 그런 자살은 자살 아니고.. 김목사만 구원 못받는 자살이다? 이렇게 성도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요. 달라야 해요. 왜냐하면 그들만 세상과 다른 눈과 심장(영)을 가졌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심장을 가진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됐는지 그 바울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 거라는 말이에요. 저 바울 예수 믿고 사람 완전히 버렸다고. 맞습니다. 예수 믿고 그렇게 복음 전한 결과가 로마 감옥에서 죽을 날만, 관제로 부어질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면 그런 예수를 누가 믿겠어요? 그러다 보니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 교회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복 받고, 조용기처럼 삼중축복이니 오중축복이니 뭐 세상 고지에 올라서서 출세하고.. 하여튼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돼.. 그러나 그런 기독교는 없다니까요. 세상 종교기술자들이 이렇게 비틀어버리는 거예요. 어떤 신학자의 책 제목이 그거예요. ‘뒤틀려진 기독교’ ‘이교에 물든 기독교’..
그래서 로마에서 핍박받고 탄압받던 기독교 성도들이 그나마 예수 믿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 어디예요? 카타콤이죠. 지하로 땅을 파고 들어갔다니까요. 그 사람들 평균 수명이 얼만지 아세요? 30을 못 넘겼어요 지하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그런데 그랬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지상으로 올라와서 햇빛을 보면서 바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성도의 피를 타고 전해지는 복음이에요. 길에서 4영리 전하고 차비 줘서 교회에 데려다 앉힌다고 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게 아니고 성도의 피를 타고 전해지는 복음이에요 은밀하게...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건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믿음 자체가 없어요. 문제는 그 선택을 내가 하는 게 문제예요. 세상 교회들이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죠. 만인구원설. 병 낫고 복 받고 출세하고 그런 고지론.. 이렇게 사기를 치니까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예수로 충만한 현실이 오늘날 대한예수교예요. 전부가 각자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거예요. 성경을 읽어도 읽고 싶은 것만 읽어요. “너희가 소경이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냥 있다” 이렇게 성경은 원래 오해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건 이 땅을 다녀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결합된 사람들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어떤 것입니까? 오죽하면 내가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런 운명이에요. 말구유에 태어나서 가난한 목수 집에서 자라고 결국 모든 세상 사람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였단 말이에요. 공공의 적. 그런 예수의 운명에 하나가 되고 싶습니까? 집안 식구에게도 버림받고 세상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 흔히 말은 쉽게 해요. 유니언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러나 그건 신학적 이론만이 아니에요. 이 땅을 사셨던 예수님의 운명에도 결합된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해요. 예수 믿는 걸 너무 만만하게들 생각하는데 내가 선택한 예수. 장로교를 선택하든 감리교를 선택하든 신천지를 선택하든 구원파를 선택하든 내가 선택한 예수를 내가 믿는 것.. 그거 믿음 아니에요.
이렇게 예수님의 운명에 결합된 자들만 예수를 믿는 거예요. 결합된다고 하니까 그럼 나도 예수처럼 살아볼까? 그런 사람들이 실제 많았습니다. 현재도 예수 전도단이라고 해서 거지같이 탁발하러 다니고 하지요. 중세에는 머리 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종무일과표 만들어서 새벽 5시 기상, 다섯 시에서 여섯 시 기도. 식사 후에는 농사일하고.. 그랬던 사람들. 그들 그 수도원에서 샴페인 만들고 위스키 만들고 했다니까요
내가 원해서 예수님의 운명에 결합되는 게 아니고 성도는 이미 창세 전에, 영원 전에 주님과 한 몸이 된 사람들이에요. 그게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교회,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기도 전에 죄가 등장하고 속량의 피가 등장하고 .. 굳이 헬라어 문법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그게 전부 이미 영원 속에 이루어졌고, 그게 지금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리고 반드시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뜻이에요. 에베소서 1장이 그런 문법으로 적혀 있어요. 그렇게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한 교회, 아들들이 된 사람들이 이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그게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과 섬김인지를 배우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들을 그리스도의 한몸된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된 교회, 예수의 믿음 안에서 그 예수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되는 성도들, 사는 것과 죽는 것까지 주를 위한 인생. 그들만 예수 믿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은 주가 되신 분과의 관계입니다. 한 몸 된 관계성이에요. 내가 믿는 예수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에게 주가 계심을 계속 확인하는 기간이 인생이에요. ‘나는 아니오 십자가 지신 당신이 나의 하나님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아까 빌립보서에서 읽었던 그 말씀이잖아요.
이런 고백, 이런 사람이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에요. 이게 어떻게 사람의 의지나 능력으로 가능합니까? 안 된단 말이에요. 주님이 주님의 믿음으로 띠 띠어 주님의 목적지로 끌고 가는 자들, 그렇게 복음의 능력에 꽁꽁 묶여서 끌려가는 자들, 주님과 함께 죽어서 사는 자들을 성경이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도 교회가 있어요. 세상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가 나오잖아요. 천상의 교회가 있어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그 교회, 그들만 주님과 영원을 살게 됩니다. 그 시범 조교로 불려 나온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고 오늘 우리에게 이 편지를 전해준 사도 바울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주님에게 매인 자예요. 꽁꽁 매였단 말이에요. 주님에 매이고, 복음에 매이고, 말씀에 매인 자예요. 이렇게 주님에게 매인 자에게는 바울처럼 자기 인생이 없어요.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여기서 말하는 진리의 자유는 나로부터의 자유예요. 이게 가장 큰 자유예요. 그런데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나로부터 자유가 안 되죠. 우리는 하나님처럼이라는 선악과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나밖에 몰라요. 나만 사랑하고 나만 섬기는 그 나로부터 자유케 하는 게 바로 복음이에요. 진리의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나에게서 자유 한 자에게는 자기 사업이 없고 자기 가족이 없고 자기 교회도 없어요. 하나님이 기업이고 천국 가족이 있고 교회도 그들만 교회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이 사시는 인생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어떤 처지에 있어도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게 주를 위한 것이 됩니다. 이게 참 놀라운 겁니다. 성도에게는 인과율이 없어요. 원인도 결과도 나에게 있는 게 보통 세상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성도에게는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어요. 결과도 하나님이 거두어가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없어요. 이게 자유입니다. 로마서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를 위한 거다하잖아요 우리가 캠프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면서 ‘짠’ 하거든요.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주를 위하여!’..
제가 요즈음 인터넷에서 책을 하나 구해서 보고 있는데, 한국 기독교사에 너무 오해되고 있는 게 있어서 .. ‘아디아포라’. 기독신앙에 있어 술 담배 같은 비본질적인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 책은 성경 역사 속에 나타난 술에 관한 내용이예요. 19세기, 20세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청교도 신학을 한 사람들인데 그러다 보니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걸 경건으로 알아요. 마침 그때 전 세계적으로 금주 운동이 일어났어요. 우리나라에도 일본에 진 빚을 갚는 운동(국채보상운동)이 있다 보니 금주를 장려하는 게 애국이고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오해되었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성경에는 술이 두 가지 있어요. 거룩한 술이 있고 세속적 술이 있어요.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사용하는 술은 거룩한 술이죠. 그럼, 세속적인 술은 뭐죠? 이사야가 이야기한 독주에 비틀거리는 제사장과 율법사들.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의 술에 취하는 것이 그거에요, 창원의 어떤 목사는 사경회 하면서 대놓고 그랬다던데 서머나 모임 사람들은 모여서 술 마신다고. 그러다가 모 집사님과 한 판 붙었다고. 하여튼 목사라는 직업병이 있어요. 이게 참 문제인데요. 그래서 옛날에 십자가 마을에 있을 때 목사들 만나면 그랬어요. 제발 죄 좀 지어봐라. 너희가 신학은 머리로 많이 아는 데 진짜 죄의 비참함과 무서움은 몸으로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니까 쓸데없는 것 가지고 쌈박질이나 한다고... 본질엔 무식한 사람들이 비본질적인 것 가지고 시비를 거는거에요 그러다 보니 성찬에 포도즙을 써야 하나 포도주를 써도 되나 이따위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죄를 모르면 의도 몰라요. 교인들 중에는 체질적으로 술 담배를 싫어하는 사람들 있어요. 이근호 목사는 술 담배 하는 사람들을 악마시하지요. 복음을 안다는 목사들까지도 그래요. 그러나 그거 아니란 말에요.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
하여튼 무엇을 해도 어떤 처지에 있어도 주를 위한 것이 되는 사람들.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한 게 되고. 하나님 나라는 그러잖아요. 성령 안에서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먹고 마시는 게 아니요.. 먹고 마시는 걸 통제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우리 육신의 즐거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렇게 주님에게 매여있는 자들, 말씀에 매인 자들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제가 젊을 때 사업하면서 회사 이름이 ‘주식회사 매인’이었어요. 이름은 잘 지었는데, 10년 만에 망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망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싶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식회사 매인은 반드시 망해야 하는 거예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너의 방패요 너희 지극히 큰 상이다.. 하나님이 너의 기업이라는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당시 많은 소유를 가진 부자였습니다. 창세기에 나오잖아요. 사병들을 거느리고 전쟁할 정도로 부자였어요.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아브라함 3대,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약속의 땅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해요. 놀랍죠?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성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게 되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에요. 그들이 이 세상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예요.
그렇게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사는 자들만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복된 자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처음 자리를 회복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아무 부족함이 없어요.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는 주님만 계시면 됩니다..” 이런 고백을 수시로 쏟아내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가 할 일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과 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이 세상에 남길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성도는 남길 게 하나밖에 없어요. 평생을 함께하신 주님의 은혜, 그 은혜만 오롯이 남는 겁니다.질그릇에 담긴 그 보배입니다.
여러분, 인생 백 년도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1초도 안 돼요. 그런데 그 짧은 기간 동안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우리 안에 담아주셨어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능력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일을 홀로 하고 계십니다. 자기 사람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세요. 그렇게 바울처럼 내가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의 진전은 전혀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뻐하는 거예요. 이게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내가 감옥에 매여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까지도 주님을 위한 것이었구나.. 이 기쁨과 이 감사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뻐하지 않을 게 없어요. 감사하지 않을 게 없단 말입니다. 불면증 걸려서 잠 좀 못 자도 괜찮아요. 남편이 애 좀 먹여도 괜찮습니다. 자식들 애먹여도 괜찮아요.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서 고생해도 괜찮아요.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다 복음의 환경, 언약적 환경이에요. 언약의 세계와 만나기 위한 그 모든 장치로서 이 세상이에요. 앞으로 시간이 있으면 언약의 세계, 언약의 역사에 대하여 특강 한번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사람을 보지 않아요. 교회도 보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행하시는 그 일, 그 복음의 진보에만 시선을 집중합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모든 일 모든 현상에 대한 해석까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게 15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옥에 갇힌 것을 기회로 알고 온갖 이단 사설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생겨나더라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도인 내가 그리스도를 전파해도 떠날 자들은 다 떠나고 말더라. 그리고 어떤 이단 사설을 들어도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자들은 알더라. 그런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도, 즉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건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교단도 만들고 신학교도 만들 수 있는데, 복음의 진리는, 생명의 말씀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설득이 아니에요. 학습도 아니고 훈련도 아니에요. 씨가 다른 자들, 약속이 주어진 자들에게만 전해지는 복음이에요.
우리 대구 교회만 하더라도 14년 동안 참 많은 분이 다녀갔습니다. 지금은 한 십여 명 남아있죠. 그런데 저는 그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렇게 복음, 십자가만 전하는데 그걸 즐거워서 앉아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복음은 모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각 사람에게 새롭게 들린다는 뜻이에요. 안 그러면 이 자리에 못 모입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그래서 교회는 모일때마다 새로운 교회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영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날마다 새로운 교회로 모일 수 없습니다. 교회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에요.
그런데도 세상 종교인들은 그것을 싫어해요. 교회라는 자기 역사를 가지고 싶단 말이에요. 교회라는 역사.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교회가 어딥니까? 가톨릭이죠. 1대 교황 베드로부터 무려 이천 년이에요. 그런데 감히 백 주년 기념교회? 어떻게 교회 이름을 그렇게 붙이는지.참.. 웬만큼 큰 교회에 가면 당회장실에 1대 당회장부터 해서 사진 쭉 붙여놓습니다. 자기 역사를 가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모일 때마다 새로운 교회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자기 역사를 가지고 싶은 인간들의 욕심을 주께서 따라다니면서 토막을 내시는 거예요. 이렇게 교회는 날마다 새로운 교회입니다.
우리는 길에 나가서 전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도 주일 이런 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주께서 때가 되면 자기 사람들을 불러서 모이게 하시고 말씀으로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까지 전부 주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흩으시는 것까지도 주님의 일이에요. 초대 교회 때 예루살렘 교회 보세요. 얼마나 건강하고 좋은 교회입니까? 자기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필요한 대로 가져다 쓰고 말입니다. 칼 막스의 공산주의가 거기서 탄생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그 교회를 깨트리셨어요. 사도가 순교 당하므로 해서 다 흩어졌지요. 사도행전에 나오잖아요. 야고보와 스데반이 순교하고. 그렇게 교회가 흩어지므로 해서 복음이 사마리아로, 이방으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부패하고 변질된 이유는 세상 정신이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세상 정신이 무엇입니까? 무조건 크고 무조건 많아야 해요. 이게 세상 정신이에요. 이게 그들의 선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축복은 예수 믿는 자들이 다 잘 되고 교회가 커지고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많은 나라가 잘 사는 나라다, 강대국이 되는 게 하나님의 뜻이고 영광이라는 말을 여러분도 많이 들었죠? 요즈음 유튜브에 이춘근 박사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국가치고 못 사는 나라가 있느냐? 미국 한 번 봐라. 반대로 불교 믿는 나라들은 다 못 산다.. 이분도 자칭 크리스천인데, 잘 산다는 개념, 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예요. 영생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그 복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받았잖아요. 예수라는 하나님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잖아요. 그 복이에요. 예수를 받은 그 복이 바로 영생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받았으면 다 받은 거예요. 그런데 왜 자꾸 다른 복을 달라고 무슨 삼중 축복, 오중 축복이 나옵니까? 이건 하나님을 받은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꾸 다른 걸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문제예요. 여기서부터 잘못 가버린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이춘근 박사만 그런 게 아니라 오늘날 대한예수교가 다 오해하고 있어요. 만약 그들 말대로 하자면 감옥에서 죽은 사도 바울은 저주받은 겁니까? 설교 한 편하고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은 어쩔 거예요? 그들은 다 저주받은 겁니까?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가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어요.
여러분, 구약 성경에서 3대 종교가 다 나왔습니다. 이슬람도 구약을 믿습니다. 가톨릭, 개신교. 같은 성경인데, 믿는 예수가 다 달라요. 하나님이 다르단 말이에요. 그렇게 성경 단어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석이 다 달라요.
이렇게 종교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작했어요.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으로. 나를 잘 되게 해주는 하나님. 내 교회, 내 나라 잘 되게 해주는 하나님만 참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 이 땅에 피를 남기신 그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은 그 하나님만 하나님이에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계시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단 말이에요. 그 하나님 나라가 묵시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거예요.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창조하셨고 그들로 채워지는 사랑의 아들들의 나라.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내가 원하는 게 다 충족되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화장실 변기가 금으로 되어 있고 백평 짜리 맨션이 어떻고 그런 천국 없어요.
그 나라가 어떤 하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영원한 나라인지를 자기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창세 전에 이미 십자가가 섰다. 아들의 피가 흘렀다. 이 세상 역사 속에서도 아들의 십자가가 세워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그 아들과 아들의 십자가에만 있어요. 그 십자가가 영원 전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진 십자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은 그 십자가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온전히 나타난 그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만 있습니다. 다른 영광은 없어요.
이천억짜리 예배당도 아니고 이슬람 국가에 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는 것도 영광 아니에요. 기독교 국가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에요. 미국이 이란을 박살내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누구처럼 예배당 수십개 지어도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다. 그런 건 마지막 날에 다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그렇게 평생 동안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모든 시간을 허비합니다. 자기 정당성, 자아실현. 그게 정치든 종교든 문화 예술이든 종교든 결국 자기 영광이고 자기 정당성이에요.
그런 세상에서 ‘나는 아니오, 하나님만 옳습니다.’ 이런 자들이 생겨나는데 그들을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참 별종이고 변태들입니다. 도저히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정당성이나 자기 의가 포기된 자들이에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 나타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특징이 자기 의를 찾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죄인으로 불리던 사람들인 세리, 창녀, 문둥병자, 귀신 들린 자들인데 그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은 내 안에서는 어떤 선도 어떤 구원 가능성도 찾을 수 없습니다. 나의 밖에 계신 당신, 하나님의 의로 오신 당신이 나를 살려주셔야만 내가 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아요. 오늘날도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에요.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원통한 자, 다리 저는 자, 쫓기는 자, 빚진 자들이란 말이에요. 그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모형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 그 십자가 은혜만 꼭 붙들게 된 자들을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라고 합니다. 사람 자체가 변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 입은 거예요. 본질이 변한 게 아니에요. 우리 육은 여전히 나밖에 모르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피를 뿌려 주시고 그 피로 빤 옷을 입혀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끗하다, 거룩하다,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거예요. 로마서의 대주제가 바로 이 ‘여겨주심’이에요. 의로 여겨주심.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 꼭 붙들게 됩니다.
그렇게 어린양의 피로 빤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 천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마태복음을 보고 가겠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과 종교인의 차이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예요.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은데 택함을 입은 자들은 거의 없다...
(마 22장)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유대 사회에서는 혼인 잔치의 주인이 예복을 준비해서 줍니다. 자기가 준비해 오지 않았다고 해서 쫓겨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혼인 잔치에 들어갈 자는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영생을 탐하는 세상 종교인과 약속 안에 있는 성도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그 구원, 그 영생의 가치를 배우기 위해서 목숨처럼 여기는 이 세상 것들이 털려 나가는 인생을 살게 되는 거예요. 육적 자아의 죽음이 그렇게 수시로 발생하면서 고린도후서 4장의 바울의 고백처럼 산 자가 예수의 죽음에 넘기우는 그 고난 속에서 새 생명이 출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게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 자들의 특징이에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 이 세상을 통과하게 되는 모습들입니다.
그렇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분의 언약의 죽음 안에서 잉태되는 생명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 긍휼.. 이 긍휼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에서는 라함, 즉 여자의 자궁이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자궁에서 잉태된 사람들이 성도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자궁 안에서 핏덩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탯줄이 끊어지면 죽어요. 그 긍휼이 곧 생명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불쌍히 여김, 긍휼이라는 말과 자궁이라는 말을 같은 단어로 씁니다. 라함.
이렇게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잉태되는 생명, 그 긍휼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자 그렇게 성도의 전 인생은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새 생명이 잉태되는 해산의 고통을 살고 있는 거예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옛사람이 죽어 나가고 죄의 삯으로서의 죽음을 예수님의 언약의 죽음, 진리의 죽음으로 바꾸어주는 그 십자가의 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어요. 주님과 함께. 주님과의 동행이란 말이에요.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동행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다 보면 시편 23편처럼 우리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기도 하고.. 생각해 보세요. 상에 차려진 것들이 목에 넘어가겠습니까?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앞에 나를 잡아먹으려는 원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이게 우리 성도의 인생이에요. 그런데도 우리 머리에 잔을 부으시니.. 성령의 기름 부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과의 동행에는 이런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으로 찬송하면서 주님과 함께 길을 가게 되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에요. 그 길을 우리 믿음의 형제들이 먼저 보여주었고, 또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 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편지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인생이 아닌 영생이 확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산업이 빼앗기고 조롱과 협박과 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며 톱에 켜여도 세상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 그리스도 안에서 확정된 그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업을 빼앗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 현실을 찬송했단 말입니다. 제가 찬송가 435장을 읽어드릴게요.
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이 영원하신 기업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주신 그 기업, 하나님 나라.
2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모든 명예 버리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나와 동행하소서
3 어둔 골짝 지나가며 험한 바다 건너서 천국문에 이르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후렴]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아멘
이런 찬송입니다. 이미 확정된 묵시의 현실, 영원한 현실을 이 세상 속에서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찬송으로 넘쳐나기를 빕니다.
우리가 다음에 하게 될 1장 20절과 21절을 함께 읽고 오늘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빌 1장)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크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을 주시고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도록 이렇게 세상과 다른 현실을 살게 하심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어떤 환경,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이 기쁨, 이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께서 저희를 지켜주시고 또 이 세상을 향해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그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남은 세상을 살아야 하는 저희들입니다. 아직 남은 광야가 있는 저희들. 주께서 저희 발걸음 하나하나를 지켜주시고 주님의 심장과 주님의 마음으로 남은 날들을 찬송하면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