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윌리엄 워즈워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보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작품해설]
윌리엄 워즈워스가 새뮤얼 테일러 콜리자와 1798년 펴낸 합작 시집 『서정답시집』의 출간은 현대 영시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시집은 “급진적이며, 의미심장하며, 영원히 다른 무언가가 발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집의 시적 실험은 이들이 표방한 대로 “일상적인 보통의 사람들의 생활에서 나온 사건들과 상황을 선택해 가능한 한 그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기술하고 묘사”하는데 있었고,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넘쳐흐름”이라는 견해를 표방한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이들의 취지와 입장은 상류계급의 생활과 감정에 걸맞게 쓸 때 시가 고매해진다고 믿었던 신고전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상반된 것이었으며, 그 바탕에는 서민들의 반복되는 경험에서 나온 언어가 훨씬 항구적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실제로 워즈워스는 하류층과 시골의 삶, 고통받는 삶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려 했다.
이와 같은 워즈워스의 시론은 프랑스혁명의 영향 안쪽에 있는 것이었다. 워즈워스는 1719년 12월 미셸 보퓌를 만나게 되는데 워즈워스에게 보퓌는 지적인 지도자로서 워즈워스를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도록 했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중요하게 행한 또 하나의 역할은 ‘상상력’을 부각한 것이다. 워즈워스의 경우 그것은 ‘회고된 정서’, ‘조영한 회상’을 통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을 포함한 과거의 시간을 회상의 방식을 통해 마음속에 현존하게 하려고 했다. 조용한 회상을 통해 워즈워스가 구축한 세계는 자연과 관련된 것, 유년 시절과 관련된 것인 경우가 많았다. 워즈워스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루시’라는 인물은 그가 평생 영혼의 안식처로 삼았던 누이도로시와의 성장 과정에서 공유한 남매간의 애틋한 인간관계를 바탕으오 한 것이었다.
워즈워스의 또 다른 대표작인 「수선화」도 그가 여러 해 전 한 호숫가에서 본 수선화를 ‘조용한 회상’의 방식을 통해 떠올려 쓴시다. 그는 이 시에서 “산골짜기 넘어서 떠도는 구름처럼 / 지향없이 거닐다 / 나는 보았네 / 호숫가 나무 아래 / 미풍에 너울거리는 / 한 떼의 황금빛 수선화를.// (......) // 무연(憮然)히 홀로 생각에 잠겨 / 내 자리에 누우면 / 고독의 축복인 속눈으로 / 홀연 번뜩이는 수선화, / 그때 내 가슴은 기쁨에 차고 / 수선화와 더불어 춤추노니~”라고 썼는데, 이때의 “고독의 축복인 속눈”이 바로 회상이며 상상력이다.
「무지개」는 동심을 노래한 시다. 아이들의 순수한 감각과 마음 씀씀이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시에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는 무지개를 보면 마음이 들떠서 두근거리는 아이다. 그 아이는 무지개다리를 통해 천상까지 갈 수 있으며 자연의 현상이 기적적이고도 신비하고도 굳게 믿는 아이다. 시적 화자도 물론 아이였을 때는 그러했으며 다 자란 지금까지도 다행히 그러한 경이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것을 시인은 한마디로 “장ㄴ의 믿음” 혹은 자연에 대한 경건함이라고 부르고 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까닭을 워즈워스는 총 열세 권에 걸쳐 쓴 자전적인 성장 과정 『서곡』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시편들에서 워즈워스는 아이들이야말로 “감각의 성화되고 순수한 움직임”을 보여 주는 “능동적인 우주의 동숙자”이며, “영적 매력” 그 자체하고 보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소유하는 “우리 인간의 삶의 최초의 / 시적 영(靈)”은 “세월의 획일적 통제에 의해 / 감소되고 억압”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보았다. “무한과 대화하거나 무한을 향하는” 상상력은 단단하게 숟어지고 쇠퇴하고 만다고 보았다.
워즈워스 역시 이러한 경고적 발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급격히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변해 갔다. “보라! 들판에서 홀로 / 가을 걷이하며 노래하는 / 저 고원의 처녀를, 멈춰 서라. 아니면 슬며시 지나가라 / 홀로 베고 다발로 묶으며 /구슬픈 노래를 부른다 / 귀 기울여라! 깊은 골짜기엔 / 온통 노랫소리가 차있구나”(「가을걷이 하는 처녀」)라고 노래했던 그는 계관시인은 되었지만 시적 실험의 열정은 온데간데없는, 마치 동력이 끊긴 증기선처럼 평범한 속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가 시 「홍진에 묻혀」에서 보여 준 “우리는 너무나 홍진(紅塵)에 묻혀산다 /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 벌고 쓰는 일에 / 있는 힘을 헛되이 탕진한다 /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도 보지 못하고 / 심금마져 버렸으니 이 누한 흥정이여!” 라는 탄식과 비판은 자신에게 들려주는 한숨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작가소개]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
<요약> 영국 낭만파 시인.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서정가요집》개정판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스스로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를 배척했다. 그는 영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문화의 역사상 커다란 뜻을 지녔다.
출생-사망 : 1770.4.7 ~ 1850.4.23
국적 : 영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주요저서 : 《서곡 Prelude》(초판 1805, 개정판 1850)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생이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이 호수지방에서 보냈다.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백부의 보호로 1787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는 프랑스와 알프스 지방을 도보로 여행한 일도 있다. 1791년 학교를 마치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때마침 절정기에 이른 프랑스혁명의 이상(理想)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를레앙에 머무는 동안 A.발롱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깊이 빠져 딸을 낳기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숨겨져 왔다.
1793년에 《저녁의 산책》과 《소묘풍경(素描風景)》을 출판하였는데, 시형(詩形)은 상투적인 영웅대운(英雄對韻)이지만, 곳곳에 생생한 자연묘사가 돋보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가 악화되자 그는 공화주의적인 정열과 조국애와의 갈등 때문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 때 쓴 비극 《변경 사람들》(1796∼1797)에는 혁명과 고드윈적인 합리적 급진주의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1795년, 친구의 도움으로 누이 도러시와 레이스다운으로 옮겨 조용한 자연과 누이의 자상한 애정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1797년 여름에는 다시 올폭스덴으로 전거(轉居)하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S.T.콜리지와 친교를 맺으면서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798년 이 두 시인은 공동으로 《서정가요집》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콜리지는 초자연의 세계를, 워즈워스는 일상의 비근한 사건을 각각 다룸으로써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 영문학사상 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를 결정짓는 시집이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초기 대표시 《틴턴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다.
1800년 개정판을 냈으며,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스스로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詩語)를 배척하고 있다.
초판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들 세 사람은 독일로 여행을 떠나 고슬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향수 탓이었는지 그는 그 곳에서 한 영국 소녀를 주제로 한 《루시의 노래》를 썼고, 또한 자신의 시심(詩心)이 성장해온 발자취를 내면적으로 더듬은 《서곡 Prelude》(초판 1805, 개정판 1850)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독일에서 귀국한 뒤 누이와 함께 그래스미어 호반의 더브코티지에서 살았다. 1802년 누이의 친구 M.허친슨과 결혼하였는데, 이 무렵 동생 존이 사고로 죽고, 콜리지가 병석에 눕게 되는 등 심로(心勞)가 겹쳤고, 또 한편으로는 국외 정세의 변화로 해서 열렬한 애국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정가요집》 이후의 10년간이 시작(詩作) 면에서는 가장 왕성한 시기였으며, 그는 이 시기에 늙은 양치기와 그의 아들의 운명을 그린 《마이켈》(1800)을 썼고, 대표작 《서곡》을 완성하였으며, 이 밖에 《2권의 시집》(1807)을 내 놓았다. 이 시집에는 〈나는 홀로 구름처럼 헤매었다〉 〈홀로 추수하는 아가씨〉 〈무지개를 볼 때 나의 가슴은 뛴다〉 등의 주옥 같은 명시가 수록되었다. 특히 〈영혼불멸송(靈魂不滅頌)〉에서는, 어렸을 때는 순수한 넋을 지닌 인간이 자라남에 따라 신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인간관을 암시하고 있다. 1813년 그는 라이덜마운트로 옮겨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814년 장편시 《소요(逍遙) The Excursion》를 완성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도덕적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해져 갔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1820년경부터 점차 높아져 1843년에는 R.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옥석혼효(玉石混淆)라고들 하는데, J.톰슨, W.쿠퍼 등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워즈워스에 이르러 가장 심오해졌으며, 그리고 자연에의 미적 관심이 동양에 비하여 희박하였던 유럽에 있어 그와 같은 범신론적 자연관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영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문화의 역사상 커다란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