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봉] 關西 巡相 記室 [花押]謹封 令前 拜謝 [본문] 墳庵元日, 百感交中, 想關西千里之外, 猶能諒此情抱也. 承情■多少意, 如對慰浣. 僕之孱疾, 自數十年前, 如不保朝暮, 而今至七袠猶不死, 歷數諸親愛少而壯者, 先我而逝何限, 人事誠不可幾, 惟是國恩報答無階. 昨見永令書, 憂端無窮, 所恃神天默佑之爾. 女息送一壺秋露, 連服之醉甚, 此實醉筆, 必照諒之也. 萬萬不能盡, 只此. 庚戌元朝, 沙山病拙. [추신] 令公知我暮年飮食衣服齟齬之甚, 每加留念, 良可感愧, 恒母拙甚, 想無自爲叶也, 可笑. 寄來毛浮, 眞是毛深溫厚, 實合老病人親膚之寢臥, 幸甚幸甚. 神枕, 觀玩甚佳且美, 然不適於老人枕頭, 好笑. 嶺伯書來, 所言一如令示, 文拙不能辦, 將如何? 可悶. 光■飢餓, 今春將死矣. 令之留念至此, 乃■再生之秋, 何幸何幸. 幸須毋忽也.
[피봉] 평안도관찰사 기실(記室) 영전(令前)에 절하며 답장함 [花押]삼가 봉함 [본문] 분암(墳庵)*에서 새해 첫날을 맞으니,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듭니다. 천리 밖 평안도에서도 이런 제 회포를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받고 여러 가지 정다운 말씀을 읽으니, 마치 마주 대한 듯 후련하고 마음이 놓입니다. 저는 병약하여 수십 년 전부터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이 지내왔습니다만, 이제 일흔이 되었는데도 아직 죽지 않고 있습니다. 아끼는 친지 중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고 건장한 이들을 세어보노라면, 사람의 일이란 정말로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음만이 분명합니다. 어제 영령(永令)**의 편지를 받아 읽고서, 한없이 걱정되었습니다. 하늘의 도움만 믿을 뿐입니다. 딸이 추로(秋露) 한 단지를 보내와, 연이어 마셨더니 매우 취했습니다. 이 편지는 실로 취해서 쓴 글씨입니다. 틀림없이 헤아려 아시겠지요. 사연이 많으나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경술년(1670년) 설날에 사산(沙山)의 병졸(病拙)***이
[추신] 영공(令公)****께서 만년에 먹고 마시고 입고 지내기가 심히 어려운 제 사정을 익히 아시고 매번 더욱 마음 써 주시니, 정말로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항이 엄마가 못나서 영공께 맞지 못하리라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보내주신 털뜸*****은 정말로 털이 두텁고 따뜻하여, 늙고 병든 제가 살을 대고 눕기에 딱 좋습니다.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신침(神枕)******은 보기에 무척 예쁘고 아름다우나, 노인이 베기엔 적당하지 않습니다. 우습습니다. 경상도관찰사가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한결같이 영공이 하신 말씀과 부합합니다. 제 글이 졸렬하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합니까? 걱정스럽습니다. 광■(光■)이 굶주려 이번 봄에 죽게 되었다가, 영공께서 이처럼 마음 써 주셔서, 다시 살아날 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소홀히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분암(墳庵): 무덤을 수호하며 지내기 위해 지은 집. 여기에서는 은진송씨 가문 선영이 있는 사산(沙山)의 재실을 가리킨다. 사산분암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로194번길 117에 소재한다. **영령(永令): 김만기(金萬基, 1633~1687). 김만기의 자가 영숙(永叔)이었다. ***병졸(病拙): 병들고 못난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자신을 가리키는 겸사로 썼다. ****영공(令公): 상대방을 높여 이르는 말. 여기에서는 편지 수신자인 사위 민유중을 가리킨다. *****털뜸: 원문은 ‘모부(毛浮)’. 털실로 뜨개질하여 만든 편물(編物) 모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신침(神枕): 내부에 약재 등을 채울 수 있게 만든 목침의 일종
1670년 새해 첫날 아침을 맞아 송준길이 사위 민유중에게 써서 보낸 편지이다. 이해에 송준길은 65세를 맞은 노인이었고, 민유중은 41세였다. 새해를 맞아 사위에게 보낸 다소 긴 편지다. 본 편지에는 늘그막에 맞은 새해에 든 감상을 주로 담았고, 긴 추신에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각종 사연을 적었다. 본문에 담긴 감상에는 병약한 노인의 회한이 가득하다. 그러나 슬픈 회한의 와중에도 국가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생각하는 등 책임 있는 사대부의 의리는 잊지 않고 있다. 민유중의 아내인 딸이 보내준 추로(秋露) 즉 소주에 취해 쓴 글씨라는, 어세를 다소 누그러뜨린 가벼운 말도 빼놓지 않았다. 추신에 담긴 사연에는 늙고 병든 장인을 생각하여 털뜸이며 신침이며 갖가지 귀한 물품을 보내준 사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주로 담았다. 읽고 있으면 가족 간 정의가 느껴져 절로 따뜻한 마음이 든다. 자신의 딸을 ‘항모(恒母)’ 즉 ‘항이 엄마’라고 지칭했는데, 여기에서 민유중의 딸(아마도 장녀)의 이름 중 한 글자가 ‘항(恒)’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가족 간 편지가 아니면 조선시대 사대부 아녀자의 본명을 알 수 있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빛나기도 한다.
본문 중간에 약간 탈락이 있긴 하나 보존 상태 또한 우수하여 송준길의 글씨를 감상하기에 충분한 자료가 된다. 젊은 시절 그의 글씨는 단정한 면이 강했으나, 나이가 들며 운필이 더욱 유려하고 거침이 없어졌다. 이 편지에서 그러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본문 첫 행, 즉 ‘墳庵元日 百感交中’에서, ‘墳’의 ‘土’변, ‘庵’의 ‘广’의 획은 강력하며, 상대적으로 ‘元日’의 획은 얌전하여 좋은 대비가 된다. ‘墳庵’, ‘百感’, 그리고 ‘交’ 모두 획을 돌리는 운필이 매우 경쾌하다. 그리고 마지막의 ‘中’에서 세로획을 길게 빼는 멋도 빼놓지 않았다.
제5행으로부터 제9행으로 이어지는 부분의 글씨는 그 조형미가 빼어나다. 제5행 ‘잔(孱)’의 ‘尸’나 제6행 ‘모(暮)’의 초두(艹)를 왼쪽 아래 방향으로 길게 뺀 것은 장필이나 이산해, 김인후 등 분방한 초서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 동세 또한 좌하 방향의 기울기가 다소 강하다. 그러나 그 어떤 자체(字體)도 왕희지체 초서의 정법(正法)을 어기지 않았으며, 글자 체세(體勢) 및 일부 획의 과장은 있을지언정 판독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자체의 균형을 어그러뜨린다거나 중봉(中峰)의 획법을 어기는 일이 없다. 이러한 기조는 둘째 장의 긴 추신이 끝날 때까지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유지된다. 송준길 글씨의 전아함은 일부 의측과 과장의 변격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이 편지는 조선 사대부의 아정한 글씨의 대표로서 손색이 없다.
왕희지의 글씨는 법도의 상징이다. 그러나 왕희지 본인은 현학(玄學)과 분방함이 넘치는 시대였던 남조(南朝)를 살았던 인물이다. 당대 문인들의 방약무인 자재한 해학과 광태는 『세설신어』 등 기록에 자세하다. 그의 대표작인 〈난정서(蘭亭序)〉 또한 인생과 역사에 대한 깊은 감수성이 빛나는 문학 작품으로서 도덕적 면모는 그다지 없다. 송준길이 짊어진 역사의 무게는 왕희지보다 훨씬 크다. 왕희지체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왕희지가 주춧돌을 놓은 후 수많은 굴곡의 계기를 거친 글씨의 역사의 곡절 많은 다양한 면모를 함께 담고 있다. 그 자신은 전형적인 유학자였다. 뛰어난 예학자로서, 국왕과 조정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사문(斯文)의 담지자였다. 편지도 왕희지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쳤다. 특히 송대 유학자들의 편지를 통한 네트워크는 성리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고, 그에 따라 문화 전체에서 차지하는 편지의 지위 또한 사뭇 높아졌다. 이제 편지가 수록되지 않은 학자의 문집이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송대의 선학을 우러러보아 마지않던 사대부들이 주축이 된 조선시대 사회 그리고 학술장에서 편지가 차지하였던 비중은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송준길의 편지 그리고 그 글씨가 비할 바 없이 뛰어난 내용과 형식을 갖추게 된 원동력이다. 송준길이 늘그막에 사위에게 보낸 이 정다운 편지는, 한 유학자의 일생 막바지의 원숙함,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편지라는 형식의 글이 갖는 발전의 극한, 그리고 왕희지 이후 오랜 온축과 곡절을 거쳐 도달한 행초서 글씨의 전아하고도 유려한 경지의 극치를 한몸에 담은, 조선시대 편지의 대표작이자 아름다운 서예 작품이다.
*참고 문헌 〈돈암서원 원정비〉 탁본. 『한국금석문대계』 권2, 조동원 편, 원광대학교출판국, 1979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도록 제2책), 국립고궁박물관, 2010 〈영원기물부〉. 윤성훈, 『한자, 문명의 무늬』, 교유서가, 2026, p.246. 清乾隆三希堂法帖(一)冊, 晉王羲之瞻近帖龍保帖. 國立故宮博物院, 台北, CC BY 4.0@www.npm.gov.tw 唐敦煌臨本王羲之瞻近龍保帖 Tang Dynasty, Dunhuang copy of Wang Xizhi's Zhan jin 、Long bao tie, British Library, scroll(Or.8210/S.3753), manuscript, ink on paper, International Dunhuang Programme (https://idp.bl.uk/collection/768595D80B5648E7ABA8DD5A83A4C149/) 『조선왕실의 각석』(국립고궁박물관, 2011), p.200. 지영(智永)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청구기호: K1-204) 디지털 장서각 사이트(https://jsg.aks.ac.kr/) 위의 책,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청구기호: 가람古754.3-J561j) 규장각 사이트(https://kyudb.snu.ac.kr/main.do) 조맹부 『진초천자문』, 전본 다수. 한호 『초서천자문』, 전본 다수. 이산해(李山海), 〈제관악산인정각시권(題冠岳山人正覺詩卷)〉, 『조선중기서예』(예술의전당, 1993)(예술의전당 1993년 ‘조선중기서예전’ 도록), pp.58~60. 김인후(金麟厚),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동원5306) 송준길 『동춘선생수찰(同春先生手札)』,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청구기호: OC 4H 송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