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광균 선생님과 나
김지철/ 충남도의회 교육의원
2001년 7월 21일.
사랑하는 동지 남광균 선생님을 가슴에 묻던 날. 하늘의 통곡인 양 종일 장대비가 내렸다.
청년 남광균이 예산군의 예덕실업고등학교에 음악교사로 공개 채용되었던 1987년은 위대한 한 해였다.
6월 민주화 항쟁과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각계각층의 요구가 용암처럼 분출되기 시작하여 12월 대통령 선거까지 전국이 요동치던 때였다. 또한 적잖은 사립학교의 비리와 부실 운영에 문제 제기했던 전국의 30여 명 교사들이 해고되어 사학민주화운동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시기였다.
그러한 1987년은 민주교사 남광균 선생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당시 예덕실고는 충남방적이 자기 회사의 노동자인 청소년들을 교육(당시 정부의 방침) 시키기 위하여 만든 학교였다. 당연히 일반계 고등학교와 달리 교육환경을 교육시설, 교사의 임금 체계 등 모든 것이 열악하고 미비했다.
예덕실고에 부임한 남광균 선생님은 이사장과의 첫 간담회에서 이사장의 교육관, 학교 운영 철학, 교장의 역할, 교사들의 임금 등에 관하여 질문했다. 선생님은 이것이 1년 만에 학교를 떠나게 하는 출발점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는 노동자이며 제자인 학생들의 과반수가 관절염, 무좀, 습진에 시달리고, 한겨울에도 작업장에서는 반팔 소매 옷을 입지만 기숙사에서는 찬물로 목욕하는 현실을 개선해줄 것을 학교와 회사에 몇 번 건의한 적이 있었다.
필자가 남광균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해고 직전에는 교사들의 임금 향상과 근무 여건 개선을 이사장에게 강력히 요구하여 당시 천안의 충남방적 부설 청운실업고등학교 교사들의 임금까지도 인상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과 개선 요구들이 누적되어 학교와 회사의 미움을 받아 1988년 2월 해고되었다. 그리고 충남방적 노동자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을 때 배후 조종하고 노동법상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끝내 구속되었다.
석방 후 충남교사협의회의 간사로서 나와 함께 당당하고 용기 있는 자세로 많은 일을 했다. 서천 정의여중․고 민주화투쟁, 국정감사 대응, 유치원 전임강사의 정규직화 투쟁, 전교조 결성.... 그러나 당시 활동비는 신혼살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참으로 죄송한 노릇이었다). 때문에 매주 1번씩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두고 떠나온 제자들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늘 마음 아파했다. 그는 불의에는 단호했지만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후 10년이 넘는 해직의 고통 끝에 대천여중에 복직한 선생님이 필자의 집에 찾아와서는 복직에 거는 기대, 활동 계획, 미래에 대한 설계 등을 밤늦도록 얘기하고 돌아간 적도 있다.
그러던 중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이름도 생소한 상악동 암이라니!
문병 갈 때마다 악화되는 병세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웠다. 1년 정도 전교조충남지부와 전국의 동지들에게 치료비 후원 및 각종 지원을 백방으로 호소했고 많은 동지들이 함께 정성을 모아주셨다.
7월 19일. 매일 24시간 내내 쾌유를 빌었던 사모님의 전화를 받고 건양대병원에 도착하니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살아생전 본인과 가족을 너무도 힘들게 했던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먼저 껴안고 도우려 했던, 오지랖 넓은 민주교사 남광균.
물질주의와 불의에도 눈 감아버리는 약삭빠른 처세술이 만연한 요즘.
그래서 오늘 그가 더욱 그립다. 보고 싶다.
쏜 살 같이 먼저 달아나는 세월.
산적처럼 수염 더부룩했던 민주교사 남광균이 정말 눈물나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