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 올리지 못한 사진들 중에서
어느해의 이맘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일러주는 것들이 있다.
지금부터 늘어놓으려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다.
2년전 11월 5일부터 7일 사이, 나는 남도에 있었다.
장흥에서 강진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가 길을 다시 남쪽으로 잡아 반도끝의 마량이라는 작은 포구에 도달했다
해는 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고금도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중이었다.
날이 이렇게 궃은데, 섬에 들어갔다가 잠잘 곳도 못 찾으면 어쩌나 하던 노파심에 전전하다가
어느새 마량에 당도, 비는 억수같이 내렸지만, 때마침 고금도로 들어가는 배가 마치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서있기에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배에 올랐다.
뱃사람들은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않고 섬으로 들어가는 차와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마치 이 모든 상황(나에게는 극적으로 보였던!)이 일상인 것처럼.
그렇게해서 난생 처음 이름도 낯선 '고금도'에 도착했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으면 절대 와보지 않았을 작은 섬.
정유재란 당시 그분이 이곳에다 삼도수군통제영을 잠시동안 두지 않았던들, 나는 고금도에 와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2005년 11월 이후, 고금도 내 마음에 담긴 또하나의 섬이 되었다.
섬에 당도할 무렵, 사방은 어둡고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민박집을 찾을 것인가.. 고민했지만, 고금도는 생각보다 훨씬 큰 섬이었다.
자동차로 제법 시간을 두고 오갈만큼 큰 섬이었고, 실제로는 두개의 섬이 다리로 이어져있었다.
큰 수퍼마켓에 들어가서 민박집을 물어서 여차저차해서 찾아간 민박집.
할머니 한분이 민박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아마도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것 같았다.
제법 컸고, 방이 많았다. 엠티 온 대학생 한팀이 제법 시끌벅적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도시에서 온 처녀가 혼자서 여행온 것이 신기했던지, 제일 깨끗하고 좋은 방을 내주며 불도 많이 지펴주셨다.
덕분에 비와 피곤에 지친 몸을 온돌방에서 지지며, 섬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저녁을 못 먹었다고 하니까, 적은 돈을 받고 저녁상을 내놓으셨는데, 그네들이 먹는 저녁상과 같아서 좋았다.
특히 몇년을 땅속에서 묵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묵은지'는 정말 맛이 기막혔다.
전라도 묵은지가 이런 것이구나 싶어서, 다른 반찬보다 묵은지에 손이 많이 갔다.
게장과 각종 젓갈에 생선과 해초무침에 나물과 갖가지 김치로 수북했던 밥상.
전라도에 가면 언제나 밥은 든든히 먹고 올 수 있다. 그곳의 밥 인심은 세계 제일이다.
아침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민박집을 나와 해안도로를 따라 빗길을 천천히 달렸다.
그림 같은 바다들이 먹빛으로 번져갔고, 내 마음도 덩달아 먹먹해져갔다.
그럴 즈음, 섬 군데군데 점점히 박힌 노란 빛에 시선이 박혔다.
유자였다.
고금도 명물인 유자가 향기를 내뿜으며 익어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나는 홀린 듯 유자밭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 달큰한 향기에 이끌려, 그 화려한 빛깔에 사로잡혀.
빗물을 머금은 유자는 더더욱 싱그러워보였다. 아침에 할머니가 주신 유자차가 바로 이놈이었구나!!!
유자향기에 흠뻑 취한 체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로 향했다.
고금도에 온 목적은 이것이었으니.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이내 비는 내리기를 멈추었다.
그랬기에 충무사에는 사람의 발길도 보이지 않고, 인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관리인이 활짝 열어둔 문에만 조금 온기가 남아있을 뿐,
빗물을 잔뜩 머금은 사당과 내삼문과, 세월의 가늠키 어려운 기와장과 담장이 물기로 번들거렸다.
나무 향기가 더 진해진 것 같고, 낙엽 냄새, 이끼냄새, 풀냄새가 마구 엉겨, 나를 오래오래 그곳에 머물게 했다.
충무공 유적지를 지키는 관리인의 개일까?
시베리안 허스키 두마리가 이 사당을 지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녀석들의 놀이터일지도 모르겠다.
녀석들은 낯선 사람들이 반가운지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사당 곳곳을 안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내가 사당 뒷편 작은 오솔길을 기웃거리자 앞장서서 길안내를 하기도 했다.
녀석들과 나는 물기가 잔뜩 배인 숲길을 걸었다.
빗물이 늦가을을 더욱 깊게 만들어 놓았다. 숲의 향기가 너무 진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차락차락, 물기에 쓸리는 내 발자욱 소리, 낙엽 위에서 남겨졌을 내 발자욱..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숲을 걷다가 바닷가에 앉았다.
이제 비는 완전히 그쳤고, 먹구름도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고금도의 바다와 하늘은 제 빛깔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고금도의 푸른 하늘과 짙푸른 바다 때문에, 간만에 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을까?
정말 빗줄기를 뚫고 배에 실려 이곳에 왔었단 말인가?
이따금 여행의 기억은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곤 한다.
낯선 풍경, 낯선 사람, 낯선 냄새 때문일까?
아니면 그 낯선 것들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고금도를 떠올리면... 나는 아직도 몽환적인 꿈을 하나 꾼 것 같다.
어쩌면 유자의 향기가, 빗물을 머금은 섬의 숲이 너무 강한 향기를 뿜어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첫댓글 어떤처자 였을까 ...고금도 잘 다녀 가셨네요
멋지군요~ 글 잘 읽고 즐감하고 갑니다.자유 방랑 할수 있는 그 처자 정말 부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