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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참판공파 행락동 가문의 역사 고찰(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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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에서 행락동 가문의 선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강회중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 보았으며 더불어 강지가 행락동 가문의 터전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게 된 경위를 소개하였다. 행락동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받음으로써 가문의 터전을 마련해준 강지는 1517년(중종 12)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강지의 묘소는 선친인 강이찬의 묘소가 위치한 고양(高陽) 오금리(梧琴里)에 강지의 아들 안악군수 강세침의 묘소는 광주(廣州) 고덕리(高德里)에 안장되었다. 강세침의 아들은 진사 강질인데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묘소 역시 廣州(광주) 고덕리(高德里)에 묻혔다. 강질의 6형제중에서 차남이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역임한 강응운인데, 특히 부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주이씨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서 부(父)는 이수갑이다. 여기서 이수갑의 또 다른 딸은 반남박씨 문중의 박응순과 혼인하여, 슬하에 딸을 두니 이가 바로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강응운이 2형제를 두는데 차남이 필자의 외14대조부가 되는 돈령부 첨정 강수곤이다. 강수곤과 관련하여 이번 기회에 명확히 밝히고 싶은 대목이 있다. 인터넷에서 강수곤을 검색하면 강수곤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모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 집에서 성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수곤이 어린 시절에 부모가 일찍 서거한 것은 맞지만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는 고모가 아니라 이모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고모는 아버지의 누이동생이나 누나를 일컫는 것인데, 진주강씨 참판공파 족보를 분석한 결과 강수곤의 고모는 경주최씨 문중으로 출가한 것으로 나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는 고모가 아닌 이모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강수곤의 어머니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어머니는 친자매가 된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강수곤과 의인왕후(懿仁王后)는 이종사촌 남매가 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555년(명종 10)에 출생하는데, 구체적으로 강수곤이 7월 11일, 의인왕후(懿仁王后)가 5월 5일생이 되기 때문에 강수곤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이종사촌 동생이 되는 것이다. 강수곤은 공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고창현감에 이어서 제천군수로 재임하였는데 특히 제천군수 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많은 백성들이 아쉬워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것을 통하여 강수곤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임진왜란시에 이종사촌 매형이 되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나, 1608년(선조 41) 선조가 승하한 이후 1613년(광해 5)에 발생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백사 이항복과 함께 귀양을 가며, 그로부터 7년뒤인 1620년(광해 12) 향년 66세로 서거하였으며, 묘소는 고양(高陽) 오금리(梧琴里)에 안장되었다. 강수곤이 서거한 이후 현석 박세채가 묘지명을 찬(撰)하고 수암 권상하가 행장을 짓고 미수 허목이 묘갈명을 찬(撰)하였다는 것이니, 이런 사실을 통하여 당대의 강수곤의 위상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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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황님을 여기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반남박문인데, 저의 11대조부께서
명재 윤증 선생과 시남 유계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신 관계이며, 종조모께서도
평와 윤탁 선생의 후손이 되십니다.
@파천황 파천황님께서 관심을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