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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이어
철학자인 아더 쇼펜하우어가 홀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생각에 골몰해 걸음을 옮기다가
다른 보행자와 크게 부딪쳤다.
충격에 놀란 보행자는 쇼펜하우어가
너무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있자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이 뭔데 이 따위로 행동하는 거요?"
쇼펜하우어가 여전히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내가 무엇이냐고? 나도 그것을 알면 좋으련만!"
아무도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라.
이것이 여행의 시작이다.
자, 첫번째 경문을 보자.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이것은 발원문(發願文)이다.
인도의 모든 경전은 발원문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다른 나라와 다른 언어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스에는 없는 현상이다.
인도는 우리 인간을 텅빈 대나무로 이해한다.
영원(永遠)이 우리를 통해 흘러간다.
이 무한성(無限性)이 발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저 그 무한성의 도구일 따름이다.
우리는 그 무한성을 발원하고,
그것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도록 염원한다.
이 반야심경을 누가 썼는지
아무도 모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필자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이 반야심경을 쓴 사람은 자신이
이 경전의 저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속기사(速記士)같은 존재였다.
저 너머로부터 어떤 메시지가 전해지고
그는 이 구술(口述)을 충실하게 받아 적었다.
그는 저자(author)가 아니다.
기껏해야 필자(writer) 정도인 것이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이것은 발원문이다. 불과 몇 마디에 불과하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지혜의 완성'이란 말은
'프라즈나파라미타(prajnaparamita)'의 번역어이다.
'프라즈나(般若)'는 지혜를 의미한다. 명심하라,
이 말은 지식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은 마음을 통해 온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지식은 결코 독창적(original)이지 않다!
지식의 본성 자체로 볼 때 독창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지식은 다른데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그대의 독창적인 비전(vision)이다.
지혜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서 성장한 것이다.
그것은 시장에서 살 수 있는
플라스틱 꽃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 위에 피어나는
진짜 장미꽃이다.
이 꽃은 나무의 노래이다.
이 지혜의 꽃은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부터 피어난 것이다.
'프라즈나(般若)'는 지혜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혜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wisdom'은
사뭇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영어에서 지식은 경험이 없는 앎을 의미한다.
대학에 가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영어의 지혜(wisdom)는
삶에서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은 앎을 말한다.
따라서 젊은 사람은 유식해질 수는 있지만
지혜로울 수는 없다.
지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이는 학위를 얻을 수 있다.
철학 박사나 문학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지혜로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늙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지혜는 직접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전히 외부에서 온 것이다.
'반야(般若)'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다.
반야는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꽃이다.
이 반야화(般若花)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면의 철저한 침묵 안으로 들어감에 의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 현현(顯現)되도록
허용함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 반야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이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적당한 토양이 필요할 뿐이다.
반야는 항상 독창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며,
오직 그대만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대의 것"이라는 이 말은
거기에 어떤 에고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야는 그대의 자성(自性:self-nature)에서 솟아난다.
그런 의미에서 반야를
"그대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야에는 에고가 설 자리가 없다.
왜냐하면 에고는 침묵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파라미타(波羅蜜多)'는
'저 너머에 속한',
'저 너머로부터 온', '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이라는 뜻이다.
바라밀다의 차원에서 그대는
시간이 사라진 상태로 들어간다.
그대는 공간이 사라진 내면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다.
시간은 그대의 외부에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에는
시간이 사라지는 교차점이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 곳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 있습니까?"
예수는 "그 곳에는 더 이상 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거기에는 영원이 있다.
시간없는 순간만이 있다.
공간없는 공간과 시간없는 순간,
이것이 저 너머 피안(彼岸)의 세계이다.
그 곳에서 그대는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를 보라.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또한 저기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중국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구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가 사라지면 전체와 하나가 된다.
이때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독립된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지 읺는다.
그대는 전체 안에서 녹아 없어진다.
보라! 아침 나절, 푸른 나뭇잎 위에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거기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윽고 이슬방울은
나뭇잎에서 미끌어져 바다로 들어간다.
이슬방울이 나뭇잎 위에 있을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이슬방울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개별성(個別性)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바다 안으로 떨어져 내리면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찾을 수 없다.
이슬방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이슬방울은 없는 곳 없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특정한 위치를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다 전체가 이슬방울의 거처가 되었다.
이제 이슬방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와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반야바라밀다가 솟아오른다.
완벽한 지혜, 저 너머로부터 오는 지혜가 찾아든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발원(發願)이다......이 발원문은 말한다.
"저 너머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찾아드는 지혜에 대해 경의를 표하옵니다."
이 지혜의 완성자는 고귀하고 성스럽다.
전체와 하나가 되었으므로 성스러우며,
온갖 추악함을 일으키던 에고가 사라졌으므로 고귀하다.
사트얌, 쉬밤, 순데람(Satyam, Shivam, Sunderam).-
그것은 진(眞)이고 선(善)이며 미(美)이다.
이 진선미가 세가지 속성이다.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진리......지혜의 완성이 진리이다.
진리는 고귀하고 아름답다.
성스럽고 선하다.
왜 그것을 성스럽다고 하는가?
모든 붓다들이 그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붓다를 탄생시키는 자궁이다.
이 지혜의 완성에 드는 순간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슬방울이 바다 안으로 사라져
개별성을 잃었을 때,
더 이상 전체와 맞서 싸우지 않고 복종할 때,
전체와 더불어 존재할 때,
이럴 때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라고 강조한다.
결코 자연에 맞서지 말라.
자연을 극복하거나
정복하려고 하지 말라.
자연을 이기려고 하지 말라.
자연을 이기려고 한다면
그대는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부분이 전체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세상이 이토록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것은 그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실패자인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이 전체를 정복하려 하고,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밀어내려고 한다.
당연히 그대는 어느 날엔가
힘이 빠져서 기진맥진할 것이다.
강은 끝없이 흐르는데
그대의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엔가 강물이 그대를 압도할 것이고,
그대는 항복하고 말 것이다.
크나큰 절망감을 느끼면서.
그러나 기꺼이 항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귀의(歸依:surrender)가 된다.
이때 더 이상의 패배는 없다.
이것은 승리이다.
그대는 신과 더불어
조화를 이룰 때에만 승리한다.
신에 대항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신은 그대를
패배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의 패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대는 맞서서 싸우기 때문에 패배한다.
만일 패배하기를 원한다면
맞서서 싸워라.
그러나 이기기를 원한다면
복종하고 귀의하라.
이것은 역설적인 현상이다.
기꺼이 무릎꿇는 자만이
승리자가 된다.
이 게임에서는 패자만이
진정한 승자가 된다.
이기려고 애쓰면
그대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대의 패배는
시간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언제 패하든 분명히 패하고 만다.
이 지혜의 완성은 성스럽다.
전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전체와 더불어 고동치고,
전체와 더불어 춤춘다.
전체와 함께 노래한다.
그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잎사귀와 같다.
나뭇잎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춘다.
나뭇잎은 자기의 의지가 없다.
이렇게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을
나는 '산야스(sannyas)'라고 부른다.
이것을 이 경전에서는
성스럽다고 말한다.
성스럽다(holy)는 말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語)는
'바가바티(bhagavati)'이다.
이 '바가바티'라는 말은
'holy'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하다.
이 말을 이해해야 한다.
'holy'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모르게
기독교의 냄새가 풍긴다.
그러나 '바가바티'는......
'바가바티'는 '바가반(bhagavan)'이라는
단어의 여성형이다.
이 경문에서는
'바가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바가바티'라는
여성형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음(陰)이지
양(陽)이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독교의 개념은
별로 아름답지 않다.
이것은 남성들의 에고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남성적인 에고는 신이
'그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남성적인 에고는
신이 '그'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보라.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
이 셋 모두가 남성이다.
여기에 여성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마치 남성 전용 클럽과 같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여성은 자궁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여성만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
여성을 통해 생명이 태어난다.
왜 생명은 여성을 통해 태어나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오직 여성만이
생명의 탄생을 허용할 수 있다.
여성은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공격적이지만
여성은 수용적이다.
그래서 여성은 흡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 반야심경은 '바가반'이 아니라
'바가바티'라고 말한다.
여기엔 지극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붓다를 탄생시키는 완전한 지혜는
여성적인 성질을 띄고 있다.
이 지혜는 어머니이다.
자궁은 어머니가 될 수 밖에 없다.
신을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그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하나의 부자연스러운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 부성(父性:fatherhood)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성의 역사는 기껏해야 몇 천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어머니는 자연적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사유 재산 제도로 인해 생겨났다.
아버지라는 개념은 자연이 아니라 경제의 일부이다.
일단 사유재산이 사라지면, 만일 이런 제도가 영원히 사라진다면
아버지 또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버지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공격적이다.
이런 현상을 관찰해 보았는가?
오직 독일인들만이 그들의 나라를
'부국(父國:fatherland)'이라고 부른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모국(母國)'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나라를 '부국'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은 위험하다!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나라를 '부국'이라고 부를 때
그대는 무엇인가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이다.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부국'이라는 명칭 자체가 전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모든 종교는 공격적이다.
기독교는 공격적이다. 이슬람교도 그렇다.
유태인들의 하나님이 오만하고
분노에 차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태인들의 신은 이렇게 선언한다.
"만일 나를 섬기지 않는다면 너는 나를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를 파괴시키고 말리라.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그러니 오로지 나만을 섬겨라!"
반면, 신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폭력적이다.
불교는 종교라는 미명 하에 전쟁을 일으킨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들은 단 한사람도 강압에 의해 개종시킨 적이 없다.
모하메드교인들은 칼로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사람들의 의지와 본심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기독교인들 또한 온갖 방법으로 사람들을 회유했다.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빵으로,
때로는 여타의 다른 수단으로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불교는 사람들의 본심에 반해 개종을 강요하지 않은 유일한 종교이다.
오직 불교만이 비폭력인 종교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궁극적 실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여성적이기 때문이다.
고귀하고 성스러운 지혜의 완성자에게 귀의합니다.
또한 진리는 아름답다는 것을 명심하라.
진리는 더없는 은총이므로 아름답다.
진리는 추악해질 수 없다.
그리고 추악한 것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추악함은 환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추하게 보인다면 그 추함에 속지 말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 안에 아름다운 사람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추함에 속지 말라. 추함은 그대의 해석일 뿐이다.
삶은 아름답다. 진리는 아름답다.
존재계는 아름답다. 그것은 추함을 모른다.
완전한 지혜는 고귀하다.
그것은 여성적이며 성스럽다.
그러나 이 '성스럽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저 세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비해 성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성스럽다.
현세적이거나 속되다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체가 성스럽다. 모든 것이 불성(佛性)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충만하다.
오로지 붓다와 붓다가 있을 뿐이다!
나무 붓다, 개 붓다, 새 붓다,
남자 붓다, 여자 붓다......일체가 붓다이다.
모든 것이 붓다를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신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인간은 신이 되어가는 중이다.
두번째 경문:
거룩한 분이시며 보디사트바인
관세음(觀世音:avalokita)께서는
피안에 이른 지혜의 깊은 과정 속에서 움직이고 계셨다.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오온(五蘊)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 오온(五蘊)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것을 보았다.
'아발로기따(avalokita)'는 붓다의 다른 이름이다.
문자 그대로 볼 때 아발로기따는 저 위에서 보는 자를 의미한다.
일곱번째 사하스라르(sahasrar) 차크라에 이른 자,
초월의 경지에 서서 보는 자가 아발로기따이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당연히 그대의 관점에 따라 채색된다.
그대가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다리의 첫번째 칸, 즉 물질적 육체의 차원에 사는 자는
모든 것을 그런 관점에서 본다.
육체의 차원에 사는 자는 그대를 볼 때 육체를 본다.
그는 육체 이상을 보지 못한다.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성적인 환상에 빠져있는 자는 오직 성적인 관점에서만 본다.
배고픈 사람도 자신의 관점을 통해서만 본다.
그대 자신을 관찰해 보라. 하나의 사물을 볼 때마다 달라진다.
그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저녁때보다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이른 아침 그대는 신선하다.
아주 깊은 잠,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난다.
이 잠을 통해 그대는 무의식적이나마
초월적인 그 무엇을 맛보았다.
그러므로 아침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아침에는 사람들이 더 자비롭고 사랑에 넘친다.
더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면
똑같은 사람이 더 불순하고 교활해진다.
더 추하고, 폭력적이고, 위선적이 된다.
똑같은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아침에 그는 초월의 차원에 근접해 있었다.
그런데 저녁 때가 되면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살고 있다.
그런 차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지혜의 완성자는 일곱 개의 차크라를 통해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다.
그는 자유인이다.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는 라디오의 다이얼(dial)과 같다.
어떤 시각(vision)에도 다이얼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이 '묵타(mukta)'라고 불려지는 사람의 경지이다.
그는 진실로 자유롭다.
그는 모든 차원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면서도
그 차원에 물들지 않는다.
그의 순수성은 오염되지 않는다.
그의 순수성은 언제나 초월의 경지에 남아 있다.
붓다는 그대의 육체를 만지고 치료할 수 있다.
그는 육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자유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되어 그대에게 말하고 설명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마음이 아니다.
그는 마음 뒤에 서서 마음을 이용한다.
이것은 그대가 차를 운전하면서 결코 차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는 사다리의 모든 칸을 이용한다.
그는 사다리 전체이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관점은 언제나 초월의 차원을 향한다.
이것이 그의 본성이다.
'아발로기따'는 저 너머 피안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을 보는 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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