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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제37회 골든디스크 어워즈에서 6년 연속 대상을 수상
2022년 세계 최초로 돼지 심장 사람에게 이식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돼지 심장을 인체에 이식하는 수술이 진행됐다. 이식받은 환자는 사흘째 회복 중이다. 미국 매릴랜드대 의료센터는 지난 7일 인체 장기를 이식받지 못해 다른 선택지가 없는 시한부 환자 데이비드 베넷(57)의 동의를 받고 돼지심장을 그에게 이식했다. 동물 장기 이식 시에는 즉각적인 거부반응이 가장 큰 문제다. 이번 수술에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이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세포 내 당을 제거한 돼지 심장을 사용했다. 환자는 수술을 앞두고 “죽거나 돼지 심장을 이식받거나이다. 나는 살고 싶다”면서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시도라는 걸 알지만, 마지막 선택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센터는 현재 환자의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2020년 제주도 낮 최고기온 23.6℃ 1923년 기상관측 이후 최고기온
2019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중국 방문 시진핑과 정상회담
2015년 이슬람 지하디스트 복장의 무장괴한 프랑스 시사만화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난입 12명 살해
2009년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체포
인터넷상에서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해온 것으로 지목된 박대성(30)씨가 허위 사실 유포 혐의 등으로 검찰에 체포됐다.
검찰은 박씨가 지난달 29일 아고라에 ‘대정부 긴급 공문 발송’이라는 제목으로 “정부가 7대 금융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긴급 공문을 전송했다”고 올린 글은 전혀 근거가 없는 허위 사실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미네르바’의 신원이 그간 인터넷상에서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했던 50대 경제전문가로 알려진 것과 달리, 30세의 무직자로 외국 금융 기관에 공부하거나 유학을 다녀온 적이 없으며 혼자 경제학 서적을 보면서 독학을 했고, 서울의 H공업고등학교와 D공업전문대를 졸업했고 전문대에서의 전공도 경제나 경영분야가 아닌 정보통신이었다고 전했다.
미네르바는 2008년 3월부터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스스로를 ‘고구마 굽는 늙은이’로 지칭하면서 100편이 넘는 글을 올렸으며 대부분이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미네르바는 그동안 자신을 ‘파생금융상품 설계 경력을 가진 늙은 노인’으로 가장한 채 현란한 수사(修辭)의 경제분석으로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네티즌들은 그의 극단적이면서도 단순한 논리에 ‘인터넷 경제 대통령’이라는 별칭까지 붙여가면서 지지를 보냈다. 미네르바의 글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건당 평균 조회 수 10만을 훌쩍 넘기는 등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2008년 1월 7일 오전 10시 47분쯤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코리아2000’ 냉동물류창고 지하 1층 기계실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났다.
화재 발생 당시 물류창고 지하 1층에는 인부 57명이 전기배선 설치와 냉동설비에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를 주입하는 작업 등을 하고 있었다. 인부 57명 중 40명이 숨졌으며 나머지 17명은 탈출하거나 구조됐으나, 이 중 7명은 중태에 빠졌다. 인부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 을 좇아 온 조선족 동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화재원인은 냉동배관을 설치하면서 전기 용접을 하기 위해 불을 붙였다가, 이것이 공기 중에 차 있던 유증기(기름 증기)와 만나면서 폭발이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고 당시 현장의 스프링클러 등 화재진압 안전설비는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물 지하 1층에서 시작된 불은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이날 오후 11시 18분쯤 40명의 시신을 모두 수습했으나, 명단에 나온 57명 이외에 추가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에 대비해 수색 작업을 벌였다. 발견된 시신은 너무 심하게 불에 타 신원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가 발생할 당시 물류창고 안에는 프레온 가스통과 암모니아 가스통, LP가스통, 200ℓ들이 우레탄원료 15통 등 화학물질이 가득 차 있어, 폭발과 함께 유독가스도 많이 발생한 것으로 소방당국은 분석했다. 또한 화재발생시 인명구조와 직결되는 방화셔터와 스프링쿨러, 비상벨 등의 소방시설을 오작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동 작동으로 변경하여 참사가 커지는 등 안전불감증으로 사과 확대되었다.
1996년 알바로 아르수, 과테말라 대통령에 당선
1996년 1월 7일 시행된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사업가 출신의 알바로 아르수 후보가 알폰소 포르티요 후보를 물리치고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선관위는 이날 투표결과를 최종 집계한 결과 우익 국민진보당(PAN)의 아르수 후보가 역시 우익인 공화전선(FRG)의 포르티요 후보를 51.22대 48.78로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발표했다.
1995년 김수환 추기경 방북용의 밝힘
199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옹 타계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 옹이 노환으로 1993년 1월 7일 밤11시 타계했다. 92세였다. 전남 승주 태생의 조 옹은 18살부터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운동단체(포수단)의 전라도담당 연락원으로 지하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24살 이후로는 항일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망명한 후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 등의 지도를 받은 조 옹은 1926년 이후로는 만주의 설원과 장백밀림을 누비며 일제와 싸웠다. 광복군의 창립에도 깊숙이 관여했던 고인은 광복군의 주계장 경리처장 경훈처장 등 요직을 거쳐 1943년에 임정 국무위원으로 임명됐다. 광복을 맞아 김구 김규식 등 임정요인과 함께 조국땅에 돌아온 조 옹은 백범이 영도하는 한국독립단을 발판으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백범이 주창했던 남북협상론에 뜻을 달리하여 남북 협상에는 불참했으며, 백범의 암살 후 중앙상무회 대리주석으로 한독당을 이끌었다. 5.16후 6대의원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펴기도 했다. 임정기념 사상업회장, 독립유공자 협회장도 맡았으며 `백강 회고록` 등 저술을 남겼고, 건국공로 훈장을 받았다.
1993년 청주 우암아파트 붕괴 (29명 사망, 48명 중경상)
2002년 1월 7일 오전 1시8분쯤 충북 청주시 우암동 우암상가아파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 진화 작업중이던 오전 2시10분쯤 상가 내부에 누출된 LP(액화석유) 가스가 폭발해 건물 전체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서 잠자던 주민 29명이 붕괴된 건물에 깔리거나 유독가스에 질식돼 숨졌으며, 4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지하1층과 지상1층에 입주해 있던 식료품점, 옷가게 등 74개의 점포가 전소되고 지상 2∼4층 아파트 59가구가 완전 붕괴돼 3백50여명의 이재민이 났다.
청주소방서와 경찰은 굴착기 등 장비를 동원, 철야로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사상자를 찾아낸 결과 7일 오전까지만 해도 확인된 사망자 수가 14명에 불과했으나 발굴작업이 진행되면서 그 숫자가 29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우암상가아파트는 1981년 5월 지어진 연면적 9천90㎡(2천7백49평)의 주상 복합건물이었다
1989년 히로히토(裕仁) 일왕 사망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33분 투병 1백11일만에 87세를 일기로 사망함으로 1926년부터 시작되어온 쇼와(昭和)시대가 63년 만에 막을 내렸다. 히로히토의 사망에 따라 왕세자 아키히토(明仁)가 이날 오전 10시 일본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부왕의 뒤를 이어 제125대 일왕에 즉위했으며 일본정부는 새 연호를 헤이세이(平成)로 결정했다. 유해는 동경교외 하치오지의 무사시 묘지에 안장됐다.
부왕인 다이쇼(大正)의 뒤를 이어 지난 1926년 12월 25일 26세로 즉위한 히로히토는 일본의 상징적 존재로, 한때는 유일신으로 국민위에 군림하기도 했으며 특히 한국에 대한 일제식민통치 35년 중 후반 20년이 그의 재위기간이었다. 히로히토가 살아온 87년간의 세월은 곡절 많던 일본 현대사와만 겹쳐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다사다난했던 과거와 깊게 맞물려 있다
1989년 화학무기금지를 위한 파리국제회의 개막(~11일)
화학무기금지를 위한 국제회의가 세계 1백49개국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1989년 1월 7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막됐다. 1925년 체결된 화학무기 금지를 위한 제네바의정서를 재확인하고, 화학무기 생산 및 비축의 전면금지를 촉진하기 위한 5일간의 토의 결과 각국 대표들은 화학무기를 불법화하는 선언을 만장일치로 승인하고 11일 폐막했다.
모두 6개항으로 된 이 선언문에는 현재 비축돼 있는 화학무기를 파괴할 수 있는 국제협약이 마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회의 참가국들은 화학무기의 확산을 우려하는 선진국과, 화학무기금지와 핵군축 연계입장을 보여온 아랍 및 비동맹국가들간의 입장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절충작업을 벌여왔는데 아랍국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양보함으로써 11일 폐막선언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1983년 소련, 핵위성 코스모스 1042호 추락중이라고 발표
1981년 `한국미술 5천년전` 미국 뉴욕에서 개막
1981년 시인 김종문 세상 떠남
1979년 베트남군, 캄보디아 공략해 폴 포트정권 태국 국경지대로 도주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공략, 민주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1979년 1월 7일 태국 국경지대로 도주했다. 폴 포트는 태국 국경지대의 밀림으로 도주한 뒤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1998년 자살했다.
캄보디아는 강대국들에게 휘둘린 전형적인 약소국가였다. 80여년 동안 캄보디아를 지배하던 프랑스가 떠나고 시아누크 국왕이 캄보디아를 다스렸는데 베트남전이 본격화되면서 캄보디아도 전쟁에 휘말렸다. 시아누크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캄보디아를 경유하는 베트남의 '호치민 루트'를 묵인했다.
미국은 1970년 론 놀을 앞세워 시아누크를 전복하고 친미·반공 정권를 수립했지만 베트남전의 피해로 반미의식이 고조되고 크메르루주 등 반공주의를 탄압하면서 민심을 잃은 론 놀 정권은 베트남전의 종전과 함께 붕괴했다. 그리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 급진 공산주의세력인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섰다.
폴 포트는 유토피아적 농경 사회주의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농촌 강제이주 정책을 펼치고 론 놀 정권의 인사들을 숙청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반 베트남 정책을 펼쳐 미국이 묵인하기도 했다.
1977년 체코 지식인 257명, 자유회복을 호소하는 `77헌장` 발표
체코의 자유파 지식인 257명이 자유회복을 호소하는 `77헌장` 선언을 발표해 그 전문이 1977년 1월 7일 서독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지에 게재됐다.
1975년 `헬싱키선언`에 체코가 조인한 인권국제협정 및 경제, 사회, 문화의 권리에 관한 국제협정을 재확인 뒤에 1977년 6월에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릴 헬싱키선언 재검토회의를 위해 발표한 것이었다.
서명자는 1968년 자유화운동 `프라하의 봄` 때 활약한 인사가 다수를 차지했다. 선언은 정보-사상의 권리, 신앙의 자유, 도청-밀고-가택수사의 폐지 등을 담고 있었는데 체코정부는 서명한 인사들을 체포했다.
1975년 동아방송의 16개 대기업광고주들, 광고방송을 중단, 해약
1974년 정구영 공화당 탈당
1973년 부산 금곡동 패총에서 3,500년 전 신석기시대 추정 주거지유적 찾아냄
1968년 함양에서 버스추락사고 (43명 사망)
1968년 미국, 서베이어 7호 발사 (이틀 뒤 달 착륙)
1967년 중국, 친모-반모파 각지서 유혈충돌. 1천여명 사상
1966년 철도청 부정사건, 전국에서 54명 구속
1963년 KOC, 남북한단일팀 구성에 관한 실무회의 개최예정 발표
1962년 언커크, 한국 정치정세 토의
1959년 미국, 쿠바의 카스트로 신정부 승인
1958년 한국과 일본이 문화재반환비밀조약에 조인
1955년 국무회의 중고등학교 분리 의결
1954년 영국과 이란 국교 부활
1953년 아이젠하워와 처칠, 한국전 문제 토론
1950년 중국 국민당정부 대만으로 후퇴
1950년 일본 재일동포 62만 명에 강제등록령 포고
1949년 ‘대마도는 우리 땅!’. 이승만 대통령이 내외신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전격 선언.
2차대전 패전으로 구(舊)소련에 북방도서 4도를 빼앗겨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인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이대통령은 “배상요구는 어느 시기까지로 한정할 것인가”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답하던 중 이같이 폭탄선언을 했다.
이대통령은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온 속지나 마찬가지였는데 350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대마도를 무력강점한 뒤 일본 영토가 됐고, 이때 결사항전한 의병들의 전적비가 도처에 있다”며 배경을 설명했다.
10여일 뒤 31명의 우리 의원이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해 일본을 더욱 압박했다.
대마도 요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맞대응, 장차 있을 한일회담에서 유리한 협상 고지를 점령하려는 엄포용 성격이 강했지만 회견소식을 접한 일본의 요시다(吉田) 총리는 혼비백산, 맥아더 사령관에게 달려가 하소연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가 해방이 돼 1945년 9월 귀국을 서두르자 대마도는 내 줄 수 있어도 우장춘은 내줄 수 없다’며 귀국을 만류했다는 일본 정부였다.
1948년 초등학교(현 초등학교)의무교육제 실시
1947년 한국문제(유엔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 실시) 유엔 상정
1946년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계열 학생들의 총연합체 반탁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에 이철승이 선출되다.
1937년 총독부 경무국, 상영금지해오던 서양영화를 50%만 상영허가하기로 결정
1932년 제주 잠녀들 항일투쟁 시작 3개월간 17,000여명 참가
1932년 독일 수상 배상불응 선언
1927년 뉴욕-런던간 무선전화 개통
1914년 이화학당, 유치원 설립
1906년 일본, 서원사 내각 성립
1895년 고종 종묘에서 홍범14조 선언
1895년 1월7일, 고종이 종묘에서 ‘홍범14조’를 선포했다. ‘홍범(洪範)’은 중국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편에 나오는 말로 천하를 다스리는 큰 원리를 뜻한다. 근대적인 내각제도 확립, 문벌폐지와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등 14개조로 구성된 홍범14조는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공포하고 근대적 개혁의지를 성문화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선포과정과 내용에 일본의 간섭과 의도가 짙게 배어있어 자주성을 의심받았다.
선포 전에 주한일본공사가 ‘내정개혁 강령20조’를 고종에게 제시하며 실시를 요구했고, 친일연립내각이 일본인들의 자문을 받아 ‘홍범14조’를 제정, 고종에게 선포를 권고했기 때문이다. 특히 ‘청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는 1조는 일본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대목이다. 그럼에도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띠었고, 근대사법(司法)의 대원칙을 천명(13조)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왕실호칭에도 큰 변화가 생겨 고려 충렬왕 이래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짐(朕)ㆍ폐하 등의 용어가 다시 살아났고, 사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된 민비도 호칭이 한 단계 승격됐다. 중국 신해혁명 지도자들은 ‘홍범14조’를 실패로 규정, 전철을 밟지 말자는 다짐을 하기도 했다.
1864년 서재필 출생
1839년 프랑스 다게르 사진기(은판사진, 다게레오타이프) 발명
프랑스의 물리학자 다게르가 은판사진(다게레오 타이프)를 발명한 사실이 1839년 1월 7일 세상에 공표됐다. 실물을 영구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은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이미 10여년 전에 만들었지만, 질이 좋지 않고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나 소요돼 불편했으나 이날 다게르가 개발해 공표한 방법은 노출시간이 20-30분밖에 소요돼지 않아 사진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다게르는 세관관리로 일하다가 오페라 무대 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1833년 경쟁자인 니에프스가 죽자 다게르는 홀로 실험에 몰두, 마침내 이날 은판사진을 발명했다. 이 방법을 발표한 사람은 다게르가 아니고 물리학자 아라고였다. 그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 방법을 발표했고 다게르는 이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사진기술은 고더도, 톨벗, 아처 등의 연구를 거쳐 꾸준히 개선되어 1870년대 마침내 새로운 기술인 건판이 발명됐다
1834년 독일의 물리학자 조한 필립 라이스 출생
1822년 독일의 인도학자 테오도르 아우프레히트 출생
1800년 미국의 제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 출생
1762년 6살 된 모차르트 누이(12살)와 함께 대중 앞에서 첫 연주
1610년 갈릴레오 목성의 4대 위성 첫 발견
1537(조선 중종 32) 율곡 이이 태어남(음력 12월26일)
1536년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 아라곤 캐서린 사망
1438년 장영실(蔣英實) 등, 흠경각(欽敬閣) 완성
BC49 시저 파 로마의 원로원에서 추방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