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는 바다와 커피만 있는 게 아니다. 강릉 여행의 참맛을 느끼고 싶다면 왕산면으로 떠날 일이다. 강릉 시내에서 굽이굽이 감도는 산길을 따라 30여 분 달려가면 대기리마을에 닿는다. 매년 12월 말, 고즈넉한 마을에 겨울잔치를 준비해놓고 길손을 기다린다. 대기리마을과 지척인 노추산 모정탑길, 국내 최대 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인 안반데기도 겨울 여행의 맛을 더한다.
[왼쪽/오른쪽]앉은뱅이 얼음썰매장으로 바뀐 대기초등학교 운동장<사진 제공·대기리마을> / 안반데기의 겨울 풍경
산촌 폐교에 마련된 자연친화적 놀이터, 대기리마을
4개 리에 18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대기리마을은 감자, 무, 배추 농사가 99% 이상을 차지한다. 해발 700m 고원지대에 자리해 내년부터 ‘강릉 꼭대기마을’로 이름이 바뀔 예정이다. 11월에 농사가 끝나면 주민의 60%가 아랫마을로 내려가 겨울을 난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만 가득할 것 같은 마을이지만 12월이면 잔치 준비로 또 한 번 들썩인다. 폐교가 된 대기초등학교 운동장에 밤새 물을 끌어다 얼려서 얼음썰매장을 만들고, 넓은 감자밭은 새하얀 눈썰매장으로 변신한다. 12월 28일부터 3일 동안 열리는 ‘대기리 겨울잔치’는 올해 5회째를 맞는 소규모 축제다. 화려한 이벤트와 프로그램이 가득한 여느 겨울 축제에 비해 소박하지만, 겨울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겐 자연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좋은 놀이터다.
[왼쪽/오른쪽]감자밭 눈썰매장<사진 제공·대기리마을> / 눈사람을 만드는 가족들<사진 제공·대기리마을>
운동장 옆 비닐하우스에서는 마을 부녀회에서 준비한 로컬푸드 장터가 체험객들의 입맛을 돋운다. 감자전, 시래기밥, 시래기김밥 등 대기리에서 수확한 농산물로 만든 건강한 먹거리가 가득하다. 대기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데다 일교차가 심해 시래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자연 환경을 갖췄다. 품질 좋은 무청 시래기는 이곳의 별미다.
한쪽에 마련된 몽골 텐트 체험존에서는 제기차기, 감자 구워 먹기, 가래떡 구워 먹기 등을 진행한다. 숯불 화로에서 구워 먹는 농산물과 한과, 달고나 등 조막만한 손으로 직접 만들어 먹는 음식은 아이들에게 푸근한 ‘시골의 맛’을 안겨준다. 비닐하우스에서 꽁꽁 언 몸을 한 차례 녹인 뒤 목공예와 천연 비누, 천연 화장품 만들기 체험을 하며 잔치를 즐기는 것도 좋겠다. 체험비는 5,000원~7,000원 선이다. 내년부터는 2층 건물의 체험관에서 실내 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겨울잔치가 끝나도 썰매장과 먹거리 장터는 설 연휴 전까지 주말마다 운영한다. 입장료는 장비 대여료를 포함해 아이들만 7,000원이다. 잔치 기간에는 입장료가 따로 없다.
[왼쪽/오른쪽]비닐하우스에서 벌어지는 훈훈한 잔치<사진 제공·대기리마을> / 한과를 만들고 있는 마을 부녀회<사진 제공·대기리마을>
눈 내리는 숲속 삼림욕, 노추산 모정탑길
축제장에서 배나드리길을 따라 10여 분 더 달려가면 노추산 ‘치유의 숲’ 초입이다. 금강송 군락이 장관을 이루는 숲길에서 한겨울 삼림욕을 즐겨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3,000여 개의 돌탑에 서린 사연을 안다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애틋할 수밖에 없는 길이다. 사연의 주인공은 26년 동안 억척스레 돌을 날라다 쌓아올린 고(故) 차옥순 여사다. 68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돌을 지게에 지고 숱하게 다녔던 이 길은 ‘노추산 모정탑길’이라 불린다. ‘모정(母情)’만으로 이름 붙이기엔 한 여인의 삶이 지독히도 기구하다.
나이 스물셋에 강릉으로 시집와 아들 둘을 잃고 남편마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어느 날, 꿈에 산신이 나타나 ‘노추산에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우환이 없어진다’는 말을 전했다. 그 후 1986년부터 2011년까지 홀로 산속에 기거하며 돌탑을 쌓은 이야기는 2013년에야 세간에 알려졌다. 지나가는 등산객도 함께 탑을 쌓기도 했다는, 전설이 아닌 실화다. 산속 움막까지 켜켜이 쌓아올린 돌탑길에는 송천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내내 뒤따른다. 야생화 만발한 봄이나 여름, 단풍 든 가을이면 더없이 아름다운 길일 터. 눈 내리는 겨울숲에서 만난 사연은 더욱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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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오른쪽]노추산 모정탑길 초입 / 겨울 삼림욕을 즐기기 좋은 금강송 군락지
차옥순 여사가 기거했던 굴피 움막에는 돌을 날랐던 지게와 아픈 몸을 의지했던 지팡이, 홀로 군불을 때고 밥을 지어 먹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주민들과 왕래도 했다고 전한다. 움막 근처 돌탑 곳곳에는 검은 펜으로 글씨가 씌어 있는데 그간 도움 받은 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다.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었을 세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아로새긴 흔적이 애달프다.
돌아 나오는 길에 노추산 모정돌탑 공원에 잠시 앉았다 가면 좋겠다. 공원에 놓인 소원우체통에 엽서 한 장 띄워볼 일이다. 맞은편 솔숲에는 노추산 힐링캠프장(www.wecamper.net)도 마련되어 있다. 새단장이 끝나는 내년 4월부터 예약을 받는다.
차옥순 여사가 살았던 굴피 움막
[왼쪽/오른쪽]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돌탑길 / 원하는 날짜에 편지를 배달해주는 소원우체통
설산과 동해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안반데기
왔던 길을 되돌아 대기리마을을 지나면 안반데기 이정표가 보인다. 안반데기는 해발 1,200m에 자리한 고랭지 배추밭이다. 1960년대, 화전민들이 고루포기산 중턱의 척박한 땅을 일궈 배추를 심기 시작했다. 밭에서 골라낸 돌을 날라다 벽을 쌓고 전망대로 만든 곳이 ‘멍에전망대’다. ‘멍에’는 쟁기질을 하기 위해 소의 목에 거는 막대를 이른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슬금슬금 전망대로 오르는 길, 강릉 시가지와 동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길을 가다 돌아보면 백발 성성한 산줄기가 하염없이 뻗어 있다. 발왕산, 고루포기,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배추 농사가 한창인 여름이면 안반데기의 광활한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는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다. 수확철이 지나버린 겨울, 배추가 뽑혀 나간 땅에 한 폭의 수묵화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비경이 펼쳐진다.
[왼쪽/오른쪽]빈 밭에 머리 빗듯 쓸어내린 흙이 곱다. / 멍에전망대에 서면 동해 수평선이 펼쳐진다.
이 길은 강릉바우길의 마지막 구간인 ‘안반데기 운유길’에 포함된 코스이기도 하다. 운유(雲流). 구름이 흐르는 길이란다. 전망대에 오르면 산허리에 걸려 쉬어가는 구름을 눈높이에서 볼 수 있다. 구름도 쉬어가는 길에서 커피 한 잔이나 컵라면으로 추운 속을 달래보자. 주차장에 마련된 운유촌 카페는 전망도 좋다. 눈 쌓인 안반데기가 훤히 내다보이는 창밖 풍경이 장관이다. 카페 옆 화전민사료관에서 안반데기의 사계와 화전민들의 생활상이 담긴 사진도 감상할 수 있다.
강릉 시내로 나가는 길에 왕산면 커피커퍼 커피박물관(033-645-0592)에 들러 여정을 마무리짓는 것도 좋겠다. 대기리마을 체험객이라면 40% 할인권을 사용할 수 있다. 할인권은 대기리마을에서 미리 챙겨두자.
[왼쪽/오른쪽]희끗희끗 눈이 내려앉은 안반데기 / 운유촌 카페 창가 전망석. 감자빵, 감자전 등 주전부리도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