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근대 문학의 ‘장소들’,
그리고 지난날 우리가 꾸었던 ‘꿈’
욕망도 사상도 아득해진 지난 시대가
이야기꾼 김남일의 온기로 되살아난다
근대 문학의 흔적을 따라 걸으며 길어올린 『서울 이야기』
소설가 구보 씨가 돌아다니던 종로와 청계천, 조선인 징병을 외친 이광수가 살던 북악의 산자락. 교과서 속 수많은 작가들의 황홀한 꿈과 절박한 한숨이 빚어낸 우리 문학사와 식민지 ‘경성’의 풍경.
🏫 저자 소개
김남일
195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네덜란드어를 전공했고, 1983년 [우리 세대의 문학]에 단편 「배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천재토끼 차상문』, 『청년일기』, 『국경』,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청소년소설 『모래도시의 비밀』, 『골목이여, 안녕』, 인물평전 『안병무 평전』, 산문집 『책』 등이 있다. 제2회 아름다운 작가상, 제비꽃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2012년 권정생 창작기금을 받았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과 ‘한국-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아시아문화네트워크’ 책임연구원이다.
📜 목차
서울 이야기 ─ 한국 근대 문학 기행
1 창랑정은 노을에 물들고
2 서울, 신문명에 놀라다
3 북촌 장마
4 신문관, 최남선의 근대
5 한국이 사라진 날
6 서울로 가는 길
7 『무정』의 무대 서울
8 1919년 서울의 봄
9 문학의 봄
10 서울은 무덤이다
11 신여성, 서울에 나타나다
12 경복궁, 폐도廢都의 치욕과 분노
13 굶주린 서울
14 종로 네거리의 순이
15 남촌, 소시지의 거리
16 성북동의 한 상고주의자
17 이광수와 홍지동 산장
18 ‘대경성’의 산책자들
19 미쓰코시 백화점, 날개 그리고 이상
20 서울말과 표준말
21 채만식의 종로 산책
22 김남천과 야마토 아파트
23 죽첨정 대화숙의 이광수
24 서울의 별 헤는 밤
25 조선은행 앞 광장 분수대
26 서대문형무소에 간 앨리스
27 문학, 서울을 떠나다
28 1945년 8월 15일, 16일, 17일 그리고…
📖 책 속으로
이태준은 1930년대 중반에 쓴 장편 『성모』에서 지금으로선 꽤 낯선 교실의 풍경을 그려낸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철진이가 엄마에게 자기네 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아예 지리부도까지 펴놓고 침을 튀기는 것이었다.
“엄마? 우리 반에 글쎄 여기 이 제주도서 온 아이두 있구 또 나허구 같이 앉었는 아인 함경북도 온성서 온 아이야. 뭐 경상남도 진주, 마산, 부산서도 오구 평안북도 신의주, 그리구 저 강계서 온 아이두 있는데 걘 글쎄 자동차루, 이틀이나 나와서 차를 탄대…. 퍽 멀지, 엄마?”
지도를 거침없이 짚어가는 그 손가락이 퍽 부러울 뿐이다.
--- p.5
도쿄?엄밀한 의미에서는 ‘동경’이라는 기표?는 싫든 좋든 우리 근대 문학의 자궁 같은 곳이었다. 사실 우리의 근대는 수신사를 파견하던 시절 이후 도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근대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주요 작가들 역시 도쿄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가령 최남선이 처음 가서 보고 기겁한 도쿄는 서울에서 말 그대로 대롱으로만 보던 것하고는 전혀 딴판 세상이었다. … 아직 학생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이광수 역시 『소년』과 그에 이은 『청춘』의 주요 필진이었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처음 맺은 인연을 한 40년 좋이 이어간다. 그 인연의 절정 또한 도쿄를 빼고 말할 수 없다. 1944년 그들이 새삼 도쿄까지 건너가 나눈 대담의 기록이 실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조선을 대표하는 두 지성인은 도쿄에서 공부하는 조선의 청년 학도들을 향해 “조선이란 점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벗어나 “대동아의 중심이자 중심인물이 된다는 기백”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지면에서 그들은 처음 도쿄에 와 문학에 눈을 뜨던 시절부터 새삼 회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몇십 년을 ‘국어(일본어)’로 글을 써오긴 했으나 ‘외국인’으로서 흉내 내기가 가능할지 근본적으로 의문이라는 속내 또한 솔직히 드러낸다.
--- p.8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정동 언덕 위 러시아 공사관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록 산은 가장 높은 삼각산이 고작 80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도성 안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할 수 있다고 뽐낼 수 있는 도시란 그리 흔치 않다고도 덧붙였다. 그때가 1894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나, 우리 시대의 한 작가는 제가 사는 도시 서울에 대해 이렇게 썼다.
- 자기 몸에 새겨진 문신을 지우려 애쓰는 늙은 폭주족처럼, 서울은 필사적으로 근대의 기억을 지우고 있다.
--- p.24
성북동에서 아침에 성을 보며 양치질을 할 때, 저녁에 노을을 볼 때, 정원에서 꽃나무를 볼 때, 그리고 옛사람의 글과 그림을 보거나 그도 아니면 옛사람이 쓰던 막사발 하나라도 어찌 구해 문갑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볼 때, 상허는 더 이상 식민지인이 아니었다. 가람이 불러 벗들과 함께 난의 자태와 향을 즐긴 날에는 더더욱 옛 조선인 선비 혹은 묵객이었다. 성북동은 이렇게 서울에 있되 서울의 현실과는 어지간히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었다. 상허는 그 성북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 p.230
소설가 구보 씨는 자기에게 여행 경비가 있으면, 적어도 지금 자기는 거의 완전히 행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떠나온 뒤의 변한 도쿄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구보 씨는 어느 틈엔가 다시 ‘가난한 소설가와 가난한 시인’과 ‘그렇게도 구차한 내 나라’를 생각하고 마음이 어두워지게 마련이었다. 그는 이 사실만큼은 골수에 박히도록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러매, 식민지의 작가로서 구보 씨는 정확히 식민지를 산책했을 뿐이었다.
--- p.265
조선의용군 포로 김학철이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 복역 중 맥아더 사령부의 석방 명령서를 받아든 것은 10월 9일이었다. 서울에 나타난 것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더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때 그는 목발을 짚은 외다리였다. 총상 입은 다리를 형무소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결국 잘라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곧 어지러운 해방 조국에서도 독특한 이력을 지닌 소설가로 첫발을 뗄 터였다. 그의 머릿속엔 벌써 원산의 어린 시절과 서울로 와서 보성학교를 다니던 때,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보낸 파란만장한 세월이 무논의 개구리 떼처럼 왁자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느 것을 먼저 써야 할지 종잡는 것 자체가 힘들 정도였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것! 원산에서 발가벗고 물장난을 치던 소년 시절부터 그의 천성은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험한 투쟁의 길을 쓸 때라도 그의 펜 끝은 우울과 비장함보다는 반드시 손에 쥘 승리에 대한 유쾌한 희망을 훨씬 더 선호했다.
--- p.392
🖋 출판사 서평
한국 근대 문학의 영광과 좌절,
그 뒷모습을 숨김없이 찾아가는 우리 문학사의 내비게이션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공간들이 꿈결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도 버젓이 살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가볼 수 없는 한 세기 전 서울과 도쿄, 혹은 국경 아닌 국경으로 가로막혀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된 휴전선 이북의 산천. 소설가 김남일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이라는 담대한 기획으로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 4부작을 펴냈다. 『어제 그곳 오늘 여기』(2020)를 통해 아시아의 근대 문학 작품을 지도 삼아 서울과 도쿄, 교토와 오키나와, 사이공과 하노이, 상하이와 타이베이를 가로지른 데 이어, 이번에는 뚝심 있는 발걸음을 우리 땅으로 옮겨 오롯이 한국의 근대 문학에 집중했다. 한국 문학의 근대를 이룬 작가들이 미처 당혹감을 떨치지 못하던 시대, 그 시절 문학의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된 분단 이전의 우리 땅이 대장정의 출발지이자 목적지가 되었다.
우리 문학에 대한 관심과 애정,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그 어느 때보다 읽을거리가 많고 콘텐츠도 풍성한 시대, 그럼에도 우리의 독서는 심각하리만큼 서구 편향적이었다. 특히나 근대 문학에 관해서라면, 이는 누구도 부정하기가 어려운 사실이다. 40년 넘게 소설을 써온 저자 김남일은 “등단 이래 수많은 외국 작품들을 읽어왔으면서도, 정작 우리 문학은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것들 말고는 딱히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읽은 기억이 없다”고 반성한다. ‘한국 근대 문학 기행 4부작’을 기획하게 된 배경이다. 이 시리즈는 한국의 근대 문학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처음부터 딱딱한 문학사론의 틀을 배제하고 ‘문학 기행’이라는 형식을 채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전 문학 작품을 좌표 삼아 소설 속 도시와 촌락, 산과 들을 되짚으며 그 장면장면에 담긴 ‘사람’과 ‘삶’을 들여다보기로 작정한 만큼, 이 방대한 ‘한국 근대 문학 기행’ 역시 소설처럼 읽는 가운데서 저절로 한국 문학사의 큰 줄기를 그릴 수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의도한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문학 작품 속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교과서에서 보고 들은 우리 문학사의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 들은 일제 식민 치하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넓은 한반도를 누볐다. 언어와 정신에 대한 억압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저 남쪽에서 기차를 타고 두만강, 압록강을 지나 백두산에 올랐고, 앞질러 천지개벽의 문명 세계를 경험한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꿈과 불안에 치이며 도쿄를 배회했다. 저자 김남일이 근대기 선배 작가들의 행적을 뒤따르며 그들의 작품에 몰입한 독자였던 것처럼 『서울 이야기』, 『평안도 이야기』, 『함경도 이야기』, 『도쿄 이야기』의 책장을 넘기는 독자들은 다시 그 뒤를 이어 한국 근대 문학의 현장을 누빈다.
김남일은 오래전 작가들이 풀어놓은 글줄을 속속들이 곱씹는다. 그러고는 주먹만 한 눈송이가 하늘을 채우던 북방의 눈 내리던 밤 풍경부터, 함흥과 제주에서 온 유학생이 뒤섞인 서울의 교실 풍경까지 생생하게 우리 눈앞으로 옮겨놓는다. 반 세기 넘는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은 저자는 고정된 풍경화로 그칠 뻔한 장면들을 유려하게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되살려냈다.
지도에서 사라진 길, 마음마저 멀어져 쉬이 갈 수 없는 곳,
그 길을 안내하는 소설가 김남일이 글로 그린 근대 풍경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지이자 보고인 서울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경성’에서 개화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작가들은 소설과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언어로 세상을 그렸다. 당대의 작가들이 보여준 생활상과 시대정신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도에서 사라진 북한 지역까지 넘나들며 ‘한국 문학의 영토’가 어디까지 뻗어 있었는지를 되새기게 해준다. 분단의 세월이 길어져 ‘통일’에 대한 회의는 물론 그 의미조차 무용해지려는 때, 김소월의 영변 약산과 백석의 신의주 유동, 또 이용악의 눈앞에서 코끼리처럼 말이 없던 두만강은 어느새 활자의 박제가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저자 김남일은 이렇게 납작해진 글귀들을 풍성하게 들춰 돋운다. 행간 가득 흐르던 작가들의 호흡을 지금 우리의 호흡으로 되살려내 박동케 한다. 바다 건너 도쿄와 국경 너머 중국, 러시아까지 한달음에 오르내리면서도 지치지 않는다. 그 ‘장소들’을 찾는 발길이 바쁘지만 숨가쁘지 않고, 그곳 ‘사람들’에 머무는 눈길은 더딜수록 두근거린다. 상투어가 되다시피한 ‘길 위의 인문학’이야말로 은유가 아닌 말뜻 그대로, 김남일의 4부작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