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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열매(1)
갈 5:16-2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16-26 / [성령의 열매와 육신의 일]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우리는 성령께서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악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 살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본성의 욕망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두 힘은 서로 우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 틈에 끼여서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18) 그러나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더 이상 억지로 율법에 복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19) 여러분이 본성이 시키는 대로 육체의 욕망에 따라 살면 여러분의 생활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곧 더러운 생각, 육신의 쾌락을 찾는 마음, 20) 우상숭배, 마술, 헐뜯음과 싸움, 질투와 분노, 언제나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 불평과 비판적인 태도, 자기의 작은 당파 외에는 모두 나쁜 것으로 인정하는 배타주의와 거기서 나오는 잘못된 교설 21) 시기, 살인,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따위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한번 더 당부합니다. 누구든지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22)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4)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26) 그렇게 하면 명예와 인기를 얻고자 질투하거나 악한 감정을 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설 교 >
십자가에 나를 못 박은 사람
마 16:16-17, 21-24 갈 5:24 / 김서년 목사(벧엘교회)
‘크리스찬이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요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바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주요 구세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고 다시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고백은 우리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시면서 아주 기뻐하며 칭찬해 주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에 아주 기뻐하시며 베드로를 축복하시고, 그리고는 이전까지는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스스로 당할 고난에 대해서 비로소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은 “이 때로부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이런 고백을 하게끔 되었으니 그때로부터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한 베드로가, 이번에는 당치도 않다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돌이키시며 정색을 하고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가리켜서 분명히 ‘사탄아’ 하셨는데, 어째서 그 귀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가리켜서 이렇게 ‘사탄아’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그렇게 훌륭한 고백을 하였지만, 그러나 입으로 한 그 고백만으로는 이렇게 “사탄아” 하고 불릴 수도 있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우려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입으로의 고백만으로는 우리도 같은 처지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곧 이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참으로 귀중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는 자격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진정한 조건을,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못할 땐 누구든지 ‘사탄’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 말씀을 보면 ‘자기’라는 말이 두 번이요, 주님 자신을 지칭하는 ‘나’가 한 번입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고, 둘째,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에서 무엇이 문제인가?’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도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베드로의 고백에서 무엇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름이 아닌 나를 부인하지도 않고, 나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로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절대조건입니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 내 지식, 내 능력, 내 재주, 나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 생각, 내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 의견만을 내세우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있습니까? 그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또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기를 부인하고 계십니까?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들 중에 보면, 한두 번 어쩌다 사정이 있어서 늦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어디서 공짜로 배급을 준다고 할 때도 늦을 것입니까? 영화구경을 간다고 하면 5분이 늦을까봐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는 데는 준비와 서두름이 없이 그냥 느긋하다면,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자기 부정이 이뤄지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 십자가를 철저하게 지지 못했기 때문이요, 큰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신앙생활이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다른 일이 좀 생기면 오늘만 가지 말까, 매일 가야만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 하루 안가면 어떠랴. 이리저리 망설이다보니 벌써 시간이 지나가고 그래서 또 늦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일들이 진정으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두 번째로 같이 읽으신 에베소서 말씀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예수님의 말씀에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바른 응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크리스찬이란 말이지요. 헬라어 성경 원어로는 ‘오이 데 투 크리스투 예수’라고 읽는데,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히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을 뜻합니다. ‘소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할 때 건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명함에 쓰여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름 석 자와 직장명과 직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 직장에 속한 사람이다 하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니까 ‘소속’을 밝히는 것이 바로 나에 대한 증명이 되는 것이지요.
명함에 나는 돈 얼마를 가졌다고 써넣는 사람이 있습니까?
명함에 ‘나는 집이 몇 채가 됩니다’ 하고 써넣은 사람도 없습니다. 명함에 쓰는 것은 오직 ‘소속’뿐입니다.
우리 사람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첫째가 소유요, 둘째가 능력이요, 셋째가 소속입니다. 이 모두가 다 중요한 것들이지만, 그러고 보면 그 중에서도 ‘소속’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소속이 하나씩은 다 있습니다. 바로 성씨(姓氏)입니다. 김 씨면 김 씨 집안에 속한 사람을 뜻하고, 박 씨면 박 씨 가문에 속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 가문이라는 것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게 되는 소속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중요한 소속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소속’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소속은 최후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 통하는 소속입니다. 그러고 보면 가장 중요한 소속이지 않습니까? 크리스찬—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께 속한 자!!
모름지기 사람은 그의 소속에 따라 평가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임종하게 되어 세상을 떠날 때에 무엇을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공로를 내놓을 것입니까? 나의 업적을 내놓을 것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하는 이것밖에 내놓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소속에 대한 자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각하거나, 예배드리면서도 뒷자리나 구석자리에 앉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의 소속은 그리스도입니다!!
소속에 대한 얘기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을 보세요. 축구를 하든 무슨 경기를 하든 시합에서 이기면 애국가가 울려 퍼집니다. 그때에 울지 않는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다 애국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내가 속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직접 경기에 출전하여 이긴 것은 아니지만, 내가 속한 나라가 이겼으므로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 바로 이것이 소속감입니다. 우리도 한국 사람이다 하는 소속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고 하는 소속감을 늘 확인해야 됩니다. 이 가장 중요한 소속 앞에,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다 소용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과감히 세상적인 정욕과 탐심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원칙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가치와 목적과 의미에 있어서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옛날에 속하였던 여하한 관계들도 다 끊어낸 사람입니다. 근본적으로 끊어졌습니다. 옛것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여기에 응답하여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십자가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흔히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듣게도 되는데, 여러분,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는 몇 가지 원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는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고 도망할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면 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부러 침묵하고, 변명 없이 십자가를 질 때에, 그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에 좀 고생이 따른다고 해서 자식을 십자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세상에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을 잘못하여 남편에게 시달려도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지못해서 지는 것입니다. 도망갈 수 없어서 억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가 못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피할 수도 있고 안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안 질 수 있는 것을 내가 자원하고 선택해서 기꺼이 질 때에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스럽다고 다 십자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적이라는 의미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목적적인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확실한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었을 때, 그 의미가 자신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고,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추수의 날을 고대하면서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에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듯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어물거리다가 그만 말려들었다면, 이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무슨 특별한 뜻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잘못해서 지게 된 고통을 가리켜 십자가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죽음입니다. ―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전에 귀하에 여기든 것들이 다 죽어버렸다’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기억도 없고, 감각도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치도 없고, 효율도 없습니다. 물론 매력도 없습니다. 시체에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또한 관심도 없습니다. 모든 관심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여러해 전입니다만 우리 교회에서 성지순례를 할 때,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가서 거기 전시되어 있는 미이라들을 보았습니다. 어린아이 미이라, 어른 미이라들이 쭉 늘어져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중간에 절개하여 전시된 것이 있었습니다. 좀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이 꼭 북어 말려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차라리 땅에 묻어 썩어버렸든지 불에 태워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썩지 않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며 야단 법석거렸겠지만 차라리 썩은 것만도 못합니다. 남에게 구경거리나 되고 있지 않습니까?
옛날 왕들이 참 어리석었습니다. 미이라로 만들어 썩지 않게 하면 죽지 않는 것입니까? 안 죽기는 왜 안 죽습니까?
왕의 죽음이든 거지의 죽음이든 죽음은 죽음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거기에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완전하게 부정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미이라와 같은 것들에 연연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라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는 세 가지의 원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만,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십자가의 죽음은 능동적이란 사실입니다.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지금 숨을 쉬고 있어도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 바울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목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한마디도 말해서 철저하게 죽어야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법적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이미 타락한 몸이며 잘못된 심령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깨끗하게 죽어야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것을 여러분은 들은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을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겪은 바를 간증합니다. 그렇게도 못된 사람이었는데, 완전히 죽어져서 은혜를 받았다는 체험을 나름대로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자기가 죽는 것을 체험합니다. 자기가 죽는 것――이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죽습니다. 내가 죽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죽도록 만드십니다. 완전히 죽어져서 백기를 들어야, 그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죽는 체험’을 아직 못한 사람이라면 ‘사는 체험’은 더더욱 못했을 것입니다. 그 감격스러운 체험을 말이지요.
죽는 체험이 있고야 사는 체험이 있습니다. 내가 죽은 체험이 있고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없으면, 성경을 읽어도 철학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이치가 이렇구나’ 하고 아는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도 제대로 못하고 찬송도 크게 못 부릅니다. 벅찬 감격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자기가 철저하게 죽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 자유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 여기에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중에 흔히 가지게 되는 문제점이 바로 이점인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철저하게 십자가에 죽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죽는 중에 다 죽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버리는 중에 다 버리지를 못한 것입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잔재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철저히 죽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모세를 보십시오. 광야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귀한 체험을 하고서는, 이제 십계명을 받아서 산에서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 동안을 기다리지 못해서 우상을 만들고 절하고 있는 백성들을 보고서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돌판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으로 그렇게 때려 부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주 철저하게 죽은 줄 알았는데, 욱 하고 올라오는 기운이 마구 폭발합니다. 애굽사람을 죽였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내던지면 어떡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는 아직 덜 죽은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면서 반석을 탕탕하고 두 번씩이나 내리 친 것도 그렇습니다. 모세가, 그 옛날의 모세가, 아직 덜 죽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부인할 지라도 자기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장담하였는데, 죽음의 위험이 닥치자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말이지요.
아직도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목숨을 바치고 사는 사람이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형식적으로, 또 법적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세례교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죽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베드로처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정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테마신’이라고 하는데, 라틴어로는 ‘파시온’입니다. 여기서 영어단어 passion이란 말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정욕’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정열’입니다.
그 마음에 정열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정열입니다. 이 정열이 죽지 않아 문제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이것이 늘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다음 ‘탐심’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투미아이스’인데, 이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 일에 대한 욕심, 지위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 욕심에는 참으로 종류가 많지 않습니까? 이 모든 욕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사업에 실패하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지식과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셋째는, 이것이 가장 큰 요인인데, 욕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 왜 실패하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나친 욕심이 원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습니다. 정욕과 욕심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완전히 죽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뜻을 하나님께 둔다고 말로는 하면서 아직도 정욕과 욕심은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셔서 내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여러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욕심이 문제라는 것을 지시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바둥바둥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동안은 참 그리스도인은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붙들고 고집하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야 포기합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조금 더 일지기 체험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욕과 욕심까지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 박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간증입니다. 그분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그 중 한 아들이 아주 똑똑하여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MIT에 유학하여 학위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높이겠구나 하고 기대가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 저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겠습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기가 막혀 소리쳤습니다. “야, 이놈아, 너 정신 나갔구나, 너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다 어찌하고 왜 하필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냐? 너 같이 머리 좋은 사람이”
며칠 후 이 아들이 한국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향해서 대뜸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장로님, 장로님이 왜 그러십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이 장로님의 가슴에 쾅 하고 부딪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큰 실수를 했습니다. 아들 가운데에 가장 똑똑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데 ‘똑똑한 녀석이 목사가 뭐냐’ 라고 했으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하고 가슴깊이 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비록 장로였지만, 정욕과 욕심을 아직 십자가에 못 박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욕과 욕심 ― 십자가에 깨끗이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럴 때에야 참으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매일같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똑바로 바라보십시다.
십자가! ― 거기에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나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리고 나의 죄가 거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됩니다. 그때에 나는 온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죽을 때에 자유하게 됨을 체험하며, 마침내 부활의 참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귀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을 것 3가지
갈 5:24 / 이한규 목사
수시로 40일 금식기도를 해도 불평과 원망과 비판과 시기가 많다면 그것은 성령 충만이 아닌 자기 충만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예언한다면서 영적인 우월의식을 가지고 남을 우습게 여긴다면 그것도 역시 성령 충만이 아닌 자기 충만의 모습이다.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신기한 능력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령 충만의 증거가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면 3가지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한다. 그 3가지가 무엇인가?
1. 육체
본문에 언급된 ‘육체’와 비슷한 성경적인 용어는 옛 사람 혹은 겉 사람이란 용어다. 옛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있는 존재이고 새 사람은 거듭남으로 있게 된 존재다. 옛 사람은 죄를 짓기 원하고 새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성도에게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싸움이 있다. 그 싸움에서 옛 사람(육체)를 죽이고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라.
어느 날 해외 빈민촌에서 선교와 구제 사역을 하는 신실한 선교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어떻게 빈민촌에서 사랑으로 영혼을 살리는 사역을 하게 되었나요?” 그가 대답했다. “내 안에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히틀러가 존재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문서답 같지만 깊은 진리가 담긴 역설적인 대답이다. 사람 내면에 존재하는 육체적인 옛 사람을 못 박지 않으면 나는 어느 누구보다 잔인한 나가 될 수 있다.
2. 정욕
정욕이 나쁜 것인가? 정욕의 원천인 정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이 바른 질서 안에서 표출되면 일을 이루게 하고 인간관계를 깊게 한다. 그러나 정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 정 때문에 소중한 일을 그르친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정 때문에 자녀 교육에 실패할 때가 많다. 친구의 정 때문에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군중심리에 휩쓸릴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의지적인 사랑이다.
꿀벌들이 여왕벌을 따라 높이 비상하듯이 성도의 사랑은 감각적인 차원에서 의지적인 차원으로 비상할 때 참된 사랑이 이뤄진다. 사랑의 비상이 이뤄지려면 날개를 열심히 파닥거리는 엄청난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감각적인 사랑은 쉽게 흔들리지만 의지적인 사랑은 잘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외모와 상관없이 상대를 누구보다 더 아름답게 여긴다. 그처럼 감각적인 정욕 이상의 의지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은 점차 아름다워진다.
3. 탐심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은 나눔과 헌신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나의 삶이 유리 뒷면에 욕심이 발라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맑고 투명한 유리 같이 되게 하라. 그래서 거울 앞에 선 사람처럼 나만 쳐다보지 말고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창문 너머를 바라보라. 낭비와 헌신의 차이를 구분하려면 “그 드림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그 드림이 거룩한 일을 위한 드림인가?”를 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드리는 낭비는 최상의 헌신이 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높여 있다. 쾌락의 길과 헌신의 길이다. 어느 길을 따라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쾌락에는 늘 쾌락 이상의 강도를 가진 후유증이 뒤따른다. 즉 쾌락이 크고 짜릿할수록 정신적인 고통이나 심리적인 공허 같은 후유증도 크다. 반면에 헌신에는 늘 헌신 이상의 축복과 열매가 따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자기 것을 드리는 헌신적인 삶이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이다.
십자가에 대한 오해
막 8:27-38, 갈 5:24-26 / 이동주 목사
미국의 어느 연구소에서 2,500명을 상대로 "당신은 왜 실패했습니까?"라고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실패의 원인으로 꼽힌 가장 지배적인 대답으로 "결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단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한 훈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있고,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처음부터가 결단이었습니다. '세상의 안일함과 영화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배고프지만 진리를 따라 살 것인가?', '넓은 길을 갈 것인가? 좁은 길을 갈 것인가?', ‘세상의 영광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것인가?’를 결단해야 하는 것이 바로 광야의 40일 금식 기간에 받은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역시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십자가를 질 것인가 피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기도가 겟세마네의 피땀 흘리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단은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버리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결단이 예수님 한 분만의 결단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과 똑같은 결단을 내리고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자들의 부류를 크게 둘로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는 십자가에 죽게 됨으로 실패한 자라고 말하는 부류입니다. 특히 이단들이 그러한 주장을 합니다. 교묘히 교리를 만들어 예수님 자리에 교주가 그 자리에 들어가 자기가 구세주라고 속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천지 이만희입니다.
수도 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교리를 바꾸는 신천지의 교리대로라면 이만희 총회장은 떠나가지 않고 영원히 신천지 인들과 함께 할 다른 보혜사요, 성부, 성자, 성령이 거할 성전 된 유일한 육체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좌정할 육계의 보좌요, 이 역사를 그의 손으로 끝낼 스룹바벨과 같은 자요, 요한계시록 2~3장과 12장에서 보좌에 앉아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이며, 성령이신 예수님의 유일한 신부요, 영생할 수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나눠줘 영생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이긴 자라고 사기를 칩니다. 머지않아 곧 죽게 될 그가 죽기 전에 또 어떻게 교리를 바꾸어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속이게 될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이런 이단자들은 처음부터 속이는 자들이요, 도적이요, 강도들이요, 살인자들이요, 사단의 하수인입니다.
성도들이 십자가를 바로 알면 예수님만 높이고, 사랑하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자들이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43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3년간의 노력 끝에 초본을 완성하였습니다.
초본을 완성한 후 그림이 어떤지 가까운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 그림이 어떤가?" 친구가 그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보더니 "참 좋은 그림이다고 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린 잔을 가리키며 이 잔이 너무 인상적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실적일 수가 있느냐"고 감탄하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다빈치는 안색이 변하여 붓 통에서 붓을 꺼내더니 그 잔을 싹 지워버렸습니다. 놀란 친구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다빈치가 대답하기를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이 더 드러나서는 안 되네. 이 그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하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나의 죄를 담당 하시고,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님만이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확증 하셨기에 영생의 소망 가운데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만 높이며 사는 자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담당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 은총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기적인 신앙인이 되어 자기중심의 신앙을 가지고 희생이나 섬김을 외면하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옛사람이 죽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또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자들은 신앙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외면하거나, 신앙을 버리고 도망치는 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아니라, 넓은 문, 넓은 길로 가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라기보다 세상에 속하여 살기 쉽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십자가를 오해하는 자들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27절) 그 때 제자들은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28절)’ 그 때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선생님이 그런 일을 당하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32절) 그 때 예수님은 무어라 하셨습니까? 그래 고맙구나! 역시 너희들은 내 제자답구나. 너희들 밖에 없다고 하셨나요. 주님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훌륭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복 되다 하시고 칭찬 하셨지만,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왜 꾸짖었을까요? 십자가가 사람의 입장에서는 싫고 부담 되는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만 죄를 씻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데 그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중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서신서 본문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욕심으로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먼저, 죽음에 대한 연합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세례 역시 옛사람의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6:3-4에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골2:12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했습니다. 우리는 갈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아니하고 단호히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자가 되어 성결한 삶을 살기를 힘씁니다.
다음에, 주님과 연합하여 삽니다. 사도 바울은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주님이 비유로 말씀 하신 것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자라고 고백하며 늘 주님 안에서 사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연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삶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부활에도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는데,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다가 영광스런 부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늘 주님과 연합하여 살다가 성령 안에서 영광스런 부활의 소망 중에 참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그리스도인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서 본문 막8:34-35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 은총을 받은 자답게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주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고, 상급과 면류관 받는 영광스런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대제사장이 보낸 자들에 의해 붙잡혀 가실 때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베드로가 멀찍이 뒤따라 가다가 추위 때문에 모닥불 곁에 왔다가 엉겁결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부끄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을 때 박해를 당하고, 옥에 갇히며, 죽음을 당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주님처럼 담대히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다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가능합니다. 내 힘과 내 의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일랜드 북방에 가면 봄철에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치고 새끼를 키우며 산다고 합니다. 그러다 늦가을이 오면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데 어미들은 새끼들이 다칠 새라 둥지가 날아가지 못하게, 바람에 날아오는 흙덩이에 맞지 않게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런데 이때 끝까지 버티는 새가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내와 새끼들을 움켜쥐고 양 날개를 크게 벌리며 바람에 몸을 맡겨버리는 새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바람에 몸을 맡기며 날아갑니다. 얼마를 날아가다 떨어지게 되고, 정신 차려 깨어보면 포근한 잔디 위에 누워있게 됩니다. 아내와 새끼들도 함께 바람을 타고 살기 좋은 안전한 곳으로 온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산등성이에서 바람을 거스르며 버티던 새들은 자기 힘과 꾀를 써서 싸워보지만, 닥쳐온 겨울의 추위 속에 그만 얼어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며 내 힘과 내 지혜로 신앙생활 하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지 못하고,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새와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를 받는 자는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는 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내 몫의 십자가 지고 주님 십자가 발자취 따르다가 주와 함께 영광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두 본문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대한 오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아멘.
탐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갈 5:24 / 조용기 목사
어떤 개인이나 국가도 탐욕에 빠지면 종국적으로 망하고 맙니다. 옛날 황해도의 어떤 금광에서 금을 캐어 서울에 와서 팔려고 금괴를 갖고 배를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천부두 가까이 와서 풍랑을 만나 그만 배가 파선을 했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나가는데 금괴를 가진 이 사람은 금을 버리고 나올 수가 없어서 그 금을 모두 허리에 찼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물속에 뛰어들었는데 다시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금의 무게가 그를 물에 가라앉게 만든 것입니다. 탐욕과 욕심은 꼭 그와 같습니다. 성경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욕심은 마음의 지혜와 총명을 흐리게 하여 옳은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 즉 죄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욕심을 이루면 그 결과는 파탄입니다.
1. 아담의 타락은 탐욕의 소산
아담의 타락은 바로 욕심의 소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름다운 낙원을 만들어 놓으시고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것에 조금도 지장이 없게 만드셨습니다.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와서 그들에게 탐욕을 넣어 주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분수대로 살아야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분수를 뛰어넘는 탐욕인 것입니다. 탐욕이 들어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타락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그 후손들은 죄악과 마귀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에게 분수를 뛰어넘는 일을 행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인 사울은 키도 장대하고 인물도 잘나고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해서 들어올 때 아말렉이 그들을 공격해서 르비딤에서 거의 점멸당할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억하시고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유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짐승까지라도 다 멸망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울 왕은 군대를 동원해 아말렉을 진멸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5장 17절로 19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왕을 꾸짖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
사울 왕은 아말렉을 점령한 후 양과 염소와 소를 보니 욕심이 나서 그것들을 탈취했습니다.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꾸짖음에 사울 왕은 “이 양떼나 소떼는 너무나 살찌고 기름지고 좋기 때문에 백성들이 당신의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죽이지 말고 살려 오자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꾸짖으실 때 변명하면 안됩니다. 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변명하면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래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그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게 된 것입니다. 탐욕이 왕의 자리를 잃게 만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짓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죄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 결국에는 파멸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왕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참으로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한평생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이 다윗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는 언제나 다윗을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존경하고 그 이름을 높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역시 마음에 탐욕을 품자 그 결과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저녁 늦게 일어난 다윗 왕이 왕궁 위를 거닐다가 목욕하는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탐욕이 생겼습니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니 일선에 가서 싸우는 자기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아 버리고 우리아의 아내를 데려다가 간음했습니다. 얼마 후 우리아의 아내가 잉태했고 그 사실을 다윗에게 고하니 다윗이 이것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아를 최전방에서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무엘하 11장 2절로 5절에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꾸짖은 것을 보십시오. 사무엘하 12장 8절로 12절에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다윗의 집안에 우환이 떠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인 다윗왕을 왕궁에서 쫓아내고 계모인 아버지의 아내들을 백주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고 그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부정한 길이 아닙니까?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욕심이 파멸시킨 일들을 처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탐욕을 통해서 아담도 타락시키고 사울왕도 왕권을 잃게 하고 다윗도 처참하게 심판을 받게 한 마귀는 똑같은 탐욕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탐욕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마음속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욕심이 없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욕심을 버리면 마귀가 우리에게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욕심 때문에 마귀가 자꾸 부정한 길, 죄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2. 탐욕이 통하지 않는 예수님
예수님이 40주 40야를 금식하시고 나올 때 마귀가 와서 유혹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사용해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예수님은 말씀으로 살것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고 단호하게 부인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목의 정욕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5∼7) 큰 성전의 탑 위에 예수님을 데리고 갔는데 밑에는 예배 드리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뛰어내려서 발에 돌이 부딪히지 않고 성큼 내리면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고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나는 명예를 얻으려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을 가지고 시험을 했습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8∼11)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세상 부귀영화를 다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하면 모두 주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예수 안 믿는 일본은 저렇게 부귀, 영화, 공명을 누리고 잘사느냐? 중국 좀 봐라.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세계 경제 7대국으로 발전하지 않느냐? 왜 예수도 안 믿는 데 그렇게 되느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세상 권세를 가진 마귀를 따라가면 부귀, 영화를 얻습니다. 이 세상 부귀, 영화는 원래 아담의 것이었는데 아담이 마귀에게 넘겨주었으므로 마귀에게 절하는 자는 세상의 부귀, 영화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 마귀가 주지 못하는 영생복락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속에 육신의 정욕도 안목의 정욕도 이 세상의 자랑도 없었습니다. 욕심이 없으니까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7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빈 마음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비워 버린 마음이기 때문에 마귀가 그 마음속에 죄악의 씨를 심을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비워 버리면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비워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 빈 곳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천국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주님 중심으로 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하게 해주시고 영혼의 구원 천국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우리가 탐욕을 이기려면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에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욕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라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을 이기려면 우리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교육할 때 집안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만 있으면 안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잠언 3장 7절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악을 떠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를 엄히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잠언 14장 2절에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패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하나님의 법을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장 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악이 됩니다. 집안에도 어린아이가 아버지, 어머니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행합니다. 집안을 온통 무질서하게 만들어 놓아도 꾸짖는 사람이 없으니 두려운 사람이 없습니다. 방자히 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두려워하면 자녀의 행동이 금방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선을 베푸시지만 우리가 잘못할 때 우리를 꾸짖으시고 채찍질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마어마하게 징계하시고 채찍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알아야 악에서 멀리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악을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말씀이 수술 도구가 되어서 우리 속에서 욕심과 악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 정결케 하는 것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1절로 102절, 133절에 보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행보를 지키시고 우리 발에 등이 되고 빛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마귀의 유혹과 계략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탐욕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돌아서서 주님의 길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로 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탐심과 욕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단호하게 대적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와서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살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는 모습이 준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끝임없이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어느날 사람들이 없을 때 요셉이 안채에 사무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이를 발견한 보디발의 아내가 잠옷 바람으로 뛰어나와서 요셉을 끌어안았습니다. 요셉은 단호하게 거부하고 잡힌 옷이 그냥 벗겨졌지만 즉시로 도망을 쳤습니다. 요셉은 단호한 결단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단호하게 뿌리쳤습니다. 그래서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3년 동안 있었지만 바로 왕을 통해서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을 보십시오. 김유신도 청년시절에는 한동안 기생집에 출입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교훈과 결심을 통해 기생집 출입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루는 고된 훈련을 마치고 말 위에서 그만 잠이 들었는데 말은 예전의 버릇대로 기생집으로 갔습니다. 잠에서 깬 그가 아름다운 기생을 따라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김유신은 단호했습니다. 칼을 뽑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말의 목을 쳤습니다. 그러한 결단을 가졌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유혹을 물리칠 때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된 분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다니는 골목길이 바로 술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는 결심을 하고 직장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 술집 없는 골목으로 발길을 돌이켰고 그때로부터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혹을 이기려면 우리 마음속에 단호한 결심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단번에 따먹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유혹을 한 것입니다. “이 과일 좀 보세요. 얼마나 좋습니까? 색깔도 좋고 아름답고…”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매일같이 가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탐욕이 들어왔습니다. 유혹받을 장소에 가서 자꾸 그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끌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학교 주변에 술집이나 비디오방을 없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등하교길에 학생들이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혹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집을 세 번이나 옮기지 않았습니까? 묘지 곁에 있으니까 밤낮 바라보는 것이 장례식이어서 그 흉내를 내는 맹자를 보고 집을 옮겼는데 마침 시장통이었습니다. 이젠 장사하는 사람을 따라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이사를 했는데 서당 옆이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천자문을 열심히 외우더랍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이기려면 유혹을 피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4절로 16절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도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조그마한 일에 욕심을 가지면 그 욕심은 자꾸만 자랍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보면서 욕심이 생겼습니다. 한꺼번에 황금알을 갖고 싶어진 것입니다. 결국 거위의 배를 갈랐는데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10명 중에 4명은 복권 대박을 꿈꾼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언론사가 1천만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약 1백 20억에 달하는 복권에 당첨되어 5년이 지난 70명을 대상으로 행복지수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상과 달리 80퍼센트인 70명 중 56명이 당첨 이후 더 불행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집과 차를 바꾸면 좋았지만 결국 가정파탄이 일어났습니다. 돈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반면 복권 당첨 후 행복해졌다고 대답한 사람들 중 몇 명 안되는 이들은 당첨금의 대다수를 교회에 헌금하거나 사회단체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1억원을 사회사업에 쾌척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캐나다에서 가장 부자가 된 깁슨에게 기자가 그 비결을 묻자 “술 마시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고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않고 일하면 부자가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기자가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라고 하자 깁슨은 말하기를 “그렇지 다 알고 있지. 그러나 실천은 안한다고… 실천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소매치기 하던 한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어서 목사님과 만났습니다. 불쌍히 여겨서 전도를 하고 눈을 감고 안수기도를 하고 난 다음 눈을 떠보니까 팔목시계가 없어요. 숨이 넘어간 그 소매치기의 손에 팔목시계가 있더랍니다. 탐욕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욕심과 탐욕의 시험에 떨어져서 마귀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늘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0절로 41절에도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 즉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1장 34절로 36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유혹을 이기고 세상에 부정과 부패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님이 오시는 날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경은 성령에 대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을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도우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자꾸 가정싸움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공격과 방어만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공격하고 서로 욕하면 방어만 하려고 하지 그 중간에 화해하고 이해하고 타협할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형제간에나 성도간에도 그렇습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공격하든지 방어하려고만 하지 이해하고 동정하고 화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욕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화목하는 그러한 일을 하면 많은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고 많은 형제간의 싸움이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 도와주시기를 간구하면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탐욕이란 과일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습니다. 그 때문에 그것을 선전하는 마귀에게 넘어간 사람들은 끊임없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원어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입니다.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보고 활을 쏘는데 맞지 않고 옆으로 빗나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빗나가는 것입니다. 탐욕은 우리의 삶을 바른 길에서 빗나가게 만듭니다. 가시밭 엉겅퀴에 걸리고 천길 만길 벼랑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슬픔과 파멸을 보고 알면서도 사람들은 탐욕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탐욕이 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탐욕과 욕심만 저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분수대로 열심히 우리가 일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면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의와 평강과 희락,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탐욕은 처음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습니다. 그것에 굉장한 기쁨과 쾌락이 있는 줄 알지만 나중에 탐욕을 취하고 나면 쓰디 씁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낙원을 버리게 됩니다. 사울처럼 왕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윗처럼 자식에게 버림을 당하고 자식이 죽이려고 따라오는 비극적인 인생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지혜요, 총명입니다. 따라서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탐욕을 못박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성령의 도움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에 의한 생활
갈 5:24-26 / 이정익 목사
신앙인의 삶은 영적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성령의 인도와 안내와 돌봄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경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소망하고 사모하고 기다리며 목적삼고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내가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나와 함께 동행하며 나를 성령의 생각대로 인도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또 하나님이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나로 하여금 성령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요구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어디에서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성령은 나로 하여금 의롭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의 본성과 의지와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성령의 생각에 이끌려 살아가게 됩니다. 그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입고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 인정받는 삶이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지는 일입니다. 내가 의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의와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죄로부터 용서받고 구원받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구원받았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나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고 성결한 삶이 시작되고 의로운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집니까.
율법, 금욕, 행위가 아님
내가 주안에서 의롭게 되는 일은 금식하고 금욕하고 절제하고 절식하고 수도원에서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런 조건들로 의로워진다면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분들은 모두 의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부터 신앙 안에서 수도하고 금욕하고 고행하는 일은 있어 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개하기도 하고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 자신을 시험하는 일로 구원받아 보려는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또 봉사와 나눔과 수고를 해서 뭔가 이루려는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일로 구원받아 보려고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고 안식일이면 숨 막힐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무엇인가 신앙의 선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 안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나를 변화시키시고 의롭게 하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절제하고 금욕하고 채식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킨다고 해서 내가 구원받고 의로워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수도를 하다가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이렇게 산속에서 수도하고 명상하고 금욕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사람이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이렇게 수도하고 금욕하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흉내로도 아님
사람이 좋은 영적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절도 있는 습관을 가지고 거룩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고상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도 좋은 습관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로워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거룩함을 흉내는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함이나 성결은 흉내로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고 고무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고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감리교 부흥사였던 이용도라는 분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고전을 읽고 이제부터 나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모방하여 살겠다고 다짐하고 그때부터 검은 고무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지만 그렇게 흉내 낸다고 사람이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용도도 끝내 말년에 가서는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단들이 처음에 그렇게 거룩함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이단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거룩함을 흉내 낸다고 모두 거룩해지고 성결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안에서 의로워지는 일은 흉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비우고 내 안에 성령이 나를 온전히 변화시키도록 내 삶을 내 맡기는 삶
그래서 본문에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하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내가 주를 알고 결심하는 순간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때 나는 마음으로 죽고 입으로 시인하고 그 증거로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안에서 꿈틀대는 정욕도 탐심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는 내가 죽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사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할 때 그 순간 “나는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성령이 내안에 임재하십니다. 내 안에 충만하게 개입하시고 나를 주관하시고 나를 활용하십니다. 그때 신앙생활에 깊이가 있어지고 뜻이 나타나게 되고 내용이 만들어지고 헌신이 뒤따르고 순종의 동기가 주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받는 날 죽어야 합니다. 세례의 뜻이 죽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는 죽고 성령의 은혜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옛길을 버리고 또 옛 습관도 과감히 버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주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죽지 않으면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는 안수 받던 날 또 한 번 더 그렇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역자의 길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삶이 성결한 삶이고 신앙의 삶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때 그렇게 죽으면 목회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숫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신자들도 여러 층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그래도 목회자가 안수 받을 때 죽었으면 모든 문제들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죽지 않으면 목회하는 동안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선 그때 죽지 않으면 살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재리에 관심 쏟게 되고 또 속에서 자존심이 꿈틀거리게 되고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해서 더 편한 자리를 차지하려 하게 됩니다. 목사가 안수 받던 날 죽지 않으면 목회과정에서 그런 숫한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안수 받던 날 죽되 또 한 번 더 철저하게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오리다”하고 찬송할 수가 있고 목회에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죽으면 교회도 조용해집니다. 때로 교회가 시끄러운 것은 목회자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장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장로도 장립식 날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로노릇 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지도자입니다. 그것도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죽지 않으면 그 직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장로는 장립식 날 안수 받을 때 철저하게 죽어야 거기서 지도자다운 생각과 사고가 나오고 영적인 지도력이 나오고 자신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를 돌보고 신자를 돌볼 수 있는 능력도 나옵니다. 그래야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자꾸만 집사와 싸우고 자기이익을 챙기려 하고 온갖 인간적인 모습들이 다 나타나고 온갖 주장이 나타나서 불화를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권사도 마찬가지이고 집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임명받는 날 모두 죽어야 한다. 그러면 일등 집사 일등 권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비우는 삶입니다. 그때 성령이 나의 빈 마음을 채우시고 나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시고 인도하시고 활용하시는 것이고 그때 나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의로워지는 삶이고 부름 받은 삶이고 인도받는 삶이고 성결의 삶입니다. 그때 내가 욕망의 길로 가면 성령이 그 길을 막으십니다. 내 안에서 인간적인 욕망이 자꾸만 솟아 나와도 내안의 성령이 막아주시고 절제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성령의 돌보시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순종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조그만 자존심이 꿈틀거려 욕망을 이기지 못해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고 이웃을 원망하게 되고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한번 알아보십시요. 내가 지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려면 내가 지금 주안에서 죽었는가를 먼저 알아보면 됩니다. 내가 죽지 않았으면 성령의 전적인 인도를 받고 지배받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멋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좋은 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내가 불순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은 지금 내가 성령이 안내하시는 궤도에서 이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거듭나고 의로워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면 내가 성령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순종의 삶이 성령으로부터 인도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자신을 한번 측정해 보십시오. “지금 나의 삶에 주님이 얼마나 차지하고 계시는가”, “지금 내 관심과 내 마음과 내 생각 속에 주님이 얼마나 점령하고 계시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주님을 얼마나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것을 측정하는데 연애할 때를 한번 기준해서 생각해 보십시요. 연애를 할 때는 “늘 마음과 생각 속에 그대뿐”입니다. 그래서 방금 전화하고도 10분 후에 또 전화합니다. 방금 헤어져서 집에 들어왔는데 또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노래 있지 않습니까.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라는 노래 말입니다. 그런 증상이 왜 나타나난 것입니까. 그것은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온통 그대 생각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생활을 그대가 완전히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가 말하자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성령 충만한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령이 이끄시는 삶입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의 신앙의 뿌리가 그만큼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에 뿌리가 깊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의 삶에는 무엇보다도 뿌리가 깊고 튼튼해야 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복음이고 십자가이고 부활이고 재림이고 심판이고 천국을 신뢰하는 깊이 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에게 이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에 힘이 없고 용기가 없고 깊이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들 중에도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면 3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 어디에서 힘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고 위해서 죽을 믿음이 솟아 나오겠습니까. 신앙의 용기나 힘이나 동기는 순전히 신앙의 깊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이 뿌리가 참 중요합니다.
일본이 분재에 조예가 깊은 나라입니다. 분재는 나무의 중심 뿌리를 잘라내고 가느다란 실뿌리만 남겨두는 식물 재배법입니다. 그러면 나무가 중심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자라지를 못하고 수십 년이 지나도 밑동은 굵어지지만 키는 그대로 있는 것이 분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심 뿌리를 잘라내서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식물 학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잘 자라는 식물을 갖다가 중심뿌리를 잘라내서 아주 기형적으로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아주 잔인한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람도 때로 식물인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태가 생명의 뿌리가 잘린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는 핏줄과 신경만 살아있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사람이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식물인간입니다. 그래서 요즘 식물인간을 놓고 그 상태가 살아 있다고 보아야 하느냐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식물신앙이 있습니다. 식물신앙은 아는 것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아는 것이 대부분 잡 지식 입니다. 그래서 그 잡 지식 때문에 깊은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동안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사안에 따라 흔들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깊은 중심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신앙의 깊은 지식이 있다면 그렇게 가볍고 얕고 흔들리는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할 때에는 믿음의 깊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평소에는 내 믿음이 좋은 것 같았는데 어느 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니까 마구 흔들립니다. 그때 찾아오는 생각이 뭔가 하면 “그동안 내가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믿음의 허상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큰 병을 얻게 되고 사고를 당하여 재산을 잃고 명예를 잃게 되면 믿음은 간데없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 같은 절망감만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식물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분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신앙인의 삶은 주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 안에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비운 다음 나는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다시 태어나면 성령이 나를 지도하시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게 됩니다. 그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고 은혜의 삶이고 주를 따르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가장 힘이 있는 삶이고 용기와 능력이 주어지는 삶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은 그렇게 내 마음과 생각과 삶에 주님으로 가득 채워진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인도받는 삶입니다. 그때 주님의 인도는 나로 하여금 잘 조성된 하나님의 형상에 가장 가깝게 그리고 아주 성숙한 인격의 신앙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영적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
갈 5:25-6:5 / 김태복 목사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2박 3일 동안 교회창립 45주년 기념 전교인수련회가 은혜 가운데 잘 마쳤음을,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너무나 수고하신 모든 분들과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주신 교우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수련회에 참석한 인원은 장년 203명, 청년들과 교회학교 학생 157명 등, 총 360여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300-400명의 교인들이 대이동을 하여서 3일 동안 함께 유숙한다는 점이 교회 책임자로서는 제일 염려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염려는 인명사고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훈련받는 군인들도 사고가 생겨서 중상을 입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전혀 훈련받지 않은 이 많은 인원이 갑자기 먼 곳으로 이동하야 함께 공동 생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준비 기도를 많이 해왔고 교역자와 직원들에게도 신신당부한 것은 절대로 인명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련회가 진행되면서 저의 생각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나가서는 그동안 많은 분들이 너무나 준비를 잘 했고 진행도 아주 매끄럽게 잘하고 있을 뿐 아니라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모습을 감동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교역자들과 준비와 진행위원들 45명, 교회학교 교사 70명이 너무나 땀 흘려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야, 우리 교회가 이만큼 성숙해졌구나. 우리 교회는 일군들이 너무나 많구나.’라는 감동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빌렸던 남서울대학교 시설은, 한국에서 최고의 캠퍼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아름다운 숲 가운데 초대현식으로 건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끼마다 먹는 2,500자리 식사로는 너무나 좋은 식사들, 여자 교우들과 아이들은 좋은 기숙사에 유숙한 반면에, 남자들은 체육관에서 함께 유숙함으로 적지 않은 불편이 있었지만 사우나와 풀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시원한 에어컨 때문에 더운 줄 모르고 지냈습니다. 또한 장년들의 집회나 교회학교에는 모든 부서가 다른 방들을 사용할 수 있어서 활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동양의 대학교 중 체육관으로는 가장 크고 좋다는 상암체육관에서 오전 오후 시간에 시원한 실내에서 너무나 재미난 체육대회를 진행할 때에 선수들도 신났지만, 청백군으로 나누어 응원했던 교우들도 너무나 신나기도 했습니다. 정말 전교인수련회 장소로는 이 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용입니다. 처음에는 비용이 약 3,500만원이 들 것으로 예상되어 적지 않은 비용이 부족할 것 같이 우려가 많았습니다.
각 교회학교 수련회비와 참석자들의 회비, 그리고 찬조금을 모두 합쳐도 약 700만원이 부족하여 교회경상비에서 충당하기로 제직회에서 결정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적극 협력해 주셔서 찬조금도 800만원이 들어왔고 찬조물품도 많이 들어왔고 남서울대학교 측에서 당초 계약한 것도 100만 정도를 깎아 주시는 등 도움의 손길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므로 총지출 2,900만원 정도이고 수입도 거의 비슷하게 들어왔습니다.
남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도록 꼭 맞게 하나님이 채워주셨음에 너무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련회 참석했던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가고 오는 차편도 좋았고 식사는 물론이고 간식도 틈틈이 잘 먹었을 뿐 아니라 상품도 얼마나 푸짐했습니까? 그럼에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장소, 좋은 프로그램, 좋은 친교가 이루어졌을지라도 영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불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첫날밤이나 둘째 날 밤에 보면 모두가 은혜를 받음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평소 믿음이 약해 보이던 교우들이 환하고 기쁜 얼굴로 찬송을 부르고 뜨겁게 기도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교인수련회는 영육 간에 기쁨이 넘치는 기간이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대행사에 은혜로 채워주신 하나님과 헌신적으로 봉사하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일, 45주년 준비위원장이신 윤종삼 장로님은, 국가가 올림픽 같은 대행사를 치루고 나면 한 단계 성숙하는 것처럼 교회도 이런 대행사나 교회건축을 은혜롭게 마치고 나면 한 단계 성숙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만약 전교인수련회 같은 행사가 일회성으로 끝나고 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이번 수련회에서 받은 은혜와 주 안에서 하나 됨을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 교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숙해집니까?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합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에게 삼종지도(t(三從之道)라 하여,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라 살고, 늙어서는 자녀들을 따라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여자만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 남자들도 나라의 왕과 부모님과 스승에 따라 살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결과는 달라집니다. 좋은 친구를 따라 살면 좋은 열매를 맺지만, 나쁜 친구를 따라 살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요즈음 우리 남자들이 많이 보는 드라마가 ‘불멸의 이순신’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똑같은 조선 수군이지만, 이순신 장군을 따르면 23전 23승을 거두는 역사를 만나기만, 원균 장군을 따르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만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따라 살아야 합니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번 수련회 참석했던 교우들은 저녁 집회 때에 작던지 크던지 성령의 체험을 하신 줄 압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혹은 찬송을 부르는 중에, 혹은 통성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왜인지 어느 순간에는 뭉클한 감동이 생기거나 왜인지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마음에 평안이나 기쁨이 임하거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신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렇게 임하시기 시작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더 강하게 임하시고 더 큰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기 시작했지만 다시 예전처럼 여전히 세상을 따라 살면서 죄를 짓는다면 성령은 탄식하며 떠나십니다.
1. 그러면 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까?
여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성령을 따라 살아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이기 때문에 높은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낭떠러지기도 있고, 가시나무도 있고, 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완전한 세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불완전하게 세상을 창조해서가 아니라 죄를 범한 인생들이 여기 저기 독을 뿌리고 다니고, 또 세상을 병들게 만들고, 위험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자신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한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또 교통사고로 불구자가 된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러나 차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병도 무섭고, 도적도 무섭고, 사기꾼도 무섭습니다. 참말 안전하지 못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살면 마치 철도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정말 안전합니다. 때로 우리가 길을 잘못 들거나 실수하는 경우에도 가장 좋은 길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2)성령을 따라 살면 평안합니다.
먼저 마음이 평안합니다. 다음은 몸이 평안합니다. 다음은 가정이 평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평안합니다. 그러나 본능대로 살거나 육체대로 살면 순간적인 즐거움은 있으나 평안하지를 못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이 따라 다닙니다. 출 1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에 마라에서 물이 써서 고난을 당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가지를 던질 때에 단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 나뭇가지를 십자가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따라 살면 쓴물이 단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의 계획은 먼저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유럽 쪽으로 복음을 전하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성령의 지시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평탄한 길을 열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순종 결과, 척 선교지 빌립보에서 지독한 매를 맞았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터인데 이상하지요. 마음에 큰 평안이 임하면서 찬송이 솟구칩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산 자의 결과입니다.
(3)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자신을 이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자신을 정복해줍니다. 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게 하여 세상과 사탄을 이기게 해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첫 번째 단계가 무엇인지 압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자기 중심, 자기 자랑,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으로, 충성한다는 노릇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고 가정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난 예화를 읽어 보았습니다. 어느 날 남편의 종합건강 진단을 위해 부부가 함께 병원에 갔습니다.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그 아내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에 지금부터 내가 지시하는 사항을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남편은 죽게 될 것이오."
"첫째, 당신은 매일 아침 남편에게 맛깔스러운 건강식을 주어야 하고, 둘째, 당신은 매일 점심때마다 당신의 남편에게 균형 잡힌 식단을 짜서 주어야 하며, 셋째, 당신은 남편에게 집안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주는 잔소리를 삼가야하고, 넷째, 당신은 남편에게 찌증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잔심부름을 시키면 안 되며, 다섯째, 당신은 집안을 항상 깨끗하게 청소를 해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남편은 죽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 아내에게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당신이 곧 죽을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래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아마, 의사는 아내 때문에 남편이 병든 줄 알고 이런 지시를 했음에도 아내는 자기를 결코 죽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분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4)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고, 이웃과의 사이에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맺게 하고, 자신에게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인생이란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것이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5)성령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남에게 유익을 줍니다.
인생은 좋은 일, 선한 일, 유익한 일을 한다고 덤비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나쁜 일, 악한 일, 해로운 일만 합니다. 마치 어린애가 방을 소제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방을 어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안 됩니다.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남들에게도 유익을 주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6)성령을 따라 살면 행복합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도 그 방법을 몰라 항상 불행한 생활을 합니다. 참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따라 살아도 안 되고, 육체를 따라 살아도 안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성령을 따라 살 수가 있습니까?
2. 그러면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행하는 생활입니다.
성령으로 인도대로 행한다는 말은 성령 안에서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때는 나는 누구에게 복수하고 싶지만, 성령이 내 양심을 통해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때에 양심을 거역하고 복수하기 힘쓴다면 그것은 성령을 거역한 생활이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아닙니다. 어느 때는 주일날 놀려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내 양심을 통해서 주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 때 내 욕심을 누르고 주일을 지킨다면 그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2)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헛된 영광이란 실제가 없는, 단순히 환상적인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의 거품처럼 잠시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하늘의 뜬 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구하는 모든 영광은 다 헛됩니다. 세상에서 구하는 모든 영광도 다 헛됩니다. 사실 인간의 욕심은 지나고 나면 다 헛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질욕도, 명예욕도, 지식욕도 그 무엇 하나 헛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얻으려고 허덕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왜 그러면 인생은 이 헛된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장난을 하면서 땅에 금을 긋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부르면 다 버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 어른도 아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내 땅이요, 내 집이요, 내 자리요, 내 자식들이요.’라고 금을 긋고 살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빈손을 들고 갈 수 밖에 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존재하기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결과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를 쳐서 이기는 자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서로 격동하지 않습니다. 원문에 보면 격동한다는 말은 제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제한하고 인간들끼리도 서로 제한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결과를 자신까지 제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교만함으로 제한하고, 범죄 함으로 제한하고, 불신함으로 제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서로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투기는 육체의 열매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온유한 심정으로 남을 바로 잡아줍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항상 돌아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를 벗어나 남의 짐까지 나누어지는 자가 됩니다. 사랑은 바로 성령 받은 자의 첫 번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농대 정지웅 교수님의 간증입니다. 이 분은 집사람이 다녔던 춘천여고 영어선생님이었는데 실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눈이 나빴는지,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여학생들 40명이 나서서 눈을 빼서 드리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집사람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 그 때 눈을 빼주었다면 자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와 만났다면 여러분들은 외눈백이 사모님과 사역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그 분은 선천적 약시로 시력이 안경을 쓰고도 0.2이상을 넘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노트필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영어 독일어 교사생활도 해냈고 서울대학교에서의 석사학위 취득, 조교생활을 하다가 국립 필리핀대학에서 사회개발부문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그 약한 시력에 안구내출혈이 있어 실명의 위기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70년대 후반, 우연히 대학교수들만이 모여 성경 공부하는 그룹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을 학문적인 탐구심에서 연구하기 시작하다가 ‘욥기’를 배우면서 알 수 없는 커다란 힘에 이끌려 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될 것을 서원했습니다. 그토록 고집이 세고 무신론을 주장하던 그가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져 내린 것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기쁨과 평안, 성공만이 가득 했습니다.
더 나가서는 ‘한국농촌선교협의회’를 조직하고 뜻이 맞는 여러분과 함께 만든 이 협의회는 농촌선교에 협력할 기관들끼리 교류하고 교육 및 연구 활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자기 분야에 대해서는 길을 열어주셔서 더 왕성한 저술과 연구 활동을 하게 하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언제나 성령 안에서 변화 받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니고데모라는 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묻기를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주님은 답하시기를 요3:5에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1:5에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마3:11에서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려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1)성령으로 물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세례를 받을 때 원래는 물 속에 머리까지 담갔다가 나와야 합니다. 물 속에 잠긴다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속에서 나올 때에는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세례를 받을 때 너무나 형식적으로 받습니다.
어느 분은 세례 받고 나서 그 주일날 자기를 업신여겼다고 대판 싸웁니다. 아닙니다. 철저히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자만이 진정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2)성령 안에서 성령세례, 불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세례를 받음으로 영적인 어린 아이가 되었다면, 성령세례, 즉 불세례를 받음으로 권능 받아 영적인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성령의 은사,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 다른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돕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성령의 권능을 받기 전에는 제자들이 영적인 어린 아이 상태로 번번이 넘어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권능을 받은 후에는 어떠한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담대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지난번 수련회 때 은혜의 맛을, 이번 여름동안 더 열심히 기도하심으로 성령의 불을 받는 자들이 되심으로 영적으로 남을 돕는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신의 성숙을 위하여 투자하시오
갈 5:25 / 오정호 목사
청소년들의 46%가 "왕따"를 그 중 여학생들의 37.5%가 '학교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왕따'(왕따돌림)라는 신조어는 일본의 이지메(집단학대)에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왕따'란 학교나 직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도 있습니다. 개인이나 가정, 혹은 특정 집단이 목회자나 순장이나 순원들을 왕따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왕따를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았습니다. 주님은 닫혀진 문을 열기를 원하시며 안타깝게 두드리십니다(요한계시록 3:20).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자기와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왕따시키는 사람입니다. 신학자이며 행동주의자인 본회퍼는 "교회는 사귐으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정의했습니다. 성도들의 사귐 가운데 주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공동체내에서 서로 기도제목과 형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눌 때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혼자 신앙생활하겠다는 것은 교회와 성도를 왕따시키는 성경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신앙의 중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결코 심한 진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의 집단과는 다릅니다. 본문은 믿는 자들과 세상사람들과의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서 세가지를 이야기합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체험하는 데서 다릅니다.(16,17절).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과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자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의 본성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육체의 죄성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16절). 당신은 누구를 따라 삶을 진행합니까?
2. 명예와 인기와 성공에 접근하는 과정과 목적이 다릅니다(26절).
세상사람들은 명예나 인기와 성공은 반드시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남을 포용하고 축복하며 성공시키는 것을 자신이 성공하는 삶이라 정의합니다. 잠언에서는 다른 사람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3. 죄인과 죄에 대한 태도가 다릅니다(6장 1절).
성도는 자신도 범죄와 유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죄인에 대해서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로 회복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시험과 유혹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사단의 시험에 직면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단의 시험과 도전에 직면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의 사는 방식과 달리할 때 온갖 시험가운데에서도 승전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내에서 성숙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영적 성숙을 위해서 값을 치루는 투자를 할 때 가능합니다. 투자하십시오.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첫째, 짐에 대한 태도를 확정해야 합니다(2절).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이 사랑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의 버거운 걱정과 책임의 짐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짐을 져야 합니다(5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책임의 출발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짐을, 순장은 순장의 짐을, 남편은 남편의 짐을 질 때 그 공동체가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납니다. 여러분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짐을 지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짐을 대신 지고 허덕일 것입니다.
둘째, 좋은 것에 대한 태도를 확정해야 합니다(6절).
새로남 교회의 가르치는 자는 담임목사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위임받은 순장님들과 여러 교사들이 주님과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영적인 빚을 지고 있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눌 때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며 상호 영적인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의 학위를 가지고 권세를 부립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육체의 힘을 가지고 남을 윽박지릅니다. 좋은 가문을 통해 남들과 차별성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좋은 것을 독점하지 말고 함께 공유하고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진정 기도의 사람이라면 기도를 공유하십시오. 연약한 자, 낙심한 자, 삶의 질서가 깨어진 자, 영혼의 문이 닫혀진 자를 위하여 중보하십시오. 지식과 지혜와 재물과 은사와 시간을 함께 공유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영적인 것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필요도 함께 공유하는 전인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삶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입니다(7-9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7절). 여러분이 기도하고 양심에 거리낌없이 행했다면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십시오(9절). 하나님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의 무게중심에 두십시오. 그렇다면 하나님도 여러분을 축복의 우선순위에 두실 것입니다. 사람은 두가지를 심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하여 심고, 또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습니다.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국 허망한 썩어질 것을 거두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자는 건강한 삶과 영적인 은혜와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8절). 여러분들의 삶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품격있는 교회와 성도는 삶의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환경 의존주의자가 되지 말고 원칙주의자가 되십시오!
넷째, 섬김의 기회를 극대화하십시오.(10절).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소유하고 나서 베풀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기회있는 대로, 즉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믿음의 가정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베푸십시오.
폴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결혼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고독하게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 진리와 사랑의 공동체에 함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자아정체감과 소속감이 분명치 않으면 나눔과 봉사와 섬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두가지 신적(神的)기관을 주셨습니다.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은 내 육신의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며 교회는 내 영적인 생명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이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옵니다. 공동체에 대한 여러분의 안목을 새롭게 하고 공동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행복과 복주심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주님과 교회와 형제를 왕따시키지 말고 여러분의 삶에 영접하십시오. 정성담긴 섬김과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은총의 도구가 여러분 자신이 되십시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고
갈 5:25 / 박봉수 목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여럿 있습니다. 우선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 또는 ‘교인’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기독교신자’ 또는 ‘신자’라고도 부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호칭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입니다. 행 11:26에 나오는 호칭인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호칭은 신약성경에 서너 차례 나올 뿐입니다.
성경에 주로 많이 나오는 호칭은 ‘성도’입니다. 이 말은 ‘거룩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을 이어서, 신약에서도 성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만 따져도 수십 차례 이상 나오고, 구약까지 합한다면 다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도라고 부를 때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행 2장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절에는 누군가를 성도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3:16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성도들은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롬 8:9를 보면, 바울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을 받지 않아서 그 안에 성령이 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곧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성도라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거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성령이 거하시는 삶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또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살고
우선 “성령으로 살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바로 앞 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앞 절의 말씀과 깊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도들은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그동안 육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았는데, 예수 믿은 뒤에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육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았는데, 예수 믿고 성도가 된 뒤에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을 보면 ‘리비도’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이 이론에서 리비도를 ‘인간 활동에너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프로이드는 사람은 이 리비도라는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리비도가 가장 강력하게 분출되는 영역이 성적 본능이라고 해서 이것을 성적에너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프로이드는 이 리비도가 자아 즉 ‘에고’에 모여 있다가 어떤 대상을 향해 움직일 때 인간 활동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에너지 흐름이 억제 당하는 것을 ‘억압’이라고 하고, 어린 시절의 대상에 붙잡혀 있는 것을 ‘고착’이라고 하고, 이타적이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향할 때 ‘승화’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프로이드는 인간은 리비도로 산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바울도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들이 이와 같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리비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사람은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정욕이고, 또 탐욕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믿고 성도가 되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즉 정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의 말을 빌려서 설명해 보면, 이런 리비도와 같은 정욕과 탐욕의 육체 에너지를 억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신 성령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의 5:17절에서 이런 사실을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 있고 또 성령의 소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우리 안에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고, 성령이 마찬 가지로 우리 안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성령의 소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마음에 소원을 품는 대상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일시적인 것이요, 채워도 채워도 다 채울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헛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적인 욕망,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몸부림치는 권력욕과 명예욕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나면 달라집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 마음은 우선 대상이 저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이요, 한 번 채우면 늘 충만한 기쁨을 주는 것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을 사모하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싶은 마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고 싶은 마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후원하고 있는 문성 이민아 선교사님이 최근에 안식년을 마치시고 다시 사역지인 파푸아뉴기니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들은 30년이 가까이 파푸아뉴기니의 원주민과 원시 밀림 속에 살면서 그들의 말로 글을 만들고, 그 글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또 제자훈련을 해왔습니다.
이분들이 처음 이곳으로 보내심을 받아 갈 때 무척이나 두려움이 컸다고 합니다. 이 원주민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인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도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정말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성령께서 두 분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들을 찾아갔을 때 뜻밖에 두 분을 환대해 주더랍니다. 그리고 말도 잘 통하지 않을 때 나름대로 복음을 전했는데 스폰지처럼 말씀을 받아들이더랍니다. 이들의 말을 배우고 어느 정도 소통하게 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가르쳤답니다. 이들은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죄사함을 받으려고 진심으로 회개하더랍니다. 그 맑은 영혼을 보면서 두 분은 이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답니다.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이들을 보고 싶어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두 분이 정말 이 밀림의 부족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두 분에게 이들에게 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주셨고, 두 분이 기도한 대로 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 피하고 싶고 심지어 도망치고 싶은 곳에 가고 싶은 마음, 사람들이 외면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낭비처럼 보이고 헛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생각에 헌신하고 싶은 마음... 바로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육체가 주는 정욕이나 탐심 말고 성령이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까? 성령께서 내게 하고 싶도록 푸시하시는 소원이 있습니까? 성령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거룩한 갈망이 있습니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행하고
다음으로 본문은 “성령으로 행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행한다고 번역한 원어는 ‘스토이케오’(στοιχέ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을 지어가다’, ‘발자취를 따라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앞의 5:16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는 말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성령으로 살면 당연히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선한 마음을 주셔도 그것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하도록 맡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고전 2:14-3:1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원어 ‘프쉬키코스’(ψυχικό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인간 정신을 뜻하는 프쉬케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 성령 받지 못한 사람으로 인간의 죄악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원어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γοι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연약한 인간을 뜻하는 사르크스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았지만 죄악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셋째는 신령한 사람입니다. 원어 ‘프뉴마티코이스’(πγευματικοίς)를 번역한 말입니다. 영을 뜻하는 프뉴마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해 보면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을 받은 영이 주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 둘입니다. 바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성령을 받았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연약한 본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 욕망을 느끼고, 또한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도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느끼지만 이를 따르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서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만 이것을 잘 제어하고 이겨냅니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따라 삽니다.
고전 3장에서 바울은 그 차이를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린아이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따르기에는 영적으로 어리다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성숙한 어른이 밥을 먹고 단단한 음식도 잘 소화해 내는 것처럼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잘 따라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마음속에 부어주시는 거룩한 욕망을 강열하게 느끼고, 철저하게 그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육체적 욕망을 뿌리치고 거룩한 욕망만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행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엡 5: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에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면서 술 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과 술 취함이 유사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술에 취한다는 것은 술 몇 잔을 마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자기가 술기운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예 술기운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술기운이 자기감정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멀쩡하던 사람이 울기도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합니다. 또 자기 인격을 지배합니다. 얌전하던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옷을 벗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이와 비슷합니다. 성령을 받아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령으로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 감정을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생각을 지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선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를 지배하십니다. 담대해지고 결단하게 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행하려면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사모하고,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성령을 받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이 비슷한 점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술 취함과 성령의 충만의 열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술 취함은 그 열매가 엡 5:18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방탕함입니다. 술 취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 스스로 실수를 저질러 큰 손해를 보게 되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성령으로 행하게 되면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됩니다. 갈 5:22가 그 열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런 열매들은 마치 맛있게 잘 익은 과일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렁주렁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 이것이 성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받은 성도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소중히 품고 성령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성령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