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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8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독일 축구황제 베켄바워 사망(78세)
2023년 세네갈, 버스 충돌 사고로 40명사망 80명 부상 애도기간 선포
2022년 파키스탄 폭설로 차량 수천대 고립 관광객 21명 차안에서 동사
파키스탄 북부 70㎞ 지점에 있는 펀자브주 고원 관광지 무르리 인근 도로에서 차량 수천 대가 폭설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무르리 당국은 비상 상황이 발생하자 차량 진입을 통제했다. 여기에 폭설마저 계속되면서 수천 대가 차를 돌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도로 위에서 꼼짝 못하는 상황을 만났다.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관광객 수천 명은 차에 탄 채 영하 8도까지 떨어진 강추위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했다.이 사고로 관광객 21명 이 차 안에서 동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사고는 설경을 즐기기 위해 무르리로 몰려든 게 화근이 됐다. 이 과정에서 며칠 간 12만대 이상이 인구 2만6000명의 소도시 무르리로 진입했고 외곽 도로에서는 심각한 정체가 빚어졌다. 이중 2300여대는 구조되고 1000여대의 차량이 고립되었다
2020년 우크라이나 국제항공 여객기가 이란의 미사일에 격추 탑승객 176명 모두 사망
2019년 소트트랙 심석희 선수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사실 밝히고 고소
2018년 우크라이나 항공기 이란 테헤란 국제공항을 이륙한 직후 추락 180명 사망
2016년 1.5km 땅굴 파 탈옥한 멕시코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 붙잡힘
2014년 KB국민카드·롯데카드·농협카드 1억400만 건 고객 정보 유출
2010년 토고 축구 국가대표팀, 앙골라에서 테러 당해
2010년 1월 8일 앙골라에서 토고 축구 국가대표팀이 탑승한 버스가 총격을 당해 운전사가 사망하고 선수 2명을 포함한 9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 10명이 사상했다.
콩고공화국에서 전지훈련을 마친 토고 대표팀은 10일 앙골라 수도 루안다에서 개막되는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로 앙골라 국경을 넘어 국경 도시 카빈다를 지나는 중이었다.
이 총격으로 골키퍼 코조비 오빌랄레(프랑스 GSI 퐁티비)와 수비수 세르게 아칵포(루마니아 FC 바슬루이) 등이 총상을 입었으며 골키퍼 코치와 팀 닥터 등 지원 인력 7명도 부상해 병원으로 후송됐다.
토고 대표팀은 11일 가나와의 첫 경기가 예정돼 있었으며, 이번 테러가 발생한 카빈다에서도 7경기가 치러질 예정이였다.
한편, 카빈다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반군단체 카빈다해방전선(FLEC)은 이번 총격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2009년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서 포격전
이스라엘이 2009년1월 8일 레바논 남부에서 로켓탄이 잇따라 발사되자 대응 포격을 가했다
이날 오전 이스라엘의 북부 나하리야 마을 등에는 레바논 쪽에서 날아온 3∼5발의 로켓탄 파편에 이스라엘 주민 여러 명이 부상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로켓이 발사된 곳으로 5발의 포탄을 발사했다.
레바논 남부에는 2년여 전에 이스라엘과 34일간 전쟁을 치른 시아파 강경 무장세력인 헤즈볼라가 포진하고 있으나 이들 로켓을 발사한 주체가 헤즈볼라인지는 즉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12월 27일 가자지구 공습에 나서면서 헤즈볼라의 전쟁 개입 가능성에 대비, 이스라엘 북부지역에 경계령을 발령한 바 있다.
2006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무력 충돌로 레바논인 1천200명이 숨졌으며, 이스라엘 쪽에서도 160여 명이 사망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2009년 인터넷 경제대통령으로 불린 누리꾼 ’미네르바‘ 긴급 체포
2009년 프랑스 제과업계 대부 가스통 르노트르 별세
프랑스 제과업계의 대부, 가스통 르노트르(Le notre)가 2009년 1월 8일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20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르노트르는 호텔 주방장이었던 아버지와 프랑스 명문 은행가 집안의 개인 요리사인 어머니 밑에서 요리기술을 익혔다. 청년 시절 제빵학교에서 빵과 케이크 만드는 법을 배운 뒤, 1957년 파리의 부유층 거주지역인 16구에 자기 이름의 첫 제과점을 열었다. 그는 정통 제과법에서 탈피해 더 가볍고 향미가 넘치는 새로운 제과를 잇달아 선보이며 파리의 미식가들을 사로잡았다.
또 1960년엔 파티용 빵과 케이크를 배달해 주는 '파티 출장업'이란 새로운 업종을 창안해, 제과업 분야에서 르노트르 왕국을 구축했다. 르노트르 체인은 세계 12개국에 지점망을 구축, 프랑스 제과기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해왔다.
2001년 서울지법, 건설업체 한양에 파산 선고
2001년 서도 명창 오복녀 여사 타계
서도 명창 오복녀 여사가 2001년 1월 8일 89세로 타계했다. 여사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민요인 `서도 소리` 원형을 보전하고 전파하는데 평생을 바친 예인이었다. `추야공산 다 저문 날에 모란 황국이 붉었구나…` 그의 `수심가` 한 자락은 대동강물 먹은 이라야 제대로 한다는 `오복녀표`였다.
평양에서 태어난 오 여사는 대동강 뱃놀이에 뽑혀가던 `애기명창`이었다. 광산하는 개명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남편은 납북되고 대구로 피난, 행상을 하면서도 소리를 지켰다. 1971년 서도소리로 중요무형문화재 29호에 지정됐고, 서도소리보존회장을 지냈다.
1990년 평양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참가한 오 여사는 "북에선 퇴폐적 소리라며 풍류를 담은 `난봉가`나 `타령`은 형체도 없어졌다"고 한탄했다. 그는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리면서도 `몽금포타령` `오봉산타령` 등 42곡의 악보를 채보해 `서도소리교본`을 묶어냈고, 1999년에는 방일영국악상에서 수상한 상금을 후학을 위해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등 사위어가는 서도소리 예맥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1997년 통계청, 1월 1일 현재 우리나라 인구 4천5백75만7천명으로 발표
1997년 KEDO(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북한 경수로 건설부지 의정서 서명
1996년 러시아제 안토노프32기 자이레 수도 킨샤사 시장 추락. 300여명 사망
1996년 미테랑 프랑스 전 대통령 사망
프랑스의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이 1996년 1월 8일 전립선암으로 사망했다. 미테랑은 파리대학 졸업후 언론인 겸 변호사로 활동하다 1981년 대통령선거에서 사상 최초의 사회당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로 1986년 3월 국민의회선거에서 우파 연합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우파 정당인 공화국연합의 J.시라크를 총리로 임명, 좌파 대통령과 우파 총리라는 ‘좌우동거체제’를 만들어냈다.
1990년 연두교서에서 유럽연방구상을 발표하고, 이어 1993년 유럽연합의 발족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3년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한-불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과의 통상, 기술교류 확대를 논의하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가 약탈해간 규장각도서 반환문제에 합의하기도 했다.
1994년 남산1호 쌍둥이터널 개통
1994년 서울 제2기 지하철(6호-7호-8호선) 공사 착공
1993년 국립교육평가원, 독학사 147명 첫 배출
1992년 위안부 할머니 첫 집회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일본대사관 앞.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20여 명이 이곳에 모여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등을 요구했다.
물론 이날은 첫 수요 집회 라는 타이틀로 모인 게 아니었다.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대중 앞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일본대사관은 묵묵부답이었다.
오기가 생겼다고 할까.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집회를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뒤로 집회는 매주 열렸다.
공휴일일 때와 1997년 일본 고베(神戶)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는 것으로 시위를 대신한 것만 예외였다.
지금까지 집회 참가자는 연인원으로 3만여 명. 학생과 시민,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양심적 일본인들까지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처음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얼굴을 가리던 할머니들이 이젠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집회를 본 외국인들은 우울한 주제를 갖고 이렇게 활기차게 시위를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고 입을 모은다.
문제는 집회에 참석했던 할머니들이 한(恨)을 풀지 못한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점. 지금까지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234명 중 111명이 사망했다.
동료가 쓰러질 때마다 이들의 의지는 더 단단해진다.
우리가 죽고 사라져도 역사는 살아 있다 고 외친다.
하지만 역사의 증인들이 있고 없고는 분명 중요한 문제다.
한일 양국 정부는 할머니들이 늙지도 않을 거라 믿는 걸까.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이다.
1985년 이라크 공군, 이란 영해서 한림해운 소속 마리너호에 미사일 공격
1981년 사회보호법 시행령 공포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부근에서 진도5.2 지진 한반도 역대 최대 규모 지진
1976년 주은래 전 중국 총리 사망
모택동에 이어 당 서열 2위였던 주은래 당 부주석 겸 국무원 총리가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57분 방광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78세였다. 중국 공산당 초창기부터 50년 이상이나 혁명동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주은래의 사망 소식에 모택동은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릴 뿐 그를 조문하지 않았다. 모택동 자신도 역시 폐와 심장 등에 이상이 있어 움직이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주은래의 죽음은 그날 발표되지 않고 이튿날 새벽에서야 내외에 공표됐다. 장례 차량이 팔보산 혁명묘지로 향하는 거리에는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북경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노동 인민문화궁에서 거행된 일반인 조문에는 건국 이래 26년간 수상을 역임한 위대한 지도자와의 영원한 이별을 애도하는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 수가 자그만치 백만명에 달했다.
도쿄와 파리까지 유학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은래는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 일생을 중국혁명에 바쳤다. 대학 재학 중 5.4운동 참여로 시작된 그의 혁명역정은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 창설, 상해 봉기 지도, 남창폭동 지도, 광주코뮌 조직, 대장정 참가, 항일연합전선 결성 등으로 이어졌고, 1949년 공산정권 수립뒤 사망할 때까지 총리로서 중국혁명의 완수와 현대 중국의 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1975년 장기영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 남북간의 우편물교환 제의
1974년 긴급조치 1호-2호 선포, 개헌운동과 관련보도 금지
197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민주당의 해산을 공고
1969년 주택채권 증권지상에 첫 상장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발생
1966년 도미니카 군부반란 수습
1965년 유엔무역개발회의(WNCTAD) 가입
1965년 정부, 비전투병력 월남 파견 결정
1964년 파나마 운하지대에서 파나마 학생과 미국군 유혈충돌 반미폭동 유발
1963년 프로레슬러 역도산 내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 프로 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이 1963년 1월8일, 30여 년 만에 처음 조국 땅을 밟았다. 300여 명의 환영객들은 트랩을 내려오는 역도산(180cmㆍ140kg)을 발견하고 달려가 서로 꽃다발을 전달하려고 북새통을 이뤘다.
역도산은 일본명 리키도상이고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함경도에서 태어나 16세 때인 1940년 일본에 건너가 스모선수로 컸으나, 일본인이 아니면 최고자리인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스모계 규정에 반발, 1950년 9월 스모계를 떠나 프로레슬러의 길을 걷는다. 이후 1년간 미국에서 선진 프로레슬링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발족시켰다.
1953년 2월19일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프로레슬링 국제시합이 도쿄에서 열리자 경기장 앞은 몰려든 인파들로 큰 혼란을 빚었다. 일본 대표로 역도산이 출전한데다 당시 한창 인기를 모으고 있던 세계태그챔피언 샤프형제가 출전했기 때문이었다. 역전광장 등 220여 곳에 설치된 옥외TV 앞에는 중계를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관중들은 역도산의 특기인 ‘가라데 촙(당수)’ 으로 거구의 서양인을 무너뜨리는 장면에 열광했다. 2차대전 패전국으로 절망에 몸부림치던 때였다. 프로레슬링 붐은 막 싹트고 있던 TV보급율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일본 전역을 들끓게 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일본 NTV가 프로레슬링 독점중계로 흑자로 돌아설 정도였다.
사업가로도 성공, 한때는 일본 100대 자산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지만 1963년 12월 뜻하지 않게 야쿠자간의 싸움에 휘말려 칼을 맞고 서른아홉의 나이로 숨졌다. 역도산이 이 해 연초 방한했을 때 약속했던 국내 스포츠센터 건립 지원도 그의 죽음에 따라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1963년 한미군사협정 체결
1961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알제리 민족자결정책 승인
1961년 혁신당 결성(대표위원 장택상)
1959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952년 국회, 대통령직선제 및 국회양원제 개헌안 부결
1951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군대확장 강조
1949년 영국, 대한민국 승인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내한
1947년 제1회 종합예술제 개막(-19일)
1946년 조선국군준비대에 해체명령
1942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군사동맹
1942년 영국 이론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출생
1941년 독립운동가 서동성 사망
1935년 연희전문대학교 농구단 전일본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1933년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출생
1932년 이봉창 의사,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투척
1932년 1월8일은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의사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날이다
이봉창(1900∼1932)서울출신으로 19살에 남만주 철도주식회사 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다가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오사카 등지를 방황했다
1931년 상해로 건너가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 그해 가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2년 1월8일 일왕이 만주국 황제 부의와 도쿄교외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했다
7워러19일 대심원 공판장에서 재판을 받을때 “나는 너의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너희들이 감히 내게 무례히 하느냐?” 라고 호령하며 재판을 거부했다
이에 일본법원은 그해 10월 방청인도 없는 재판에서 저희들끼리 판결문을 작성하여 사형선고를 하고 10월10일 이치가야형무소에서 형을 집행 했다
이봉창 의사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1918년 윌슨 민족자결주의 선언
1905년 동화작가 마해송 출생
1902년 미국의 심리학자 칼 로저스 출생
1897년 마포삼열 선교사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 설립
1896년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 사망
1895(조선 고종 32) 동학혁명 지도자 김개남 장군 전주감영에서 참수/육시형 당함
1823년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리스 출생
1786년 미국의 금융업자 니콜라스 비들 출생
1642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사망
‘현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42년 1월 8일 78년에 걸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인했고,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고전역학의 틀을 마련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무엇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교회와의 갈등이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한 ‘대화’(1632)가 종교재판에서 성경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이단으로 심히 의심’을 받아, 그후 200년 동안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10명의 재판관 중 7명이 서명했던 교회의 역사적 오류는 360년이나 지난 1993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비극적인 상호 몰이해’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함으로써 마침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갈릴레오는 ‘출세’에 관심이 많았다. 사교술이 뛰어났던 그는 박봉의 교수직을 벗어나 ‘궁정학자’로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끝에 토스카나 대공의 아들을 가르칠 기회를 얻었고, 그 아들이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면서 그는 마침내 1610년 대공의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교회와의 충돌만은 피해보려 노력했으나 성경의 독선적 해석에 집착했던 신부들의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교황의 시야에서 멀어지게 됐다. 연금상태와 딸의 죽음에 따른 고통으로 시력까지 상실했던 그는 마지막 저서 ‘두개의 새로운 과학’(1638)을 교회의 눈을 피해 네덜란드에서 발간하고, 이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324년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사망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1324년 1월 8일 사망했다. 1254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마르코 폴로는 1266년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을 따라 몽골제국의 수도 대도(大都)로 향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생 마페오와 함께 동방무역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킵차크 칸국에 갔다가 전쟁으로 귀향길이 막히자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원나라에까지 다녀온 사람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 소아르메니아의 라이아스를 출발, 터키 동부를 지나 이란을 경유하여 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북방 육로로 향한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카슈미르를 거쳐 파미르를 넘은 뒤, 중국 서부의 신강과 감숙 지방을 지나 마침내 1274년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마르코 폴로는 몽골 제국 지배하의 중국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쿠빌라이로부터 여러 임무를 부여받아 때로는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고, 3년간 양주라는 도시를 통치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국측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장에는 상당한 과장이 섞여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한 것은 1290년이나 1291년이다. 그로부터 몇년 전 칸국의 군주인 아르군(1284~88)의 부인이 사망하자 그녀를 대신할 또다른 왕녀를 원나라에서 이란까지 호송하는 임무가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폴로 일가와 왕녀 일행을 태운 열네 척의 선단은 중국 동남해안의 천주항을 출발하여 26개월 만인 1293년에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 도착했다. 왕녀를 인도해준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베네치아로 귀향한 것이 1295년의 일이었다.
3년 뒤 지중해 상권을 두고 경쟁하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해전이 벌어졌다. 전투에 참가한 폴로는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루스티켈로를 만나 그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구술하여 `세계의 서술` 이른바 `동방견문록`을 완성한다. 1299년 감옥에서 풀려나 베네치아로 돌아온 뒤 상업에 종사하다 이날 사망했다.
881년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 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 입성
당 왕조의 혼란한 틈을 타 반란을 꾀한 황소가 군사를 일으킨 지 7년 만에 마침내 당나라 군을 격파하고 881년 1월 8일 당나라 수도 장안에 입성했다. 황소는 산동성 하택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좋아했으나 과거시험에는 낙방해 관료로 진출하진 못했다.
874년 왕선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 황소도 군사를 일으켜 본격적인 반란군의 생활을 시작했다. 해마다 계속되는 한발과 수해, 충해로 고향을 등진 유랑민들이 그의 수하에 속속 모여들어 군사는 순식간에 수천으로 늘어났다.
당나라군과 계속된 접전중에 왕선지가 피살되자 황소는 `충천대장군`으로 추대되어 연호를 왕패라 이름지었다. 황소군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전투형태를 취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880년 11월 낙양을 함락시켰다. 이어 12월 장안을 향하는 동관을 돌파할때 황소의 군사는 60만이었다고 `후당서`는 기록하고 있다. 열세를 느낀 당나라 희종이 이날 장안을 탈출하자 황소는 마침내 장안에 무혈입성했다. 황소는 당의 황족 전원을 몰살하고 12월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나라이름을 대제, 연호를 금통이라 칭했다.
그러나 도망간 희종을 중심으로 당나라 군사들이 계속해서 장안을 공격하자 황소군의 전력은 눈에 띨 정도로 약화되었고 황소군의 부장 주온의 배반으로 황소는 장안을 탈출해야 했다. 884년 6월 1천여 명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태산 낭호산으로 탈출한 황소는 호랑곡 전투에서 패배하자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황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당왕조는 이 반란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어 그후 23년 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647년 신라, 선덕여왕 사망, 진덕여왕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