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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가까울수록>
성가정 축일을 맞아 가정, 식구, 가족 구성원에 대해서 조금은 엉뚱한 풀이를 해봤습니다.
남편: ‘남의 편’이나 드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아내 편만 드는 사람
아내: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는 내편’이 아니라 ‘안해’-‘내 안에 뜬 해’
가족: ‘가까이 있는 족쇄’가 아니라 가까이 있기에 더욱 예의를 갖춰야 할 사람
친척: 친하기에 더욱 배척하지 말아야 할 사람
결국 가족, 식구들은 가까이 있기에 함부로 할 사람, 막 대할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기에 더욱 존중하고, 더욱 배려하고, 더욱 예의를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존재로군요.
그러나 현실은 어디 그렇습니까? 늘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점점 그의 흠집은 커 보입니다. 점점 미운 구석이 늘어만 갑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애증(愛憎)관계로 접어듭니다. 때로 사랑하지만, 어떤 때는 증오합니다. 엄청 미워하지만 즉시 돌아서서 후회합니다. 그래서 늘 미안스럽습니다.
그래서 부부관계, 부자 관계, 모녀 관계, 형제 관계에는 적정선이 요구됩니다. 그 적정선이란 것은 마치 뱀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과도 비슷합니다. 서로의 꼬리를 너무 세게 꽉 물어버리면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흐르며 그로 인해 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슨하게 물고 있으면 쉽게 분리되어버립니다. 서로 떨어져 나갑니다.
가까울수록 지혜로운 관계 맺음방식이 요청됩니다. 친할수록 예의범절이 요구됩니다. 관계 사이에 여백, 완충지대, 제3의 장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여백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하시면 가장 바람직합니다. 그 완충지대를 침묵과 숙고의 시간으로 채워나가면 가장 좋습니다. 그 제3의 장소를 피정이나 영신수련, 깊이 있는 기도생활로 채워나가면 좋겠습니다.
요즘 너무나 많은 가정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정말 참담할 뿐입니다. 특히 아무런 죄도 없는 자녀들이 겪는 고통은 눈뜨고 볼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가녀린 어깨 위로 너무나 무거운 평생의 십자가가 얹어지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족 간의 유대와 일치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 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한번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가정이었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한 가족으로 묶어졌지만, 솔직히 그들은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상한 가족이었습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부담스러워하기보다, 늘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갔습니다. 서로의 처지를 측은지심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를 다했습니다.
그 결과가 ‘성가정’이었습니다.
유럽의 시골로 가면 아직도 집집마다 벽난로를 사용합니다. 요즘 같이 강추위가 계속될 때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벽난로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벽난로 안에 장작 서너 개 집어넣고 불을 댕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기분 좋은 훈훈함이 거실에 가득 찹니다. 따뜻한 홍차 한 잔씩 하면서 도란도란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겨울밤이 깊어갑니다.
가정, 생각만 해도 따뜻한 곳, 생각만 해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곳,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지는 그런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우리 가정부터라도 그런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보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성가정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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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방금 미사 중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불렀습니다.
해마다 성가정 축일 미사 때 마다 부르는 노래, 늘 불러도 새롭고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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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교회나 수도원뿐 아니라 내 몸담고 사는 집이 주님 계시는 '주님의 집'입니다.
가정(home)보다는 집(house)만이 두드러지는 현실이지만
주님의 집은 가정과 집을 동시에 포함합니다.
바로 수도공동체기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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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늘 펼치는 지론이 있습니다.
‘수도생활은 공동생활이요, 수도생활의 어려움은 공동생활이요, 함께 사는 것이 바로 수도다.’
‘밖에서 볼 때는 평화로워 보여도 안에서 보면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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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을 요하는 성가정 수도공동체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만 있는, 영원히 답이 없는 성가정 공동생활입니다.
오늘은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기본 요소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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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끊임없는 기도가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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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사랑의 샘이자 생명의 샘입니다.
함께 기도해야 하고 홀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해야 비로소 하느님과 연결되고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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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음이 맞아 성향이, 취향이 같아서 공동체의 일치가 아니라
바라보는 하느님 중심이 같아야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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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일’보다 힘든 것은 없습니다.
하여 ‘하느님의 일’인 기도가 절실합니다.
‘하느님의 일’인 기도가 잘되어야 ‘함께 사는 일’도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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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성가정 공동체의 우선적 요소가 기도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자발적 표현이 기도입니다.
말 그대로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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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잘하는 비결은 하느님 사랑 하나뿐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사랑합니다.
하여 우리 분도수도가정의 모토도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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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위하여' 기도입니다.
혼자 기도에 앞서 공동기도가 우선입니다.
진정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선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할 때 개인주의도 극복 되고 사랑도 살아납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에 이어 서로간의 소통도 원활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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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나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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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의 으뜸이 하느님께 함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습관입니다.
감정이나 기분이 아닙니다.
좋든 싫든 감정에 개의치 않고 항구한 주님 사랑으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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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그리스도의 말씀도 우리 가운데 풍성히 머물고 매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저절로 그리스도 중심의 한 몸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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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함께든 홀로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의 샘에서 샘솟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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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랑이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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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사랑, 겸손한 사랑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용서도 사랑도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은총과 노력의 열정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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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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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런 자랑스러운 품위에 걸맞게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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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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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가 사랑 안에 포섭됩니다.
사랑뿐이 답이, 길이 없습니다.
만병의 근원은 사랑 결핍에 있고 만병통치약은 사랑뿐입니다.
의식주가 보장되어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이 있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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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요셉 부부가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함께 예수님을,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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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추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노부모에 대한 사랑 역시 중요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보고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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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서의 권고가 참 적절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고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집니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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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부모 사랑이 하나도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정말 노부모 잘 돌보는 이들 치고 자녀들 탈선한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날로 심각해지는 노년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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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를 향한 집회서의 권고가 마음 깊이 파고듭니다.
“예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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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자세로 노부모뿐 아니라 주변의 노인들을 대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런 구체적인 사랑 실천이 절실한 오늘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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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상호 순종이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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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 순종, 상호 섬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할 때 하느님도 우리에게 순종하십니다.
하느님을 섬길 때 하느님도 우리를 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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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체험이 이웃 간의 순종과 섬김의 원천이 됩니다.
진정 하느님께 잘 순종하는 이들은 형제들에게도 잘 순종하며
하느님을 잘 섬기는 이들은 형제들도 잘 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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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요셉의 순종이 놀랍습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르실 때마다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순종을 통한 주님과의 일치입니다.
순종을 통해 책임의 완성입니다.
'순종의 사람' 요셉의 길을 좌절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긴 요셉의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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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에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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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순종 뒤에는 꼭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라는 말이 붙습니다.
그대로 요셉의 순종이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됨을 봅니다.
순종을 통해 하느님과의 일치요 순종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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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순종보다 크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순종 잘 하는 이가 겸손한 이요 지혜로운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과 사랑은 성가정 공동체의 절대적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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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성가정 공동체를 위한 구체적 처방입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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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자발적 순종입니다.
순종은 영적성숙의 잣대입니다.
평생 배워야 할 사랑의 순종입니다.
비단 가정공동체뿐 아니라 모든 공동생활의 필수 요소가 사랑의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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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모든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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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사랑, 순종이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줍니다.
저절로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평생 기도와 사랑, 순종의 수행에 항구할 때 은총처럼 선사되는 주님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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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사랑 안에서 한 몸인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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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시편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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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원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자서전을 보게 되면 부모님을 자기 인생의 중요한 코치라고 고백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지식과 특별한 기술을 전달해 준 선생님이나 감독관이 아닌, 자신의 옆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 부모님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부모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요?
과외나 학원 등 세상의 모든 교육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경쟁에서 이겨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나 사랑이라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는 것일까요?
언젠가 어떤 부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제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인데, 왜 이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지 못하게 부모가 결정해 주어야 합니까?
훗날 아이가 커서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저는 어떤 강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논리적인 말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이 부모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갓난아기가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젖을 주지 않는 엄마가 있을까요?
또 기저귀에 응아를 해서 냄새가 심하게 나고 있는데, 아기 스스로 기저귀를 갈라고 가만히 두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주님으로 받는 영혼의 모유입니다.
영혼의 성장을 가져오는 세례를 단순히 아이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가만히 둔다는 것은 아이를 영적으로 굶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아세례를 부모가 반드시 이행할 의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혼인면담을 하면서 혼인문서를 작성할 때 서약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즉, 돈이 많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많은 능력과 재주가 있기 때문에 성가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자기 자신의 역할에서 충실하면서 가족 안에서 서로에게 큰 힘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과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는지, 세상의 논리를 앞세워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도록 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정이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성가정이 되어, 주님의 뜻이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행복한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가정, 가족>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일은
단순히 한 남자에게 한 여자를 주신 일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들까지 주신 일이고,
그래서 그 일은 사람에게 가정을 만들어 주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요셉의 아들이 되게 하신 일은
예수님에게 가정을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가족'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은혜)입니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마태 5,31-32)
단순히 이혼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면 안 되고, 가족을 버리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좀 모순되는 것 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미사의 복음 말씀으로 이런 말씀이 나오면
혈육보다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강론을 했다가
성가정 축일이 되면 혈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강론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 강론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세속의 인간관계에 얽매여서
영원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일을 가족과 함께 하면 됩니다.
지금 그렇게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다." 라는 말씀은
혈육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나의 가족이 된다." 라는 말씀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 가족을 버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가족을 버려라." 가 아니라,
영원한 것을 얻으려면 세속적인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버리는 것과 초월하는 것은 다릅니다.
초월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세상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버리면 안 되고, 가족이 모두 함께 세속을 초월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의 독신제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시면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라고 하셨기 때문에(창세 1,28)
독신제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신제도는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 라는 말씀과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고,
또 "주님을 위해서라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1코린 7,32)."
라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받아들인 일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신제도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가정과 가족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을 갖기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이 '포기'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가정으로 시선을 옮기면,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정(혈육)을 만드시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혈육을 버리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당신의 사명을 모두 이루셨다는 뜻으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혼자 남아 계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지금 '걱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 쪽에서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모셔달라고 부탁하셨는데(요한 19,26-27),
그 일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부탁하신 어머니는 혈육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성가정은 대표적인 영적인 가정이지만,
동시에 분명히 혈육으로 맺어진 가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곧바로 보내실 수도 있었을 텐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어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가정을 통해서 인류 구원 사업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가정을 본받자." 라는 상투적인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 성가정과 향주삼덕 >
소와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둘은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호랑이에게 대접했습니다. 호랑이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호랑이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다 참다 드디어 소와 호랑이는 다툽니다. 결국 둘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소는 소대로,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했어.’였습니다.
호랑이와 소는 결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라고 엮어놓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기대했던 것만큼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와 호랑이가 만나 하나가 되는 방법은 없을까요? 결국 소는 고기에 맛들이고 호랑이는 풀에 맛 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예수님과 나무가 한 몸이 되어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은 나무 위에 놓였지만 사람과 나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은 십자나무와 하나가 되어계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 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는 덕을 믿음, 희망, 사랑이라 하여 향주삼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혼자 힘으로는 나무에 매달려 계실 수 없지만 못 세 개를 통하여 십자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이 향주삼덕으로 당신 자신을 뚫어 십자가에 달려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소와 호랑이도 이 향주삼덕으로 자신들을 뚫는 아픔을 감수할 수 있다면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믿음’으로 서로의 오른 손을 뚫어야합니다.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덕은 하느님께 가기 위한 덕이지 서로를 위한 덕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서로를 믿는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몇 달 만에 본 마리아는 배가 불러온 상태였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잉태된 것임을 믿어야 했습니다. 성모님 또한 하느님의 정배로서 남편이 필요치 않았지만 성가정을 지켜줄 가장으로서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남편이 요셉임을 믿어야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해주셨다는 믿음만 있다면 서로를 믿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서른이 될 때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는데 그 이유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위해 정해주신 부모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 사람과 결혼해가지고...’가 아닌, ‘하느님께서 왜 이 사람을 나의 정배로 정해주셨을까?’를 생각해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이유를 깨달아 나갈 수 있습니다.
왼 손을 뚫는 두 번째 못은 ‘희망’입니다. ‘사랑은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장인이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목적이 있듯이,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다면 합당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맺어주신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인류구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대로 산 결과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성가정으로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신다면 자녀를 낳아 번성하고 그 가정뿐만 아니라 그 가정을 통해 온 세상이 복음화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펙 쵸프라가 자기 두 아들에게 “너희는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이 세상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만 생각하라.”라고 가르친 것이 우리 가정교육에도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신앙교육이 아닌 이 현 세상에서만 물질적으로 안녕 되게 살게 만들려고 한다면 올바른 희망을 지닌 가정이 아닙니다. 모든 성가정의 희망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처럼 세상 구원에 이바지하고 하늘나라의 천상가정으로 다시 모이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둘의 만남은 기찻길과 같습니다. 기찻길은 두 선로가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합니다. 서로 다른 희망을 지니고 있다면 벌어진다든지 아니면 붙어버려서 더 이상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즉 서로 같은 희망, 같은 목적지를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못, 어쩌면 양 손의 힘이 빠졌을 때 온 몸을 지탱해주어야 하는 못이 바로 양 발을 박은 못입니다. 믿음과 희망이 두 날개라면, 그 날개로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몸통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믿음과 희망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조금도 하늘로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란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랑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누군들 사랑하면 행복한 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미워지기 시작해서 용서가 안 될 때가 있고 그냥 냉랭하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내가 스스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자동차와 같습니다. 운전자는 영혼이고 차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자신에게서 에너지, 즉 사랑이 솟아나오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그 힘을 받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넣지 않은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으면 둘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사랑은 우리 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만 그 ‘열매’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지 않을 때는 누가 나의 뒷담화만 해도 미워질 수 있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고정원씨처럼 자신의 가족을 다 죽인 유영철을 자신 양아들로 삼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 생깁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세 개의 못으로 비유한 이유는 그만큼 내 자신을 죽이는 아픔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매일 여기에만 머무르려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알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서로를 위해서도 자기 자신을 태울 줄 모른다면 가정은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우리는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부부는 성탄절 선물을 고심하다가 남편은 가보로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를 위해 빗을 사오고, 아내는 자신의 자랑인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곗줄을 사옵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가족을 위해 내 자신을 그렇게 태우고 있다면 그 사람 안에는 성령의 뜨거운 불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에 사랑이 있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구성원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성령의 불로 자기 마음을 채우는 좋은 신앙인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 수원교구 오산 본당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을 많이 만드시고, 나눠주시고 또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늘 복된 사람으로, 꼭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였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들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헤로데의 손아귀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난살이에서 오는 혹독한 시련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전 생애 동안 가난을 감수하시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5) 라는 시메온의 당혹스런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 때 3일간이나 예수님을 잃고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찾아냈을 때 아들에게 들은 소리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19)하는 말이었습니다. 부모는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에는 인간적 갈등과 고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의 다른 모습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며 지켰습니다. 각자의 소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성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 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해 내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머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3,1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을 가슴에 모시고 말씀대로 실천하여 성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이 떠나면, 말씀을 멀리하고 영성체를 소홀히 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메마르고 삶은 공허해 집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고 이혼율이 늘어갑니다. 하느님을 떠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의미와 공허와 비인간화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게끔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대통령 링컨'이라는 책을 보면 너무나 가난했던 링컨의 어머니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으로 남긴 것도 성경 한 권 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읽고 또 읽어 지혜를 얻었고 링컨의 삶을 이끌었던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는 대통령(미국16대, 1861)이 되고 나서도 집무실 책상 위에 항상 성경을 두고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한 결과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3,13.17).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새3,15.16)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행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실천하는 가운데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가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서 사촌이 되고 대학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성체성사를 통해 영적 충만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 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집인가 가정인가
집 벽은 나무로 세워진 것
그 기초는 벽돌이나 돌로 세워진 것.
그러나 가정은 오직 심장의 고동들로 세워진 절묘한 것.
집 값은 즉시 매겨지고
한 덩어리 금덩이로 치를 수 있으나
가정의 값을 계산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 가격을 말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네.
집의 방들은 품위 있고 호화로우며
그 장식이 예술적 업적인지 모르나
가정의 아름다움은 사심이 없는 마음의 노고에서 나오는
마지막 결과들이라네.
집은 불탈 수 있고 팔리거나 바뀔 수 있는 것
집안의 조화를 잃어버리기까지 간섭할 것은 아니지만
가정을 잃게 되면 마음이 얼마나 짓밟혀질 것인가!
우리의 가정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
많은 행운으로 여러 집을 가진 사람은
그의 재산이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이 속한 가정에 사는 사람은
참된 백만장자로 여겨질 것이 틀림없다네(J.H 사이크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본당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 분이 보여 주신 가정 공동체의 모범을 따라 우리 각자의 가정 또한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다짐하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정이 성가정일까요? 화목한 가정,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유지되며 기도로 끝맺는 가정, 모든 식구가 세례를 받은 가정 등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으로는 부족합니다. 많은 것으로 채워져도 그것은 성가정의 특징은 될지언정 성가정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성가정의 성화나 성상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가정이란 ‘예수님을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가정’이며, ‘예수님을 그 공동체의 중심으로 모신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가족 구성원 서로서로가 아기 예수님으로 알고 품에 안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정의 부모와 면담한 내용이 기억납니다. 그 가정에는 신체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는 일로 가족이 10년 넘게 고생해 왔습니다. “딸 때문에 식구들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마음고생도 많지요?” 이러한 저의 위로에 그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딸이 우리 가정의 보물입니다. 이 아이가 없었다면, 우리 가정은 기도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 딸의 오빠와 동생도 자기 욕심만 챙겼을 것입니다. 딸아이의 장애로 말미암아 식구가 모두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고, 각자가 시간을 쪼개어 딸에게 더 마음을 쓸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였습니다. 이 가정에서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처럼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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