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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8년 1월 7일 주일오전
성경봉독 : 민23:18-26; 롬8:35-39
본문 : 시44:1-26
제목 : “언약을 붙들 것인가?”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34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11편 4,5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25편 3,4
설교 후 찬송 - 시44편 1,2,4,8
성찬식 찬송 - 시84편 2,3
폐회찬송 - 시108편 1,2,4
언약을 붙들 것인가?
서론 : 시편의 위로가 세상의 위로와 다른 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달 시편을 설교로 들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은 “인간적인 위로”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시편은 인간적인 위로를 줍니다.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도 더욱 많은 고난과 슬픔 가운데 살았던 시인의 처지가 우리에게 살아갈 힘과 위로를 줍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감정은 우리를 일어설 수 있게 합니다. 세상이 다 자신을 등짐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주를 붙드는 시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모범이 됩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적인 위로를 줍니다.
하지만 시편이 시중에서 널리 읽을 수 있는, 고생 가운데서 성공한 유명인의 자전적 에세이와 다른 점은, 이 시들이 우리에게 인간적인 위로를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진실로 이 시들로부터 받게 되는 위로는 “천상적인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인간적인 위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의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사실 위에 피어나는 “구속적 위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누리게 되는 위로는 언제나 “배경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인간적인 위로와 구속적 위로가 다른 점입니다. 말하자면 시편을 읽을 때의 배경은 “구속적 지식”인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위로는 내 귀에 듣기에 좋은 말,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을 해 주는 것을 통해서 주는 위로입니다. 그러나 시편이 주는 위로는 내 생활이 쓰고 고달플지라도 “하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사실에 기초한 위로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어서고, 그것은 오늘날 이 시편의 말씀을 듣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신앙전승
오늘 이 시편 44편은 그런 점에서 아주 뛰어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44편은 현대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주 극명하게 그 대답을 제시해주는 시입니다. 시편 44편은 우리가 이전 달에 들었던 42편이나 43편만큼이나 대단히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시편입니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42편이나 43편이 내용에 있어 드라마틱했다면, 오늘 이 44편은 주제의 시제가 드라마틱함을 이끌어냅니다. 이 점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도 마찬가지이지만, 시편을 잘 이해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여러 번 읽는 것”입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묵상하고 음미하면서, 이렇게 시편 44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편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시편 44편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면, 여기 내용을 구분 지어주는 “시제적 구분”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1)
먼저 1절부터 8절까지를 한 번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물론 8절 끝에 “셀라”가 붙어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도 충분히 구분은 되지만, 9절부터 나오는 “그러나 이제는”을 통해 우리는 9절부터는 8절까지 있었던 이야기와 무언가 다른 전개가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44편을 크게 둘로 나누자면 9절부터 나누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나누기로는 44편은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주석가들은 이 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내용상은 4구분이 좋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는 이 시를 3구분으로 해서 한 번 읽어봅시다.
먼저 제일 첫 번째 부분으로 1절부터 3절까지를 보겠습니다.
1절은 “하나님! 우리가 들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이 내용은 “들은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1절은 이 이야기가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의 일”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들었습니다. 과거 조상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재미있는 전래동화나 속담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주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 조상들에게 행한 일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일까요? 언젯적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어렵지 않게 2절에서 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처럼 문장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이 구절이 굉장히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두 그룹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열방은”, “쫓겨납니다.” 그리고 “열조는”, “심깁니다.” 그렇죠? 그리고 이어서 어떻습니까? “민족들은”, “괴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조상들, 즉 과거의 이스라엘과 그에 대비되는 열방, 민족들을 함께 놓고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열방들은, 민족들은, 쫓겨나고,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고통과 정반대로 열조들, 즉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그 땅에 심겨지고 번성케 됩니다.
언제를 가리키는 이야기입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때, 빈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열방을 그 땅에서 쫓아내시고, 열조들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열조들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열조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내쫓으시고 이 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문단의 주제어구가 그 다음절인 3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읍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아멘!
시인이 열조로부터 들었던 사실은 그 땅을 얻었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과 함께, 신앙고백해야 할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땅을 얻은 일이 그들의 힘을 통해 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여호와의 손과, 여호와의 팔과, 여호와의 얼굴 빛으로 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열방을 쫓으시고, 우리 열조들에게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상들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조상들이 힘이 세거나 전쟁민족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작고, 나약하고, 허접하고, 힘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2)
그리고 이제 4절부터 나머지 8절까지를 읽을 차례입니다.
이 부분이 저는 굉장히 감격스러웠습니다. 설교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없는 부분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감흥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이 부분을 여러분도 잘 묵상하고 이 은혜를 함께 누렸으면 참 좋겠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말한 후 시인은 무엇을 말합니까? 5절에서 시인은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주의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5절 말씀이 덩그러니 여기 혼자 떨어져 있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 절이 의미 있는 것은 방금 조상들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2절과 함께 이 5절을 읽어보십시오. 시인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대적들을 물리쳐 이겼듯이”, “우리도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열방들과 싸워 물리친 일을, 우리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앞 문단의 신앙고백이 여기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나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앞문단과 똑같죠? 차이는 앞에서는 조상들이었고, 지금은 우리들이라는 차이 뿐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열방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도 열방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 역시 모두 하나님의 손이 하신 일입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같은 싸워 이김과, 같은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이 부분을 읽을 때 왠지 뭉클한 것이 없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묵상할 때 “교회학교”나 우리 “자녀들”이 생각났습니다. 시편 44편의 첫 부분은 우리에게 정말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이긴 것처럼, 지금의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이겼습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뭉클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시대를 훗날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때 이 사실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우리는 신앙고백적 분투의 시기를 살아왔고 또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속화되어 가고, 교회가 세상과 벗하기를 즐거워하는 시기에, 고통하고 투쟁하면서 나름의 길을 찾아 교회를 세우고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가 들어 늙고, 하늘나라에 갈 때가 가까웠을 때,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과 벗하지 않고, 우리가 세운 이 교회를 계속해서 지탱해나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시편 44편의 첫 부분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싸웁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우리가 처음 겪는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싸웠던 싸움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이겼던 것처럼 우리도 이깁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이긴 것이, 조상들의 팔의 힘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힘과 능력 때문이었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싸움을 이기게 하시는 것 역시, 우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 시편의 첫 부분을 읽으시면서 많은 은혜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을 만나다
이렇게 현재적 삶에서의 언약적 승리가 이 시편 기자와 그들의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이 시인과 공동체의 승리가 “언약적” 승리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조상들의 싸움과 같은 싸움, 조상들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이 단지 개인적 싸움이 아니라 “언약 증거”를 가진 싸움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길 수가 있었고, 첫 문단에서 둘째 문단으로 갈 때 여기 “들었던 것”이 “현재화된 것”이 있습니다.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열조에게 행하셨던 하나님의 일”을 들었을 뿐 아니라 경험했습니다. 사실 1절부터 3절까지의 내용이 있기 전에는 그저 “들었던 일”에 불과한데, 4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은 그 들었던 일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열조의 일에 대해 들었던 이 시인과 공동체가 이제 지금 자신의 삶에서 직접 그것을 경험하고, 그래서 언약이 현실화되는 것, 성경책의 이야기가 책 속에 있지 않고 자기 삶에서 증험되는 것, 그것을 지금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진정 “언약적” 승리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44편은 셋째 부분에서 극적인 전환을 이룹니다. 앞의 이 내용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시인과 시인의 공동체가 이제 전혀 뜻밖의 상황을 만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9절의 “그러나 이제는” 부터가 이 내용입니다. 이것을 이제 한 번 살펴봅시다.
고난에 처하다, 그리고 그 이유
문제는 이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절도 읽겠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님께서 시인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원수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쳤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대적에게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왜 이런 갑작스런 반전일까요?
이어지는 11절과 12절을 읽어도, 이유는 나오지 않고 상황만 나옵니다.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다.” 심지어 12절은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셨다.” 팔아서 돈이 되기 때문에 판 것이 아니고, 무료로 이스라엘을 열방들에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시편 44편에는 이유는 안 나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급작스럽게 그렇게 이스라엘을 망케 하셨는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늘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배역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 대해서는 이 시편이 대답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17절부터 19절까지를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저는 처음에 시편 44편을 읽을 때는 17절에서 비록 시인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시인의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비록 자신과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적 징벌이 임한 것일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연구해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의 말은 거짓말도 착각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17절이 대단히 “언약적인”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언약적으로 이전의 일을 술회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했다.” 이것은 대단히 언약적인 서술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다시 또 똑같이 언약적인 용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잊지 않았다, 우리는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 결국.......이 시에서 시인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대답
시편 44편 정리
바로 이 점이 오늘 시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의 상황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간단한 문장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1) 첫째, 시인은 언약을 알고 있으며, 주의 명령을 알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복을 주신다, 대적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둘째, 그런데 시인은 과거의 열조들을 말합니다. 즉 시인의 열조들은 바로 이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시 제일 첫부분에서 시인은 “내가 들었다”라고 하면서 이 사실을 말합니다.
3) 셋째, 그리고 “들었던 것”을 “현실에서 경험”도 했습니다. “과거 열조들의 일”이 “지금 자신들의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의 둘째 부분에서 시인은 과거 열조들이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듯이, 자신들도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여, 과거 열조들이 적들에게 승리했듯이, 지금 자신들도 적들에게 승리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4) 그리고 넷째,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열조들을 통해서”, 또 “스스로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5) 다섯째,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사실이 일어납니다. 자신은 언약을 배신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앞서 말씀하시고 행해왔던 것과 반대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들은 패하기 시작했고, 언약의 복들을 빼앗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언약에 신실하기 때문에 적들에게 나가면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가서 지는 것입니다.
자, 시편 44편의 전체 내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시편 44편의 내용을 다 정리해서 듣고 나니까 그 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또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다수의 신자들이 실수하거나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앞에서 정리한 대로 매우 합당한 방식으로 이해를 밟아왔습니다. 언약에 충실했기 때문에 이겨야 하고, 또 실제로 열조들도 자신들도 그 이김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에 차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언약을 지키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현실이 그렇지 않은 때가 생긴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명령대로, 매뉴얼대로, 가르침대로 행동을 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명령하신대로, 매뉴얼대로, 가르치신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많은 이들이 여기에서 이렇게 말하면서 나가떨어지게 됩니다. “틀렸어! 하나님이 틀렸어! 하나님이 말씀을 어겼어! 하나님이 잘못한 거야!”
언약에 신실했지만 고난을 만났을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현실은, 사실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이러셨던 때가 없습니까? 아니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하나님이 불의하다”, “하나님이 이러실 수 없다”라고 마음속으로라도 생각하셨던 적은 없습니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살았는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큰 불행을 주시는 것인가!”라고 커다란 의심을 가지고 되물어본 경험이 없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실을 반드시 붙드시기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절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상식이 가능한 영역 안에서만 하나님을 든든하게 의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태풍이 불 때, 내 집은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나랑 똑같이 지은 옆집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 마음속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든든하게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정말 절대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가 물론 있지만, 동시에 그 신뢰를 무너뜨릴 만한 일이 일어나면 내 마음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는 자들이라는 것을,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일을 당하기 전에는 자신이 그럴 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식이 가능한 영역에 있을 때만 믿음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고 계신 것처럼 “보일 때에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고 계신 것처럼 보일 때에만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치 언약을 지키시지 않고 계신 것처럼 우리 눈에 보일 때에도 여전히 언약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라서 변개치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절명의 언약, 예를 들면 혼인언약이나 국가적 중대성을 가진 언약 같은 것에서도, 상황이 나쁘게 몰려가면 그 언약을 “바꿀까?”라는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으시며, 뜻을 바꾸시지 않으시며, 정한 것을 돌이키지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서 계시며, 자기 백성과 정한 약속을 결단코 바꾸시지 않습니다.
이 첫째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내 주변의 모든 증거가 “하나님이 배신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반드시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첫째를 고백할 때, 우리는 둘째 이유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신실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보기에”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답은 하나님께 우리가 모르는 숨은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려져 있고,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지금 다 알 수도 없고, 알려 해도 하나님이 알려주시지도 않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기에 언약에 신실하지 않게 보이는 행동을 하시는 이유는 모두 여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또 다른 뜻이 있으시다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44편은 우리에게 이것까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전체적으로 다시 읽어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라는 사실과, “그런데 우리는 언약에 신실했는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바로 이 때 시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17절부터를 아까 보았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정당성을 이야기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자 이제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17절, 우리가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않았다.
18절, 우리가 주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19절, 그런데 우리가 사망의 그늘에 있다.
20절과 21절, 우리가 배반했더라면 배반의 벌이라고 할 것이지만 아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어디로 나아갑니까? 23절,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24절,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절,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습니다.”,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보기에 언약을 이행하지 않고 계시는 것처럼 보일 때 시인이 보인 그 다음의 행동은, “다시 언약의 하나님께 나아감”입니다. 시인은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언약을 이행하지 않으실 리가 없으므로, 다시 그분께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모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를 모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결과는 한 길로 갑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행치 않으시는 것 같을 때는 우리 편에서 그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다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우리 교회에서 도르트 신경에서 제일 많이 인용한 부분이 여기일 것입니다. “내가 낙심하고, 믿음이 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게 되고, 마음이 심하게 난도질 당했을 때, 그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신뢰하기는커녕 붙들 힘도 없습니다.” 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르트 신경은 그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때 더 은혜의 방편을 붙드십시오”
우리는 “내 마음이 떨어져 있는데 무슨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말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엄마가 나를 쳐다보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의 손을 더 강하게 부여잡습니다. 어떤 아이도 엄마가 길을 잃은 상황에서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해서 엄마 손을 버리고 다른 길로 가지 않습니다. 마음이 낙심되고 무너지면 아버지를 더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낙심되었으니 하나님을 더는 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정말 이상한 말입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태도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이상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데 일이 이상한 데로 흘러갑니다. 고난이 닥칩니다. 그런데 내 잘못이 아니니까 하나님이 잘못한 것 같습니다. 바로 이 때 시인은 하나님께 따져묻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러므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또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최후의 질문.......그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않으시고, 언약을 배반하시는 것처럼 보이실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시편 44편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해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봉독시간에 읽었던 로마서 8장 35절부터 39절을 읽고 마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