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전달이 참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뭘 찾아본다고 뒤적거리다
안동의 한 가문의 좋은 글이라 옮겨 봅니다
양떼가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국보「훈민정음해례본」과 안동과의 인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1443년(세종 25년)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한 훈민정음 28자가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본(例意本)'과 '해례본(解例本)'로 나누어져 있는데,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은 것으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하여
「세종실록」과「월인석보」등에도 실려있어 널리 전해져 왔지만
한글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해례'는
모두 소실되고 없어져 오랫동안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한글이 창제되고 3년 후인 1446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이 처음 반포될 때
세종대왕은「훈민정음해례본」을 통해
문자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와 창제 원리를 설명했는데,
안타깝게도 연산군의 한글 탄압과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글 말살 정책을 펴면서
한글을 탄압하고 한글 관련 서적들을 압수, 소각하여
해례본이 대부분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전권 33장 1 책으로 된 해례본이 소실되면서 한글은 순식간에 뿌리를 잃어버려
한글의 형체에 대하여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篆)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창살 모양의 기원설까지 나올 정도로 구구한 억설이 난무하였다.
그러던 중 소중한 해례본이 1940년 8월 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던 것이다.
▲ 안동 '두류종택' 전경
안동의 진성이 씨 두류종택에서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 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40년까지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주하동
이한걸(李漢杰) 家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한걸의 선조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 이정(李禎)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았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한글 말살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훈민정음해례본'을 찾기 위해 헐 안이되어 있었다
해례본을 없앤다면 조선 초기까지 소급되는 세종의 한글 창제의
신화는 깨어지고 조선의 한글을 말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 정신을 담은 그릇의 뿌리와 기원은
허구화될 수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 세종대왕 동상과 간송 전형필 모습
이 무렵 경성제대와 경학원(현, 성균관대학 전신)에서
국문학을 강의하던 김태준(월북) 교수는 경학원의 제자였던
이한걸(李漢杰)의 셋째 아들 이용준(李容準, 1916~?, 월북)으로부터
자기 집 가보로 '훈민정음해례본'이 내려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김태준은 급히 우리 문화재 지킴이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을 만나서
해례본에 대한 정보를 귀띔하였고,
간송은 위험을 무릅쓰고 구입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간송은 충직한 거간인 이순황을 통해
해례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당시 기와집 10채 값에 해당하는 일만 원과 거금의 중계 사례비를
별도로 주고 어렵사리 해례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간송은 해방 때까지 해례본을 몰래 간직하다가
6.25 동란을 맞아서는 해례본 한 권만 오동나무상자에 넣어
가슴에 품고 피난 떠나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면서
보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 안동본(간송본)의 출현을 통해
훈민정음은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현재 서울 성북동 간송 미술관에 보관 중인 훈민정음해례본 안동본(간송본)은
이러한 수난을 겪으며 보존되었고 해례본의 실증을 토대로
훈민정음의 과학성과 독창성이 입증되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현재 세계의 많은 나라들 중
모국어를 사용하는 나라는 총 28개국으로서
이들 28개국도 대부분 자신의 고유 순수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영어, 불어, 독어,
그리고 한문의 영향을 받은 일본어, 몽골어 등으로 국한,
순수문자는 중국어, 라틴어, 아라비아어, 인도어, 에티오피아어,
그리고 한글로 단, 여섯 개 밖에 없다.
이 중 표의문자(表意文字)가 아닌 표음문자(表音文字)는 라틴어와 한글,
누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아는 문자는 한글이 유일하다.
▲ 안동 '긍구당' 전경
▲ 안동 '긍구당'
그런데 이 소중한 한글의 제자원리를 입증할 수 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안동본(간송본)은
앞에서 설명했던 안동 와룡면의 이한걸가의 소장본이 정설이었으나
지난 2005년 이를 반박하는 주장이 나와 세간의 주목을 끌어었다.
안동이 고향인 부산의 한 중학교(동래여중) 교사(박영진)가
한글학회 기관지인 '한글새소식' 제395호에 기고한
<'훈민정음해례본' 유출과정 연구>라는 글에서
실제로는 안동군 와룡면 가야리에 소재한 긍구당(肯構堂)
광산 김 씨 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세 전가보(世傳家寶)를
광산 김 씨 종가의 종손 김응수(金應洙)씨의 사위였던 이용준(李容準 월북)이
1940년대 초에 처가에서 김매월당집(김시습 문집)과 함께
훈민정음해례본을 빼돌린 뒤 간송에게 팔아먹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나와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주장은 한 국문학자가 이용준이
처가에서 책 여러 권을 훔친 사실을 실토하면서
장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입수해 공개하면서
신빙성을 높여준 바가 있었으나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 안동 학가산 '광흥사'의 전각 모습들
그런데 한 권뿐인 것으로 알려졌던 훈민정음해례본은
또다시 안동의 한 사찰에서 보관 중이던 것이
경북 상주에서 공개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9년 9월 어느 날 안동 학가산 '광흥사(光興寺)' 나한전에 있던 것을
도굴꾼 서 모 씨가 월인석보 3권, 5권, 7권과 석보상절, 오성제자 고와 함께
또 다른 '훈민정음해례본'을 훔쳐서 경북 의성지역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상주의 고서적 취급점의 조 모 씨에게 500만 원을 받고 팔았던 것인데
2008년 상주의 배 모씨가 집수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해례본을 공개한 것이다.
▲ '광흥사'의 '나한상'이 있던 '나한전'
▲ 안동 '광흥사'의 훈민정음 대학 강의실
배 씨가 해례본 상주본을 공개하자 소장자였던 조 모 씨가
상주본의 원소유주는 자신이라며 '민사소송'을 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문서들을 배 씨에게 무더기로 헐값에 팔았는데
해례본 상주본이 그 속에 섞여 있었다는 주장이다.
배 씨가 상주본의 가치를 알면서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헐값에 사 간
고문서 속에 섞어 가져 갔으니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배 씨는 상주본이 조 씨에게 산 무더기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따로 '형사소송'을 냈다.
민사소송에서는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조 씨가 승소했다.
하지만 배 씨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상주본을 조 씨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승소한 조 씨는 2015년 5월 돌려봤지 못한 상주본이 귀중한
문화재임을 알고 문화재청에 기증하고 얼마 후 사망했다.
그런데 민사소송에서 패소한 배 씨는 형사소송에서
훔쳤다는 증거가 충분치 못해 배 씨의 절도혐의는 무죄 판결이 나면서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 법적 소유권은 문화재청에 있으면서
실제 소유는 배 씨가 하고 있다.
▲ 안동 '광흥사' 나한상(복장 도난 당시의 모습)
상주본도 국보 70호로 지정된 안동본(간송본)과 같은 판본이고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주본은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안동본(간송본)에 없는 훈민정음 창제원리에 대한
주석이 수록되어 있어 국보지정본(안동본) 보다 오히려
학술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배 씨는 2008년 처음 공개 당시 해례본을 보여준 이후
지금까지 공개는커녕 그 행방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배 씨는 상주본을 묶어둔 끈을 풀어 여러 곳에 낱장으로 분산 보관해 왔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상주본의 가치를 1조 원 이상으로 평가했고
배 씨는 평가액의 10%인 1천억 원을 주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원소유주 조 씨가 국가에 기증을 했으므로
국가 소유이기 때문에 보상해 줄 수 없다면서
배 씨 집을 수차례 압수수색을 했지만 상주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인 2015년 3월 상주의 배씨집에 큰 불이나
골동품과 고서가 거의 모두 불타버렸다.
배씨집에 일부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상주본 또한 상태가
어떠한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배 씨는 자신의 절도 혐의를 벗겨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1천억 원 정도의 보상을 해 주지 않으면
해례본은 영원히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법적으로 소유권을 기증받은 상황에서
해례본을 돈을 주고 사들이는 것도 어불성설인데
오랜 시간 악조건에 방치되다가 훼손되면 그도 문제가 아닐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안타까워할 뿐이다.
물론 소유권을 인정받은 정부가 배 씨를 고발해 처벌을 할 수도 있지만
문화재를 숨긴 죄로 3년 이상 징역을 받더라도 배 씨가 어디 두었는지 밝히지 않고
징역형만 살고 나오면 더는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안동의 학가산 광흥사는 어떤 경로로
훈민정음해례본을 소장하게 되었을까를 살펴봤다.
광흥사는 지금의 안동시 서후면 자품리 학가산에 위치한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서
불교 중흥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왕실 어첩(御牒)과 명나라 황실의 친서를 보관했으며
경전을 인출하는 인경불사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사찰이다.
1827년 화재로 시왕전과 일주문을 제외하고는
500여 칸에 이르는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가 그 후 중창되었는데
1946년 다시 큰 불로 대웅전이 소실되고
1952년에는 극락전이, 1962년에는 학서로 등 전각도 퇴락해 무너졌지만
지금도 16 나한상은 국내에서 가장 웅장한
당시 안동지역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
어필각에는 세종대왕의 친서인 '수사금자(手寫金子) 법화경' 1권과
영조대왕의 친서 대병풍(大屛風) 16첩, 어필족자 1개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불교계의 주장에 따르면
훈민정음해례본은 현재 모두 2권이 남아있는데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안동본(간송본)과
안동 광흥사 불상 복장물 도난 사건 과정에서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은 서로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 연결고리는 세종대왕의 왕사였던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와
세조 때 국사를 지낸 그의 제자 학조대사(學祖大師 1431~1514 추정)라는 것이다.
▲ 학조대사 영정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
고대 인도어인 범어와 티베트어, 몽골 팔사파 문자 등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미대사와 도학과 학식이 뛰어났던 학승으로 그의 제자였던 학조 대사,
그리고 불경 번역에 능통한 학열대사(學悅大師) 등 세 스님에게
집현전 학사들과는 별도로
속리산 복천암, 경기도 현등사, 진관사, 흥천사, 양주 회암사 등의 사찰에
창제 공간을 따로 만들어 주고 세 스님을 주축으로
새 글을 연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유교 사회에서
유생들의 한글 창제 반대와
최만리, 김문. 정창손 등 집현전 일부 학사들이 한글 반포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상황에서 스님들의 한글 창제 공헌에 대한
공적을 감추어 유생들로부터 스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사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법보신문 1298호. 2015. 6. 17일 자 참조)
또 법주사 복천암(福泉庵) 사적기(事蹟記)에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미대사의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영산김 씨 족보 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다는 설이
그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다.
신미대사는 충북 영동에서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큰 뜻이 없고 우연히 접한 불교경전에 심취하여
속리산 법주사에 출가하였다.
학조대사는 신안동김 씨 10 세손인 한성판윤을 지낸 김계권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속명은 김수성(金守省)이며 안동 풍산 소산리 출생으로
세조의 국사였으며 한 때 홍길동에게 무예를 전수해 주기도 했었다..
스님은 말년에 고향 안동의 학가산 광흥사에 주석하며 판각 전을 짓고
훈민정음해례본, 월인석보 등을 인쇄하여
각 지방에 보급하고 풍기 희방사와 학가산 광흥사에도
이의 보전을 위해 보관했었는데
희방사 소장본은 6.25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볼 때 현재 남아있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안동본과
상주본이 모두 안동 학가산 광흥사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불교계는 추정하고 있다.
이렇듯 값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의 가치를 지닌
소중한 민족 자산인 훈민정음해례본이 두 권씩이나 모두
안동에서 소장되었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한글 보존과
안동과의 인연은 예사롭지가 않다.
'정신문화의 수도'답게 안동에는 민족정신문화의 자산인
문화재들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장으로써 2013.12.31 현재
총 429점의 문화재(국가지정 86점, 도지정 216점, 기타 다수)를
보유하고 있어 전국 각종 문화재 보유현황에서 기초 자치단체 중
전국 1위(2위 경주 351점, 3위 제주시 231점)였다.
안동은 예로부터 예절을 알고 학문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유교문화의 원형을 온전히 잘 간직하고 있어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일컫는 고장이다.
또한 문화적 편향성도 가지지 않아 시대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지 않았기에 한 때 불교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조선 시대 양반사대부들의 권문세가도 많았고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재를 고르게 보유한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의 고장이기에
세종이 창제한 소중한 한글의 보존에도 크게 일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의 고장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