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수리 2684-1번지 (구)조수국민학교 옆
옛 조수국민학교 울타리를 겸한 비석군이다. 90여개의 비석들이 줄지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신성의숙 기념비(남쪽에서 일곱 번째)
비문 ;〈전면〉新成義塾紀念碑 天下桃李 盡在公門 〈후면〉先生所依有餘斟 古酌今瞬息止間 四個里有志設塾發論 相互合意其奬義塾 非但一人之事有志勉力成焉(4개리 유지들은 의숙을 설치하여 마을간의 합의로 다시 없는 배움의 터를 성사하다. 북제주군 비석총람 906쪽) 着工西紀一九二五年十二月 竣工西紀一九二六年五月 塾長 金大亨 趙南浩 金應謙 評議員 金容三 金宗鉉 文成直 〈좌측면〉西紀一九七六年四月日 造水里民一同建立 〈우측면〉楮旨里金季乭 邊宗欽 梁元鉉 淸水里 李東喬 任國鉉 樂泉里 金宗鉉 文成直
조수리에서는 면장 허가에 의해 1924년 향사를 신축하고 곧 4월에는 향사에 4년제 개량서당을 개설하였다. 초대숙장 김대형(金大亨), 평의원 김용삼(金容三) 등이 헌신하였다. 이 사숙은 인근 산간마을인 저지리, 청수리, 낙천리, 조수리 4개 마을이 공동으로 운영하여 처음 저지리의 김수후(金秀厚=金季乭?)·변종흠(邊宗欽)·양원현(梁元鉉), 청수리의 이동교(李東喬)·임국현(任國鉉), 낙천리의 김종현(金宗鉉)·문성직(文聖直) 등이 의숙운영회 임원으로 크게 활동하였다. 교사로는 수동의 양문숙, 무릉의 부태환, 낙천의 박성수, 조수의 김우경·강원호, 명월의 임상국, 고산의 강기숙 등이었다. 당시 학교의 위치는 조수리 중동이었고, 서쪽에는 숙직실, 북쪽은 대동(大洞)에 속하여 학교 전체는 중동네와 큰동네의 중간 지점에 위치했다. 취학지구가 4개리여서 재학생수가 많아 도가(都家) 집 앞에 동향으로 3개 교실, 북쪽에는 직원실과 1개 교실이 있었다. 또 남쪽에 3개 교실을 증축하였다. 수업 방식은 1·2학년인 초급반과 3·4학년 고급반으로 나누어 복식수업으로 가르쳤다. 뒤에는 학생이 증가하자 학년별로 수업했다. '제주여성문화유적'에는 학생이 50명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교실을 계속하여 증축한 것으로 보아 훨씬 더 많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조수개량서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폐지되었다.
김대형(金大亨 1843~1927)은 한경면 조수리에서 태어나 구우면(舊友面, 현 한림읍)의 풍헌을 역임하고 면 행정이 현대화되자 면사무소의 초기 영수원(領收員)으로 공무원을 역임하였다. 1924년 조수리에 4년제 개량서당 신성의숙 개설을 서둘러 신식공부를 장려하였다. 먼저 친형 김대열(金大烈)의 미망인 김해김씨를 설득시켜 아들 창수(昌洙)의 농토를 희사하게 하여 학교 부지를 마련, 개량서당을 신축한 뒤에 인가를 받았다. 김대형은 초대 숙장으로 헌신하여 타계하자 1927년 4개리 공동으로 공덕비를 세웠다.
유향좌수 김대열 처 의인김해김씨 기념비
<후면> 懿哉 此金氏早寡 年高克諧家道矣 于今文明 創建校室 其嗣子參奉金昌洙 捐出品田 完成基址 惠補美且多焉 一鄉物議 刊此片碣 以表紀念 而右昌洙氏 克盡慕先之道 固辭於母位 故美其誠讓 歎其追推 闡金氏紀念焉 銘 當辭克讓 母慈子孝 惠施有方 永報石表 昭和二年 五月 日 造水里
아름다워라. 이 김씨 여인은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연세가 높아지도록 가족이 화목하는 도리를 지키셨다. 이제 문명한 시대에 학교 교실을 창건하려 하매 그의 큰아들인 참봉 김창수가 의연품으로 밭을 내주셔서 터를 완성하게 되매 은혜로 보태주심이 아름답고 또 많아라. 온 마을 사람들의 의견이 이 작은 비석이라도 세워 기념하자 하였고, 위 창수 공도 선조를 위하는 도리가 극진하여 굳이 어머니의 신위에 공로를 돌리므로 그 정성과 양보를 찬미하고 추모하여 섬김을 감탄하여 오직 김씨 여인의 공덕만 기념하노라. 명문의 내용이다. 극구 사양하는 말씀 들으니 어머니는 자애하고 아들은 효자였네. 은혜가 사방에 베풀어지매 영원히 돌에 새겨 알리노라. 소화2년(1927) 5월 일 조수리
1924년 조수리에 4년제 개량서당 신성의숙 개설을 서둘러 신식공부를 장려할 때 앞장섰던 사람은 김대열의 동생 김대형이었다. 김대형은 친형 김대열(金大烈)의 미망인 김해김씨를 설득시켜 아들 창수(昌洙)의 농토를 희사하게 하여 학교 부지 마련에 앞장 서 개량서당을 신축한 뒤에 인가를 받았다. 조수리에서는 신성의숙 개설에 따른 김씨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공덕비를 세웠다.
의인(宜人) 조갑출(趙甲出) 기념비
<후면> 氏訓長公性溫之女也 天賦順正 克諧婦道 勞身鳩財 有志慈善 捐義益公 女中有德 芳名不巧 千秋一石 子 梁元行 女 己生
이 분은 훈장인 조성온 공의 딸이다. 천성이 온순하고 정직하며 부녀자의 도리를 잘 헤아렸다. 몸이 힘들게 하면서도 재료를 구하여 자선하는 뜻을 지니셔 의연금을 내셔서 공익을 도우셨으니 아름다운 명성 없어지지 않게 하려 오래 전해진 비를 세우노라.
학교를 설립할 때 당시 돈 200원을 희사하였으므로 기념비를 세웠다.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에서 학교 부지를 마련해야 했다. 학구민들이 주변의 땅을 매입하기 위한 의연금을 모을 때 가장 많은 돈을 희사하여 현 농협분소 부지와 그 앞의 교장관사가 있던 부지를 모두 사다가도 남을 정도로 큰 돈을 희사하여 학구민들이 고마워했다. 일본에 가서 바느질로 어렵게 살며 근근이 모은 돈을 희사한 조갑출 여사에 대한 표창식 이야기가 동아일보 기사에 남아 있다.
훈장 조경현 기념비
<후면> 公以閱世 簪纓之裔 大姿淳厚 六行全備 一鄉稱善 而里中穿井 獨捐要地 公校設立 更捐後 園 以成二美 比諸俗流 一美猶難 況二美乎 其於報瓊 不可泯默 故物議齊發 立石表誌 以壽永久 不朽之蹟耳 銘曰 修齊有度 模先遺風 有財能施 富仁適中(공은 지난 시대에 벼슬살이를 한 집안의 후예다. 천성의 자태가 순박하고 후덕하여 육행을 온전히 갖추었으니 온 마을이 선행을 칭찬한다. 그리고 마을 안에 우물을 팔 때 홀로 옥토를 내놓았고, 공립학교를 설립할 때도 다시 뒤뜰을 내주시었다. 이렇듯 두 아름다운 행위를 이루었으니, 속류들이 한 가지 미덕도 오히려 어려워함과 견준다면 하물며 두 가지 미덕이랴. 그 아름다운 뜻에 보답하려 돌에 새겨 세우니 오래도록 영구히 없어지지 않을 업적이여. 명문에 이르기를, 수신제가의 법도 지키며 선조를 본받는 풍모 남기시고 재물이 있어 능히 베푸시니 부자가 어질다 하는 말에 꼭 맞아라.)
<좌측면> 檀 四二七二年 庚辰(원래의 글자를 파내고 그 곳에 다시 새김. 1939년이므로 ‘昭和14년’이 새겨져 있었을 것임) 七月 日 楮旨 清水 造水 樂泉(저지 청수 조수 낙천)
조수학교는 신성의숙의 부지인 조수리 315번지를 기본으로 하여 주변으로 넓혀 나갔는데 학구민들이 학교 부지를 마련하려고 고심할 때 살던 집터를 내놓아서 그 공덕을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 학교 서쪽 소나무 동산과 관사가 있는 부지, 예전에 학교 뒤쪽에 있던 새왓이 모두 조경현이 살던 집터인데 조경현이 타계한 뒤 아들인 조인하(趙仁厦)가 학교부지로 모두 내놓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조인하는 한문 훈장을 역임하여 교육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고 평한다.
중암거사 조달지 기념비
國校延長 捐出戶當 학교를 늘리고자 가호의 배당금을 의연하시었으니
欲報斯恩 立石不忘 이 은혜 갚으려 비를 세워 잊지 않으리라.
<후면> 紀元二千六百六年 立
학교운동장 확장을 위하여 필요한 기금을 마을 가구당 얼마씩 분배하였는데 분배금 일부를 더 내놓아서 그 공덕비를 세웠다. 아들 조승우는 리사무소 앞에 있는 본인 소유의 땅을 마을을 위해 기증하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손자 조종률은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일본은 에도 바쿠후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과정을 겪었다. 1868년 메이지(明治) 천황 때이다. 이를 메이지유신이라 하며, 이후로 천황 중심의 정치체를 만들 목적으로 1872년 신무천황 즉위년인 서기 660년을 기준으로 기원(황기)을 세웠다. 紀元(皇紀)2606년은 서기1946년이 된다. 해방 이후임에도 일본 기원을 썼다는 점이 특이하다.
죽암선생 김용삼 기념비
天姿汎愛 里綱振作 천품이 자애로우셔 마을 기강 진작시켰고
奮勵公益 獎興教育 분주히 공익을 독려하여 교육을 장려하여 일으켰네.
伊誰之力 莫匪其德 이것이 누구의 힘이던가, 그분의 덕 아님이 없어라.
茲表一碣 千載不泐 여기 비석 하나 세우나니 오랜 세월 쪼개지지 않으리.
김용삼(金容三)은 당시 조수리의 구장으로서 숙장 김대형과 함께 신성의숙 설립을 적극 나서서 추진하고 헌신하였다. 아들은 선탁과 희탁이고 후손들은 서울과 제주시에 살고 있다.
조용하 기념비
猗歟公德 玉潤金聲 아름다워라 공의 덕이여 옥 같은 윤택 빛나는 명성이여!
善揚鄉里 光及校庭 고향마을 선양하니 광명이 학교의 뜰에 미쳤네.
嘆美斯仁 以覺後生 이분의 어짊을 찬미하나니 후생들을 일깨우리로다.
千載一石 不腐其名 천 년이 되도록 이 비석이여 그 명성 시들게 하지 않으리.
조수리 출신 재일교포로서 신성의숙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조남호의 아들이고 현학병 교장의 처남이다. 운동장 등 학교의 시설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기금을 희사하였다. 아들이 조무빈이다.
조무빈은 일제강점기 유학자‧항일운동가로 낙천리(樂泉里)에서 출생하였다. 향리의 서당 훈장을 지내며 후학들에게 민족자존과 외세배격을 강조하였다. 1910년(융희4) 일본에 의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백성들의 울분은 항일운동으로 번져, 제주도에서는 ‘무오법정사항일운동’, ‘기미조천만세운동’ 등이 발생하였다. 1919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자 각 서당의 훈장들은 학동들에게 독립운동의 의미를 가르치며, 국권회복의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내 유림의 지도자와 관료들이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은사금과 기로금을 횡령하자, 각 지역의 조무빈(낙천, 33세), 김여석(낙천, 27세), 박세현(저지, 39세), 신계선(신촌, 45세) 등의 젊은 훈장들은 분노하여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며 전 도민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벽보를 붙이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 일로 그 역시 1919년 10월 5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정시법위반으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 6개월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렀다. 형인 조문빈(趙文彬)도 서당훈장이자 한학자로 조천 선비 김형식의 시 <조문빈과 이별하며>라는 한시가 혁암산고(革菴散槁)에 전해진다.
교장 현학병 기념비
至矣哉 先生之爲德也 校已燒蕩 教鞭中絕 童求其師 無所應聘 匋匐匍赴任 先濟童蒙 灰燼荒村 同樂甘苦 風雪假校 不拘漏濕 多年教訓 育成衆寸 又輔期成 重設文化 燃然師道 容光乎兹 德音無量 恩鑑在邇 曷唯其偉 永頌于斯(지극하여라! 선생의 덕을 행하심이여. 학교가 이미 불타고 씻겨 없어져 가르치는 일이 중단되는 아동들은 스승을 찾아도 초빙해 올 길이 없었는데, 도포 차림으로 부임하시어 먼저 아동을 구제하셨네. 불에 타 황폐한 마을에서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하며 눈보라 치는 임시 교실에서 물이 새는 것도 구애받지 않고 여러 해를 가르쳐 일깨워 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도다. 또 기성회를 도와 문화시설을 일으키시니 찬란히 빛나는 스승의 길이여. 여기에 그 광채 빛나네. 훌륭한 명성 끝없고 은혜의 광택이 여기 있으니 그 위대함 어찌 보답하리오. 여기에 영원토록 칭송하리라.)
4·3 재건 후의 초대교장으로 김우경 기성회장이 초빙해왔다. 부인이 재일교포인 조용하의 누님이어서 조수리에 살면서 학교의 재건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학교가 4·3으로 잿더미가 되어 분하고 찾을 길 막연한 처지에서 현학병 교장은 학교연혁 등 훼손된 제반여건을 보충, 보완하였다.
《작성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