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가두기 위해선 먼저 그곳에서 재앙을 맞아 돌아오지 못하게 된 피해자들의 기억을 소환해야만 한다. 피해자들의 감정을 기억해 내고 고통을 나누어야만 열쇠가 봉인의 효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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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교감의 방식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확장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영혼이 된 피해자들과도 초월적 교감을 시도하면서 왜 살아 있는 피해자에 대한 교감과 사죄는 어려운 것일까?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 그게 바로 역사적 인식의 시작인데 말이다. 그래서 그 치유와 이해는 늘 선택적으로 보인다. 집단적 치유는 사실 확인 및 사죄를 동반해야 한다. 가해자의 사죄 없는 집단적 치유는 자기 최면이나 정신 승리와 다를 바 없다. 대지진과 같은 반복된 자연재해 앞에서 일본은 절대적 피해자의 위치에 익숙해진 듯싶다. 자연으로부터의 재앙은 가해와 피해를 따지기 어려우니 배타적 적대시로 서로를 위계화하거나 내밀한 치유의 방식으로 자기 구원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분화된 방식 속엔 진정한 이해와 화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