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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없……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네. 작년에 왔던 각설이(진짜 작년이네;;)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언제나 그렇지만 읽어주시는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챕터는 '대체 이게 왜 크킹 연대기?' 싶을 만큼 크킹과 상관 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쭈글쭈글)
주인공은 1100년생 이 챕터에서는 한국 나이 34세의 중세인이며, 주인공의 사상이나 지향이 꼭 저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전 이야기는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카페 PC버전은 긴 글을 읽기에 너무나 안 좋으므로 모바일로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나는 사람을 웃기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숨도 못 쉬고 박장대소하며 웃는 딸과 아내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를 왜 때려요. 때리지 마세요. 불쌍하잖아요.”
아키텐 국왕은 오늘도 자비롭다. 노에 얻어맞고 기절해 수면 위에 둥둥 뜬 물고기를 가엽게 여길 만큼. 화사한 얼굴로 소리 높여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내 눈치를 살펴 웃음을 참을 프레브라나까지 오라드와 함께 까르르 웃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노를 거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히 햇살이 내려앉은 늦가을 낮의 호젓한 은빛 호수 위, 우리 가족이 탄 나룻배를 위시하고 늘어선 배 몇 척에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떠는 위병과 다리 위에 얹은 주먹을 불끈 쥔 시종들이 흘끗 보였다. 웃음이 터지려는 옆 사람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찌르는 이까지.
“웃고 싶으면 웃어도 좋네.”
그런다고 기꺼이 웃는 얼빠진 이는 여기 뱃놀이하는 선객 중에 없다. 허연 배를 내놓고 드러누웠던 물고기만 다시 정신을 차려 한 번 풀쩍 뛰어오른 뒤 물밑으로 도망칠 뿐이었다. 한참을 웃던 오라드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이상하네요. 아버지가 배를 태워 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삼촌이 아버지는 뭐든지 다 잘한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손재주는 삼촌이 훨씬 더 좋았어. 삼촌이 만든 목마를 떠올려봐.”
아무래도 처남이 생각한 ‘뭐든지 잘한다’와 내 생각이 불일치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아이에게 아비의 체면을 세워주려 빈말을 했거나. 장인은 당시 권력자로서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고명아들과 다른 소년들, 그러니까 사위인 나나 조카인 위그 등과 차등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플랑드르 공인 처숙부가 왕성에 머물면 나와 처남, 그리고 위그와 그 아우 필리프가 함께 어울려 교육을 받곤 했다. 당시 나는 아무리 사소한 수업이나 행여 미래의 군주를 제쳐 나쁜 인상을 남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그럴 것도 없이 나는 단 한 번도 처남을 이겨보지 못했다. 스스로 뛰어나다고 자만했던 분야도 다. 시무룩해 방으로 돌아가니 파트리샤는 나를 상냥히 다독이며 반대로 자신이 스코틀랜드에 갔다면 절대로 나를 이기지 못했을 거라며 속삭였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파트리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주제넘은 짓을 했다며 화낼지도 모르니 이대로 행복한 바보가 될까, 그런 턱도 없는 고민을 하며 며칠을 보냈다. 체술로 처남에게 완패를 당하기 전까지.
‘곱게만 자랐으면서 무슨 힘이 그렇게 셌는지.’
나는 처남이 보여준 우애가 고마우면서도 두려웠다. 우리가 자랄 수 있었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고 그가 나를 신임할수록 내 운신 폭은 칼날처럼 좁아졌다. 결국 나를 형이라 부르던 유일한 사람은 생을 다하고 나서야 다시 내 형제가 되었다. 강하고 영리한 군주였다. 백발이 되도록 오래오래 통치할 것 같았다.
“리키?”
프레브라나가 나를 부르며 내 손에 쥔 노를 함께 잡았다.
“미안해요. 많이 힘들었죠? 이제 제가 할게요.”
얼떨결에 노를 뺏겼다. 프레브라나는 내 손목을 가볍게 몇 번 주무르더니 자리를 고쳐 앉고 능숙하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자기 키보다 더 큰 노를 둘이나 양손에 쥐고서. 우리가 움직이자 우리를 둘러싼 이들도 속도를 맞춰 느릿느릿 나아갔다. 어느새 한기를 담뿍 머금은 물기 어린 가을바람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푸아티에의 가을은 남쪽의 보르도보다 더 이르게 찾아왔다. 꽃보다도 더 화려하게 물든 단풍 위, 훌쩍 높아진 말간 하늘에 철새들이 떼지어 날아가며 긴 울음을 울었다. 바람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마른 나뭇잎을 스치면 풀벌레가 찌르르 울며 소리를 섞었다. 그 틈에 간혹 낙엽을 헤치며 작은 발이 호다닥 바삐 달렸다. 겨울을 준비하는 산짐승이었다. 사람들은 10년 만에 관향을 방문한 푸아티에의 새 주인을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웃음을 지으며 환영했다. 평생을 푸아티에 가문에 봉사한 노인은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폐하, 살아서는 다시 폐하를 뵙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허리를 숙인 노인의 뒤로 어린 청년이 몸을 낮춰 그 들썩이는 어깨를 조심스레 다독였다. 노인의 손자였다. 나는 청년이 아이이던 시절 성 여기저기를 활발히 돌아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던 앳된 모습을 떠올리며 두 사람을 일으켰다. 오라드는 눈물범벅이 된 노인의 깡마른 손을 잡고는 손녀처럼 다정히 얼싸안았다. 너무 어릴 때 온 거라 저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할 텐데. 그렇지만 그건 굳이 묻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할 사람들을 늘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도착 첫날 알현은 해가 저물도록 이어졌다. 국왕을 처음 보는 아이들부터 행차 구경을 나온 어른들까지, 청명하다 못해 쓸쓸한 마음마저 드는 푸른 하늘 아래 다양한 사람들이 가득 차 움찔움찔 고개를 기웃거리며 발돋움했다. 그들의 시장과 교구의 사제를 비롯해 인근의 지주와 그 가족들, 실무관, 치안대 등은 차례로 나서 이 땅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외부 알현을 마친 후 우리는 자리를 옮겨 푸아티에에 체류하는 동안 가깝게 봉사할 이들의 인사를 따로 받았다. 참을성 있게 버티던 오라드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져 다음날 낮까지 깨어나지 못했다. 나는 옛 추억이 배인 성 여기저기를 천천히 거닐며 보르도를 떠나오기 전 있던 일을 차례로 곱씹었다.
살레르노에서 아키텐의 약혼 제의를 받아들였다. 노르망디를 고향으로 둔 오트빌 가문은 국왕의 배위로 자신들을 선택해 준 푸아티에 왕가의 호의와 옛 인연에 깊이 감사하며, 자애롭고 부귀한 미래의 신부와 이후 젊은 부부가 만들어갈 가정에 전능하신 신께서 한없는 축복과 영화를 내려주시길 기원한다는 정중한 답서를 보냈다. 지중해와 맞닿아있는 건 지금의 프랑스가 아니라 아키텐이니 그들로서도 우리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터. 적자가 아닌 것은 아쉬우나 이미 역병으로 여러 가문이 문을 닫은 유럽은 아이가 귀해, 설령 아들 셋이 있다 한들 단 한 명도 남의 가문으로 보내지 않으려 한다. 국왕의 곁에서 함께 왕관을 쓰는 것보다 손바닥 크기만한 영지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답신을 받은 후 나는 오래 미뤄왔던 왕성 보수를 지시했다. 특히 장차 국왕 부부가 지낼 공간을. 역대 가주가 쓰던 방은 처남이 출정한 후 사람의 온기를 잃었다. 떠나간 선왕비의 방도 파트리샤의 방처럼 모든 물건을 소각한 장모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새 주인이 마땅히 자신이 지닌 권리로 누려야 할 곳이다. 새로 단장할 궁실, 왕가를 수종할 새로운 사람들, 아울러 찬사와 경외를 보낼 여러 방문자까지. 내게는 처남 시절 번성하던 아키텐을 다시 복구할 책임이 있다. 간 사람들과 내 하나뿐인 자식을 위해.
“제가 가면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보수를 진행할 동안 왕성을 떠나 순행을 가자고 했을 때 오라드는 침대에서 몸만 일으킨 채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품에 안은 흰 토끼를 작은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너무 오래 찾지 않았어요. 그리고 바쁜 시기이고요. 공연히 번거롭게 한다며 싫어할지도 몰라요. 저는 삼촌처럼 키가 크지도 않고…….”
나이가 차서 그런가, 오라드는 점점 용모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남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 것인지를.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었다.
“네가 언제 가든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어. 네가 주인이니까. 오히려 네가 한 번도 찾지 않는다면 왕가가 자신들을 잊었다며 섭섭해할 거야.”
나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 시간 누워 뒤척거린 탓에 곧은 머리카락이 새집처럼 변하고 말았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해달라고 해. 당연히 널 맞이하라 하고 널 위해 행동하라고 해. 혼자 움츠리지 말고 지시해. 누구한테건 마찬가지로.”
오라드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딸을 마주 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린 국왕의 입에서는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난 소리가 나왔다.
“남들은 겨울이 될수록 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대요. 난롯불을 피우고 모여 앉아서요.”
그거 좋은 거 아닌데.
불쑥 떠오른 옛 기억을 다행히 혀가 막았다. 20년이 가까이 지났지만 내 기억 속의 난롯가에는 언제나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윈 작은형이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형 대신 잡일을 하느라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살얼음이 낀 물로 씻다가 꽁꽁 얼어붙었고. 누나와 큰형의 얼굴에는 짐을 옮기다 붙은 노란 지푸라기가 수시로 있었다. 모여 앉은 우리는 작은형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었고 타다 남은 장작불의 매캐한 연기를 맡으며 잠에서 깼다. 검댕으로 얼룩덜룩해진 얼굴은 덤이었다. 로스의 모든 것은 모레이 공작의 소유였고 어렸던 길크리스트는 자신의 선친에게 재산을 강탈당한 전 로스 백작과 그 남매를 보살필 수 없었다.
“……그렇게 하게 해줄게. 맛있는 것도 많이 갖다 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듣고. 시빌이 보고 싶으면 앙굴렘으로 마차를 보내 불러와 줄게.”
사람은 자기가 누리지 못한 것에 환상을 품는다. 분명 시중을 드는 누군가에게 들었겠지. 나는 굳이 출처를 묻진 않았다.
“아버지도 함께 계셔야 해요. 아니면 필요 없어요.”
아이는 투정을 부리듯 중얼거렸다. 기뻐하는 표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빠는 네가 부르면 언제든 올 거야.”
순행을 준비하는 기간은 평상시보다 할 일이 몇 배로 더 많았다. 인원을 차출해 생통주를 지나 푸아티에로 향하는 가도를 새로 정비하고 병사와 마필이 두를 의장을 손질해야 했다. 특별히 베풀 배급도. 게다가 으레 이즈음에 계산해야 할 호밀의 겨울 파종과 육류의 저장까지. 추수가 진행되자 거리는 곡물이나 과일을 가득 실은 수레로 북적였다. 소금을 실은 통에 싱싱한 돼지 넓적다리를 집어넣어 가져온 농부도 여럿 보였다. 그 사이에서 관원들은 여전히 사주전을 색출하고 또 저울을 속여 신과 국왕의 율법을 어기는 자가 없는지 감시했다. 시장 중앙에는 난전과 야합해 뇌물을 받아 배임죄로 처형된 관리의 수급 여럿이 흉물스럽게 걸렸다. 무능한 자들이 차지하던 자리는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새로운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외에도 선량한 이들을 속이는 것도 모자라 행패를 부리며 사욕을 채우던 집단은 재산을 몰수하고 바다 너머로 추방했다.
가을의 젖은 흙냄새는 해의 높이가 내려앉을수록 더욱 짙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새파란 하늘 한복판을 채운 양떼구름을 보며 생통주를 향했다. 키 큰 장정이 두 팔을 벌려도 목을 감싸지 못할 우람한 말들이 왕가의 마차를 차례로 끌며 걸었다. 빈 마차였다. 오라드는 망아지 시절부터 키웠던 우윳빛 하얀 말에 올라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이의 곁에서 함께 말을 몰았다. 이동하면서 읽으려고 준비한 것들은 한 장도 펼치지 못하고 그대로 마차에 고이 놓였다. 말을 타고 처음으로 먼 거리를 걷는 내 자식을 곁에서 보호해야 하니까.
“이제 말씀해 주세요. 제가 어떻게 할까요?”
생통주 성에 도착한 첫날, 우리를 지키는 눈이 하나도 없는 시간이 되자 프레브라나가 나직이 내게 물었다.
“이런 걸로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잖아요.”
단순히 보수공사 하나만으로 보르도를 떠난 것이 아니다. 하물며 해마다 이렇게 영주를 번다하게 하는 가을임에야. 역대 가주가 원래 푸아티에를 자주 방문했고 곧 성년을 맞을 새 주인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으나 내가 서두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궁의가 내게 오라드의 휴식을 권했다. 아이 얼굴에 다시 핏기가 가시고 앓는 날이 길어졌다. 요양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들이 의구심조차 품지 못할 명분이 필요했다.
“강요는 하지 않겠소. 잘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테고, 다들 당신이 태만하고 놀기만을 좋아해 오라드를 휘두른다며 혀를 찰 테니.”
아이를 최대한 쉬게 해야 한다. 쏟아지는 정무에서 눈을 돌리고 녹음을 바라보며 맛난 걸 먹게 해야 한다. 영민하고 조숙하다는 장점은 점점 더 내 딸을 왕좌에 억세게 옭아맬 것이다. 나는 무심결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프레브라나는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계시는데 누가 저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아키텐에서 제일 센 사람인데.”
“우리는 바라보는 눈이 많소.”
“앞에서 못 할 말까지 짐작해주며 살고 싶진 않아요.”
까칠해졌어요. 프레브라나는 킥킥 웃으며 수염이 돋아난 내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당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저와 오라드 말고도 또 있었네요.”
프레브라나의 목소리는 아직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이에게 찬물을 끼얹듯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의지할 데가 없으니 다른 자를 위해 움직이진 않겠지. 무엇을 약속받든 내가 더 큰 것을 줄 수 있으니. 다만 살아서 오라드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오. 만약 그러려 한다면 반드시 없애야 하니까.”
우리는 생통주에서 한 달을 지냈다. 내가 국왕령 각지의 생산량을 예년과 비교하며 상승한 임금이나 줄어든 경작지 등을 파악하는 동안 프레브라나는 오라드의 손을 잡고 생통주 곳곳을 구경했다. 간혹 오라드가 꼭 내 동참을 요구했기에 나도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소하게 수확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도 했다. 왕국의 수도는 그 왕국의 부가 집중되기에 필연적으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크다. 비슷한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이 나라의 어린 국왕은 아마도 생전 처음 볼 것이다.
떠날 때가 되자 우리는 다시 사람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을 갖추고 앞으로 나섰다. 천진한 눈빛을 빛내며 불쑥 나타났던 낯선 소녀는 군주의 위용으로 돌아와 생통주의 선량한 이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빌며, 내년 꽃이 활짝 피는 계절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했다. 오라드는 다시 직접 말에 올랐다. 올 때와 다름없는 행렬이 포도 내음 사라진 가을 길을 걸으며 푸아티에로 향했다.
성벽 위를 걷던 내 눈에 푸른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행렬이 보였다. 오늘 즈음 당도할 것이라 미리 알린 앙주의 깃발이었다. 나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직접 오라드를 깨웠다.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이는 딸의 기운 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렸지만 당장 일어나야 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알현실로 내려가자 잠시 후 서로 꼭 닮은 청년과 소년이 손을 잡고 들어왔다. 청년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신께서 가호하시는 고귀하신 국왕 폐하,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상왕 폐하, 앙주의 주인 페이용을 대신해 알현하옵니다. 국왕 폐하, 오래도록 통치하십시오.”
그는 우리가 인사를 받은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앙주의 고티에르. 섭정공이었던 선대 앙주 공작 풀크의 이복아우이며 현 공작 페이용의 숙부로 앙주의 섭정이다. 그리고 국정 고문인 닥스 백작 기랑드 경의 사위이기도 하다. 아직 서른은 안 되었던가. 나는 무심결에 그의 모습을 내가 기억하는 섭정공의 외모와 겹쳐 보았다. 별로 닮지 않았다. 솔직히, 자신 스스로 내가 그이의 아우라 나서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그는 큰 키에 다부졌고, 모친이 이탈리아 출신이라 그런지 머리카락은 금발인 이복형과 달리 시커멨다. 하늘처럼 푸른 눈만이 이복형과 비슷할 뿐이었다.
“난 비록 어렸으나 그대의 형을 기억합니다. 큰 슬픔을 당한 시절에 선대 풀크 공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오늘 고티에르 경을 만나 참 반갑고 기쁘답니다.”
오라드는 고티에르의 손을 작은 두 손으로 맞잡고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고티에르의 뒤에 있는, 그를 퍽 닮은 남자아이에게 눈길을 보냈다. 열 살쯤으로 보이니 누군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고티에르는 그 아이를 앞으로 나서게 했다.
“아드마르, 인사드리렴. 아키텐을 수호하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분들이시다.”
아이는 내 예측대로 고티에르의 장자였다. 아드마르는 제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오라드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그러나.
“Jubémus te salvére, regnátor, regína(*유베무스 테 살베레 레냐토르, 레기나. 통치자시여, 여왕이시여. 문안드립니다).”
나는 순간 흠칫하며 오라드를 보았다. 비록 어린아이의 말이라 하나 나를 칭하는 말이 국왕인 오라드보다 앞서서 나왔다. 통치자라는 말도 틀렸다. 아직 프로쿠라토르(*procurátor. 섭정)라는 말을 배우지 못했을까. 짧은 순간에 나는, 이 아이의 아비도 섭정이라는 사실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말실수한 것뿐이라는 낙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는 사이 오라드는 아드마르를 안아 올리듯 감싸며 일으켰다.
“Pax tecum, Dominus te ament(팍스 테쿰, 도미누스 테 아멘트. 평화가 있기를, 주의 축복을 바라노라).”
라틴어로 화답한 오라드는 으레 그랬듯 아드마르를 한 번 껴안았다.
“반가워요. 기랑드 경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할머니 없이 우리만 있어서 서운하겠지만 잘 지내다 갔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제 이야기 많이 하셨어요?!”
한껏 점잖게 굴던 아드마르는 오라드가 닥스 백작을 거론하자 아이 특유의 높은 소리를 올리며 반색을 보였다. 그러자 아들 목소리에 흠칫한 고티에르가 제법 그 나이 청년답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고티에르의 모친 데아는 45세나 차이 나는 늙은 남편이 병사한 후 귀네즈 백작의 맏며느리로 재혼했다가 아들 하나를 더 낳고 25세에 사망했다. 닥스 백작의 남편인 선선대 베아른 백작 가스통 경은 파트리샤의 38일 재위 시절에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외숙인 선대 베아른 백작 조프로이 경은 미증유의 재난을 수습하다가 내가 섭정을 맡고 얼마 안 된 시기에 쓰러져 급사했다. 고티에르의 두 형도, 큰형은 앙주를 물려받고 불과 4년 뒤 배후를 알 수 없는 암살을 당했으며 작은형 풀크 공은 차남 페이용을 남기고 처자와 함께 역병에 집어삼켜졌다. 그러니 아드마르에게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은 고티에르의 이부동생인 귀네즈의 샤를과 외할머니 닥스 백작뿐일 것이다. 외숙이야 한 명 더 있지만 자기보다 어린 삼촌이니.
“그럼요. 아드마르 경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데요. 기랑드 경은 내게도 할머니 같은 분이에요. 아드마르 경이 받아야 할 할머니의 사랑을 내가 대신 받는다고 속상해하면 안 될 텐데요.”
“여왕님, 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는 좋으신 분이에요. 그러니 할머니가 여왕님을 사랑하신다면 여왕님은 착한 사람일 거예요.”
나는 아이 아버지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가 얼마나 아들에게 의젓함을 주지시켰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드마르는 조금 전 라틴어로 능숙하게 인사하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들뜬 목소리로 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할머니를 추어올리며 바로 지금 만난 오라드를 함께 칭찬했다. 착하다거나, 예쁘다거나, 엄마보다 더 예쁘다거나, 자기가 본 여자아이 중에 가장 예쁘다거나. 언제까지 하려나 좀 더 지켜보려 했는데 결국 고티에르가 아들을 제지하려 손을 뻗으려 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눈짓하며 손끝으로 입을 지그시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하오, 아드마르 경.”
나는 앞으로 다가가 아드마르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러자 오라드는 내게 자리를 양보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내 키가 훌쩍 더 크니 그늘이 지기라도 했을까, 방긋 웃던 어린 손님이 다소 경직되었다. 아드마르는 제 아버지를 그대로 줄여놓은 것 같은 얼굴로 참 정중한 말을 읊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아드마르는 제 아버지를 그대로 줄여놓은 것 같은 얼굴로 퍽 정중한 말을 읊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어른의 예의를 흉내 내는 모양새는 참으로 마뜩잖았다.
“이리 온, 아이야.”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아이를 번쩍 올려 안아 들었다. 아이는 엉겁결에 나를 잡으며 기대 체중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나는 이 작은 손님을 오래 안지 못하고 바로 내려놓았다. 잠시 눌렸을 뿐인 손목이 아예 팔에서 떨어져 나가버릴 것처럼 욱신거렸다.
우리는 좀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누려 자리를 옮겼다. 나와 오라드 곁에는 프레브라나가 동석했고, 반대로 고티에르는 아드마르를 먼저 우리가 준비한 방으로 올려보냈다.
“아이가 아직 어려 예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배려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티에르의 말은 이 자리의 상석인 오라드보다 나를 먼저 향했다.
“자기 때문에 제 부모가 남에게 머리를 숙이는 경험이 좋은 건 아니잖소.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내가 신호를 보내지 않았으면 고티에르가 오라드에게 자식의 무례를 사과했을 터이다. 그러면 그 꼬마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아버지가 난처해지는’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나 얻게 되었겠지.
“그 나이에는 아비가 세상 누구보다 더 잘난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잖소.”
덧붙인 말은 일반론이었다. 말하는 나도 듣는 고티에르도 아버지 기억은 없으므로. 화제를 돌려야 했다. 독립전쟁 이후 아키텐의 최북단이 된 앙주의 실질적인 통치자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다. 나는 내 곁에 앉은 프레브라나와 오라드를 의식하며 어떤 말부터 꺼낼지 뜸을 들였다. 그 순간.
“경의 부인을 만나고 싶었어요. 왜 함께 오지 않았나요? 함께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오라드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나는 속으로 갈무리하던 말을 멈추고 내 딸이 주도하는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제 처는 넷째를 낳고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조카도 갑작스러운 찬바람에 건강을 해쳐 폐하를 배알할 수 없었습니다. 국왕께서 심려해주심을 안다면 두 사람 다 바로 기운을 차릴 겁니다.”
“앙주는 식구가 많다지요. 풀크 공이 앙주는 남자가 많다며 귀여운 조카딸이 태어나기를 바라던 기억이 나요. 앙굴렘의 타이유페르 자매가 보르도를 반년 가까이 다녀간 것은 알고 있지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찾아온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지 몰랐어요.”
오라드는 작은 손을 내밀어 고티에르의 손등을 덮었다.
“나는 정말 고티에르 경이 반가워요. 할 일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큰아들까지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다른 가족들도 언젠가 모두 보고 싶어요. 보다시피 일하는 사람들 외에는 여기 앉은 사람이 우리 식구 전부예요. 만약 경의 아이들이 모두 왔다면 더 활기가 넘쳤을 거예요.”
고티에르는 웃으며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제 아이들은 아직 어려 공연히 폐하를 번거롭게 해드릴 뿐입니다. 좀 더 자라면 수도 구경을 시킬 테니 그때 꼭 반가이 맞아주십시오.”
“모두 다 보르도로 오면 앙주는 누가 돌보지요?”
“그때 폐하께서 심려치 않으시도록 조카가 알아서 할 겁니다.”
설마 내려놓을 작정일까?
나는 떠오른 의문을 감추며 그를 멀거니 보았다. 현 앙주 공작 페이용은 불과 아홉 살. 내 앞에 앉은 이는 나처럼 한창 젊은 청년이며 수년간 공령을 다스려 온 경험 많은 귀족이다. 게다가 페이용의 유일한 친삼촌으로 누구보다도 공위에 가까운 위치. 그러나 페이용이 장성해 아내를 맞이하고 자식을 얻으면 그는 점점 밀려날 것이다. 어쩌면 페이용이 숙부의 노고에 보답해 앙주의 영지 일부 관리를 맡길지도 모르겠지만, 상속자의 호의에 기대는 게 얼마나 위태롭고 부질없는 짓인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좋아요. 기대하지요. 내가 고티에르 경을 도울 것은 없을까요?”
오라드는 프랑스와 맞닿은 경계에서 특별한 일은 없는지, 앙주의 풍흉은 어떤지 차례차례 물었다. 고티에르는 내가 미리 알아본 사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대답을 술술 답했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통치에 개입했다면 유창하게 말할 수 없었을 테니 그가 앙주를 총괄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선대 공작부인의 소관이었을 것만은 그의 아내 마르타 부인에게 넘어갔겠지.
“폐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아드마르를 시동으로 삼아주십시오. 여덟 살 나이치고 말도 곧잘 하고 제법 영리하니 데리고 계시기에 크게 미욱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럴 의도로 데려왔을 거라 짐작했기에 별 놀랄 것도 없는 말이었다. 유복한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집을 떠나 집안의 어른이나 연고가 닿는 높은 가문을 찾아 예의범절을 배우고 교양을 쌓는다. 그러나 아키텐에서 왕가 다음 명문가 순위를 다투는 앙주의 귀공자로서는 배움터가 되어줄 곳을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더 낮은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므로 굳이 거처를 옮기려 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그렇다.
“…귀한 손님을 맞는 일이니 혼자서 결정하기 어렵군요. 잠시 기다리면 아버지와 의논해 대답하도록 하지요.”
어?
“그동안 성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일러둘게요. 아드마르 경은 아버지와 단둘이 나들이를 나온 게 처음일 테니 즐거운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흔쾌히 수락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오라드는 대답을 망설이고 결정을 내게로 돌렸다. 고티에르도 더 채근하지 않았다. 그의 네 자녀, 생전 풀크 공이 여아이길 기대했던 큰딸 카트린이나 형만 아버지와 놀러 간다며 속상해했다던 차남 아샹보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진 후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고티에르가 아들에게 가려고 완전히 층계를 벗어난 뒤, 오라드는 내게 대뜸 말했다.
“앙주 공이 아파서 못 왔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요?”
내 딸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방글방글하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티에르가 직접 왔으면 페이용이 온 거나 마찬가지야. 앙주의 전권을 틀어쥔 이가 여기 있는데 아홉 살 꼬마가 정말 아픈지 아닌지는 사소한 문제지.”
“우리도 아버지가 가시면 제가 간 것과 마찬가지일까요?”
레냐토르, 레기나.
알현실에서 들었던 아드마르의 어린 목소리가 순간 귓가에 생생히 울렸다. 내 머리는 엉킨 실타래처럼 뒤엉켜버려 흡사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변변한 대답 하나 꺼내지 못했다. 너를 제치고 내가 먼저 인사를 받게 되어 마음이 상했을까. 나로 인해 남들이 너를 업신여길까 불안한 걸까. 이 나라에 온 내가 십여 년 세월을 거치며 손에 남은 건 오직 너 하나뿐인데.
“아무튼 저 애는 너무 고귀해요. 부릴 수 없어요.”
오라드는 대수롭지 않은 듯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닌데. 나는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일을 시키란 게 아니라 그저 당분간 데리고 있어달라는 거지. 거절할 이유가 없어. 먼저 청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청해야 했을 거야.”
앙주가 왕가에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호의다. 국왕의 이모인 공주를 계모로 둔 앙굴렘 백작 자매가 지난봄과 여름에 걸쳐 국왕의 특별한 친구가 된 사실은 이미 아키텐 전역의 귀족들에게 널리 퍼졌을 터이다. 아키텐의 영주들이 모두 프랑스의 반역자라 하나 개국 20년을 겨우 넘긴 아키텐 국왕을 향한 우의를 끊고 다시 프랑스에게 신종을 맹세한다면 프랑스의 카페 왕가는 기꺼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다행히 프랑스가 갖던 우세는 깨졌다. 프랑스의 선왕이 핏덩이만 남기고 죽은 해부터.
“겨우 여덟 살이에요. 부모와 떼어놓기에도 동생들과 떼어놓기에도 너무 어려요.”
“제 아버지가 직접 데리고 왔어. 왜 그랬을까? 너는 그 애한테 가족 곁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더 큰 걸 줄 수 있어. 아키텐 국왕은 이제 앙주의 아드마르를 절대 모른 체할 수 없을 테니까.”
고티에르가 불운하다면 아들들에게 가문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왕실의 국정 고문을 다년간 역임한 외할머니를 둔 사촌 아우들의 존재는 조실부모한 공작에게 든든한 지원군이면서 동시에 위협이 될 수 있다. 가정할 수 있는 좋지 않은 미래가 닥쳤을 때, 장자가 오랜 기간 국왕을 가까이에서 모셨다는 점은 자식들에게 훌륭한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국왕은 자기에게 봉사했던 어린 동무에게 호의를 베풀 테고, 고향에서 미래를 바랄 수 없을 시 보르도가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어줄 테니.
“……저는 아프잖아요, 아버지. 그 애를 없애시게요?”
오라드는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이더니 얼굴에 시무룩한 빛을 드리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어떻게 하셨는지 나중에 알려주시기만 하면 돼요. 쉬러 갈게요.”
아이는 나를 남겨두고 빠른 보폭으로 휘적휘적 멀어져갔다. 뜻밖의 사태에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있자 프레브라나가 나를 돌아보더니 “아가야, 잠깐만.” 하며 오라드를 뒤쫓아갔다. 나도 이내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세상이 짙은 눈안개가 낀 양 흐려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폐하. 억센 손길이 화급히 나를 잡으며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우리 가족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꿈쩍도 안 하던 시종이었다. 나는 긴 탁자를 짚어 휘청이는 몸을 지탱하며 손을 내저었다.
“발을 헛디뎠을 뿐이네. 앉고 싶으니 이만 놓게.”
다시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본래 색채를 다시 보려면 눈을 몇 번 더 깜빡여야 했다. 나는 할 일을 접어두고 의자에 기대 프레브라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만일 오라드가 끝내 거부한다면 고티에르를 달랠 말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니 앙굴렘 백작 자매는 받아들였으면서 앙주 공작의 종제를 거절한 이유가 필요하다. 누구라 해도 수긍할 만한. 그 아이는 10년만 지나면 청년이 될 텐데.
“……어느 놈이 쓸데없는 소리를…….”
나는 무심코 말을 흘렸다. 내 딸은 분명하게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군주가 누군가를 가까이 둔다면 그건 곧 신뢰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런 자는 누구보다도 군주의 약점에 접근하고 있으니 더 함께할 수 없는 때가 온다면 가차 없이 없애서 입을 막아야 한다. 그게 누구라 하더라도 나는 내 딸을 위해서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이 나라의 왕인 오라드도 그래야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말을 아이에게 한 적이 있던가?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번 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비슷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또래 친구가 생겨 그렇게 좋아했는데, 지금은 우정을 쌓더라도 늘 비수를 품고 있으라는 그따위 비정한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한참 뒤 다시 문이 열렸다. 돌아온 사람은 프레브라나 혼자였다.
“괜찮아요. 오라드는 아드마르가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만 않으면 된대요. 당신이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 이미 살아온 나이의 절반을 군주로서 산 아이다. 이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혹시 내가 잘못했소?”
나는 맥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프레브라나는 눈을 둥글게 뜨고 깜빡이다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당신은 옳으세요. 정말이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티에르 경에게 아이가 뭘 좋아하고 잘 먹는지 물어볼게요. 프레브라나는 나지막이 말을 덧붙이며 나를 달랬다.
외동딸과 실랑이를 이어갈 시간은 내게 없었다. 다음 날 나는 고티에르 부자에게 성을 자유롭게 다녀도 된다는 허가를 내주고 오라드와 함께 말에 올랐다. 보르도를 떠나기 전 미리 푸아티에의 현황과 호구 등을 조사하게 시켰는데, 어쩐 일인지 보고가 늦어져 기록과 실제 사이에 혼선이 생기고 말았다. 사무관들은 면목 없어 하며 우리 부녀를 이미 무성한 수풀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도와 야생으로 바뀐 폐촌으로 안내했다. 오라드는 그 황폐한 모습을 보며 흡사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양 창백히 질리곤 했다. 역병에서 지켜달라 신에게 구원을 청하던 이들이 모두 몰살당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오히려 이단으로 의심받아 시신이 십자가도 지니지 못한 채 불태워졌다, 수십 번도 더 본 건조한 문장이 오싹한 실체로 눈앞에 나타났다. 반란군이 가장 먼저 침공한 지역. 아키텐에서 가장 역병이 오래 머무른 지역.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내서 나라도 먼저 와볼 걸 그랬다.
“아마 삼촌과 어머니가 살아계셨어도 어쩌지 못하셨을 거예요.”
오라드는 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이가 신경을 쓸 만큼 표정을 구기고 있었나. 나는 손을 내밀어 오라드의 작은 어깨를 도닥였다. 그 둘이 살아있었다면 국왕이 직접 북부로 가든 내가 북부로 가든 따로 움직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속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고 이 아이는 국왕이다. 틀린 가정을 해도 전면에서 부정할 순 없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가 많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자가 열이라면 그중 셋은 근래 흘러 들어온 자입니다. 사람이 너무나 적으니 이들을 모두 내쫓기도 어렵습니다.”
보고가 늦어지는 원인 중 하나였다. 사람은 대개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부모와 출생의 자연스러운 증인이 된다. 5할. 그리고 그 5할의 3할. 다른 곳도 다 사정은 같을 것이다. 역병을 피해 도망쳤거나, 굴레를 피해 도망쳤거나. 밭에는 내 허리만큼도 못 오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나이와 가구 수는 파악했는가?”
“그것은 이미 마쳤습니다. 하나 사람 수를 속이진 못하겠으나 그 외에는…….”
“그러면 그것만 우선 보내게.”
신원을 증명하지 못하는 유민 정착을 묵인하면 동일 인물로 이중 인적이 생기게 된다. 부르고뉴에 살던 로베르의 아들 27세 앙리가 푸아티에로 와서 29세 필리프로 행세해도 알아차릴 사람이 없다. 그러나 모두 솎아내고 현지인만 남긴다면 이번에야말로 푸아티에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상속자를 잃은 빈집과 농토를 점거한 유민의 수도 파악해주게. 분명 연고가 있다며 우길 것이니 처벌 목적이 아님을 미리 밝히고. 이른 시일 내로 받아봤으면 좋겠군.”
“아버지.”
갑자기 오라드가 나를 불렀다. 그러자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일제히 오라드를 보았다. 오라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돌아가서 이야기해요.”
아무래도 궁금한 게 아니라 뭔가 기분이 상한 것 같다. 나는 손을 들어 다른 이들에게 따라오지 말라 지시하고 말을 조금 걷게 했다. 오라드가 곁에서 따라왔다.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멀어졌을 때 오라드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왕가의 재산을 무단으로 가져갔어요. 그냥 넘어가시게요?”
상속자를 잃은 유산은 영주에게 귀속된다. 나는 오라드에게 되물었다.
“만약 그들이 먼저 너를 찾아와 여기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병든 노인과 어린 자식이 있다며 은혜를 바란다고 청했으면 어떻게 했겠어?”
“당연히 도와줬을 거예요. 하지만 이거는 순서를 지키지 않았잖아요.”
“우리는 여기에 없었고, 보르도는 오랫동안 문을 닫아걸었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우리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머무르게 해야 해.”
역병이 가장 극심하던 때에는 세수가 내전 전 시기의 3할도 걷히지 않았다. 폐쇄를 풀고 문호를 개방한 지금도 그때의 5할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유민 모두가 그저 새 삶의 터전이 필요할 뿐인 결백한 이들은 아닐 것이다. 가짜 신원을 가려내지 않는다면 국왕의 호의를 악용하려는 악인들도 몰려들 터. 감시할 인력과 정착을 도와줄 인력이 둘 다 필요하다. 결국은 돈과 사람 문제인가.
“걱정되는 게 많겠지만 일단 지켜보자. 네 영민이 되겠다고 온 사람들이니 살 곳을 마련해주면 너를 더 좋아할 거야. 어차피 우리가 모든 걸 다 관리할 수는 없어.”
“아드마르보다도 작은 아이들이 낑낑대며 짐을 옮기는 걸 봤어요. 알아요. 착한 사람들이라면 저도 나쁘게 대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무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거기에 더해 어린 자식까지 있으면 앞날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오라드는 하얀 손을 들어 기다리던 이들을 불렀다.
“하지만 앞으로는 먼저 결정하지 마시고 저한테 물어봐 주세요. 제가 주인이잖아요.”
어린 국왕은 고개를 홱 돌리고 먼저 말을 타박타박 걷게 해 앞서 나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아이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고 서둘러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부족한 국고를 채울 방법부터 궁리할 때 오라드는 먼저 마음을 열고 유민들의 처지를 이해하려 했다. 나와 같은 것을 보던 그 짧은 시간에. 그런데.
“…오라드, 아빠가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미안해.”
내 자식이다. 겨우 이런 일로 멀어질 리 없다. 그러나 같은 말을 처남에게 들었으면 누구처럼 눈밭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충분히 뉘우쳤으리라 판단할 때까지 왕의 용서와 자비를 빌어야 했을 거다. 무골호인이던 처남이 내가 그러는 걸 바라지 않더라도. 수치는 두렵지 않다. 그러나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나를 꺼리는 건 견딜 수 없다.
돌아온 뒤 오라드는 바로 열을 내며 앓아누웠다. 늦가을의 찬바람이 해를 끼쳤는지 기침도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고일 만큼 그치지 않았다. 프레브라나에게 아이가 국정에서 숨 돌릴 수 있게 도와달라 했건만 정작 내가 아이를 괴롭히고 말았다. 야히드가 기침이 멎을 수 있도록 약을 지어 오라드를 재웠다. 앞서 기미를 본 시종은 꾸벅꾸벅 조는 닭들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졸린 눈으로 물러갔다. 나는 오라드 없이 고티에르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앙주 공의 숙부이자 앙주의 섭정인 고티에르 경이 특별히 그대들을 위해 오셨소. 오랜 기간 앙주를 통솔해 온 경의 지난 경험과 지혜가 푸아티에의 도움이 되길 바라오.”
모인 이들의 표정이 어쩐지 나 한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더 경직되었다. 앙주와 푸아티에가 마찰이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나는 사소한 변화를 무시하고 내전 전 푸아티에의 지도를 펼치게 했다.
“투아르와 맞닿은 서북쪽은 한나절을 걸어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습니다. 이 다리는 작년 여름에 홍수로 손상되었는데 인근에 주민이 없어서 아무도 돌보지 않습니다. 이 밀밭은 전날 보신 바와 같이 지주 가족과 소작농이 모두 죽은 후 잡풀만 무성합니다.”
설명할 기회를 얻은 젊은 사무관이 낭랑한 목소리로 암울한 현황을 읊었다. 죽은 사람, 사라진 마을, 망가진 가도와 교각, 야생으로 바뀐 농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가는 사무관이 발표하는 조카의 말소리에 맞춰 지도 위에 얕게 모래를 뿌렸다. 사람이 살았던 곳이 절반 가까이 모래에 묻혀 지워졌다. 나는 회의가 끝나면 털어버릴 그 모래를 응시하다가 그들에게 물었다.
“오랫동안 푸아티에를 지켜온 그대들에게 묻고 싶네. 우선 무엇부터 하길 바라는가?”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양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다소 들떠 보였던 젊은 사무관들도 미더운 젊은이들을 선보이며 내심 으쓱거리던 나이 지긋한 사무관들도. 처남이 세상을 떠나고 7년이나 지났으니 그들은 왕관을 쓴 이가 기탄없이 말해보라 하는 게 처음 겪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풍경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봐 왔다. 이 어색한 침묵을.
“그대들이 지금껏 살아왔고 또 장차 살아갈 곳이 아닌가. 나도 이 자리에 국왕의 대행이 아니라 아키텐의 재무관으로 참석할 테니 편히 말해보게. 내게 청하고 싶은 것이 정말 없었나?”
무슨 말이 나올지는 얼추 예상되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지내다 요청을 직접 듣고서야 문제를 알아채는 자는 수장의 자격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회의의 결론을 이미 상정한 방향대로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왕실이 자신의 의견을 경청했고 또 이 참여가 국왕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암시를 심어줘야 한다. 나는 짐짓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누군가가 용기를 내길 기다렸다. 폐하. 가장 먼저 나선 건 모래를 뿌리던 이였다.
“폐하, 두 분 폐하를 섬기는 보르도의 강인한 병사들을 잠시 보내주십시오. 일부면 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물길이 더러워져 배앓이를 하는 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시신과 짐승의 사체가 한데 뒤섞여 파묻히니 혼탁한 피가 수로를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저희가 조금만이라도 어떻게 처치하려 했으나 살아남은 장정은 적고 그마저도 모두 번다해 공사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도와주십시오.”
두 분 선왕도 화장했으니 역병으로 죽은 자는 다 화장하라고 했건만 말을 안 들었군.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물꼬가 트이자 이번엔 젊은 사무관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폐하, 앞서 마을을 정비해야 합니다. 원래 있던 마을은 폐허가 되고 살아남은 이들은 역병을 피하려 가도를 벗어나 아무 곳에나 막집을 지어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 유랑민까지 더하니 호구의 규모도 바로 파악하기 어렵고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눈이 내리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이 생으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습니다.”
그는 스물대여섯 즈음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 자신의 경험일 수도 있겠거니 짐작하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자네는 지금의 취락지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잘못 만들어졌으니 고착되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마을을 짓기까지 그 사람들을 수용할 곳이 마땅찮아 속절없이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주위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다른 이들은 시선을 갈팡질팡하며 우려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가 책망하는 눈으로 그를 보곤 했다. 나는 그가 미처 하지 않은 말을 읽어냈다. 이 성 일부를 숙소로 내어달라는 뜻이다.
“상왕 폐하, 감히 왕가의 궁실을 침범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금 전 설명을 하던 청년이 동료를 감싸려는지 허둥대며 나섰다. 청년은 떨리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주인을 잃은 빈집을 청소해 숙소로 만들면 됩니다. 유민 중에는 이미 그렇게 사는 자들도 많습니다. 힘을 쓸 수 있는 자가 밭일을 하지 않아도 끼니 걱정 없이 양식을 보조해 공사를 돕게 하면 될 일입니다.”
“그렇게 어른들이 모두 떠나면 병자와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로 눈 속에 남네.”
잠자코 있던 고티에르가 타이르듯이 입을 열었다.
“게다가 작금에 집이 비었다는 건 거기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뜻이다. 들어가 사는 자는 정말 담대하거나 아니면 폐가라도 필요할 만큼 절실한 자일 테지. 자네는 전자에 해당하는 것 같군. 그러나 대부분은 질겁하고 도망치기 일쑤네.”
고티에르는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그는 짧은 말을 마저 한 뒤 다시 입을 닫으려 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앙주의 복안을 듣고 싶소. 말해보시오.”
고티에르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성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것만은 불가합니다. 여기에는 우리 국왕께서 계십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위해 무조건 성을 개방한다면 자애로우신 국왕의 호의를 빌어 암약하려는 자를 방비하기 어려워집니다.”
간자에게, 혹은 자객에게 쉬이 문을 열어줄 것인가. 고티에르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미 그가 거쳤던 고민이었을 것이며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앙주는 보안 문제가 다른 지역들보다 더 심각했을 것이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재주가 있군. 나는 고티에르의 많은 장점 중 하나를 특별히 기억해두기로 했다. 고티에르가 말을 마치자 수용 공간의 필요성을 처음 말한 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결코 적을 이롭게 하려거나 반역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편하게 이야기 좀 나누려 했건만 빙판이 갈라지듯 쩌적쩌적 균열이 인다. 왕가와 친밀한 높은 귀족이 오류를 지적하고 동료가 잘못을 비니 다른 이들의 표정도 점점 두려움에 물들어갔다. 내가 혐의를 확신하는 한 마디만 던진다면 이 젊은 관리는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쓰레기처럼 내던져질 것이다.
“의욕이 앞서서 그랬겠지. 다만 앞으로는 자네가 하는 말이 듣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좀 더 주의를 기울이길 바라네. 일어나게.”
나는 그의 팔을 잡아서 일으키고 고티에르를 돌아보았다. 고티에르의 말을 마저 들을 차례였다. 고티에르는 내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 말을 이었다.
“다만 눈이 내리기 전에 흩어진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나 수로 개선의 시급함은 일리가 있습니다. 폐하를 도와 필요한 일을 하는 동안 양식을 보조하고 이후 황폐해진 밭을 개간토록 하면 다음 일을 진행하기에 한결 수월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동원된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하고 이후 자체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자는 처음부터 우리의 병력 부족을 꿰뚫어 보고 있군. 그러니 시일이 좀 걸리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로만 해결할 것을 전제로 놓았겠지.
“원주민과 유민이 함께 재건에 힘쓰다 보면 서로 자연히 섞이게 되겠지. 국왕이 위험에 노출되지도 않을 테고 건물은 이후에라도 다시 사용할 수 있으니.”
“부득이하게 국왕과 가까운 곳으로 사람을 들여야 할 때는 어린 자식을 둔 자를 선발하십시오. 아이를 데리고 왔거나 여기서 아이가 태어난 자는 정착하려는 자일 가능성이 크며, 그렇지 않더라도 아이를 두고 허튼짓하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는 김에 병동을 하나 더 짓는 게 좋겠소. 집안에 병자가 있으면 병자를 돌보느라 사지 멀쩡한 이도 밖에 나갈 수 없고, 그렇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끊기면 곤궁한 처지에 자신을 팔거나 악행에 가담하거나 혹은……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나는 섬뜩한 말이 나오기 전에 입을 닫았다. 고티에르를 포함해 나를 보는 눈빛들이 점점 아연히 변하고 있었기에. 다시 우리는 지도를 짚으며 여러 구상을 나눴다. 도로와 교각의 복구, 손상된 의료 시설의 보충, 올해 예상 총 수확량과 세수, 최근 화제 등등.
“대체로 농작물은 1년 내로 파종에서 수확까지 마치니, 아무리 새로운 주거지를 준다 해도 이미 농토를 개간한 자는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네. 국왕은 이미 자비를 베풀 뜻을 밝혔지만 무조건 점유를 허가한다면 미처 농토를 갖지 못한 자가 저도 모르게 왕가의 재산을 강탈하려 들 테지. 정확한 인원과 규모부터 파악해보게. 그 김에 현재 점유한 자와 마땅한 상속자가 달라 분쟁이 생긴 경우도 모두 알아봐야 하네.”
시간이 흐를수록 듣는 이들의 얼굴이 점차 해쓱해졌다. 적을 것이 많겠기에 대동한 서기관만 표정 없이 술술 손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그러다가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 쓰러지겠어요.”
파트리샤?
순간 나는 멈칫하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들린 소리에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방향을 보고는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당연히 파트리샤가 아니었다. 검은 머리카락, 갸름한 흰 얼굴에 보석처럼 맑게 빛나는 초록빛 눈동자, 이제는 목소리까지 어느새 너무나도 엄마를 닮아버렸지만.
“순서부터 다시 정해서 알려주세요. 차근차근히 해요. 아버지는 영민들을 사랑하시지만, 이 사람들이 탈진하면 배급도 숙소도 그 무엇도 제때 맞출 수 없을 거예요.”
오라드는 아드마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으쓱함이 엿보이는 아드마르의 얼굴과 대조되는 내 딸의 침착한 하얀 얼굴이 마음을 저미듯 아프게 했다. 두꺼운 이불에 푹 파묻혀 겨우 얼굴만 내놓고 자던 모습을 보고 나왔는데. 나는 자주 일어나 있던 탓에 별로 앉지도 않은 의자에서 비켰다. 이 성의 영주인 오라드가 앉을 자리였다.
“어서 와, 우리 딸.”
내가 평범한 관리였으면 부지런한 국왕에게 제대로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아비였으면 좀 더 쉬지 않고 왜 벌써 나왔느냐며 타박을 했을 것이다.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다. 아드마르는 오라드가 자리에 앉자 넓게 펼쳐진 치맛단의 매무새를 정돈해주고 쪼르르 제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섰다. 국왕이 늘어선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다만 경비대와 위병만큼은 부모와 일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들로 우선 선발하세요. 출신을 알 수 없는 자는 훈련생으로 두어 임관까지 당분간 유예를 두고 늘 감시하는 게 좋겠어요.”
여러 사람에게 하는 말처럼 보이나 사실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무기 반입이 금지되는 왕성에서 군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무기를 휘두를 자격이 있으니 가족이 없는 자는 믿을 수 없다. 설령 아무리 품행이 바르고 온화한, 혹은 심약하여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자라도 그것 자체가 치밀하게 쌓아온 연기일 가능성을 무시 못 하기 때문이다. 내 딸은 소재가 파악된 가족은 잠재적인 인질이라는 것을, 언행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둘 만큼 자라 있었다.
“그리고 야히드를 빌려주겠어요. 별로 아픈 데도 없는 우리 가족의 음식 입맛만 맞추고 있느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게 의사로서 더 보람을 느낄 테지요. 툴루즈 공이 왕실에 선물한 사람이니 다들 귀하게 대해줄 거라 믿어요.”
고티에르를 제외하고 참석한 이들의 입이 텁텁한 것이라도 잘못 먹고 부르튼 양 우물우물한 소리를 내려다 말려다 하게 되었다. 궁의 야햐 야히드는 이방인이며 이교도이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보르도에서 내가 백 번도 넘게 들었던 우려를 말할 용기 있는 자는 여기 없는 걸까. 부족한 의사, 국왕의 신뢰와 총애, 그리고 아키텐의 유일한 성년 공작인 툴루즈 공. 10년 만에 찾아온 군주가 호의를 베풀겠다는데 반발은 불경에 불과하겠지. 오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지요. 고티에르 경은 따라오세요. 아버지도요. 할 이야기가 있어요.”
어린 국왕은 아드마르에게 반지 낀 하얀 손을 내밀었다. 역할을 부여받은 소년은 웃음을 띠며 아버지 곁에 섰던 때처럼 쪼르르 다가가 국왕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고티에르는 하늘처럼 푸른 눈에 다소 의아한 빛을 깃들이다 나와 함께 묵묵히 오라드를 따라갔다. 오라드는 층계를 올라 복도를 걸어 그들 부자에게 마련한 객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지는 않고 몸을 돌려 고티에르를 바라보았다.
“내가 경을 구해줬어요. 내가 그대로 나갔으면 지금쯤 질문 세례가 쏟아져 그 자리에서 달 뜨는 걸 구경하게 됐을걸요. 오늘은 수고했어요. 아드마르 경, 아버지 곁에 있어 드려요.”
오라드는 대답을 듣지 않고 자신의 방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뒤늦은 고티에르의 감사 인사는 오라드의 발을 멈춰 세우지 못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할 일들을 구겨 넣고 오라드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오라드는 대뜸 이불을 잡고 확 들추더니 비단 드레스를 입은 채로 속에 굼실굼실 파고들었다.
“오라드, 옷 구겨져. 자더라도 그건 벗고 자. 불편하잖아.”
“내일은 다른 옷 입을게요. 저 추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노르게의 빙하 위에 올라선 것 같았어요.”
그 말에 나는 손을 뻗어 딸의 작은 이마 위를 턱하고 짚었다. 열이 내리지 않았다. 목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바깥을 향해 당장 물과 해열제를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애가, 아니 왕이 이 지경인데 대체 누가 바깥을 활보하도록 내버려 뒀단 말인가?
갑자기 머리가 찌르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팽팽하게 당겨진 관자놀이를 손으로 짓누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고치처럼 이불을 둘둘 말던 오라드가 나를 부르며 이불을 걷고 손을 내밀어 내 손 위에 겹쳤다. 물병과 시럽을 들고 들어온 나이 든 시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든 것을 내려놓고 야히드를 부르러 뛰어갔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저 시끄러운 여자를 내쳐버리겠다. 다시는 오라드 곁에 발도 못 붙이게 하겠다. 국왕이 병약하다는 걸, 내가 아프다는 걸 여기저기 퍼트릴 작정인가. 저 멍청한…….
“리키!”
기름과 익은 밀가루 냄새가 익숙한 목소리와 더불어 훅하고 풍겼다. 그 탓에 먹은 것도 없이 메슥거리며 욕지기가 솟았다. 나는 오라드를 뿌리치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얼핏 본 프레브라나는 하인들처럼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토끼눈을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딸과 아내를 다시 마주하려면 이르게 뜬 하얀 초승달이 붉게 물든 서쪽 하늘 위까지 달려야 했다.
“여보, 미안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직접 요리해주면 더 좋아할 것 같아 그랬어요.”
휘황하게 물들인 붉은 불빛, 악사들의 흥겨운 연주 소리, 주방에서 공들여 준비한 음식이 식탁 가득히 오른 만찬 연석에서 프레브라나는 말쑥한 새 옷을 입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는 나와 오라드에게만 들릴 만큼 작았다. 고티에르에게 아드마르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겠다더니 손수 팔을 걷어붙인 모양이다.
“당신 탓이 아니오. 내가 마침 속이 안 좋았던 탓이지.”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떠나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기름진 음식에는 별로 손대지 않고 물과 술만 들이켰다. 공중에 단검 대신 사과를 여러 개 돌리던 젊은 광대는 아무것도 없던 비단 천에서 작은 꽃다발을 꺼내더니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 바친다며 오라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런 시구를 읊조렸다.
“여왕이여, 그대는 여신인가요, 여인인가요. 그대가 넓은 하늘에 사시는 여신들 가운데 한 분이라면 나는 그대를 누구보다도 위대한 제우스의 딸 아르테미스에 견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대지 위에 사는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라면 그대의 아버지와 존경스러운 어머니는 세 배나 축복받았으며 그대의 오라비들도 세 배나 축복받았지요. 나는 남자든 여자든 그대와 같은 사람은 아직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 나는 그 광대를 노려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거리를 떠도는 예인이 입에 올릴 만한 문장이 아니다. 학인 대다수도 신의 아들이 강림하기 전 야만인들의 서사라 외면하기 일쑤인 내용일진대. 나는 머릿속에 재빨리 세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는 저 자에게 재주를 가르친 누군가를 따라 했을 가능성, 둘째는 오디세이아를 쉽게 접할 만한 먼 동쪽에서 흘러 들어왔을 가능성, 마지막 셋째는 누군가가 매수해 여기 보냈을 가능성이다. 꽃을 받은 오라드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내 생각건대 너는 나쁜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도 아닌 것 같구나.”
무릎이 고운 나우시카아의 화답을 들은 광대는 씨익 웃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오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찬 분위기에 들뜬 사람 몇몇이 성마른 박수를 보냈다. 오라드는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 광대의 손을 턱 잡고 중앙으로 나섰다. 곡조가 바뀌었다. 마을 잔치에서 종종 연주했을 법한 경쾌한 춤곡이 울려 퍼졌다.
“저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게요.”
프레브라나가 내 손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나는 같은 높낮이로 그이에게 말을 덧붙였다.
“우리와 함께 가도록 만드시오. 여의치 않으면 내게 보내고.”
오라드는 조금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아이가 몸을 돌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넓게 펼쳐져 마치 중앙에 커다란 붉은 꽃을 피운 것 같았다. 도저히 춤을 출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저것도 군주의 자질 중 하나인 걸까. 곡이 끝나고 젊은 광대는 몸을 숙여 오라드의 손등과 치맛자락에 입을 맞춘 뒤 물러갔다. 오라드는 내 곁으로 돌아와 앉고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다치게 하지는 마세요. 그냥 주워들은 거일 수도 있잖아요.”
내가 조금 전 무슨 말을 했는지 바로 옆에서 들었나 싶은 말이었다. 오라드는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흘끗 나를 보고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아까 아버지가 정색하셔서 혹시나 했어요. 아무 생각 없었을지도 몰라요. 저한테 남자 형제는 사촌까지 찾아봐도 없잖아요. 알면 말을 바꿨겠죠.”
그러자 프레브라나가 약간 풀이 죽었다. 내 손등 위에 올린 손이 추욱하고 힘을 잃어 오히려 내게로 무게가 실렸다. 나는 빈 다른 손으로 그이의 손을 겹쳐 잡았다. 이을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악사들의 음악 소리나 술기운이 얼근히 오른 다른 이들의 부산스러운 말소리 등이 침묵을 가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눈에는 의자에 기대 턱을 하늘로 치솟고 곯아떨어진 아드마르가 보였다. 고티에르는 그들 부자의 수행원들을 포함해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러 사람과 함께 뭉쳐 있었다. 나는 제 동무 하나 없는 자리에서 장하게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버틴 그 아이를 방으로 옮기게 지시했다. 나도 내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술꾼들에게 오늘 밤늦게까지 시달릴 예인들을 위해 잘 곳을 준비하고 보수에 곁들여 식구들에게 가져갈 양식도 넉넉히 챙겨주도록 말해두는 건 잊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내려 차갑게 식은 돌벽을 타고 어렴풋이 빗소리가 들렸다. 오라드는 오늘 왕으로서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에티에네트 부인도 용서해 주세요. 우리는 몇 달 뒤면 떠날 거잖아요. 그런데 아버지에게 실수해서 처벌받은 것이 알려지면 이후 부인에게 큰 결점으로 남을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우리가 부인을 쫓아내면 다른 사람들은 제게 정말 큰 문제가 있어서 아버지가 중대하게 받아들이셨다고 생각할 거예요.”
내가 내치려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오라드는 꼭 대답을 듣겠다는 양 눈빛으로 나를 채근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오늘은 이만 자.”
비는 오락가락하며 이틀을 내리 내렸다. 돌바닥에 맑은 빗물이 고여 사람이 지나갈 적마다 찰박찰박 소리를 냈다. 오라드는 흰 토끼 피니를 안고 빗물을 머금은 가을 풍경을 창 너머 구경했다. 아이가 나른하게 쉴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인적이 드문 김에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책을 읽다가 방문을 청한 손님을 맞았다. 고티에르였다. 나와 그는 격식 없이 마주 앉았다.
“저는 투아르에서 선왕을 뵌 적이 있습니다. 국왕께서는 선왕을 많이 닮으셨군요.”
심장에 묵직한 추가 매달려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게 사람들이 기억하는 파트리샤의 마지막 모습이며 또 그에게는 키워준 형과 함께 한 마지막 추억이다. 비록 용병을 부른 반군의 수가 더 많았을지언정 당시 국왕군은 원정을 준비하던 정예군이었으니 그의 형도 갓 스물 된 아우를 대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티에르는 앙주의 병력을 통솔해 돌아가고 풀크 공은 파트리샤를 수종해 보르도를 지켰다. 우리의 과거는 죽음의 거무죽죽한 흑색이 가득 덧칠되었다.
“나를 더 닮지 않았소? 나는 오라드가 태어났을 때 신기해서 몇 번을 쳐다봤는데.”
나는 일부러 웃어 보였다. 고티에르도 피식 웃었다.
“물론 폐하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제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국왕 폐하를 뵈러 가겠다며 보챌 지경입니다.”
두세 살만 더 많았으면 오트빌 가문에 혼담을 보내기 전 이쪽도 충분히 고려했을 텐데. 문득 나는 그를 보다가 몇 년 전 그의 형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미 열두 살을 맞은 장자가 아니라 겨우 네 살이던 차자가 앙주를 물려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혼인으로 모레이 공작의 이름을 쓰게 된 내 큰형처럼. 그도 어쨌든 앙주 사람이니 모든 조건이 맞아도 앙주를 다른 가문에게 통째로 넘길 만한 짓은 하지 않을 테지.
“경도 알다시피 국왕은 너무 외롭게 컸소. 엊그제는 내게 자신은 형제도 사촌 형제도 없다며 투정을 부렸지. 가족만큼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리고 아직 아이잖소.”
“사자의 자식이 뭇 짐승들의 새끼와 같겠습니까.”
훌륭한 대답이군. 국왕을 상대로 불경하게 동정을 비추지 않으면서 내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나와 그는 바로 손 뻗으면 서로를 잡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 앞에 좁고 깊은 골이 하나 파여 있었다. 아쉽게도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며칠 뒤 앙주를 다녀오려 합니다.”
어제 부슬비를 뚫고 앙주의 전령이 왔다. 적의 침공이나 약탈을 알리는 전령은 아니었다.
“그대가 섭정이니 자리를 오래 비우기 어렵겠지. 많은 도움이 되어주어 고맙소. 돌아가도 좋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급한 일을 마치고 겨울이 되기 전에 다시 돌아오려 합니다.”
집에 가고 싶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는 기꺼이 경을 위해 난로에 불을 지피고 더운 음식을 마련할 것이오. 그렇지만 어린 아드마르 경에게는 고되지 않겠소?”
“제 큰아이는 애초 두 분 폐하께 말씀 올렸던 대로 국왕 폐하 곁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다. 아직 배움이 부족한 아이입니다. 그리고 이젠 저보다 국왕 폐하 곁에 있는 걸 더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글쎄, 아이에게 물어본다면 어떨까. 호수의 요정이 연모하는 소년을 데려와 맛난 음식을 먹이고 금은보화를 안겨줬으나 가족이 보고 싶다며 눈물을 그치지 않아 결국 단념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새 친구가 마음에 들어도 제 부모 없이 혼자 남겨지기는 달갑지 않을 터.
“경이 고맙게도 나와 오라드를 신뢰하니 아드마르 경이 머무는 동안 내 자식과 다를 바 없이 돌보겠소. 그러나 시간을 다투는 일이 아니라면 경도 며칠 더 지내다 가는 것이 좋겠소. 내가 한다고는 해도 아버지만은 못할 테고, 경이 나를 돕느라 내내 다망했는데 훌쩍 돌아가면 아이가 무척 상심할 테니. 경이 돌아가는 날까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경을 부르지 않을 테니 내 말대로 하시오.”
절반은 내 경험이었다. 딸의 얼마 안 되는 행복한 추억 속에 모두 내가 등장했으니. 오라드는 비단옷을 입혀주고 오색 영롱한 보석으로 몸을 꾸며주는 것보다 나와 파트리샤가 자신의 손을 잡고 함께하던 과거를 더 그리워했다. 어렸던 내가 꿈도 꾸지 못할 호사 속에서 자란 아이였지만 언제나 가족의 정을 더 바라고 있다. 천금을 줘도 다시 가질 수 없는 시간을.
비가 그친 후 새 울음소리가 길어졌다. 가을의 흐린 별을 서서히 밀어내며 겨울의 청백색 사냥개가 늦은 밤 동편에서 하늘길을 달렸다. 짧아지는 해를 체감하게 되는 시기였다. 오라드의 지시대로 진료소가 우선 열렸다. 국왕이 수석 궁의를 진료소로 보내자 푸아티에의 유지들도 주치의를 보내거나 필요한 물품을 희사했다. 수도원의 수녀도 환자를 맡았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낯선 풍모를 지닌 사라센 의사를 경계해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보초를 서며 대열을 정리하는 위병들이 이따금 쭈뼛거리는 이에게 “두려워 마시오. 저 궁의는 당신처럼 우리 국왕을 섬기는 아키텐 사람입니다.” 하며 언질을 줘 진찰을 받게 시켰다.
“약속을 지키세요. 아버지가 필요해요.”
탁. 오라드는 프레브라나를 대동하고 들어와 내 앞 책상에 놓인 보고서 뭉치에 하얀 손을 내리쳤다. 나는 내 주위에 여럿 켠 촛불의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딸을 끔뻑거리며 보다가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프레브라나에게 사정을 물었다. 고티에르가 내 말을 참 잘 지킨 게 오라드를 속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오라드는 막무가내로 내일 나들이 계획을 떠넘긴 후에야 책상에서 손을 떼었다.
밤이 이슥할 즈음 또 다른 방문자가 나를 찾았다. 야히드였다.
“비께서 보내셨습니다.”
가장 반갑지 않은 손님이로군. 이 친구가 왜 왔을까. 나는 얼마 전 내가 두통과 메스꺼움으로 프레브라나를 제치고 도망갔던 적이 있었던 걸 기억해냈다. 야히드는 공손히 몸을 숙여 내 옷자락에 입을 맞추고 진찰을 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청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를 청한 적이 없다. 물러가라.”
내가 거부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야히드는 당황하며 나를 올려보았다.
“자비로우신 폐하, 비께서 심려가 크십니다. 국왕께서도…….”
오라드가 거론되자 나는 짐짓 눈을 치켜뜨고 소리를 높였다.
“내 딸에게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감히 국왕을 현혹한 죄로 자네의 혀를 뽑아 개에게 던져주겠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물론 그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돕는 사람을 배척해서 괜히 원망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오라드에게 말한 주제에 내가 상반된 언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삶의 주인이시여, 죽으라고 명하시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하나 그 전에 이 비천한 종이 부디 폐하를 보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결코 폐하를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야히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리며 내게 애걸했다. 흡사 나를 막아서려는 것처럼.
“내가 자네에게 내린 명은 내 딸을 보호하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가 물러가지 않겠다니 내가 나가는 수밖에. 따라오지 마라.”
끌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석 궁의에게 그런 모욕을 주면 다른 이들이 왕가에 봉사한 대우를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경원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방인 의사가 다소 책을 잡힌 것 정도로는 누구도 중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방을 나섰다.
저이는 성실하다. 박식하고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나 오라드와 내 몸 상태를 다 알게 할 수는 없다. 북쪽에는 프랑스, 남쪽에는 알모라비드, 동쪽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주인을 연달아 잃어 어린 여왕이 홀로 지키게 된 아키텐을 노리고 있다. 국내의 귀족들도 안심할 수 없다.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형제로 맺어진 플랑드르도 주인이 바뀌자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반기를 들었다. 누군가가 모략을 꾸민다면 가장 먼저 야히드에게 마수를 뻗칠 것이다.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 어릴 때는 북해의 칼바람과 변덕스러운 산바람을 맞으면서도 병치레 한 번 앓은 적 없다. 지금은 그저 다소 지쳤을 뿐이다.
여우를 쫓아 보내니 머잖아 곰이 등장하는 건 고금에 변함없는 이치일지도 모른다.
“수도원에 물어봐서 만들었어요. 신분은 밝히지 않았고요. 야히드도 조합을 보고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 했어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가 만들었어요.”
오라드를 닮게 된 걸까. 프레브라나는 대뜸 쓰디쓴 향이 듬뿍 풍기는 음료를 담은 잔과 물병, 그리고 꿀을 쟁반에 받쳐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내가 야히드를 물리고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나는 쟁반 위 꿀을 담은 그릇으로 눌러놓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음료의 배합이었다.
“만약 이 중에 드시지 못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다시 만들어 올게요.”
“난 쓴 걸 싫어하는데.”
투정을 부리자 프레브라나가 킥킥 웃었다.
“그건 못 들어드려요. 잠깐만 참으세요.”
“거기 있는 꿀이라도 타지 그랬소.”
“향이 이상해져서요. 코가 예민한 사람은 그런 거 아주 싫어하잖아요.”
프레브라나는 내 손에 잔을 들려주고 손을 감싸 꾹 쥐게 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기대하는 양. 아무래도 내가 이 잔을 비워야 입가심할 걸 만들어줄 모양이다.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워 프레브라나에게 건네고 입 안에 남은 텁텁한 이물감에 콜록거렸다.
“혹시 미운 사람 준다고 용도를 잘못 말한 거 아니오?”
내가 눈을 찡그리며 묻자 프레브라나가 손을 바삐 휘저어 꿀물을 만들며 답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이것도 마저 드셔야 해요. 해독제예요.”
나는 다시 잔을 받아들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마시려 했다. 그러나 절반만 마시고 프레브라나에게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너무 달았다.
“혀가 절임이 되는 기분이오.”
“오라드도 그렇게 말해요. 절여지는 거 같다고요. 그래도 잘 드시네요. 미운 사람 주는 거라고 하셨으면서.”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깜빡깜빡. 반달처럼 휘어져 웃음기가 가득하던 갈색 눈이 신기한 소리를 들었는지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프레브라나는 어이없어하며 내게 물었다.
“반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하는 거요. 내가 남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내 말이 틀렸소?”
“…그건 아니에요. 맞아요. 그리고 당신도 저를 사랑하고요.”
프레브라나는 침대에 기대앉은 내 곁에 나란히 앉아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팔짱을 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일들을 들을 차례였다. 성을 나가서 본 사람들 가운데 신발을 신은 사람이 몇이었다거나 수도원에서 돌보는 빈자들의 모습 등을.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걸 보고 기억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루를 죄다 먹을 것을 구하는 데에만 쓰는 사람을 여럿 봤어요. 그 사람이 데리고 있는 아이는 모습을 조금씩 바꾸면서 배급을 여러 번 받으러 왔다가 쫓겨났어요. 도와주고 싶었는데 소동이 일어날 거 같아 위치만 기억하고 돌아왔어요.”
밝고 희망찬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기대는 접는 게 낫다. 그런 걸 원한다면 어느 정도 재력이 있으면서 왕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들을 모아놓고 밥 한 번 먹여주면 된다. 원하지도 않고.
“아픈 사람이었소?”
“잘 모르겠어요.”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나 보군. 나는 머릿속으로 익숙한 몇 가지 경우를 추측했다. 첫째로 단순히 아이를 고생시킬 뿐인 나쁜 양육자이거나 둘째로 다시 일할 기반도 기력도 없어 하루하루 버텨내는 게 최선인 자. 죽음이 아키텐을 뒤덮으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조차 망자를 보내며 살아갈 힘을 잃었다. 여럿을 봤다니 이게 제일 가깝지 않을까. 셋째로 아이와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벌이로 아이를 이용하는 자. 어느 쪽이든 아이가 벌써 어른을 돌보게 되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말은 내가 전해줄 테니.”
허기만을 해결해주는 것은 한시적이다. 예산 지원 없이 지시만 한다면 인력 보충 없이 맡은 일만 늘어나는 꼴이라 아까운 사람을 잡게 된다. 우려 사항을 말하고 물자를 추가 배정해준다면 이미 다뤄왔던 사람들이 알아서 살펴줄 것이다. 아이들이 구걸하는 대신 글자와 기술을 가르치며 돌볼 선생도 고용할 수 있을 테고.
문득 내 머릿속에 여기 오기 전 보르도에서 배임과 횡령을 저지른 관원 몇을 말린 생선처럼 성벽에 매달아버렸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 사람들은 믿을 수 있을까. 내가 자주 다니며 관리하지 않아도 해이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마땅한 곳으로 흘러야 할 돈이 도중에 샌다면 사람들은 당장 군주에게 탐욕스럽고 무자비하다는 죄목을 씌울 텐데.
“여기는 보르도가 아니니 기탁은 당신 이름으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제가 나서면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요.”
프레브라나의 물음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생각이 너무 길었다.
“도와주겠다는데 문제 삼을 일이 있으려고.”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궁금해할 거예요. 저는 당신 아내잖아요. 여기는 왕가의 고향이고요.”
내가 문제군. 죽은 전처의 유산으로 새사람에게 사치를 누리게 해준다고 흰 눈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건가. 영주 부인이 자선을 베풀면 사람들은 영주 부부를 둘 다 칭송한다. 나는 영주가 아니다. 푸아티에의 재산으로 푸아티에가 아닌 사람이 풍요를 누리는 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비록 자신은 아무 권리가 없더라도.
“내일 오라드와 함께 나가봅시다.”
아마 오라드는 먼저 파악한 프레브라나에게 공을 돌릴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남들에게도 존중받기를 바라는 착한 아이니까. 그러자 프레브라나가 살며시 웃었다.
“아빠가 먼저 나가자고 하면 오라드가 참 좋아할 거예요.”
“놀러 나가는 게 아니니 듣자마자 실망할지도 모르겠소.”
“세상에서 당신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괜찮을 거예요.”
만약 내게도 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셨다면, 큰아버지라도 허망하게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린 시절에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나는 짧은 감상에 잠기다 이내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어차피 내게 없는 걸 이제 와 상상해서 뭘 하겠는가.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아키텐 국왕의 충성스럽고 건강한 신민으로 돌려놔야 한다. 나바라와 레온이 사라지고 있다. 나와 나이가 같은 알모라비드의 술탄 야햐 6세는 아키텐이 프랑스를 흡수해 저들과 맞설 힘을 기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 딸은 속이 시커먼 나보다는 언제나 나은 사람이다.
“저 아이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하루 사이에 구름이 자욱하게 세상을 덮었다. 우리가 일부러 내방을 통보하지 않았기에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은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더러는 땟국물이 흐르는 얼굴을 씻지도 않은 채 맥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남루한 차림을 감추려 몸을 숨겼다. 어떤 아이들은 돌진하듯 겁 없이 다가와 ‘부유하고 착한 아가씨’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 아키텐 국왕은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가 보르도에만 있어서 여기 사람들은 영주가 있는데도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지 못했어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여기 사람들이 누려야 할 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새 영주가 취임하면 으레 영민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성을 개방하고 평소 먹어볼 수 없었던 요리를 대접하며 사는 이야기를 듣는다. 일이 바빠 미뤄졌으나 예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 눈은 발진이나 볼거리, 다리를 저는 등 돌림병의 징후가 있는지 먼저 살폈다. 나는 딸의 손을 잡았다.
“이미 준비하고 있어. 다 갖춰지면 알려줄게.”
따라온 이들에게는 어린 국왕이 인자하다는 인식만 심어주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할 일이다. 오라드는 수녀원장의 손을 잡고 내 예상대로 다정한 어머니를 추어올리며 은화가 가득 든 상자를 전했다. 수녀원장은 천국에 자리가 약속된 고결한 국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아울러 사랑이 넘치는 다복한 가정에 전능하신 신께서 또 다른 축복을 내려주시길 빈다며 감사를 올렸다. 마지막 말은 쓸데없는 소리였다. 돌아가는 길에서 프레브라나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내게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요.”
속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오.”
비가 또 내리려는지 바람이 습윤했다. 구름에 가려 노을 없이 쌀쌀한 저녁 공기를 맞으며 돌아오니 사무관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르도에서 온 이였다. 그는 내게 왕성 공사 진척 현황과 이번 가을의 총 수확량, 그리고 그 외 내가 알아야 할 변천 등을 보고서에 추려서 가져왔다. 어쩐지 이걸 보내고 내 지시를 기다리는 사이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을 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이제 직접 보지 않아도 수레길 하나하나 다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보르도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왕성의 보수를 마치면 성 바깥의 정비도 필요하다. 지금 여기서 하는 것처럼. 오라드가 성년이 되어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리는 때까지 마치면 좋으련만.
다음날 내게는 서신이 둘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도착한 서신 중 하나는 뤼지냥 백작 오브리가 보낸 것이었는데, 찬바람에 건강을 해쳤고 처가 곧 출산을 앞두었으니 알현을 미루게 되었음을 용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에서는 아르투아 백작 아르신드가 복귀를 알렸다. 나는 그 두 서신의 답장을 잠시 미루고 줄리아나 공주 앞으로 편지를 직접 썼다. 시빌과 마틸드 자매를 데리고 푸아티에로 오길 바란다는 부탁이었다. 내게는 그 어떤 괄목할 만한 성과보다도 내 딸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가장 큰 보상이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제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고티에르는 예고했던 대로 아드마르를 돌볼 나이 든 시종 하나만을 남기고 수행원들과 함께 앙주로 돌아갔다. 제 아버지 없이 혼자 남겨지니 그 활발한 아이도 약간 기가 죽은 게 엿보였다. 나는 앙주의 행렬이 작은 점으로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보았다. 고티에르는 떠나기 몇 시간 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 지금 아키텐에서 두 분 폐하의 위광에 맞설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국사를 나누어 맡길 자들을 더 발탁하지 않고 거의 혼자서 모든 일을 하는 것에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나는 그에게 답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악몽을 꾸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어린 주군이 그의 자식이 아니기에. 가문의 영역을 제각기 나눠 가진 자들이 많지 않기에. 언제든지 내 자식의 목숨과 재산을 강탈하려 날붙이를 들이댈 적이 없기에.
나는 내 딸을 잃고 헤매는 꿈을 꾼다. 목이 갈라져 피가 맺히고 눈물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국왕의 시신 없이 새 국왕을 축복하는 하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는 새 국왕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릴 내 딸을 찾아 성을 나선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찌른다. 내가 내 피에 잠겨 더는 오라드의 손을 잡아주지 못할 때 꿈이 끝난다.
귀족은 믿을 수 없다. 안위와 대우만 보장된다면 기꺼이 힘이 센 새 주인에게 고개를 숙일 자들이다. 아키텐의 왕통이 끊기거나 불안정하면 프랑스는 옛 통치권을 내세워 각 영주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것이다. 후방에 적을 둔 채로 피레네를 바라볼 순 없다. 처남이 계획했던 대로 이른 시일 안에 아키텐의 정예군을 재건해 브르타뉴의 강철을 손에 넣어야 한다. 산적한 내부 문제를 정리하고 예전의 번영을 되찾으면 길은 서서히 열릴 것이다.
누가 먼저 다다르느냐.
나는 푸아티에 성을 거닐며 옛 추억을 지금과 겹쳐 보았다. 키가 다 자라지 않은 어린 내가 처남과 처제의 손에 이끌려 여기저기를 구경 다녔다. 우리가 노는 사이 내 신부는 항상 검은 잉크가 묻은 손으로 두꺼운 책이나 서류 등을 쥔 채 부왕 곁을 졸졸 따랐다. 세월이 지나자 청년이 된 처남이 어린 오라드를 무릎 위에 앉히고 지도를 펼쳤다. 어려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오라드는 커다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삼촌을 보다가 그 옆에 앉은 내게로 손을 뻗었다. 아이 엄마는 외동딸의 선택을 받은 나를 짐짓 흘겨보다가 두세 살 딸의 무게조차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손목을 원망스러운 듯 문질렀다. 간혹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위그가 내 맞은편에 앉아 국경의 새 근황을 알려주기도 했다. 노을이 짙게 깔려 눈이 부실 때가 되면 처남은 배가 고프다며 자리를 파하고 우리를 인솔해 밖으로 나섰다. 창백한 회색빛 성벽이 그 시간에는 금을 바른 것보다 더 찬란히 빛나곤 했다. 젊었던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정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 혼자 남았다.
첫댓글 원작자의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이미지에 원작자의 파랑새 아이디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엊그제가 화이트데이였고…… 이 집 딸내미는 이렇게 자랍니다.
밤버전
낮버전
그리고 엄마입니다. 원래 아들은 엄마 잘 닮고 딸은 아빠 잘 닮더라.
요건 로판 타입의 핑크핑크한 딸내미 낮버전.
로판 타입 밤버전입니다. 각 파일의 크기가 크므로 와이파이 연결이 안 되셨을 경우 조심해서 클릭하시고… 인간적으로 저작자의 권리에 반하는 일만 하지 않으신다면 저장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 집 아빠는 아직도 자기 딸이 미소녀인 걸 모릅니다.
혹시 배경으로 쓰고 싶으신데 이미지가 깔끔하게 저장되지 않으시는 분은 말씀 주시면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부활했다!!!!! 연재가 부활했다!!!!!!!!!!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아 (미안해서 머리 박고 주거버림)
부활했군요!!!
여전히 34세 아빠와 중1 딸입니다 (쓰러짐) ㅇ<-< 딸내미가 마성의 여자 되는 건 3부에서나………… (으아아아)
이제 서서히 머리가 커져서는 군주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네요
길패트릭: 키나 좀 컸으면………
프린세스 메이커 기준으로는 13세에 프라이드를 800대는 찍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아키텐 실세는 여전히 아빠입니다. 이번에 엄청 길었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무엇이지 폭군 메이킹인가(?)
아버지, 왕이 주변을 보며 숙청을 생각하는데 애한테 잘못말했다고 매달리면 버릇 나빠져요!(..)
크킹 세계관에서 고1이면 성인식이니 3년 남았군요.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_◐;;;;) …ㅇ○(이 분 왜 이리 예리하시지;; 역시 짬에서 우러나오는…)
뭐 베이스는 로판이 아니라 크킹이니까요. 아무리 저런 아버지라도 딸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같은 시기를 똑같이 겪었어도 당시 아빠는 청년이었고 딸은 유년기고) 딸도 아빠랑은 성격 다르고. 캐릭터 당사자도 못 잡은 부분을 캐치하셨네요. 길패트릭은 그래도 딸내미가 선량하고 자기보다 약한 남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모습을 많이 봤고 또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딸이 자기한테 화 내고 멀어지려 하는 거기 때문에 딸내미가 종종 냉정한 면모를 보여도 저번에 장미 용병대 왔을 때처럼 세게 나가지 않는다면 큰 문제 삼지는 않을 거예요. 군주로서 나쁜 건 아니고, 얘 삼촌이 인정 베풀다가 죽는 꼴을 보기도 했고. 그 대가는…… 3부에서 돌려받을 예정입니다………
쉬시는 때 읽어주시겠다 하셨는데 너무 빨리 보셔서 으아아 싶구 암울한 글이라 미안합니다 싶기도 하구……… ㅇ<-<
귀인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오라드가 국왕의 면모가 나타나면서도 아직 아이같은 점들이 남아있네요. 역병도 지나가고 이제 재건과 부흥, 희망과 밝은미래만 남은거 같은데.. 부녀간에 뭔가 삭막해진거같아서 그런가
오히려 점점 갈수록 삭막하고 위태위태해보이네요
아무튼 결론은 귀인이 귀환하셨다! 부왘을 울려라!!!
저는………… 콤콤님에게 귀인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 (머리박)(석고대죄)
이 집 딸내미 이제 사춘기니까요. 까칠할 때지요. 아빠도 시니어가 아무도 없는 조별과제 N년차에 처음과 비하면 좀 더 다크해지기도 했고(그래도 전근대 통치자가 이 정도면 꽤 양호한 편이 아닌가). 위기의 순간에 그나마 어떻게 해 볼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는 리더가 다행히(?) 혈연 정통성으로 앉아있는 아키텐이지만 과연 아키텐이 예전의 번영을 되찾았을 때 저 사람은…… 그렇게 보이길 바라며 썼습니다. 그치만 길패트릭이 오피셜 천재인 게(머리박) 저는 천재가 아닌데에에.
아마 순탄하게 풀리진 않을 겁니다. 사는 게 그렇지요. 젊고 아름다운 병약미소녀 여왕님이고 사위도 (성장과정은 꽤 길패트릭과 닮았지만) 자기 같은 사람은 아니고 딸의 찐 사랑도…… 그리고 정말 쓰고 싶은 장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려면 한 7년쯤? 남은 거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써보도록 하겠습니다(_ 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