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 (풍수설)
중국과 한국에선 유난히 명당에 대한 신앙이 드세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선 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중국은 아직도 풍수에 대한 믿음이 강해서 집을 지을 때 풍수설을 철저히 따져서 장소와 방향과 위치를 세밀하게 조정한다.
풒수설에 의하면 터에는 양택과 음택이 있는데 사람이 사는 집을 ’양택‘이라 하고 돌아가신 분을 묻을 터 즉 묘지를 ’음택‘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음택 즉 조상이 묻힐 무덤을 중시하고 중국에선 사람이 살 집 즉 양택을 선호한다.
우리나라의 풍수설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전설적 인물이 바로 신라 말기를 살다 가신 도선(827~898)국사다.
그분은 전라도 영암 출신이지만 광양의 백운산 줄기의 백계산에 위치한 옥용사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옥용자라 이르기도 한다.
15세에 화엄사에 출가하여 처음 화엄학을 배워 달통했지만, 당시 교학에서 신라 중기 이후 선수행으로 옮겨지는 흐름을 따라 선수행으로 방향을 바꾸고 당(唐)의 서당 지장에게서 법을 이어 받은 ’동리산파‘를 연 혜철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혜철은 전남 곡성의 동리산에 있는 태안사에서 처음 동리산문를 열었다. 동리산문은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아홉의 선문 즉 ’구산선문‘ 중 하나다.
상당히 존경받는 선승임에도 선과 걸맞지 않은 풍수설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했음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의 풍수설은 거의 신화적이어서 여러 신비한 전설들이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운주사의 천불 천탑 이야기다. 즉 도선께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 나머지 나라 모양과 닮은 운주사 둘레의 땅에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을 하룻밤 사이에 모셔서 머지않아 닥아올 나라의 액운을 막았다고 하는 전설이다.
불상과 불탑 하나하나를 나라의 기운이 흐르는 맥의 장소에 세워 나쁜 흐름을 방지하여 미래에 일어날 나라의 액운을 막았다는 설화다.
도선이 선승이었음에도 풍수의 대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신봉해서 훈요 10조를 세워 나라의 안위를 위해 절대 지켜야 할 열 가지 조항을 세운 것에서 비롯되었다.
‘훈요 십조’는 불교를 많이 믿게 할 것,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도선이 정한 곳에만 절을 짓고) 함부로 아무 곳에나 절을 짓지 말 것, 외국의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을 본받지 말 것, 서경을 중요시할 것,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 것,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등이다.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훈요십조를 세워 불교를 중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라 당부한 것은. 길이 고려가 번창하기를 바라고 백성이 걱정 없이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호국 안민의 충정이었을 것이다.
도선의 저술로 알려진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기‘ 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 서책들을 다 도선이 지었다고 믿을 근거가 희박하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혼란기에 고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라의 멸망 당위성을 펴기 위한 왕건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왕건은 실제 도참설을 믿고 있어서 나라의 중요 지맥이 흐르는 곳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왕권의 안녕과 나라의 안정을 빌었다. 그래서 맥을 따라 지어진 절이나 탑을 함부로 허물지 말고 새로 절이나 탑을 함부로 세워 지맥을 흩트리지 말라고 한 것이 훈요다.
도선국사가 다소 풍수에 대한 학문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듯 많은 풍수 이야기가 그를 중심으로 전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무설설과 무법법의 부처님 가르침을 새기며 살았던 그가 가르침의 요지인 비움 사상을 외면하고 가시적 눈앞의 현상에 매달리는 풍수설이나 도참설의 신화에 빠져 그런 저술들을 지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후세의 권력가들과 신비주의자들이 그의 탁월하고 기이한 행적을 저들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모든 현상은 요행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어떤 노력을 했느냐로 결정된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복받을 인연을 가꾸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