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저 호박이예요.
전요..어쩜 이 평생에 나 자신을 호박 그대로를 보고 감사한 일이 별루 없었을까요?
매일 매일 물어보았던 것 같아요.
"저...호박 맞아요?"
왜냐하면, 제가 알고 있는 호박은 이런 호박이거든요.
속이 아주 진하게 노랗고,
단 향이 나며,
통통한 씨도 넉넉히 끌어안고 있는...
어떤 비바람도 잘 견딜 수 있는 단단한 껍질임에도 뽀오얀 분이 덮힌...
둥글둥글...잘도 넘어가는...
그런데요..
전 제 모습을 보면서 제가 호박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호박인지 아닌지 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인가요?"
"아니면..수박이었나?"
"박?"
"아니다..수세민가보다!"
"개구리 참외?"
저는 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궁금하기도 했고, 또 제 모습을 찾고 싶었습니다.
오인가 싶어 오이처럼 살아보았더니..
아니래요.
너무 뚱뚱하고 큰 오이래요.
저의 몸집에 치일까봐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어요.
아니..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더라구요.
그래서, 오이의 삶을 포기했답니다.
그럼..수박인가 싶어 수박처럼 살아보았더니..
아니래요.
단물을 가득 머금은 시원시원한 맛이 없다네요.
갑갑하고 비릿한 게..날 것으로는 먹기에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요.
그래서..갈증이 나는 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으로 굴러갔습니다.
박친구를 만났습니다.
수박이 아니면 박이라도...하는 기대감이 컸었나봅니다.
박도 날 것으로는 사귀지 못하였기에..난 박을 닮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박처럼 살아보려고 흉내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속살이 뽀오얀..우리의 순결함이 네게는 없어! 넌 박이 아니야!"
단호하게 거절당했습니다.
단단한 바가지로 몇 대 얻어맞고는..무거운 걸음을 옮길 수도 없어..또 굴렀습니다.
"그래, 나는 저 수세미인가보다"
색깔도 닮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만 그렇게 선호받는 열매는 아닌 것 같아서요.
수세미처럼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
전..이미 개구리 참외밭에 와있었습니다.
제가 수세미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요.
'여긴..내가 머물 수 있는 곳일까?'
그럴리가 있겠어요?
'내가 메론이나 노란 참외랑은 얘기하면 했지 네 속은 도저히 알 길이 없어'
라는 눈빛을 한꺼번에 온 몸으로 받으면서..결심했지요.
'더이상 내 모습 찾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야지...나는 그냥 나인가보다'
굴러다니기가 이젠 귀찮아졌습니다.
몸도 무거워졌고 마음도 무거워졌습니다.
이 거대한 몸을 이끌고 탱탱한 대추처럼 살아볼 용기도 없습니다.
미래를 소망하는 습관도 잊은 지 오랩니다.
부러움도 제게는 사치였습니다.
내 주변에는 똥냄새만 가득하네요.
내게는 똥이 최고라면서..주인이 오늘도 똥물을 부어주고 갔거든요.
나는 똥냄새 싫은데...
내 넝쿨은 거칠고 강하답니다.
사과처럼 살아보고자 언젠가.. 멋진 사과나무 위로 힘차게 올라갔다가...
호되게 야단맞았지요.
주인은..제몸을 뜯고 베어서 사과나무로부터 떼어 놓더니..
저만큼 머얼리 넝쿨을 옮겨버렸지요.
다시는 사과 나무에 얼씬도 못하도록...
아~ 이 절망감...!
피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이 현실에 묶여..
저는 이제..누구도 흉내낼 수 없이 뚱땡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굴러다닐 때가 몸은 가뿐했던 것 같네요.
살도 터지고
골도 깊게 패이고..
점점 더 미워져가고 있네요.
옛날엔 개구리 참외처럼 고왔는데...흑흑
가끔씩 주인이 절 살펴보고 가시네요.
다른 친구들은 똑똑 따다가 볶아서 주인의 밥상에서 가족들을 즐겁게도 하던데..
고추랑 오이는..요즘 여름철을 만나 가장 주인의 손이 많이 찾더군요.
손님이 올라치면,
참외랑 수박이랑...박도 바삐 주인의 손을 만나게 됩니다.
전..넓디넓고 거칠거칠한 솜털가시를 잔뜩 담은 넝쿨과 잎속에 숨어지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그 그늘을 벗어날 용기도 없지만..그럴 수도 없음을 아니까요.
'주인이 모르는 걸까? 내가 여기 있는 줄을...'
'아마..이 솜털가시 때문인가보다..팔이 따거워 다리가 따거워..가까이 오기 싫은가보다..'
이제 가을이 오면..이 잎들도 누렇게 변하겠지요?
마를 건 마르고..그 강하던 넝쿨도 이제 뻗어나가기를 중단하겠지요?
더 이상..그들의 그늘로부터도 숨지 못하게 되겠지요?
부끄러워서 어떡하나?
이 못난 모습..어떻게 가리우나..?
이곳 저곳 기웃거리면서
그들처럼 살아보려고..닮아보려고..흉내라도 내어보려고..몸부림 쳤던 날들이...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나를 초라하게 느끼게 할까요?
'주님..내가 여기 있음을 알고 계시지요~?"
흑흑...
...
그래요 주님..
제가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아니..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호박은..누렇게 늙은 호박이란 거...알고 계셨지요?
제가 기대하고 제가 바라며 꿈꿔왔던 호박의 모습이...
가을이 되고 겨울이 가까이 올즈음이면 저에게도 갖추어진다는 사실을..
주님께선 이미 알고 계셨지요?
전...
박을 닮았으나 박은 아니었습니다.
수박을 닮았으나 수박은 아니었습니다.
오이도 아니었고, 수세미도 아니었습니다.
개구리참외..그를 닮았으나 내가 그는 아니었습니다.
제겐..남에게 없는 굵고 깊은 골이 패여져 있습니다.
노화로 인해 주름이 패여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은..그것이 내가 호박이란 걸 잘 증명해 주는 증거물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치..넓디 넓은 호박잎 아래에 이 내 모습을 감추고 싶었던 것처럼...
이제는 덩치가 커져서 가릴 수도 없네요.
다른 이들은 저보고 호박이래요.
한동안 제 모습 보기를 멈췄기에..호박이라고 부르면..절 놀리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호박처럼 살지 못한다고 그렇게 놀리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이젠..제게..오이를 닮은 모습도, 수세미를 닮은 모습도, 박이나 수박을 닮은 모습도...개구리참외를 닮은 그 모습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호박이었습니다.
잘 익은..단내가 나고 분이 뽀오얀..
통통한 씨를 내 속에 넉넉히 안은..그런 호박은 아니지만..
전 호박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젠..오이처럼 살지 않을래요. 수세미나 박..수박의 흉내도 내지 않으렵니다.
개구리참외는 더욱...
호박답게 살고싶어요.
가을 걷이 때엔..주인의 손길이 내게 닿을 때..만족한 웃음을 보는 거..사치가 아니겠지요?
전...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치가 아니라고..허영이 아니라고...
왜냐하면,
주인께선..내게 가장 알맞는 똥물을 퍼다가
내 줄기의 뿌리가 있는 곳에다 땅을 깊이 파는 수고를 해 주셨고,
거기다 잘 발효된 가족들의 똥물을 당신에게 튈까봐 싫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부어 주셨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게 손길을 더 많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했지만
주인은 저보다 저의 뿌리..그리고 잎을 관리해 주시면서..
저를 가장 어리고 여릴 때 똑 따드시지 않고..
가장 원숙하고 가장 아름다워질 때까지 아껴두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주인께서 원하시는 그런 아름다운..가장 호박다운 모습이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지금도 끊임없이 저를 던져 놓고 돌보시는 주인님의 믿음직한 손길이 있는 한..
제게도 호박다운 호박의 모습으로 가을걷이를 마칠 수 있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소망합니다.
주님 오시는 날..
멋진 신부로 준비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이제..전..주님의 호박다운 호박으로 준비되고 싶습니다.
'호박아~'라고 불러주세요.
주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신다면..나의 모든 눈물이 말갛게 거두어 질 거예요.
이뻐서..사랑스러워서 나를 만져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냥..호박다운 호박으로 성숙해지고 원숙해질 수 있도록..저의 뿌리를 가꾸어 주세요.
주님의 그 성실하심은..
저로 하여금 가장 호박답게 하실 것임을 유일하게 소망할 수 있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