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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어떻게 써야 할까-이정일
다들 어디엔가는 글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SNS도 그중 하나입니다. 주보에 설교
컬럼을 쓰거나 블로그나 카페에 글을 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글을 쓰지 않아도 업무
외의 일로 축하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이매일을 보내거나 페북에 자신의 생각을
쓰기도 할 것입니다.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어렵지 않겠지만 글쓰기가 어색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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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게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요. 영화‘해적’에 보면 철봉
(유해진)이 산적들에게 고래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래를 낚시로 잡는지
그물로 잡는지 묻는 질문에 철봉이가 기가 막혀합니다. 철봉은 고래의 크기를 설명
하고 또 고래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말하지만 이걸 믿어주는 산적이 없어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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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슨다는 것은 아마도 고래를 보지 못한 사람들
에게 고래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글을 잘 쓰는 작가에게 글 쓰는
법을 물으면 교과서적인 답을 해요. 준비하느라 시간 끌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고 말
입니다. 또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로 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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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작하지만 한숨을 쉬면서 끝날 것입니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어서 낭패감이
뭔지 알아요. 그래서 글을 슨 게, 그리고 잘 쓰는 게 뭔지를 한번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설교자를 위해서.
좋은 글
글을 잘 쓰려면 좋은 글이 뭔지를 알아야 해요. 좋은 글에 대해서 곧 언급하겠지만
이것을 스스로 터득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좋은 글이 뭔지를 알면 글쓰기 실력이 일취월장
합니다. 특별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길을 찾아 갑니다. 이것을 깨닫는 과정이
꼭 등단 과정 같아요.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나 소설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그 비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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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를 가르쳐줄 수가 없어요. 천신만고 끝에 등단한 당선자일지라도. 좋은 글에 대해선
자기만의 정의가 필요해요. 헤밍웨이와 포크너는 글쓰기 방식이 달라요. 헤밍웨이는 신문
기자 출신답게 간결하게 글을 썼지만 포크너는 만연체의 글을 썼어요. 글이 길고 복잡하지요.
둘 다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헤밍웨이가 볼 대 포크너의 글은 산만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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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포크너가 볼 대 헤밍웨이는 내용이 빈곤하다고 느꼈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글에 끌리는지를 알아야 해요. 나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글을 선호해요.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를 보니까 작가는 글을 정직하게 쓴다고 말하더이다.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로 쓴다는 뜻이지요. 신 형철 문학평론가도 비슷한 말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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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훌륭한 작가들은 정확한 문장을 쓴다고 설명해요. 이때 정확하다는 것은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이 아니에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쉽고 자연스럽게 설명한다는 뜻일
겁니다. 정유정 작가는 정직한 글로, 신 형철 평론가는 정확한 글로 표현한 것을 김 훈
작가는 다르게 표현해요. 김훈은 자기의 삶을 통과해서 나오는 글을 좋은 글이라고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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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다르게 인식되고 표현되기에 김훈의 경우 좋은 글은 삶의
구체성과 일상성을 확보한 글이에요. 경험적으로 볼 때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글은
자연스럽고 구체적이어서 공감을 얻기가 쉬워요. 설교자는 고민이 많을 거예요.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니즈가 다르니까요. 그것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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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신만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해요. 세례 요한에게는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었어요.
갈릴리의 어부들도 요단강으로 내려왔을 정도니 말이에요. 그는 분명 사람들이 듣고 공감
하는 메시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설교는 더 파워풀
해요. 산상수훈은 좋은 글이 뭔지에 대한 힌트를 줘요. 쉽고 구체적이어서 공감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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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으킵니다. 한 번 들으면 기억해요. 메시지가 간결하기 때문이에요. 설명이 유용한 도구
지만 기억하기는 쉽지 않아요. 정보에 더 힘을 쏟다 보니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정보를 담는한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해요. 좋은 글은 쉽고 진실
하고 기억하기 좋아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말의 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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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글쓰기는 쉬워져요. 그 작가의 글을 일고 밑줄 치고 필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글 잘 쓰는 강원국 작가도 강 준만 교수의 컬럼을 꼼꼼히
읽으면서 글을 구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해요. 이게 관찰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지만 새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 익숙한 것을 다루지만 시각과 감성에 다른 포인트를 주어 새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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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게 하는 것, 이게 글쓰기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워밍업이 필요해요. 자기가 닮고 싶은
작가의 글을 읽는 시간이 필요해요. 이게 모방입니다. 롤 모델이 디는 작가를 두 세명쯤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그 작가들의 감정이 나를 통해서 연결이 되면 나만의 글쓰기
스타일이 나온다는 걸. 이것은 노래가 히트하는 것과 비슷해요. 신기하게도 비트나 감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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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만 달라져도 대중은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라고 느껴요. 뭐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달라요. 이종범, 이승엽 같은 야구선수를 보면 스윙이 글쓰기 훈련 같아요.
몸 쪽으로 오는 고은 당겨 치고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은 툭 밀어 칩디다. 이걸 모르는 타자는
없을 테지만 두 사람이 남다른 비결은 분명해요. 투수의 공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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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도 비슷해요. 글도 그렇게 느는 것 같아요. 처음엔 감이 안 잡히지만 쓰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글쓰기는 취미가 아니라 일이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은 취미와 일의
차이라고 봅니다. 글을 잘 쓰려면 프로의 시선이 필요해요. 설교자는 그런 기대치가 있어야 해요.
글쓰기는 세계를 이해하고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터득하면 설교자는 프로가 되요. 사역이든 글쓰기든 튼실하게 지을 수 있어요.
발견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고 여기지요. 그렇게 글을 쓰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는 드물어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탁월한 작가도 자신이 무슨
글을 쓸지 모르고 시작해요. 물론 본능적인 직관은 있겟으나 글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에 대한 감을 잡는 경우가 많아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이 선명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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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설교자는 작가와 반대자일 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요. 구원을 말한다면 구원이 무엇이고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로마서를 말한다면 그 책이 어떤 책이고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고 또 신앙인에게 어떤 으미를 갖고 있는지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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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터가 갈림길입니다. 할 말이 많을수록 그것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자신만의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이 사회를 두고 미래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이제 정보의 시대는
갔고 경험의 시대가 왔다.” 사람들은 이제 정보를 문자를 통해 알기보다는 영상을 통해서
아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일 겁니다. 시대가 바뀐 것이지요. 이제 사라들은 읽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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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걸 좋아하고 보는 것도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훅으로 시선을 끌지 못하면 그
짧은 동영상 짤도 묻힙니다. 글쓰기도 그 영향을 받고 있어요, 설교자는 주일설교를 준비
하며 고민할 것입니다. 비슷한 본문과 주제로 설교를 하다보면 설교자도 지치기 마련이지요.
설교자도 지치는데 성도들은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할 테지만 이걸 설교자가 해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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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설교자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해요. 다양한 시선을 가진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쇠락의 중심엔 목회자가 있지만 반전의 중심에도 목회자가
있다고 봐요.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호흡이 짧아지고 있어요. 성경 본문을 묵상하고 깊이
파기보다는 일상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있어요. 성도들은 하나님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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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는 살아있는 경험을 느끼고 싶어 해요. 이제 설교자는 성경말씀을 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아요. 그 말씀이 성도들이 살아가는 일상이란 콘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해요. 성도들은 울타리처럼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법을
일깨워줄 설교를 원해요. 이 울타리는 철망이 아니에요. 필요에 따라 넘나들지만 울타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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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경계선의 의미가 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여인이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말씀에서 보듯 경계를 넘는 게 뭔지 알면 신앙은 경직되지 않고 외골수라는
터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이걸 모르면 내가 옳다는 것을 상대가 틀렸다는 데서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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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롯의 흐름
어느 소설이건 첫 문장이 좋아요. 하지만 읽다 보면 더 좋은 문장이 곳곳에서 나옵니다.
바로 플롯의 흐름이 바뀌는 곳이나 이야기의 흐름이 바뀔 대 작가는 독자에게 문장으로
시그널을 보내지요. 작가는 그 문장 하나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앞으로 잔행 될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갖도록 유혹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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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슨 뜻인지 동화‘비밀의 화원’을 에로 들어 설명해 보려고 해요. 주인공 메리
레녹스는 열 살 이에요. 작가는 메리의 밉살스러움을 묘사해요. 메리는 여섯 살 무렵 이기
적인 폭군이 되어 있었어요. 아빠는 바쁜데다 병치레가 많았고 엄마는 파티에 빠져 살았어요.
그 사이 아이는 유모 손에서 컸어요, 부모가 콜레라로 급사한 뒤 메리는 영국의 친척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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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져요. 밉살스러운 모습은 그대로였어요. 그러다 작가는 아이가 붉은가슴새를 보고
하는 말을 적어요. “나도 외로워” 아이는 붉은가슴새를 보면서 자신도 외롭다는 걸, 친구가
없다는 걸 처음오로 느낀 것 같아요. 이후의 소설을 보면 아이는 새를 보면서 말해요.
“나랑 친구가 되어 줄래” 메리는 누구랑 같이 놀아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 아이가 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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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바뀌고 신분이 낮은 동네 아이와도 친구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해요. 아이가 성장
하고 변하는 계기와 과정이 있어요. 이걸 이야기로 또 문장으로 말하듯이 쓰면 좋은 글이
된다고 봐요. 소설 속 아이가 경험하고 깨닫는 생각이 있다. 이게 발견이고 한 겹이다.
한 겹이 두 겹이 되고 열 겹이 되면 달라지는 게 있어요. 시선이 달라져요. 그 한 겹이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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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이 되면 느낍니다. 같은 이야기도 얼마나 새롭게 변할 수 있는가를. 설교자가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몰입하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잊기 쉽습니다. 글을 말하듯이 쓰다보면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감이 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감을 익혀야 합니다. 좋은 글을
쓰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요. 문단에서 보면 스무 살에 등단하는 천재 같은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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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드문 예이지요. 대개는 힘든 과정을 거쳐요. 최고의 작가 소리를 듣는 정유정
작가도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했어요. 소설이 뭔지 그걸 쓰는 게 뭔지를 깨닫는 시간이 필요
해요. 같은 레시피를 갖고도 다른 맛을 내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기까지
쓰고 또 쓰는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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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격은 작가의 땀을 보여줍니다. 문장에 묻은 땀이 보이면 소설을 읽고 그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돼요. 같은 소설을 읽어도 뽑아낼 이야기는 무궁하지요.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뽑아내면 그넌 자신만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이런 경험이 중요해요.
이게 발견이고 글쓰기에요. 이런 경험이 쌓이면 귀에 익은 설교도 처음 듣는 것처럼 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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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다들 이런 비결이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을 매뉴얼로 설명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어요.
탁월한 레시피도 맛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셰프가 최고의 레시피를 알려주어도 그 음식을
내가 먹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어요. 그게 글쓰기의 맛입니다. 좋은 글이 뭔지를 알면 그걸
쓸 수 있어요. 그걸 터득하기가지가 수련의 시간입니다. 그 사간은 예상하는 것보다 힘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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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되지만 그것을 견디며 나만의 글을 쓰게 되지요. 지금은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해진
시대에요. 설교자가 아무리 무엇을 말해도 어떻게가 없으면 메시지는 잊힐 것입니다.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어떤 글이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도 알아가고 세상도 알아갑니다. 이런 글쓰기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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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우리가 다 아는 에디슨 명언이 있어요. “천재는 99%의 노력과1%의 영감으로 만들어 진다.”
어떤 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 말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 명언의 핵심은 반대
라고 말하기도 해요. 1퍼센트의 영감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둘 다 중요해요.
영감이 빛을 발휘하려면 노력이 필요하고, 반대로 노력에 영감의 불꽃이 없으면 글이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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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지 못해요. 좋은 글에는 반드시 빛나는 문장이 있어요. 그 문장은 우연히
작가의 머릿속에서 번득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톨스토이가 그걸 증명합니다. “모든 행복
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작기 나름으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도입부이지만 작가는 소설을 쓰는4년 동안 이 첫 문장을 쓰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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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대요. 빛나는 한 문장은 이런 노력의 결과일 때가 많아요. 이것이 글쓰기와 맞닿아있어요.
글도 이야기처럼 그 어떤 설득과 설명으로도 열지 못하던 마음의 문을 열게 해요. 그런 글을
쓰려면 두 가지를 경험해야 해요. 절망과 목마름입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다 보면 본능적으로
알게 돼요. 사람들이 어떤 글에 목이 말라 있는지를. 그걸 채우려 작가가 토해내듯 쓰는 게 글
이에요. 좋은 소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에 나와요. 어쩌면 설교도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싶네.
2023.2.27.mon. 정리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