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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선원
 
 
 
카페 게시글
불교 자료실 스크랩 유가사지론 제 21 권
보행 추천 0 조회 50 09.04.28 12: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715 / 829] 쪽
  
유가사지론 제 21 권
  
  
  미륵보살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강명희 번역
  
  
  10) 성문지(聲聞地) ①
  
  (1) 초유가처(初瑜伽處) 종성지(種姓地)
  위와 같이1) 수소성지(修所成地)를 설하였다.
  무엇을2) 성문지(聲聞地)라고 하는가?
  일체의 성문지(聲聞地)를 총괄하여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만약 간략하게 이 지(地)를 설하면
  종성[姓] 등과 삭취취(數取趣)와
  
1) 이 위에서는 삼승통행(三乘通行)의 3지(地)를 설명하였고, 이 이하는 삼승별행(三乘別行)의 3지(地)를 밝힌다. 위의 3지(地)는 방편행(方便行)이라고도 하며 아래의 3지(地)는 근본행(根本行)이라고도 한다.
2) 성문(聲聞)이란 제 불(佛)의 성교(聖敎)를 최우선으로 삼는 그 스승과 벗으로부터 가르침의 소리를 듣고서 차츰 수습하고 증득하여 세간(世間)을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에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성문(聲聞)의 종성(種姓)과 발심(發心)과 수행(修行)과 득과(得果)의 모두를 종합적으로 설명하여 성문지(聲聞地)라고 한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종성(種姓)이요, 둘째는 삭취취(數取趣)이며, 셋째는 안립(安立)이며, 넷째는 세(世) 출세(出世)이다. 또한 초유가처(初喩伽處)에는 3지(地)가 있으니, 첫째는 종성지(種姓地)이며, 둘째는 취입지(趣入地)이며, 셋째는 출리상지(出離想地)이다. 이 21권에서는 종성지(種姓地)와 취입지(趣入地)를 해설하고 그 다음의 네 권에서는 출리지(出離地)를 해설한다. 이하는 유가처(瑜伽處)의 종성지(種姓地)에 대하여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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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응하는 대로 안립(安立)과
  세간(世間) 출세간(出世間)이니라
  若略說此地  姓等數取趣
  如應而安立  世間出世間
  
  이 지(地)3)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으니
  종성지[種姓]과 취입지[趣入]와
  그리고 출리상지(出離想地)이니
  이를 성문지[聲聞]라고 설한다네
  此地略有三  謂種姓趣入
  及出離想地  是說爲聲聞
  
  무엇을 종성지(種姓地)라고 하는가?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만약 간략하게 일체를 설하여
  종성지(種姓地)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자성(自性)과 안립(安立)과
  제 상(相)과 삭취취(數取趣)라네.
  若略說一切  種姓地應知
  謂自性安立  諸相數取趣
  
  말하자면 종성(種姓)의 자성(自性)과 종성(種姓)의 안립(安立)과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자의 모든 제 상(相)과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이와 같은 일체를 간추려서[總略] 하나로 하여 종성지(種姓地)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종성(種姓)이라고 하는가?
  
3) 초유가처(初喩伽處)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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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補特伽羅)에게는 종자법(種子法)이 있고 현재 있기[現有] 때문에 종성(種姓)에 안주하는 보특가라가 만약 승연(勝緣)을 만나면 곧바로 적응할[堪任] 수 있고 세력이 있게 되어서 그 열반(涅槃)에 대해서 얻을 수도 있고 증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종성(種姓)의 이름에는 어떤 차별(差別)이 있는가?
   혹은 종자(種子)라고도 이름하고 혹은 계(界)4)라고도 이름하며 성(性)이라고도 이름하니, 이를 차별(差別)이라고 한다.
   이제 이 종성(種姓)은 무엇을 체(體)로 삼는가?5)
   소의(所依)에 붙어 있으면 이와 같은 상(相)이 있으며, 6처(處)에 포함되어[所攝] 무시시래[無始世]로부터 전전(展轉)하며 전래(傳來)하면서 법이(法爾)로 얻어진 것이며,6) 이에 차별적인 이름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소위 종성(種姓) 종자(種子) 계界) 성(性)을 종성(種姓)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이라고 하는가?7)
  '이제 이 종성(種姓)은 응당 세(細)8)라고 말해야 하는가, 추(麤)9)라고 말해야 하는가?'라고 응당 물으면 '세(細)이다'고 대답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이
  
4) 범어로는 Dh tu의 의역(意譯)이다. 이는 인(因)이라는 뜻이다.
5) 이하는 종성(種姓)의 자성(自性)과 종성(種姓)의 안립(安立)과 종성(種姓)의 제 상(相)과 종성(種姓)의 삭취취(數取趣)를 설한 종성지(種姓地)의 내용 가운데에 첫 번째로 종성(種姓)의 자성(自性)을 체(體)로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6) 난타(難陀) 등은 본유(本有)의 종자(種子)의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는 산모가 능히 자식을 낳는 작용이 있는 것을 사람의 종자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여자의 몸에 모여서 잉태되지 않았다면 이것 역시 이와 같이 증득하는 데에 감능(堪能)이 있기 때문에 종자가 있다고 설할 뿐이다. 이 감능을 얻는다는 뜻은 수소득(修所得)이 아니기 때문에 법이(法爾)라고 하는 것이다.
7) 이하는 네 가지의 종성지(種姓地)를 설하는 가운데에 두 번째로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을 설명한다.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을 밝히는 데에는 총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추(麤) 세(細)를 밝히는 것이며, 둘째는 일(一) 다(多)의 상속(相續)을 밝히는 것이고, 셋째는 반열반(般涅槃)의 인연(因緣)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고, 넷째는 승(勝) 열(劣)의 2연(緣)을 밝히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 가운데 첫 번째의 추(麤) 세(細)를 밝힌다.
8) 짜임새가 촘촘한 것을 의미하며, 마음의 정신작용을 말한다.
9) 매우 거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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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種姓)은 아직 능히 과(果)를 부여하지 못하고 아직 성과(成果)를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세(細)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이미 과(果)를 부여하였고 성과(成果)를 익혔다면 이 때의 종성(種姓)은 종자[種]이거나 과(果)이거나 간에 모두 추(麤)라고 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종성(種姓)은 하나의 상속[一相續]에 떨어진다고 말해야만 하는가, 많은 상속[多相續]에 떨어진다고 말해야만 하는가?10)
   하나의 상속에 떨어진다고 말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법(法)이 다른 상[異相]으로 구유(俱有)하면서 구른다[轉]고 한다면 그것의 각각 다른 종종(種種)의 상속(相續)과 종종(種種)의 유전(流轉)을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종자(種子)는 6처(處)에 각기 다른 상[別異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곧 이와 같은 종류의 분위(分位)인 6처(處)의 수승한 것에 무시시래[無始世]로부터 전전(展轉)하며 전래(傳來)하면서 법이(法爾)로서 얻어진 이러한 상(想)과 언설(言說)로서 있어서 종성(種姓) 종자(種子) 계(界) 성(性)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속에 떨어진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약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補特伽羅)에게 열반법(涅槃法)이 있다고 한다면 종성(種姓)에 머무르며 열반법(涅槃法)이 있는 이 보특가라(補特伽羅)가 무슨 인연 때문에 열반법(涅槃法)이 있는데도 전제(前際)로부터 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유전(流轉)하면서 반열반(般涅槃)하지 못하는가?11)
   네 가지 인연 때문에 반열반(般涅槃)하지 못한 것이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겨를 없는 데[無暇]에 태어났기 때문이며, 둘째는 방일(放逸)의 과환[過] 때문이며, 셋째는 삿된 해행(解行) 때문이며, 넷째는 장애[障]의 과환[過]이 있기 때문이다.
  
10) 이하는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을 밝히는 가운데 두번째로 일(一) 다(多)의 상속(相續)을 밝힌다.
11) 이하는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을 밝히는 가운데 세 번째로 반열반(般涅槃)의 인연(因緣)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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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겨를 없는 데[無暇]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변방의 나라[邊國]와 달수(達須) 또는 멸려차(蔑戾車)로 태어나서 그곳에는 4중(衆)과 현양(賢良)과 정지(正至)와 선사(善士)들이 왕림하여 유행[遊涉]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를 겨룰 없는 데[無暇]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방일(放逸)의 과환[過]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비록 중국(中國)에 태어나고 혹은 달수(達須)도 아니고 멸려차(蔑戾車)도 아니고 4중(衆)과 현양(賢良)과 정지(正至)나 선사(善士)가 모두 왕림하여 유행[遊涉]하지 않을지라도 귀한 집에 태어나서 재보(財寶)를 두루 갖추어 여러 가지 묘오욕[妙欲]에 대하여 탐착(耽著)하고 수용(受用)하여 과환(過患)을 보지 못하고 출리(出離)를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를 방일(放逸)의 과환[過]이라고 한다.
  무엇을 삿된 해행(解行)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중국(中國)에 태어나고 내지 [廣說] 라고 하더라도 외도(外道)의 갖가지 악견(惡見)을 지녔기 때문에, 즉 이와 같은 견해[見]를 일으키고 이와 같은 이론[論]을 세우면서 시여(施與)할 줄 모르나니, 내지…… '나는 스스로 여러 후유(後有)가 없는 줄을 분명히 안다'고까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위와 같은 외도(外道)의 견해 때문에 제 불(佛)이 세간(世間)에 출현하셨는데도 만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법(正法)을 설하는 선우(善友)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삿된 해행(解行)이라고 한다.
  무엇을 장애[障]의 과환[過]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비록 중국(中國)에 태어나고 자세한 설명은 앞에서와 같으며, 또한 제 불(佛)이 세간에 출현하신 것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설하는 여러 선우(善友)들을 만나더라도 성품이 우둔(愚鈍)하고 완고[頑騃]하며 무지(無知)한 것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손으로 말을 대신하는 벙어리인지라 선설(善說)과 악설(惡說)의 모든 법의(法義)를 알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이며, 혹은 다시 여러 무간업(無間業)을 짓기도 하는 것이며, 혹은 다시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장애[障]의 과환[過]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네 가지 인연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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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열반법(般涅槃法)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열반(般涅槃)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 제 불(佛)의 출세(出世)를 만나서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교수(敎授) 교계(敎誡)를 수순(隨順)함을 획득하여 이러한 인연12)을 없앤다면 이 때 비로소 능히 선근(善根)을 성숙(成熟)하여 점차로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다.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補特伽羅)는 결정취(決定聚)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는 연(緣)을 만나거나 연(緣)을 만나지 않거나 간에 일체종(一切種)에 두루하여도 필경에 반열반(般涅槃)을 얻을 수 없다.
   무엇을 열반법(涅槃法)의 연(緣)이라고 하였는데도 결여하기 때문에, 없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반열반(般涅槃)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13)
   두 가지 인연[緣]이 있다.
  무엇을 두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승연[勝 : 勝緣]이며 둘째는 열연[劣 : 劣緣]이다.
  무엇을 승연(勝緣)이라고 하는가?
  정법(正法)을 더욱이 하는[增上] 다른 법음[他音]과 안[內]의 여리작의(如理作意)를 말한다.
  무엇을 열연(劣緣)이라고 하는가?
  이 열연(劣緣)에는 이에 많은 종류가 있다.14) 자체의 원만[自圓滿] 다른
  
12) 반열반(般涅槃)하지 못하는 네 가지 인연을 말한다.
13) 이하는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을 밝히는 가운데 네 번째로 승(勝) 열(劣)의 2연(緣)을 밝힌다. 승(勝) 열(劣)의 2연(緣)을 밝히는 데에는 2연(緣)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문(問) 답(答)으로써 자세히 해석하는 것과 2연(緣)을 하나 하나 나누어 해석하는 것과 거듭 2연(緣)을 해석하는 것과 3법(法)에 이어지는 것이 있다. 이하는 2연(緣)을 종합적으로 밝히는 부분이다.
14) 승(勝) 열(劣)의 2연(緣)을 밝히는 가운데 앞에서는 2연(緣)을 종합적으로 해석하였고 이하는 이를 하나 하나 해석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열연(劣緣)에 대해서 12가지로 나누어서 해석한다. 12가지란 자체의 원만[自圓滿] 다른 것의 원만[他圓滿] 선법욕(善法欲) 바른 출가[正出家]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의 양을 아는 것[於食知量] 초야와 후야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의 유가를 수습하는 것[初夜後夜常勤修習覺寤瑜伽] 정지하면서 머무르는 것[正知而住] 원리를 즐기는 것[樂遠離] 제 개를 청정히 하는 것[淸淨諸蓋] 삼마지를 의지하는 것[依三摩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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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의 원만[他圓滿] 선법의 욕구[善法欲] 바른 출가[正出家] 계율의(戒律儀) 근율의(根律儀) 음식의 양을 아는 것[於食知量] 초야와 후야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의 유가를 수습하는 것[初夜後夜常勤修習覺寤瑜伽] 정지하면서 머무르는 것[正知而住] 원리를 즐기는 것[樂遠離] 제 개를 청정히 하는 것[淸淨諸蓋] 삼마지를 의지하는 것[依三摩地]을 말한다.
  무엇을 자체의 원만[自圓滿]이라고 하는가?
  좋은 사람 몸[人身]을 얻는 것과 성처(聖處)에 태어나는 것과 제 근(根)이 결함이 없는 것과 승처(勝處)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내는 것과 제 업장(業障)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좋은 사람 몸[人身]을 얻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인동분(人同分)15)에 태어나 장부(丈夫)의 몸을 얻어서 남근(男根)이 성숙하고 혹은 여자의 몸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좋은 사람 몸[人身]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성처(聖處)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가?
  어떤 사람이 중국(中國)에 태어나고 자세한 설명은 앞과 같으며, 내지 선사(善士)가 모두 왕림하여 유행[遊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성처(聖處)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제 근(根)이 결함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성품[性]이 우둔하지도 않고 완고[頑騃]하지도 않고 또한 벙어리도 아니고 내지 …… 팔다리에 결함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팔다리에 결함이 없으며, 귀 등에 결함이 없기 때문에 능히 선품(善品)에 대하여 정근(精勤)하고 수집(修集)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제 근(根)이 결함이 없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승처(勝處)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내는 것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제 여래(如來) 정각(正覺)께서 설하신 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해서 청정한 믿음[淨信]의 마음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
  
15) 인간(人間)의 중동분(衆同分)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동분(同分)이란 유정(有情)의 공통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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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승처(勝處)에 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내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승처(勝處)라고 하는 것은 제 여래(如來) 정각(正覺)께서 설하신 법과 비나야는 능히 일체 세간[世]과 출세간[出世]의 백정법(白淨法)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것에서 일어나게 되는 전행(前行) 증상(增上)의 여러 청정한 믿음[淸淨信]을 승처(勝處)의 청정한 믿음이라고 이름한다. 능히 일체의 모든 번뇌의 구예(垢穢)16)의 흐림[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제 업장(業障)을 여의는 것이라고 이름하는가?
  능히 5무간업(無間業)을 원리(遠離)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그가 어미를 살해하고 그가 아비를 살해하고 아라한(阿羅漢)을 살해하고 화합승(和合僧)을 파계(破戒)하고 여래의 몸[如來所]에 악한 마음으로 피를 내는 것이다. 어느 하나의 무간업장(無間業障)을 현법(現法) 중에서 짓지 않고 행하지 않는 이와 같은 것을 제 업장(業障)을 여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러한 5무간업(無間業)에 대하여 조작(造作)하거나 증장(增長)하는 일이 있다면 현법(現法) 중에서 능히 굴러도 결국에는 반열반(般涅槃)을 얻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성도(聖道)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요약해서 제 업장(業障)을 여읜다고 설하는 것이다.
  위와 같기 때문에 다섯 가지 지분만이 자체(自體)의 원만(圓滿)이다. 그러므로 이를 설하여 자체의 원만[自圓滿]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다른 것의 원만[他圓滿]이라고 하는가?
  제 불(佛)께서 출세(出世)하여 정법(正法)의 가르침[敎]을 설하시고, 정법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머무르고[久住], 법주(法住)에 따라 구르며[隨轉], 다른 사람에게 애민(哀愍)을 받게 되는 경우와 같다.
  무엇을 제 불(佛)의 출세(出世)라고 이름하는가?
  어떤 사람이 널리 일체 모든 유정(有情)들에게 좋은 이익을 더욱 더[增上] 하려는 의요(意樂)를 일으키고, 수많은 난행(難行)과 고행(苦行)을 수습하며, 3대겁(大劫) 아승기야(阿僧企耶)17)를 지나치도록 광대한 복덕과 지혜의 두
  
16) 더러움을 의미한다.
17) 범어 Asa khya의 음사어로서 아승지(阿僧祗)로도 음사된다. 헤아릴 수 없는 무량수(無量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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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자량(資糧)을 적집하여, 최후(最後)의 상묘(上妙)한 몸을 획득하여, 더 이상 뛰어남이 없는[無上勝] 보리좌(菩提座)에 편안히 앉아서, 5개(蓋)를 끊어 없애고 4념주(念住)에 잘 그 마음을 머물게 하며 37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아서 현재에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제 불(佛)의 출세(出世)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제 불은 모두 이와 같은 것에 의하기 때문에 출세(出世)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정법(正法)의 가르침[敎]을 설한다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곧 이와 같은 제 불(佛) 세존(世尊)께서 세간에 출현(出現)하여 일체의 여러 성문(聲聞)을 애민(哀愍)히 여겼기 때문에 4성제(聖諦)에 의하여 진실한 고(苦) 집(集) 멸(滅) 도(道)와 무량(無量)한 법의 가르침을 선설(宣說)하셨으니, 이른바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풍송(諷誦) 자설(自說) 인연(因緣)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논의(論議)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정법(正法)의 가르침[敎]을 설한 것이라고 이름한다. 제 불(佛) 세존(世尊)과 성제자(聖弟子)와 일체의 정사(正士)들은 모두 이 법에 올라타서 출리(出離)를 얻은 연후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설(宣說)하고 칭찬(稱讚)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설명하여 정법(正法)의 선설(宣說)이라고 이름하며, 이 때문에 정법의 가르침[正法敎]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정법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머무른다[久住]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정법을 설하고 나서 법륜(法輪)을 세존의 수명[壽量]이 오래 머무르는 동안까지 굴리신 뒤에는 그리고 열반(涅槃)한 뒤에는 이소시(爾所時)18)를 지나치면서 정행(正行)이 여전히 줄지 않고 정법이 여전히 숨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정법(正法)이 오래도록 머문다[久住]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래도록 머문다고 하는 것은 그 승의(勝義)의 정법(正法)과 작증(作證)한 도리(道理)를 말하는 것인 줄 알아야만 한다.
  
18) 정법(正法) 5백 년의 기간을 말한다. 『대비경(大悲經)』 등에 의하면 정법의 기간을 1천 년이라고도 한다.
[724 / 829] 쪽
  무엇을 법주(法住)에 따라 구른다[隨轉]고 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곧 이와 같이 정법을 증득한 사람은 이와 같은 정법을 증득할 수 있는 중생(衆生)을 환히 아는[了知] 힘이 있으므로 곧 증득한 바 그대로의 교수(敎授)와 교계(敎誡)를 따라 굴리며[隨轉] 수순(隨順)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법주(法住)에 따라 구른다[隨轉]고 이름하는 것이다.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애민(哀愍)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이란 시주(施主)를 말하며, 그는 행하는 자한테 애민(哀愍)한 마음을 일으켜서 청정한 생활[淨命]을 수순하는 자구(資具), 이른바 여법(如法)한 의복과 음식과 여러 앉고 눕는 자구[諸坐臥具]와 병에 의한 의약을 혜시(惠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애민(哀愍)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선법의 욕구[善法欲]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 혹은 제자들한테 정법을 듣고 나서 청정한 믿음[淨信]을 획득하는 것이다. 청정한 믿음을 얻고 나서 응당 다음과 같이 학(學)에 상응하여, '재가(在家)는 번거롭고 요란하여 티끌의 집[塵宇]19)에 있는 것과 같으며 출가(出家)는 한가롭고 넓어서 마치 허공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모든 처자(妻子) 권속(眷屬) 재물과 곡식[財穀] 값진 보물[珍財]를 버리고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毘奈耶)로 바로 가법(家法)20)을 버리고 집 아닌데[非家]21)로 나아가겠다'고 하며, 이미 출가하고 나서 정행(正行)을 부지런히 닦고 원만(圓滿)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선법(善法)에 대한 이와 같은 욕구를 일으키는 것을 선법의 욕구[善法欲]라고 한다.
  무엇을 바른 출가[正出家]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곧 이러한 뛰어난 선법의 욕구[善法欲]의 증상력(增上力) 때문에 백사갈마(白四羯磨)22)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혹은 힘써 책려하면서 배
  
19) 번뇌가 쌓인 집이라는 의미이다.
20) 재가(在家)를 의미한다.
21) 출가(出家)를 의미한다.
22) 수계작법(受戒作法)에서 맨처음 받는 사람에 대하여 고백하는 것을 1백(白)이라고 하고 다음에 세 번 그 가부(可否)를 묻는 것을 3갈마(羯磨)라고 한다. 갈마(羯磨)란 범어 Karma의 음사어로서 업(業) 혹은 소작(所作)이라고도 한다. 한 번의 백(白)과 세 번의 갈마(羯磨)를 합하여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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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야 할[所學] 시라(尸羅)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바른 출가[正出家]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계율의(戒律儀)라고 하는가?
  그는 위와 같이 바르게 출가하고 나서 구족계[具戒]에 안주하고 굳건히 방호(防護)하여 별해탈율의계[別解律儀]와 궤칙(軌則)의 소행(所行)에 모두 다 원만함을 얻고 미세한 소죄(小罪)에 대해서도 대포외(大怖畏)를 보고 일체의 모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는 것[受學]이다. 이것을 계율의(戒律儀)라고 한다.
  무엇을 근율의(根律儀)라고 하는가?
  말하자면 곧 이 시라(尸羅) 율의(律儀)에 의지하여 정념(正念)을 수호하고, 상위념(常委念)을 닦으며, 염(念)으로서 마음을 방호[防]하여 평등위(平等位)에 나아가고, 눈으로 색(色)을 보고 나서 상(相)을 취하지 않고 수호(隨好)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의지하여 안근율의(眼根律儀)의 방호(防護)를 수습하여 그 마음을 머무르지 않게 함에 의해서 모든 탐애(貪愛)와 악(惡) 불선법(不善法)이 흘러 나올까봐 곧 그것에 대하여 율의(律儀)의 행(行)을 닦고 안근(眼根)을 방호하며 안근(眼根)에 의지하여 율의(律儀)의 행을 닦는 것이다.
  위와 같이 행자(行者)는 귀로 소리를 듣고 나서, 코로 냄새를 맡고 나서, 혀로 맛을 보고 나서,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나서, 의(意)로 법(法)을 알고 나서 상(相)을 취하지 않고 수호(隨好)를 취하지 않으며, 이러한 것에 의하여 의근율의(意根律儀)의 방호(防護)를 수습하여 그 마음을 머무르지 않게 함에 의해서 모든 탐우(貪憂)와 악(惡) 불선법(不善法)이 흘러 나올까봐 곧 그것에 대해서 율의(律儀)의 행을 닦고 의근(意根)을 방호(防護)하고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율의(律儀)의 행을 닦는다. 이것을 근율의(根律儀)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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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음식의 양을 아는 것[於食知量]이라고 하는 것인가?
  그는 이와 같이 제 근(根)을 수호하고 나서 정사택(正思擇)으로써 먹어야 할 것[所食]을 먹으니, 방탕[倡蕩]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교만과 방일[憍逸]을 위해서가 아니며 족히 꾸미기 위해서도 아니며 단엄(端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어야 할 것을 먹는 것이다. 더군다나 먹어야 할 것을 먹는 것은 몸의 안주를 위해서이며, 잠깐 동안의 지탱을 위해서이며, 기갈(飢渴)을 없애기 위해서이며, 범행(梵行)을 섭수(攝受)하기 위해서이며, 옛 느낌[古受]23)을 끊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느낌[新受]을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역락(力樂)을 보존하여 기르고 죄없어 안은(安隱)하게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음식의 양을 아는 것[於食知量]이라고 한다.
  무엇을 초야와 후야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의 유가를 수습하는 것[初夜後夜常勤修習覺寤瑜伽]이라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음식의 양을 알고 나서 낮[晝日分]에는 경행(經行)과 연좌(宴坐)의 두 가지 위의(威儀)로 장애를 따르는 법[順障法]으로부터 그 마음을 청정하게 닦으며, 초저녁[初夜分]에도 경행(經行)과 연좌(宴坐)의 위의(威儀)로 장애를 따르는 법으로부터 그 마음을 청정하게 닦으며, 이 시간을 지난 뒤에는 머물고 있는 곳[住處]의 바깥으로 나아가서 그 발을 씻고서 오른쪽 옆구리로 대고 두 발을 포개고서 누워서 광명상(光明想)에 정념(正念) 정지(正知)로써 일어난 상(想)을 머물면서 사유(思惟)하며, 새벽[後夜分]에는 빨리 잠에서 깨어나서[覺寤] 경행(經行)과 연좌(宴坐)의 두 가지 위의(威儀)로 장애를 따르는 법[順障法]으로부터 그 마음을 청정하게 닦는다. 이와 같은 것을 초야와 후야에 항상 부지런히 각오의 유가를 수습하는 것[初夜後夜常勤修習覺寤瑜伽]이라고 한다.
  무엇을 정지하면서 머무르는 것[正知而住]이라고 하는가?
  그는 이와 같이 항상 부지런히 각오(覺寤)의 유가(瑜伽)를 수습하고 나서 가거나 오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며 보거나 쳐다보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며, 굽히거나 펴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며,
  
23) 이미 저장되어 있는 느낌이라는 의미에서 옛 느낌[古受]라고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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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가지(僧伽 )와 의발(衣鉢)을 가지면서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먹거나 마시거나 씹거나 맛보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며, 가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깨어있을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말하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르고 피로를 풀려고 잠을 잘 때에도 정지(正知)하면서 머무른다. 이와 같은 것을 정지하면서 머무르는 것[正知而住]이라고 한다.
  무엇을 원리를 즐기는 것[樂遠離]이라고 하는가?
  이와 같은 닦아야 할[所修] 선법(善法)으로 인하여 전도없이[無倒] 초업지(初業地)를 닦아 대치하고[修治] 나서 일체의 와구(臥具)에 대한 탐착(耽著)을 원리(遠離)하고 아련야(阿練若) 나무 아래[樹下] 빈 집[空室] 산골짜기 산봉우리 굴 풀밭 한 데 무덤사이 수풀 빈 벌판 들 맨 마지막[邊際]의 와구(臥具)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을 원리를 즐기는 것[樂遠離]이라고 한다.
  무엇을 제 개를 청정히 하는 것[淸淨諸蓋]이라고 하는가?
  그는 위와 같이 아련야(阿練若), 혹은 다시 나무 아래, 혹은 빈 집 등에 머무르면서 다섯 가지 개(蓋)에 대하여 그 마음을 청정하게 닦으니, 이른바 탐욕(貪欲) 진에(瞋恚) 혼침(惛沈)과 수면(睡眠) 도거(掉擧)와 오작(惡作) 의(疑)의 개(蓋)이다. 그 제 개(蓋)로부터 마음을 청정히 닦고 나서 마음이 모든 개(蓋)를 여의고 현선(賢善)의 뛰어난 삼마지(三摩地)에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제 개를 청정히 하는 것[淸淨諸蓋]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삼마지를 의지하는 것[依三摩地]이라고 하는가?
  그는 위와 같이 5개(蓋)를 끊은 다음에 곧바로 마음에서 수번뇌(隨煩惱)를 원리(遠離)하고 여러 탐욕[諸欲]의 악(惡) 불선법(不善法)을 멀리 여의며, 유심유사(有尋有伺) 이생희락(離生喜樂)의 초정려(初靜慮)에 들어가 구족하게 안주하며, 심(尋) 사(伺)가 적정(寂靜)한 내등정(內等淨)의 심일취성(心一趣性)에서 무심무사(無尋無伺) 정생희락(定生喜樂)의 제 2정려(靜慮)에 구족하게 안주하며, 희탐(喜貪)을 원리(遠離)하고 사념(捨念)과 정지(正知)로써 안주하여 몸으로 즐거움[樂]을 받아들이고, 성인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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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설(宣說)하신 사념(捨念)을 구족하고 안락(安樂)하게 하면서 머물러서 제 3정려(靜慮)에 구족하게 안주한다. 끝내[究竟] 즐거움[樂]을 끊어지고 먼저 괴로움[苦]에 대하여 끊었고 희(喜) 우(憂)가 함께 사라졌기에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 4정려(靜慮)에 구족하게 안주한다. 이와 같은 것을 삼마지를 의지하는 것[依三摩地]이라고 이름한다.
  그는24) 위와 같이 점차로 수행(修行)하여 계속 뒤이어 구르면서 수승(殊勝)해지고 구르면서 증가하고 구르면서 위[上]로 가면서 제 연(緣)을 수집(修集)하는데 처음 자체의 원만[自圓滿]으로부터 삼마지(三摩地)에 의지함을 최후(最後)로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마음의 청정(淸淨)과 선백(鮮白)을 얻고 여러 틈과 더러움[瑕穢]이 없도록 수번뇌(隨煩惱)를 여의고 질박[質]하고 정직[直]하며 감당할 수 있어서[堪能] 흔들림 없이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4성제(聖諦)에 의지하여 두루 알고 영원히 끊으며 작증(作證)하기 위해서 다른 법음[他音]의 교수(敎授) 교계(敎誡)를 수습하고, 곧바로 이와 같은 감당할 수 있는 세력이 있어서 여리소인(如理所引)의 작(作意)를 발생하고, 그리고 그것을 으뜸으로 삼는 모든 정견(正見)을 획득하면 이것에 의하여 곧바로 능히 4성제(聖諦)에 대하여 진현관(眞現觀)에 들어가며, 해탈을 원만히 하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25) 처음 정견(正見)으로부터 해탈을 원만히 하고 무여의열반계(無餘依涅槃界)에서 반열반(般涅槃)하는 것까지를 종성의 진실한 수집[種姓眞實修集]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자체의 원만[自圓滿]으로부터 최후의 삼마지에 의지하는 것[依三摩地]까지를 수집(修集)의 열연(劣緣)이라고 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4제(諦)의 법의 가르침이 더욱 증성[增上]하는 모든 다른 법음[他音]의 교수(敎授) 교계(敎誡)를 의지하거나 여리소인(如理所引)과 같이 작의(作意)하는 것을 수집(修集)의 승연(勝緣)이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24) 이하는 승(勝) 열(劣)의 2연(緣)을 해석하는 가운데에 세 번째로 거듭 2연(緣)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25) 이하는 승(勝) 열(劣)의 2연(緣)을 해석하는 가운데에 네 번째로 3법(法)에 이어지는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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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것을 종성(種姓)의 안립(安立)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자가 가지게 되는 제 상(相)이라고 하는가?26)
  모든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제 상(相)과 상위(相違)한 것을 곧 종성(種姓)에 안주하는 보특가라가 가지고 있는 제 상(相)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27): 무엇을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지니게 되는 제 상(相)이라고 하는가? 무엇을 성취하기 때문에 응당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라고 설한다고 알아야만 하는가?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에게는 많은 상(相)이 있지만 나는 지금 그 상(相) 가운데의 일부분[少分]만을 설하겠다. 그는 처음부터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으니,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의 아뢰야애(阿賴耶愛)는 일체종(一切種)에 두루 하여 모두 다 박(縛)을 따라서 소의(所依)에 붙어서 무량법(無量法)을 이루기 때문에 뒤집어 뽑을 수도 없으며, 오랜 세월 동안[久遠] 따라다니며 끝끝내 견고(堅固)해지고 붙어서 상속[依附相續]하기 때문에 일체의 제 불(佛)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첫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 있다. 그는 무량문(無量門)으로써 생사(生死)의 많은 과실을 꾸짖는 것을 듣고, 또한 다시 무량문(無量門)으로서 열반(涅槃)의 많은 공덕을 칭찬하는 것을 듣고서도 생사(生死)에 대한 적은 부분이라도 희론(戲論)의 과실
  
26) 이하는 네 가지의 종성지(種姓地)를 설하는 가운데에 세 번째로 종성(種姓)의 머무르는 자의 제 상(相)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는 두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자가 가지게 되는 제 상(相)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열반법이 없는[無涅槃法] 보특가라(補特伽羅)가 가지고 있는 제 상(相)에 대해서 여섯 가지고 나누어서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이다.
27) 이하는 종성(種姓)의 머무르는 자의 제 상(相)에 대한 설명 가운데, 두 번째로 열반법이 없는[無涅槃法] 보특가라(補特伽羅)가 가지고 있는 제 상(相)에 대해서 여섯 가지고 나누어서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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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보지 못하고, 적은 부분이라도 모든 과환(過患)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은 부분이라도 염리(厭離)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거나 염리(厭離)하는 것을 과거세(過去世)에서도 이미 일으킬 수 없었고 미래세(未來世)에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며 현재세(現在世)에도 곧바로 일으킬 수 없다.
  또한 애욕이 다한 적멸열반(寂滅涅槃)에 대하여 적은 부분의 하열(下劣)한 공덕도 보지 못하고 적은 부분이라도 모든 뛰어난 이익[勝利]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은 부분이라도 흔락(欣樂)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거나 흔락하는 것을 과거세(過去世)에서도 낼 수 없었고 미래세(未來世)에서도 낼 수 없을 것이며 현재세(現在世)에서도 곧바로 낼 수가 없다. 이것을 두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 있다. 그는 상품(上品)의 무참(無恚) 무괴(無愧)의 본성(本性)을 성취하였고, 이 인연에 의하여 염오(厭惡)가 있지 않으며 마음에 겁과 두려움이 없어서 환희심(歡喜心)으로써 뭇 악(惡)을 현행(現行)하는 것이다. 이 인연 때문에 후회[追悔]해 본 적이 없고 오직 현법(現法)만을 관하며, 이 인연 때문에 자신의 재보(財寶)가 쇠퇴하는 과환(過患)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세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 있다. 모든 종류[一切種]의 원만(圓滿)하고 분명(分明)한 도리(道理)로 칭해지고, 그리고 미묘하고 수승(殊勝)하여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혹은 고제(苦諦)에 의해서 혹은 집제(集諦)에 의해서 혹은 멸제(滅諦)에 의해서 혹은 도제(道諦)에 의해서 정법(正法)의 가르침을 선설(宣說)하고 개시(開示)할 때, 아주 작은[微小] 발심(發心)과 아주 작은 신해(信解)도 획득할 수 없는데, 하물며 몸에 털이 곤두서면서 슬피 울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 역시 과거 미래 현재세에 의해서 구별된다. 이것을 네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한다.
  다시 그 밖의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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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있다. 그는 때로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로 잠시 출가하게 되었거나, 혹은 국왕의 핍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광란하는 도적에게 핍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채무자에게 핍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두려운 것에 핍박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혹은 살 수 없는 두려움에 핍박을 받기 때문에 스스로의 조복(調伏)을 위한 것도 아니며, 스스로의 적정(寂靜)을 위한 것도 아니며, 스스로의 열반(涅槃)을 위한 것도 아니며, 사문성(沙門性)을 위한 것도 아니며, 바라문성(婆羅門性)을 위한 것도 아니면서도 출가를 구하는 것이다. 이미 출가하고 나서는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의 대중이 함께 시끄럽게 섞여 머물기를 좋아하며, 혹은 삿된 원(願)을 일으켜서 여러 범행(梵行)을 닦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천(天) 또는 다른 천처(天處)에 태어나기를 구하며, 혹은 배워야할 금계(禁戒)를 즐겨 물러나 버리고, 혹은 시라(尸羅)를 범하며, 혹은 속으로는 썩은 것을 품고서 밖으로는 진실인체 하는 것이다. 마치 더러운 물에 소생하는 여러 가지 더러운 달팽이와 고동 소리를 내는 것과 같으며 개의 행동을 하는 것[狗行]28)과 같다. 실제로는 사문(沙門)이 아니면서도 사문이라고 자칭하고, 범행(梵行)을 행하지 않았는데도 범행(梵行)을 행했다고 자칭하니, 이와 같은 것도 또한 과거 미래 현재세에 의해서 구별된다. 이와 같은 것을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가상출가(假相出家)인 줄 알아야만 한다.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보특가라가 아닌 것을 진실출가[眞出家]라고 이름하며,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면 필추성(苾芻性)을 성취한 것이다. 이 이문(異門)에 의하여, 이 의취(意趣)에 의하여 모양[義]만이 그것에서 나타내었으니, 본래 출가한 것이 아니고 출가의 모양만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출가의 수(數)에 들어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을 다섯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 있다. 그는 혹은 신(身) 혹은 어(語) 혹은 의(意)의 적은 부분의 선업(善業)을 짓고서 일체의 모두에 제 유(有)를 희구(希求)29)하고, 혹은 미래의 수승한
  
28) 즉 개의 시늉을 하면서 문 밖에 누워서 똥 따위를 먹고 그것이 생천(生天)의 인(因)이라 생각하고 고행(苦行)을 실행하는 일을 비유하는 것이다.
29) 욕계(欲界)의 유구(有求)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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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유(後有)를 희구(希求)하고, 혹은 재보(財寶)를 희구하며, 혹은 수승한 온갖 재보를 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여섯 번째 종성(種姓)에 머무르지 않는 보특가라의 무종성상(無種姓相)이라고 이름한다.
  위와 같은 등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 상(相)이 있어서 그것을 성취하기 때문에 반열반(般涅槃)하지 않는 법수(法數)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무엇을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는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하는가?30)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補特伽羅)에 있어서 어떤 경우는 종성(種姓)에만 머무르고 취입(趣入)하지는 않으며 또한 출리(出離)하지도 않는다. 어떤 경우는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고 또한 취입(趣入)하고 나서도 출리(出離)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는 종성(種姓)에 안주하고 또한 취입(趣入)하고 출리(出離)한다. 어떤 경우는 연근(軟根)이 있고 어떤 경우는 중근(中根)이 있으며 어떤 경우는 이근(利根)이 있다. 어떤 경우는 탐행(貪行)이 있고 어떤 경우는 진행(瞋行)이 있고 어떤 경우는 치행(癡)行)이 있다. 어떤 경우는 무가처[無暇 : 無暇處]31)에 태어나고 어떤 경우는 유가처[有暇 : 有暇處]에 태어난다. 어떤 경우는 제멋대로 방일함이 있고 어떤 경우는 제멋대로 방일함이 없다. 어떤 경우는 사행(邪行)이 있고 어떤 경우는 사행(邪行)이 없다. 어떤 경우는 장애(障礙)가 있고 어떤 경우는 장애(障礙)가 없다. 어떤 경우는 가까움[近]이 있고 어떤 경우는 멈[遠]이 있다. 어떤 경우는 아직 성숙(成熟)하지 않고 어떤 경우는 이미 성숙(成熟)했으며, 어떤 경우는 아직 청정(淸淨)하지 않고 어떤 경우는 이미 청정(淸淨)한 것이다.
  무엇을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는 보특가라에 있어서 오직 종성(種姓)에만 머물고 취입(趣入)하지도 않고 또한 출리(出離)하지도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한 보특가라가 출세간의 성법(聖法)의 종자(種子)를 성취하였으나
  
30) 이하는 네 가지의 종성지(種姓地)를 설하는 가운데에 네 번째로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는 보특가라(補特伽羅)를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첫째로 23가지 사람을 열거하고 둘째로 32가지 사람을 포개어 해석한다.
31) 범어 Ak ana의 의역(意譯)으로서 난(難) 난처(難處) 무가(無暇)로도 한역(漢譯)한다. 불우 불운 재난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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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선사(善士)를 가까이 하여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는 것을 획득하지 못하고, 아직은 여래(如來)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하여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지 못하고, 아직은 정계(淨戒)를 수지(受持)하지 못하고, 아직은 다문(多聞)을 섭수(攝受)하지 못하고, 아직은 혜사(慧捨)를 증장(增長)하지 못하고, 아직은 제 견(見)을 조유(調柔)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오직 종성지(種姓地)에만 머무르고 취입(趣入)하지도 못하고 출리(出離)하지도 못하는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고 또한 취입(趣入)하고 나서도 출리(出離)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앞에 설한 바 모든 흑품(黑品)과 상위(相違)하는 백품(白品)을 곧 종성(種姓)에 안주하고 또한 취입(趣入)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차별(差別)을 말하면 아직 모든 성도(聖道)와 성도과(聖道果)인 번뇌(煩惱)의 이계(離繫)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무엇을 종성(種姓)에 안주하고 또한 취입(趣入)하고 출리(出離)한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앞에서 설한 것과 같으며 차별을 말하면 이미 성도(聖道)와 성도과(聖道果)인 번뇌의 이계(離繫)를 얻은 것이다.
  무엇을 연근(軟根)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알아야 할 대상[所知事]인 소연(所緣)의 경계[境]에 대하여 모든 근(根)들이 극히 더디게 운전(運轉)하고 미열(微劣)하게 운전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문소성(聞所成), 어떤 경우는 사소성(思所成), 어떤 경우는 수소성(修所成)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보특가라가 있으며, 어떤 경우는 신근(信根), 어떤 경우는 정진근(精進根), 어떤 경우는 다시 염근(念根), 어떤 경우는 다시 정근(定根), 어떤 경우는 다시 혜근(慧根)에 감능(堪能)하는 일이 없으며, 능히 법의(法義)를 통달하고 속히 진실(眞實)을 증득할 수 있는 세력이 있는 일이 없는 보툭가라가 있다. 이를 연근(軟根)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중근(中根)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알아야할 대상[所知事]인 소연(所緣)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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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境]에 대하여 모든 근(根)들이 조금 더디게 운전(運轉)하는 것이다. (나머지) 일체는 앞에서와 같이 자세히 설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중근(中根)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이근(利根)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알아야 할 대상[所知事]인 소연(所緣)의 경계[境]에 대하여 모든 근(根)들이 더디지 않게 운전(運轉)하며 미열(微劣)하지 않게 운전(運轉)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문소성(聞所成), 어떤 경우는 사소성(思所成), 어떤 경우는 수소성(修所成)의 작의(作意)와 상응하는 보특가라가 있으며, 어떤 경우는 신근(信根), 어떤 경우는 정진근(精進根), 어떤 경우는 다시 염근(念根), 어떤 경우는 다시 정근(定根), 어떤 경우는 다시 혜근(慧根)에 감능(堪能)하는 것이 있으며, 능히 법의(法義)를 통달하고 속히 진실(眞實)을 증득할 수 있는 큰 세력이 있는 보특가라가 있다. 이를 연근(軟根)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탐행(貪行)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사랑할만한 대상[可愛事]와 염착할만한 대상[可染著事]인 소연(所緣)의 경계[境]에 대하여 맹리(猛利)한 탐욕[貪]이 있고 오랜 기간 동안의 탐욕[貪]이 있는 것이다. 이를 탐행(貪行)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진행(瞋行)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증오할 만한 대상[可憎事]과 진에할 만한 대상[可瞋恚事]인 소연(所緣)의 경계[境]에 대하여 맹리(猛利)한 진에[瞋]가 있고 오랜 기간 동안의 진에[瞋]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진행(瞋行)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치행(癡行)의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알아야 할 대상[所知事]인 소연(所緣)의 경계[境]에 대하여 맹리(猛利)한 우치[癡]가 있고 오랜 기간 동안의 우치[癡]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치행(癡行)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가처[無暇]에 태어나거나, 제멋대로 방일하거나, 사행(邪行)이 있거나, 장애(障礙)가 있는 보특가라, 즉 위와 같은 일체는 앞의 경우와 같이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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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 한다. 이것과 상위한 것은 곧 유가처[有暇]에 태어나고, 제멋대로 방일[縱逸]하는 일이 없고, 사행(邪行)이 없고, 장애(障礙)하는 일이 없는 보특가라인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멈[遠]이 있는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시간이 멀리 있기 때문에 열반(涅槃)에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다시 가행(加行)이 멀리 있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멈[遠]이라고 이름한다.
  시간이 멀리 있기 때문에 열반(涅槃)에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수 100생(生) 혹은 수 1000생(生) 혹은 수 백천생(百千生)을 거치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능히 승연(勝緣)을 만나서 반열반(般涅槃)하게 되는 것이다.
  가행(加行)이 멀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멈[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오직 종성(種姓)에만 머물러 아직 취입(趣入)하지도 않고 빨리 승연(勝緣)을 만나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게 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는 열반에 대하여 아직은 뛰어난 가행(加行)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가행(加行)이 멀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멈[遠]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간이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모두 하나로 줄여서, 이를 설하여 멈[遠]이 있는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가까움[近]이 있는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시간이 가깝기 때문에 열반과 가깝게 떨어져 있고 혹은 다시 가행(加行)의 가까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가까움[近]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이 가깝기 때문에 열반과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최후생(最後生)32)에 머무르고 최후유(最
  
32) 업(業)이 이미 끊어지고 지금 이 존재를 마지막으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기반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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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有)33)에 머무르고 최후신(最後身)에 머물러서 곧 이 몸에 의하여 열반(涅槃)을 얻게 될 것이고 혹은 곧 이 찰나(刹那) 무간(無間)에 의하여 번뇌(煩惱)를 끊고 작증(作證)을 얻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시간이 가깝기 때문에 열반과 가깝게 떨어져 있다고 이름한다.
  가행(加行)의 가까움이 있기 때문에 이를 설하여 가까움[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고 또한 이미 취입(趣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를 모두 하나로 줄여서 이를 설하여 가까움[近]이 있는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성숙(成熟)하지 않은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아직까지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34)에 머무르면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거나 혹은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능히 취입(趣入)하는 것이다. 이를 성숙(成熟)하지 않은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성숙(成熟)한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이미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능히 획득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머무르면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거나 혹은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능히 취입(趣入)하는 것이다. 이를 성숙(成熟)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아직 청정(淸淨)하지 않은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다음과 같은 보특가라가 있으니, 아직까지 성도(聖道)를 일으키지 않아서 성도과(聖道果)인 번뇌(煩惱)의 이계(離繫)를 아직 작증(作證)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 청정(淸淨)하지 않는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이미 청정(淸淨)한 보특가라라고 하는가?
  앞의 것과 상위(相違)한 것으로 그 상(相)을 알아야만 한다.
  
33) 최후신(最後身)과 같이 쓰이며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마지막 몸이라는 의미이다.
34) 최후유(最後有)를 획득하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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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것을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는 보특가라의 모든 차별이라고 한다.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제 불(佛) 세존(世尊)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으니, 말하자면 아직 취입(趣入)하지 않았으면 그들로 하여금 취입하게 하고, 아직 성숙(成熟)하지 않았으면 그들로 하여금 성숙(成熟)하게 하고, 아직 청정(淸淨)하지 않았으면 그들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시려고 정법륜(正法輪)을 굴리고 학처(學處)를 제정[制立]하신 것이다.
  
  (2) 초유가처 취입지(趣入地)
  위와 같이 종성지(種姓地)에 대하여 설하였다.
  무엇을 취입지(趣入地)라고 하는가?35)
  올타남(嗢拕南)으로 말하리라
  
  간략하게 일체를 설명하면
  취입지(趣入地)를 마땅히 알라.
  자성(自性)과 안립(安立)과
  제 상(相)과 삭취취(數取趣)라네.
  若略說一切  趣入地應知
  謂自性安立  諸相數取趣
  
  취입(趣入)의 자성(自性)과 취입(趣入)의 안립(安立)과 취입자(趣入者)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과 취입(趣入)한 보특가라를 말하니, 이와 같은 일체를 모두 하나로 줄여서 취입지(趣入地)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취입(趣入)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36)
  
35) 이하는 초유가처(初瑜伽處)의 3지(地) 가운데 두 번째로 취입지(趣入地)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취입지(趣入地)는 총 네 가지로 설명되는데, 즉 첫째는 취입(趣入)의 자성(自性)이며, 둘째는 취입(趣入)의 안립(安立)이며, 셋째는 취입자(趣入者)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이며, 넷째는 취입(趣入)한 보특가라에 대한 설명이다.
36) 이하는 취입지(趣入地) 가운데 첫 번째로 취입(趣入)의 자성(自性)에 대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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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種姓)에 안주(安住)하는 보특가라의 본성(本性)이 열반(涅槃)의 종자(種子)를 성취하고 또한 이 때에 불(佛)의 출세(出世)가 있고 중국(中國)에 태어나며 달수(達須) 멸려차(蔑戾車)로 태어나지 않으며, 내지 …… [廣說] 비로소 부처님과 불제자(佛弟子)를 만나게 되고, 나아가 받들어 섬기고, 그로부터 법(法)을 들어 처음 바른 믿음[正信]을 얻으며, 정계(淨戒)를 수지(受持)하고, 다문(多聞)을 섭수(攝受)하며, 혜사(惠捨)를 증장(增長)하고, 제 견(見)을 조유(調柔)하는 것이다. 이 이후로부터 이 법(法)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인연 때문에 몸이 없어지고 나서 이 생(生)을 건넌 뒤에는 6처(處)의 이숙(異熟)에 포함된 수승한 제 근(根)을 획득하고, 오랜 세월동안 구른 뛰어난 바른 믿음[正信]을 능히 지어서 의지(依止)를 일으키고, 또한 그것과 더불어 정계(淨戒)를 수지(受持)하고 다문(多聞)을 섭수(攝受)하며 혜사(惠捨)를 증장(增長)하고 제 견(見)을 조유(調柔)하며, 더욱 더 뛰어나게 굴러서 다시 미묘한 소의지(所依止)가 되는 것이다. 다시 이와 같이 더욱 더 뛰어나게 굴러서 다시 미묘한 신(信) 등의 제 법(法)은 다시 그 나머지 수승한 이숙(異熟)을 얻으며, 이 이숙 때문에 다시 그 밖의 출세간[出世]을 수순(隨順)하여 구르는 뛰어난 선법(善法)을 얻으며,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여 상호 의인(依因)이 되고 서로 간에 세력과 더불어 다음 다음 생[後後生]에 굴러 굴러 승진(勝進)하며 내지 최후유(最後有) 최후신[身]을 획득하고, 여기에 머무르면서 반열반(般涅槃)을 얻고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능히 취입(趣入)하는 이러한 것을 취입(趣入)이라고 이름한다.
  왜냐 하면 도(道)와 길[路]과 바른 행적[正行跡]은 능히 열반을 얻고 열반에 능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때에 오를 수 있으며, 들어갈 수 있으며, 바르게 밟을 수 있어서 점차로 지극(至極)한 구경(究竟)에 취향(趣向)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여 취입했다[已趣入]고 하며, 이와 같은 것을 취입(趣入)의 자성(自性)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취입(趣入)을 건립(建立)하는 것이라고 하는가?37)
  
37) 취입지(趣入地) 가운데 두 번째로 취입(趣入)의 안립(安立)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취입(趣入)을 안립(安立)하는 데의 8문(門)을 표방하는 것이고, 둘째는 8문(門)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8문(門)과 6위(位)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하는 취입의 안립 가운데 첫 번째로 8문(門)을 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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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혹은 종성(種姓)이 있고, 혹은 취입(趣入)이 있으며, 혹은 장차 성숙함이 있고, 혹은 이미 성숙함이 있고, 혹은 오직 취입(趣入)이 있을뿐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도 않은 것이 있으며, 혹은 취입(趣入)도 있고 또한 장차 성숙함도 있지만 이미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이 있으며, 혹은 취입(趣入)이 있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만 장차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이 있으며, 혹은 취입(趣入)이 있지도 않고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으며 이미 성숙함도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종성(種姓)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38)
  말하자면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취입(趣入)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는 최초로 옛날의 미처 얻지 못했던 바 제 여래(如來)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의 모든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정계(淨戒)를 수지(受持)하고 다문(多聞)을 섭수(攝受)하며 혜사(惠捨)를 증장(增長)하고 제 견(見)을 조유(調柔)하는 것이다. 이를 취입(趣入)이라고 이름한다.
  장차 성숙함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위와 같이 이미 취입(趣入)하게 된 보특가라 중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한 자는 제외된다. 말하자면 여기에 머물러서 반열반(般涅槃)을 얻고 혹은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취입(趣入)하며 취입(趣入)한 후에는 다음 다음 생[後後生]에서 제 근(根)을 수집(修集)하여 더욱 더 뛰어나게 굴리고 다시 미묘(微妙)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장차 성숙함이 있다고 이름한다.
  이미 성숙함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한 것이다. 만약 여기에 머물러서 반열반(般涅槃)을 얻거나 혹은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취입(趣入)하면
  
38) 이하는 취입(趣入)의 안립(安立) 가운데 두 번째로 8문(門)의 각각에 대해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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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이미 성숙함이 있다고 이름한다.
  오직 취입(趣入)이 있을 뿐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도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으로 제 여래(如來)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한 모든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 내지 제 견(見)을 조유(調柔)했으나 아직 이 이후로부터 다시 1생(生)을 경과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오직 취입(趣入)이 있을 뿐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도 않은 것이 있다고 이름한다.
  취입(趣入)도 있고 또한 장차 성숙함도 있지만 이미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으로 제 여래(如來)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한 모든 바른 믿음[正信]을 획득하고 …… 내지 제 견(見)을 조유(調柔)했으나 이 이후로부터 다시 1생(生) 혹은 2생(生) 혹은 다생(多生)을 경과했을지라도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머물러서 반열반(般涅槃)을 얻으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를 취입(趣入)도 있고 또한 장차 성숙함도 있지만 이미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이름한다.
  취입(趣入)이 있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만 장차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위와 같이 이미 취입(趣入)을 얻은 보특가라가 다시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한 것이다. 만약 여기에 머무르면서 반열반(般涅槃)을 얻으며 나머지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를 취입(趣入)이 있고 이미 성숙함도 있지만 장차 성숙함은 있지 않은 것이라고 이름한다.
  취입(趣入)이 있지도 않고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으며 이미 성숙함도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위와 같은 열반법(涅槃法)이 있는 보특가라가 오직 종성(種姓)에만 머물뿐 취입(趣入)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취입(趣入)이 있지도 않고 장차 성숙함이 있지도 않으며 이미 성숙함도 있지 않은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감능(堪能)이 있어서 반드시 취입(趣入)하게 될 것이고 성숙하게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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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 다시 반드시 감능(堪能)도 없는데도 장차 취입(趣入)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는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종성(種姓)을 여의어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보특가라를 말한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종성(種姓)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감능(堪能)이 없지만 장차 취입(趣入)하게 될 것이며, 또한 장차 성숙하게 될 것인데 하물며 장차 능히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이랴.
  이 가운데에 위와 같은 모든 보특가라는 6위(位)에 포함되는 줄 알아야만 한다.39)
  무엇을 6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감능(堪能)이 있는 보특가라이며, 둘째는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이며, 셋째는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이며, 넷째는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이며, 다섯째는 구경방편(究竟方便)의 보특가라이며, 여섯째는 이미 구경(究竟)에 도달한 보특가라이다.
  감능(堪能)의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종성(種姓)에 안립(安立)한 보특가라이지만 아직은 처음으로 불(佛)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한 모든 바른 믿음[正信] …… 내지 제 견(見)을 조유(調柔)함을 획득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감능(堪能)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종성(種姓)에 안립(安立)한 보특가라이지만 이미 불(佛)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한 모든 바른 믿음[正信] …… 내지 제 견(見)을 조유(調柔)함을 이미 획득한 것이다. 이를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39) 이하는 취입(趣入)의 안립(安立) 가운데 세 번째로 8문(門)과 6위(位)의 관계를 설명한다. 6위(位)란 감능(堪能)의 보특가라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 구경방편(究竟方便)의 보특가라 이미 구경(究竟)에 도달한 보특가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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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성(種姓)에 안립(安立)한 보특가라이지만 이미 불(佛) 정각(正覺)의 정설(正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한 모든 바른 믿음[正信] …… 내지 제 견(見)을 조유(調柔)함을 이미 획득하였고 이로부터 이후에 혹은 1생(生) 혹은 2생(生) 혹은 다생(多生)을 경과하면서 전전(展轉)하여 승진(勝進)하였지만 아직은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에 머물러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고 혹은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취입(趣入)하는 것이니, 이를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즉 위와 같이 전전(展轉)하고 승진(勝進)하는 보특가라가 이미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하고 또한 이것에 머물러서 능히 반열반(般涅槃)하거나 혹은 능히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취입(趣入)하는 것이다. 이를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을 성취(成就)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구경방편(究竟方便)의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최후유(最後有)와 최후신[身]을 획득한 보특가라가 제 번뇌[漏]를 다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혹은 전도없는[無倒] 교수(敎授) 교계(敎誡)를 획득하며, 바르게 가행(加行)을 닦지만 아직은 일체종(一切種)에 두루하며 제 번뇌[漏]를 영원히 다하지 못하고 아직은 구경(究竟)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구경방편(究竟方便)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이미 구경(究竟)에 도달한 보특가라란 무엇을 말하는가?
  위와 같은 보특가라가 제 번뇌[漏]를 다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청문(聽聞)하고 전도없는[無倒] 교수(敎授) 교계(敎誡)를 획득하며 이와 같이 이와 같이 바르게 가행(加行)을 닦으며 일체종(一切種)에 두루하며 제 번뇌[漏]를 영원히 다하여 소작(所作)을 이미 성판[辦]하였고 구경(究竟)의 제일(第一)의 청량(淸凉)을 획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이미 구경(究竟)에 도달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에 감능(堪能)이 있는 종류의 보특가라는 곧 종성(種姓)으로서 의지[依]로 삼고 머무름[住]을 삼아서 곧바로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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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히 획득하고 능히 취입(趣入)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이미 취입(趣入)하고 나서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을 의지로 삼고 머무름으로 삼아서 곧바로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능히 획득하고 이 선근(善根)으로써 스스로 성숙(成熟)하는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이 스스로 성숙할 때에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을 의지로 삼고 머무름으로 삼아서 다시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을 능히 획득하고 획득하고 나서 성숙하는 것이다. 그는 위와 같은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에 의하여 그것이 인(因)이 되어 얻게 되는 자체(自體)를 수집(修集)하고, 다시 굴러가며 뛰어나게 되는 자량(資糧)을 수집(修集)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을 부딪쳐 증득하며[觸證] 다시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취입(趣入)하고 예류과(預流果) 혹은 일래과(一來果) 혹은 불환과(不還果)를 획득하였으나 아직은 가장 뛰어난 제 1의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구경방편(究竟方便)의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만약 이미 일체의 번뇌를 모두 다 영원히 끊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면, 이 때 이미 구경(究竟)에 도달한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곧 초(初) 중(中) 후(後)의 성문(聲聞)이 닦아야 할 정행[所修正行]에 의해서 세워진 여섯 가지 보특가라를 현시(顯示)하는 것이다. 종성(種姓)이 있는 성문(聲聞)의 정행(正行)에 의하여 맨처음의 보특가라를 현시(顯示)하고, 구경(究竟)에 도달한 성문(聲聞)의 정행(正行)에 의하여 마지막의 보특가라를 현시하며, 그 밖의 성문(聲聞)이 닦아야 할 정행[所修正行]에 의하여 중간의 보특가라를 현시하는 것이다.
   이미 취입(趣入)을 얻은 보특가라는 정량(定量)이 있어서 일체시(一切時)에 똑같이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인가? 정량(定量)없이 일체의 시분(時分)에 나란히 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인가?
   정량(定量)이 있지 않고 또한 일체의 시분(時分)에 나란히 하면서 반열반(般涅槃)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연(緣)을 만나는 것과 같은 차별이 있기 때문에 반열반(般涅槃)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혹 매우 오랜 세월[久遠]을 경과하는 한 종류가 있고, 혹은 매우 오랜 세월을 경과하지 않는 한 종류가 있으며, 혹은 매우 극히 빠르게 반열반(般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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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槃)을 얻는 한 종류가 있다. 말하자면 종성(種姓)에 머무르는 보특가라로서 매우 극히 빠르게 반열반하는 자는 반드시 3생(生)을 경과하니, 제 1생(生) 중에 최초로 취입(趣入)하고 제 2생(生) 중에 닦아서 성숙시키며 제 3생(生) 중에 닦아 성숙하고 나서 혹은 곧 이 몸으로써 반열반을 얻는다. 혹은 반열반을 얻지 못한 자일 경우에는 반드시 학위(學位)에 들어가며 비로소 요절[夭沒]하고 끝으로 7유(有)를 거쳐야 반열반을 얻는다. 이와 같은 것을 취입(趣入)의 안립(安立)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취입(趣入)한 자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이라고 하는가?40)
  종성(種姓)에 안주한 보특가라(補特伽羅)로서 겨우 취입하였지만 설사 구르다가 나머지 생[餘生] 동안에 스스로 대사(大師)의 선설(善說)의 법(法)과 비나야(毘奈耶)에 대하여 다시 망념(妄念)하더라도, 만약 세간에 지금 악설(惡說)의 법과 비나야가 있고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가 있어도 만나기가 오래 걸리고, 무량문(無量門)으로써 악설(惡說)의 법과 비나야에 대하여 뛰어난 공덕(功德)이 있다고 찬미(讚美)하는 것을 청문(聽聞)하여도 신해(信解)하고 애락(愛樂)하고 수행(修行)하지 않으며, 또한 그곳으로 출가하려 하지 않으며 잠시 출가하고 막 취입(趣入)하게 되더라도 곧바로 빨리 버리고 물러 나오고, 성품[性]으로 인하여 그곳에 대하여 안주하길 애락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꿀에서 생기는 벌레를 진한 초에 두는 것과 같으며, 혹은 묘욕(妙欲)을 받기를 애락(愛樂)하는 자를 진흙 속에 두는 것과 같다. 그는 숙세(宿世)의 묘선(妙善)의 인력(因力)에 의하여 임지(任持)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잠시 선설(善說)의 법과 비나야의 적은 부분의 공덕을 찬미하는 것을 청문하거나, 혹은 전부를 듣지 못하고 비록 잠깐동안 적은 부분을 듣더라도, 혹은 전부를 듣지 못하여도 능히 빠른 신해(信解)로 취입하고 수행을 애락하고 혹은 출가를 구하고 출가하고 나서는, 필경 취입하여 끝내 퇴전(退轉)하는
  
40) 취입지(趣入地) 가운데에 세 번째로 취입자(趣入者)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것은 모두 세 가지로 설명되는데, 첫째는 이미 취입한 자의 8상(相)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취입(趣入)한 자의 3품(品)을 밝히는 것이며, 셋째는 취입자(趣入者)의 제 상(相)은 불(佛) 세존(世尊)과 불제자(佛弟子)에 의해서만 구제(救濟)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하는 그 첫 번째로서 이미 취입한 자의 8상(相)을 밝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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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 없으며 성품[性]으로 인하여 그곳에 대하여 안주하길 애락하지 않는 것이다. 꿀에서 생기는 벌레는 좋은 꿀에 두는 것과 같으며 혹은 묘욕(妙欲)을 받기를 애락하는 자를 승욕(勝欲) 속에 두는 것과 같다. 그는 숙세(宿世)의 묘선(妙善)의 인력(因力)에 의하여 임지(任持)되었기 때문이다. 혹 이를 첫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모든 악취(惡趣)와 무가처[無暇]에 나아가서 번뇌의 이계(離繫)를 능히 얻지는 못했지만 악취(惡趣)와 무가처[無暇]에 태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미 취입을 얻은 이러한 보특가라에 의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하시길 "만약 세간의 상품(上品)의 정견(正見)일 경우에는 1000생(生)을 지나가더라고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가 만약 이미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에 들어가서 점차 성숙(成熟)으로 향하려고 한다면 이 때, 곧바로 무가처[無暇]와 그 밖의 악취(惡趣)에 능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두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잠깐동안 불(佛) 혹은 법(法) 혹은 승(僧)의 뛰어난 공덕(功德)을 듣고 나서 곧바로 수념(隨念)하여 청정한 신심(信心)을 얻고 광대(廣大)한 출리(出離)의 선법(善法)을 끌어 일으키며, 수없이 염(念)을 연(緣)하여 청정한 마음[淨心]을 단련하여 몸에 드디어 털이 곤두서며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며 슬피 우는 것이다. 이를 세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맹리(猛利)한 참괴(慚愧)를 성취한 성품[性]이 현행(現行)하는 여러 죄(罪)가 드러나는 곳에 대하여 깊이 수치(羞恥)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네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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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趣入相]이 있다.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고 청문(請問)하고 사유(思惟)하고 관행(觀行)하면서 선법(善法)을 구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욕락(欲樂)과 맹리한 욕락이 있는 것이다. 이를 다섯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모든 무죄(無罪)의 사업(事業)에 대하여 일체의 선품(善品)의 가행(加行)을 수집(修集)하고 바른 방편[正方便] 속에서 능히 잘 수집(修集)하고 견고하게 일으키며 오랫동안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이를 여섯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그는 진구(塵垢)41)가 작고 엷으며 번뇌가 약한 성품[性]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의 전(纏)을 일으킬지라도 오랫동안 상속하여 길게 머무르지 않으며, 첨(諂) 광(誑)도 없고 능히 교만(憍慢) 아(我) 아소(我所)의 집착을 제도하며 즐겨 공덕(功德)을 취하고 과실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를 일곱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다시 그 밖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 있다. 능히 선교(善巧)로 그 마음을 장호(藏護)하고 여러 광대(廣大)한 소응증처(所應證處]42)에 대하여 스스로 경시하지 않으며 스스로 힘[力]과 능력[能]이 없는 곳에 안주하지 않으며, 그 신해(信解)하는 것이 더욱 증가하며 맹성(猛盛)하는 것이다. 이를 여덟 번째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은 무량한 줄 알아야만 한다. 나는 이것 가운데 적은 부분만을 설하였다.
  
41) 마음을 더럽히는 진(塵) 구(垢), 즉 번뇌를 의미한다.
42) 응당 증득해야 할 것을 의미하며, 불교소응지처(佛敎所應知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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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이43) 제 상(相)에 대하여 만약 하품(下品)의 선근(善根)에 안주(安住)하여 취입하게 되는 자일 경우는 하품(下品)은 간극(間隙)이 있다고 하며, 아직은 끊임없음[無間]이 가능하지 않고, 아직은 선청정(善淸淨)이 아닌 줄 알아야만 한다. 만약 중품(中品)의 선근(善根)에 안주하여 취입하게 되는 자일 경우는 중품(中品)이라고 알아야만 한다. 만약 상품(上品)의 선근(善根)에 안주(安住)하여 취입하게 되는 자일 경우는 상품(上品)이며, 간극(間隙)이 있지 않으며, 이미 무간(無間)이 가능하고, 이미 선청정(善淸淨)인 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은 것을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을 보특가라의 이미 취입한 상[已趣入相]이라고 이름한다.
  위와 같이44) 취입상(趣入相)을 성취한 자는 이미 취입한 수(數)에 떨어져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위와 같이 종성에 안주하고 이미 취입을 얻은 보특가라의 모든 많은 갈상사상(吉祥士相)은 오직 불(佛) 세존(世尊)과 제일(第一)의 구경(究竟)에 도달한 제자(弟子)만이 선청정(善淸淨)한 승묘(勝妙)한 지견(智見)으로써 현견(現見)하고 현증(現證)하는 것이며, 그 종성에 따라서 취입하는 것에 따라서 상응하는 대로 구제(救濟)하는 줄 알아야만 한다.
  무엇을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이름하는 것인가?45)
  혹은 이미 취입을 얻은 보특가라가 있고, 오직 취입(趣入) 만을 했을 뿐 아직 성숙하려고 하지도 않고 아직 이미 성숙(成熟)한 것도 아니며 아직 출리(出離)를 얻지 못한 자도 있으며, 혹은 역시 이미 취입을 얻었고[已趣入] 또한 장차 성숙(成熟)하려고 하지만 아직 이미 성숙한 것도 아니고 출리를 얻지 못한 자도 있으며, 혹은 이미 취입하였으면서 이미 성숙하였지만 아직
  
43) 취입지(趣入地) 가운데에 세 번째인 취입자(趣入者)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 가운데에, 이하는 그 두 번째로서 이미 취입(趣入)한 자의 3품(品)을 밝힌다.
44) 취입자(趣入者)가 지니고 있는 제 상(相)에 대한 세 번째의 취입자(趣入者)의 제 상(相)은 불(佛) 세존(世尊)과 불제자(佛弟子)에 의해서만 구제(救濟)된다는 것을 밝힌다.
45) 취입지(趣入地) 가운데에 네 번째로 이미 취입을 얻은[已得趣入]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대해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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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리(出離)를 얻지 못하여 탐욕[欲]에 따라서 행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차별은 앞에서 이미 그 상(相)을 판별[辦]한 것과 같은 줄 알아야만 한다. 다시46) 그 밖의 것이 있어서 종성지(種姓地)에서 연근(軟根) 등의 보특가라(補特伽羅)의 모든 차별을 설하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 그 상응하는 바와 같이 또한 모든 차별을 훤히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설한 것과 같이 취입(趣入)의 자성(自性)과 취입(趣入)의 안립(安立)과 이미 취입한 자[已趣入者]의 모든 제 상(相)과 이미 취입한[已趣入] 보특가라(補特伽羅) 일체를 모두 종합적으로 설하여 취입지(趣入地)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46) 이하는 종성지(種姓地)에 대하여 종합적을 결론짓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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