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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원문]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옮김
지계(持戒)의 향이여, 선정(禪定)의 향이여, 지혜(智慧)의 향이여, 해탈(解脫)의 향이여, 해탈지견(解脫知見)의 향이여, 이 거룩한 향을 사루어 올립니다.
해설
의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다섯 가지를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 또는 줄여서 오분향(五分香)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오분향은 부처님을 위시해서 깨달은 분들이 갖추고 있는 광대한 무량공덕을 가리킵니다.
공덕을 크게 말해서 만행(萬行), 만덕(萬德)이라고 합니다.
흔히 부처님께서는 팔만 사천 가지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다섯 가지로 말할 때 오분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 속에는 온갖 수행의 결과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분향의 끝에 <향>자를 붙인 것은, 옛날에는 세속에서 가장 값진 물건으로 향을 첫째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향의 고귀함을 마음에 심는다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향이라고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멋진 말입니다.
<계>가 잘 실천되면 향기롭고, <정>이 잘 이루어지면 또한 향기롭고, <혜>가 얻어지면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 것입니다.
처음에 나오는 <계향> <정향> <혜향>의 세 가지는 삼학(三學)이라고 하여 불교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삼학은 불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학이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신행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파라밀(六波羅密)도 삼학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삼학의 첫째인 <계>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경계한다’는 뜻인데, 흔히 계율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계>의 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글자 모양을 잘 분석해 보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戒)>라는 글자는 ‘울타리 (井)’에 ‘창 (戈)’을 들고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는 집 밖에서 창을 들고 서 있으면서 집 안을 지키는 수위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위의 역할이란 집 안으로 들여보내야 할 사람은 들여보내고, 들여보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는 일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또 수위는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낯선 사람이면 무조건 안 들여보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위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하려면 취사선택의 분별을 잘 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수위의 역할에 미루어 볼 때 <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분별하여 궁극적으로는 해야 할 일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계>의 의미는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이나 질서, 사회의 규범, 도덕성 등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계율 자체에 너무 매달리고 집착하여 좁은 안목이 되는 것은 계율의 근본정신에서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계율은 개인이나 단체의 역할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즉, 승려 집단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과 신도 단체에서 필요로 하는 계율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계율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익 되는 점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아는 융통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지범개차(持犯開遮)’ 즉, 계율을 잘 지키고, 잠 범하고, 잘 열고, 잘 막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각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이나 규칙, 질서가 한데 모여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도덕과 규칙, 질서가 됩니다. 우리가 질서나 규칙을 잘 지키면서 매사를 모범되게 행동하는 것은, 마치 물이 흐르듯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향>이라고 하는 것은 계율을 잘 지키면 혼탁하고 무질서한 사회가 밝고 명랑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저절로 향기가 풍겨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단체에 나아가든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물이 흐르듯 조용히 규범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에게는 향기가 저절로 풍겨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에다 <향>자를 붙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정향>은, <계향>이 잘 이루어지면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은 ‘안정’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계향>이 각자 자기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이라면 <정향>은 모든 것이 멈춰진 고요한 안정의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개인의 안정은 물론 집안의 안정과 나아가 사회의 안정까지를 통틀어서 <정향>의 의미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흔히 사찰에서는 스님들이 신발을 벗어 놓은 곳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구절이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너의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실행하라는 뜻입니다.
<정향>이란 말의 뜻은 바로 ‘조고각하’라는 한 마디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결국 안정을 얻을 것이며, 그런 사람에게서 저절로 향기가 뿜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세 번째의 <혜향>은 ‘지혜의 향기’를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인생, 지혜로운 사람 등 지혜를 항상 강조합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지혜가 없다면 빛을 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삶을 살기보다는 지혜롭게 사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잘못 쓰여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조촐한 삶이라 하더라도 지혜가 있다면 그 삶은 밝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향기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보다 지혜를 강조합니다. 자비와 지혜라는 표현 대신에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여 항상 지혜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올바른 자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계>와 <정>이 마련되면 저절로 얻어지는 삼학 중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덕목인 것입니다.
삼학의 가르침을 흙탕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돌을 던져 흐리게 된 흙탕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물을 마실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그런 흙탕물을 맑게 하려면 우선 물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해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돌도 던지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아야 물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금지하는 일이 바로 <계>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흙이 가라앉도록 조용히 기다리면 안정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바로 <정>의 상태입니다. 수면이 안정되어 고요해지면 그 물 위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모두 비춰볼 수 있고, 맑아진 물은 마실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탕물이 일어나고 바람이 부는 것은 우리의 번뇌 망상 잡념에 비유한 것이고, 이러한 번뇌 망상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 고요하고 적적한 경지에 도달하면 그 속에 참다운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 즉 <혜>에는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이 뿜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계 . 정 . 혜 삼학의 실천은 개인의 인생살이나 가정생활에서는 물론 이웃과 사회에까지 그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되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한 마디로 삼학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학은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는 일이 <계>이며, 그래서 안정이 되면 <정>을 얻고, 그 다음에 <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든 계 . 정 . 혜 삼학의 순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삼학의 이런 뜻을 음미하면서 예불을 드려야 합니다. 결국 삼학은, 모든 개인적인 수행이나 가정과 사회에서 안 일어났으면 좋은 일들을 모두 멈추어 달라는 뜻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을 위시해서 가정과 사회가 안정되고, 나아가서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불문’의 한 대목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삼학을 삼층집에다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어리석은 임금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근사한 삼층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수에게 가서 삼층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가 보니 겨우 일층만 지어 놓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임금은 일층은 필요가 없고 다만 삼층만 지어 달라고 우겼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삼학의 중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삼층만 짓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층이 있어야만 이층이 존재할 수 있고, 이층을 지어야만 비로소 삼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발전과 마음의 지혜를 얻는 일이나 가정의 발전, 나아가 국가의 발전도 그와 똑 같은 이치입니다. 제대로 밑거름도 닦아 놓지 않고 엉뚱하게 다른 결실을 바란다면 삼층만 갖겠다는 어리석은 임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계 . 정 . 혜 삼학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가 되새겨야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네 번째의 <해탈향>에서 <해탈>은 모든 장애, 고통, 어려움, 문제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생로병사를 위시해서 집착 때문에 일어나는 개인적인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훌륭한 인격자가 되려면 현재의 상태에서 부단히 벗어나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겸손해져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는 것을 삶 속에서 해탈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생사해탈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작은 해탈부터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어떤 고정된 관념 속에서 보지 말고 항상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창조적인 태도로 매 순간을 사는 것이 해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그런 삶에는 향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 수행력이 깊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만 수양이 얕은 사람일수록 몸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마음만 중요하고 몸은 별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입니다. 절에 갈 때는 가능하면 가장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단정한 몸차림이면 마음은 저절로 상쾌해지게 마련입니다.
관세음보살의 몸치장을 보면 온갖 장신구로 장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절의 단청이나 탱화의 색깔도 대단히 화려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형상화해 놓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세음보살처럼 우리의 인격도 훌륭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몸과 마음을 합하여 지칭하는 것이지 단지 마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몸은 아무렇게나 하고 있으면서 마음이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몸이 잘 다듬어지면 마음 또한 정돈되는 게 중생의 근본 모습입니다.
하찮은 옷 하나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가지 예로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승복을 입고 있으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외모 또한 마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해탈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더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고, 창조하고, 구상하며,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 대하는 식구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신선한 시각으로 본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변화 발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해탈입니다.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공부의 진척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법회에 참석하여 뭔가 배우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작은 해탈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긍정적이고 새롭고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이 진정한 해탈인 것입니다.
오분향의 마지막으로 <해탈지견향>은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견>은 ‘지혜’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아울러 <해탈지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해탈의 경지로 이끄는 중생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자신의 해탈과 함께 다른 사람의 해탈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법(傳法)을 통한 중생제도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에 대한 바른 이해, 즉 <해탈지견향>이란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의 해탈을 함께 성취하려는 교화활동을 뜻합니다.
해탈에 대한 바른 견해가 섰다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실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둘이 아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앞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의 각각 항목이 참으로 자기 것이 되어서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해탈지견향>입니다.
이상으로 오분향의 설명을 다시 정리하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중요한 뜻을 지니며, 그것이 또한 순서대로 실천될 때 완전한 것이 됩니다.
오분향에는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함축되어 있으며, 부처님과 모든 수행자들이 갖춘 무량한 공덕이므로 우리도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분향을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께서는 평생을 통해서 ‘예불문’의 구절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분향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오분향은 읽고 또 읽어도 향기가 가시지 않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오분향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압권(壓卷)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 . 정 . 혜 삼학을 통해 해탈하게 하며, 그 해탈을 남에게 전함으로써 해탈지견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삼학이라 할 때의 학(學)은 단순한 글공부가 아닙니다. <계>를 지키고, <정>을 찾고, <혜>를 얻는 것 모두가 학(學)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참선하는 사람을 공부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불자라고 생각한다면 항상 공부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원문]
광명운대 주변법계 공양시방 무량불법승
(光明雲臺 周遍法界 供養十方 無量佛法僧)
옮김
광명의 구름대(臺) 법계에 주변하여 시방의 한량없는 불 . 법. 승께 공양합니다.
풀이
지혜의 광명 온 우주 법계에 충만하여 시방삼세에 한량없는 불 . 법 . 승 삼보님께 공양 올립니다.
해설
오분향 다음으로 이어지는 위의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광명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어느 곳에서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 . 법. 승 삼보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광명운대>에서 광명은 바로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삶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진리에 입각하여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깨달은 사람은 생활 자체가 바로 진리의 구현인 것입니다.
진리라고 말하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 광명이라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곧 광명인 것입니다. 광명은 진리를 현상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광명과 관계되는 이야기가 매우 많습니다.
경전이 설해지기 전에 먼저 광명(光明)을 놓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또 사리탑이나 스님들이 방광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법당 안에 인등을 켜는 일도 광명과 관계되는 일이며, 초파일에 등을 다는 일도 광명인 것입니다.
광명은 곧 빛을 뜻합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잘 분별할 수 없을 것이며, 길을 가다가도 부딪치고 넘어져서 온통 피투성이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광명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오분향은 불교인의 인격 완성에서 오는 다섯 가지 덕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광명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光)은 오분법신향을 몸소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것이 광명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상처로 얼룩졌던 것은 광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광명은 항상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광명에 대한 말씀을 설해 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입암 즉무소견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心住於法 而行布施 如人入暗 卽無所見 若菩薩 心不住法 而行布施 如人有目 日光明照 見種種色)”입니다.
그 뜻은 ‘마음을 법에 머물러 보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물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보살이 마음을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것은 눈 밝은 사람이 햇빛 아래서 여러 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해석해 보면, 마음이 자기만의 소견과 편견과 고집과 굳어진 사상에 의해 생활할 것 같으면, 어떤 사람이 캄캄한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만약 자기만의 고집과 편견과 아집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어떤 사물을 실상대로 진실하게 관찰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눈도 밝고 햇빛이 환히 비춰서 아무 탈 없이 다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소견이나 고집, 편견들은 결코 지혜가 아니며, 슬기도 아니며, 빛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감정, 사건 등을 실상대로 관찰할 줄 아는 밝은 눈이 열릴 때 우리의 삶은 참으로 환한 광명의 삶이 될 것입니다. 밝은 눈이란 바로 깨달음의 슬기요, 지혜의 빛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도처에서 깨달음의 안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라만상의 일어나는 일체의 모습을 사실대로 파악하는 광명의 눈을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광명의 눈이 있다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상처 받지 않고 목적한 곳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의 말씀은 곧 지혜의 광명에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의식 가운데 촛불을 켜고 등에 불을 밝히는 의미는 모두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광명입니다.
앞에서 오분법신향으로 무장한 사람은 광명스러운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엄청난 밝기로 이 세상을 비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따라 밝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광명을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이라고 하여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뜨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참으로 밝은 완벽한 광명의 화신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우리에게 올바른 빛을 비춰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나마도 지금까지 별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앞길만이라도 비출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마저 없다면 이리저리 부딪혀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빛을 잃어 어둡고 캄캄한 세상은 우리에게 치명적인 상처만 남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분법신향이 각자의 마음속에 원만히 성숙되어 광명을 밝히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광명을 우리의 육신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밝게 웃는 모습은 광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웃는다는 것은 밝은 인상을 말합니다. 밝은 인상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옆의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웃음을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출근할 때 웃고, 퇴근할 때 한 번 웃어 주는 것보다 더 귀하고 값진 선물은 없는 것입니다. 웃음이라고 해서 실없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명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온몸 전체에서 향기로운 웃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광명운대>에서 운대는 구름 덩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변법계>는 법의 세계에 두루두루 펼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세속적인 표현으로 지구 전체를 나타내는 말을 세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세계는 물론 텅 빈 공간까지를 전부 합하여 법계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세계를 일컫는 것이므로 온 우주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어디에도 진리가 없는 곳은 없다고 해서 법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스님이 개신교 목사와 함께 우연히 기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자신의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여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스님은 그럼 변소에도 하나님이 있겠다고 말했더니 목사는 발끈하여 화를 냈다고 합니다. 어떻게 신성한 하나님이 변소간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법계>는 진리의 구름 덩어리가 온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없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광명은 처음에는 자기 혼자만을 비출 수 있는 정도의 빛이지만, 기도와 수행을 통해 더 많은 빛으로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빛은 다른 데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갖추고 있는 광명 덩어리를 발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업과 어리석음에 의해 가리어진 어두운 구름을 걷어 버리고 부처님과 똑같은 덕과 지혜의 빛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갖추고 있는 그 광명을 수행을 통해 확연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살아가신 분이십니다.
다음으로 <공양시방>이라고 할 때 공양은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공양은 흔히 꽃 . 음식 . 초 . 향 . 음악 . 춤 . 의복 등 부처님께 이바지하고 도와주는 모든 사물과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 올리는 모든 것을 공양이라 하여, 엄밀히 말해서 부처님께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분에 관계없이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양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도 공양이란 말을 쉽게 쓰는 것입니다. 절에서 밥 먹는 일을 ‘공양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에도 ‘당신도 부처님입니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처님께 쓰는 공양이란 말을 우리들에게도 쉽게 쓰는 것은 바로 우리도 부처님처럼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양 올리는 자가 곧 공양 받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부처님과 같은 인격으로 대한다는 뜻이 공양이란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처의 씨앗이 없다면 공양이란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법화경’에는 상불경(常不輕)이란 참으로 훌륭한 보살이야기가 나옵니다.
상불경 보살은 평소에 수행을 할 때 남들처럼 경을 읽거나 기도,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으로 존경하고 예배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았습니다.
상불경 보살은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씨앗을 품고 있음을 알고, 그에 대한 확신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예배하는 일에도 너무 바빠 다른 수행은 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처럼 존경하고 예배하는 일로 평생 수행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 일로 해서 그는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공양이란 말 속에는 상불경 보살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각 가정에서 ‘공양 하십시오’라는 말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 말 속에는 훌륭한 만행 만덕과 무한한 능력과 광명을 지니고 있는 부처님의 씨앗이 당신에게도 심어져 있으므로 부처님처럼 존경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양이란 말은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제일성(第一聲)으로 삼아도 좋은 훌륭한 말입니다. 공양이란 말 한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진정한 포교가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는 법공양의 위대성을 “설사 삼천대천 세계만한 금은 보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희사한다고 해도 짧은 사구게(四句偈) 한 구절만이라도 서사수지(書寫受持) 위인연설(爲人演說)을 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라고 표현한고 있습니다.
이 말은 법공양의 훌륭함을 나타낸 말로, 결국 자신 속에 무한한 보배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공양이라고 해서 단지 먹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공양, 법에 대한 공양, 가르침에 대한 공양입니다. 이것은 곧 지혜의 광명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불문’의 공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리의 공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양이란 말은 참으로 고맙고 빛나는 값진 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공양이란 말과 함께 있는 시방은 동 . 서 . 남 . 북의 사방(四方)과 동남 . 동북 . 서남 . 서북의 사유(四維)에 상 . 하를 합한 것입니다. 결국 시방은 불교의 공간 개념을 나타낸 말로써 온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어느 곳에서나 항상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무량불법승>은 ‘한량없는 불 . 법 . 승 삼보’라는 말입니다. 불 . 법 . 승은 부처님과 진리와 불교 단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온 인류, 모든 만물에게 모두 진리의 빛이 펼쳐지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온갖 만물에게 진리의 빛이 골고루 펼쳐져 바람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무량불법승>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 . 법 . 승 삼보 중에서 <승>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출가 수행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승가(僧伽)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교 단체, 불교 집단, 불교 대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출가 비구(比丘) . 비구니(比丘尼)는 물론 재가 남녀인 청신사(淸信士) . 청신녀(淸信女)를 모두 합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사부대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 부처님의 아들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향>에서부터 <무량불법승>까지의 내용에서 살펴볼 때, 이 속에는 불교의 목적하는 바가 모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대목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기본 밑천으로 삼아 자기 자신의 수행을 쌓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원문]
헌향진언
(獻香眞言)
“옴 바아라 도비야 훔”(3번)
옮김
향을 사루어 올리는 진언
옴! 금강소향존(金剛燒香尊)이시여, 훔.
해설
<헌향진언>은 ‘향을 올리는 진언’입니다. 여기서 향은 부처님이나 불보살의 완성된 인격체를 다섯 가지 덕으로 표현한 오분법신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향을 꽂음으로써 우리도 부처님처럼 위대하고 원만한 공덕을 갖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향을 하나 꽂더라도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의 마음으로 꽂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향진언>에서 <진언>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참된 말’이란 뜻입니다. 진언은 우리가 쉽게 그 뜻을 모르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도처에 진언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진언이라는 말 외에 다라니 혹은 주문이라는 말도 함께 쓰는데, 그 뜻은 비슷합니다.
진언은 인도말로 만트라(mantra)라고 하는데 주(呪) . 신주(神呪) . 밀주(密呪) . 밀언(密言)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진언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한두 가지로 잘못 번역하면 오히려 본래의 의미와 거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실지로는 그 뜻을 모르고 외워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진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정신의 세계, 영혼의 세계, 귀신의 세계, 불보살의 세계 등 보이지 않는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옛날부터 뜻도 알지 못하는 진언을 자꾸 외우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법회에서 진언을 해석하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진언의 뜻을 알고 외우면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신심이 고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진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옴 바아라 도비야 훔>에서 <옴>은 모든 진언의 정형구조로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진언이 됩니다. <옴>은 모든 진언의 모체가 되는 진언 중의 진언으로서 모든 법문의 어머니이며, 상대를 지극히 찬탄하는 극찬구(極讚句)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며, 상대를 섭복(攝伏)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옴>은 우주의 핵심이며, 피안에 이르는 범선(帆船)이며, 우주와 삼라만상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이 우주와 삼라만상은 <옴>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옴>은 그 뜻이 매우 깊고 중요해서 한두 마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옴>은 항상 진언의 맨 앞에 위치하며, 전체 진언의 내용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옴>은 모든 진언 중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진언인 것입니다.
다음의 <바아라>는 원래 <바즈라>라고 해야 합니다.
서양 사람들에게 <바즈라>라고 물어 보면 ‘다이아몬드’라고 그 뜻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도에서는 <바즈라>는 우리가 쉽게 쓰는 말로 하면 ‘금강(金剛)’이 됩니다. 다이아몬드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이아몬드는 다른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흔히 금강과 같은 견고한 지혜를 금강반야(金剛般若)라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의 지혜는 그 어떤 탐 . 진 . 치 삼독이나 번뇌 망상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 그 자체를 깨뜨릴 물건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도비야>의 뜻은 ‘소향존(燒香尊)에게’라는 말입니다. 끝의 <야>는 ‘~에게’라는 위격조사입니다.
소향존이란 향을 사루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강과 같은 지혜의 향을 사루는 분이 소향존입니다. 그 소향존은 지혜로, 광명으로, 오분법신으로 무장된 소향존입니다. 금강의 지혜가 마음속에 간직된 소향존이기 때문에 그 향으로써 이 세상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맨 끝의 <훔>은 ‘이구청정(離垢淸淨)’이란 뜻인데 진언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정형구입니다. <훔>은 더러움을 벗어난 청정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수행자들이 마음으로부터 미심쩍은 음식을 먹을 때 먹기 전에 음식에다 <훔>자를 쓰고 먹기도 했습니다.
청정하게 하는 데에는 향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의 향이 있는 곳에 더러움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향기도 중요하지만 좀더 강력하고 좋은 향기를 발하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향기를 풍겨야 온 세상이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옴 바아라 도비야 훔>을 붙여서 해석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하고 훌륭한 마음으로 향을 올리는 존귀한 분을 지극히 찬탄하면 이 세계가 청정해진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부처님의 공덕은 향과 같이 이 세계를 청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