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님이 늘상 주장하신 글들이긴 하지만...
좀 간단하게 중등교과서 수준으로 재 편집합니다.
연경가는길의 계산기정엔...
옛 한나라가 흉노를 치고 만들었단 우북평(右北平)이 나옵니다.
옥이 나는 무종(無終山)근처의 옥전(玉田)에서 멀지 않은 곳이랍니다.
아무리 봐도,,,돈황서북의 구 옥문관(舊 玉門關)과 관계있을듯 합니다.
현재에도 거기에서 감숙성 가욕관까지 한장성(漢長城)이란 하창성(河倉城)이 존재합니다.
그 증거는 이미 문무님이 확실하게 제시하셨습니다.
빼도박도 못할 지명 "백룡퇴(白龍堆)...
백룡퇴란 지명은...지구 전체에서 유일하게 감숙성 돈황과 신장성 포창해 사이의 침식지형지대를 이릅니다.
기련산맥의 물이...북으로 흘러... 저지대인 포창해로 흐르면서...포창해의 동북방향 옥문관 서쪽으로 흐르면서...
거대한 줄무늬 침식지형을 만드는데...그게 거대하고 수 많은 흰룡(白龍)과 같단 얘깁니다.
그 끝 지점인 동북쪽 지점이... 요즘 인기가 많은 관광지인 마귀성이란 야단지모입니다.
야단지모에 대한 설명들엔 ..백룡퇴에 버금가는 장관이라 하면서도...
어느 중국관광 안내나 구글에도...이 야단지모 서남부...포창해 남부의 백룡퇴를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어쩜 짱게 학자들이...역사왜곡의 최대 약점인 이 백룡퇴(白龍堆)란 지명 자체를...아예 야단지모로 바꿔치기하려나 봅니다.
어느 설명엔...야단지모가 백룡퇴(白龍堆)라 합니다.
밑의 계산기정을 보면...
대막(타클라마칸) 북쪽의 오환(烏桓)을 치러 가는 위나라 조조가...우북평 인근 옥전(무종)까지 동진했다가...
홍수로 길이 끈어져 지체하던 차에...어느 지역민의 코치로...
다시 돌아가 노룡새(기련산맥의 서쪽지류?)를 넘어...눈이 쌓인 산길을 개척해...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그때서야 오환군이 놀랬다 하니...
조조군은...호탄방면에서...
곤륜산맥의 남쪽을 거처 동쪽으로 청해성을 거처 노룡(기련산맥)넘어 돈황인근에 주둔했다가...
홍수로 길이 막히자...
다시, 빠꾸해서...노룡새(기련산맥&곤륜산맥)남쪽 길로 이동해...
북쪽 산골길을 개척해 백룡퇴에 짠~! 허고 나타나니...
그곳이 유관(柳關)에서 200리 거리였고...유관의 오환인들이 그때서야 비상이 걸렸다니...
오환군의 유관(柳關)은...
포창의의 남부나 백룡퇴접경이나 그 약간 서부란 얘기가 됍니다.
어쨋든지 중요한건...
중국사서든 조선사서든...우북평(右北平)은 딱 한군데인데...여러 왜곡 고지도들 말고...
분명한 사서들의 100% 일치하는 내용이...그 근방에 황무지인 백룡퇴(白龍堆)가 있다 합니다.
그곳은 대사막 넘어의 오환족들 영토와 지근거리라 합니다.
그런데 거기가 바로 고구려가 정복한 한사군의 우북평(右北平)과 지근거리랍니다.
그럼, 고구려의 영토는 최소한 신장성 라포박 일대 돈황일대요...오환도 고구려의 땅이엿던 때가 있다니...
고구려의 최대 관경은...서북으론 최소한 천산을 포함한 그 북단의 중가르사막까지엿던 때도 있었단 증거입니다.
이리 분명한 문무님의 사서 증명이 있는데도...
왜? 강단사학 학자늠들은 주목하질 않고...
왜? 서역조선사님들은...못 들은척 코카서스 백인 아가씨들 궁뎅이에만 관심이 많으신지 모르것습니다.
더 중요한건 밑의 계산기정에 나온 마지막 싯구입니다.
조조는 대사막 북쪽의 오환을 치러...일단, 먼저 동쪽으로 행군했단 겁니다.
호탄방향에서...혹여 오환군이 있을까 두려워...곤륜 남쪽길로 동쪽 청해성 거처 돈황쪽으로 올라가...
우북평이 있는 옥전(무종)근처에 주둔했으나...포창해의 물길이 야단지모 저지대들에 범람해 진군을 못 하다가...
근방의 주민에게 정보를 얻어...다시 노룡새(기련&곤륜산맥) 남로를 택해 서쪽으로 돌아가...
노룡새(곤륜지맥)을 넘어 백룡퇴(白龍堆)...즉, 라포박 남부에 나타나...
그 근방 200리에 유관(柳關)이란 관문을 지키던...오환군들의 전초병들이 비상이 걸리게 했단 겁니다.
고로...
한나라의 낙랑군은 청해선 동부 현재의 란주등... 조선의 깊숙한 곳에 있었으나...
그 중국이라 뻥치던 짱께족들의 전통적 중심은...호탄등이 최 북방영토인 티벳과 파미르인근 중앙아에 있었단 것입니다.
빼도박도 못할 세계 유일의 지명인... 백룡퇴(白龍堆)...지중해엔 없겠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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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한서역제국도는...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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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룡새(盧龍塞)쌍망보(雙望堡)부터는 들판의 빛이 다시 활짝 트이고 북쪽으로 바라보면 먼 산이 옹기종기 빼어나 아름답다. 십팔리보(十八里堡)까지 가면, 그곳이 옛 노룡새이다. 옛날 조조(曹操)가 북쪽으로 오환군(烏桓軍)을 정벌하느라고 무종(無終)에 머물렀다. 그때 마침 비가 와 물길이 막히고 뚫리지 않아서 조조는 그 일을 근심하고 전주(田疇)에게 물었다. 전주가 말하기를, ‘전의 우북평(
右北平)의 관아가 평강(平剛)에 있어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 있고 유성(柳城)으로 통했습니다. 지금도 아직 샛길이 있습니다.’ 했다. 드디어 조조는 군대를 돌려 노룡의 입구로부터 험준한 백단산(白檀山)을 넘어 공허한 곳으로 나가는데, 조조는 전주를 길잡이로 삼고 서무산(徐无山)으로 해서 백룡퇴(白龍堆)에 오르니, 유성까지가 200여 리가 되었다. 적은 그제서야 놀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무종(無終)은 곧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이다. 어떤 사람은 ‘조조가 노룡새에 도달해서 산을 좇아 길을 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산이 터지고 벼랑이 끊긴 곳이 있어 길이 그 사이로 나 있다.’ 한다.
새벽에 유관의 달을 밟고 / 曉踏楡關月
저녁에 노룡새의 눈 뚫었네 / 夕穿龍塞雪
예부터 황막한 땅이라 / 古來荒漠地
마을과 끊긴 지 오래다 / 人煙久阻絶
황사에는 북방 기운 흐르고 / 黃沙朔氣流
백룡퇴는 천연으로 험준하다 / 白堆天險設
노회(老獪)한 아만(阿瞞)이 동쪽으로 출정하자 / 老瞞東出征
오환이 그 굴혈을 짓이겼다 / 烏桓擣巢穴
열흘 내내 비 멎지 않고 / 一旬雨不止
잔 길은 곡절 많았다 / 小徑多曲折
요행히 군막에 객이 있어서 / 幸得帷中客
군사 돌려 이길 계획 결정되었다 / 回軍勝籌決
철마로 멀리 달려오니 / 鐵馬長驅來
팔락팔락 바람 깃발 잡아제친다 / 獵獵風旌掣
들판이 열리니 강물에 다리 둥그렇고 / 拓野河橋圓
길을 쪼아내어 산 구름 이그러졌네 / 鑿路山雲缺
백단산에 군사의 방비가 없어 / 白檀兵无備
격전(激戰)을 칼날에 피 없이 끊었다 / 鏖戰刃不血
북방 길 드디어 뚫려 / 北方道遂通
만 리를 내 수레에 기름 치고 간다 / 萬里膏吾轍
먼 길 와서 무엇을 하려는지 / 遠道來何爲
날 저문 오랑캐 땅엔 바람이 맵다 / 日暯胡風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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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구려현고와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고구려는 맨 처음 요동 졸본(卒本)의 땅 즉 발해(渤海)의 솔빈부(率賓府)에서 일어나 화주(華州)ㆍ익주(益州)ㆍ건주(建州)를 두었다. 명(明) 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를 두었으니, 지금 심양(瀋陽) 봉천부(奉天府) 흥경(興京)의 땅이 바로 그것이다. 뒤에 국내 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으로 옮겼으니, 지금 이산부(理山府) 강북(江北) 올랄산성(兀剌山城)이 바로 그것이다.
또 환도성(丸都城)이 있어 국내성과 서로 접하였다.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옛땅에 서경(西京) 압록부(鴨綠府)를 두어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환주는 바로 환도의 옛땅이다.
뒤에 도읍을 평양에 정하였으니, 《삼국사기》에,
“맨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 웅거하다가 점점 동쪽으로 패수(浿水)의 곁에 옮겨갔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현고와 관련해서 보기 바란다. 처음에는 동북은 말갈에, 동쪽은 옥저에, 동남쪽은 예ㆍ맥에, 남쪽은 낙랑에, 서쪽은 요동과 현도에, 북쪽은 부여에 접하였다.
그 땅은 양한(兩漢) 때에 비류(沸流)ㆍ행인(荇人)ㆍ개마(盖馬)ㆍ구다(句茶)
네 나라는 모두 지금의 백두산 안팎에 있었다.ㆍ북옥저(北沃沮)
지금의 경성(鏡城) 이북 육진(六鎭) 땅이다.ㆍ동옥저(東沃沮)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永興)ㆍ함흥(咸興) 등의 땅이다. 등 여러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또 북쪽으로 부여의 남쪽 지경을 빼앗고, 낙랑을 침략하여 살수(薩水)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淸川江)이다. 로 경계를 하였으며, 뒤에 또 부여ㆍ낙랑ㆍ대방ㆍ현도ㆍ요동 등의 땅을 병합하여 요서(遼西)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은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 때에 많이 하였다. 동진(東晋) 말기에 광개토왕이란 묘호(廟號) 또한 영토를 확장한 이유로 얻어졌다. 맨 처음에는 백제와 패수
지금의 평산부(平山府) 저탄(猪灘)이다. 로 경계를 삼았다.
《북사》에,
“위 태무(魏太武) 때 이오(李敖)로 하여금 고구려에 가게 하였는데, 그 땅이 남쪽은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은 옛날의 부여에 이르고, 인민의 호수는 전위(前魏) 때보다 3배가 된다.”
하였다. 소해는 지금 해주(海州) 이남의 소해인데, 곧장 건너면 충청도 내포(內浦) 등지에 이르게 된다. 《남사》에 또,
“백제는 소해 동남쪽에 있다.”
하였으니, 소해란 바로 그것이다. 패수의 하류가 지금의 벽란도(碧瀾渡)로서 소해로 흘러 들어가니, 패수가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뒤에 또 백제를 침략하여 한수(漢水) 이남, 충청도 동북 일대
직산(稷山)ㆍ진천(鎭川)ㆍ청안(淸安)ㆍ괴산(槐山)ㆍ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충주(忠州)ㆍ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영춘(永春) 등 읍(邑)과 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청송(靑松)ㆍ진보(眞寶)ㆍ영해(寧海)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영천(榮川)ㆍ순흥(順興)ㆍ안동(安東)의 임하현(臨河縣)이다. 를 차지하고, 신라를 침략하여 그 북쪽 땅을 빼앗았다.
《북사》에,
“왕은 평양성(平壤城)에 거한다. 국내성(國內城)과 한성(漢城)지금의 경도(京都)이다. 은 별도(別都)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를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하였다. 이어 그 땅은 동서쪽은 바다에 닿고, 동남쪽은 영(嶺)을 넘어 신라에 접하고, 남쪽은 한수를 건너 수백 리에 뻗쳐서 백제에 연하고, 북쪽은 옛날의 부여에 이르고, 동북쪽은 말갈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수(遼水)를 건넜으니, 강역이 이때에 가장 광대하였다.
쇠망할 무렵에는 수(隋)의 동침(東侵)을 당하고, 신라는 그 빈틈을 노려 5백 리의 땅을 빼앗았으니, 곧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다.ㆍ북한산주(北漢山州)
지금의 경도(京都)이다. 등의 땅이 신라에 흡수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요동은 당(唐)에 흡수되더니 곧 망하고 그 땅은 중국에 소속되었는데, 현종(玄宗) 때에 지금 대동강 이북 동북의 땅은 다 발해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그 남쪽 지경을 얻어 한주(漢州)ㆍ명주(溟州)ㆍ삭주(朔州)를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덕원(德原)ㆍ중화(中和) 이남이 바로 그것이다.
《동사찬요(東史纂要)》에,
“그 땅은, 동서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남쪽은 한강(漢江)에 이르고, 북쪽은 요하(遼河)에 이른다.”
한 것은 그 대략을 말한 것이다.
《후한서》에는,
“요동의 동쪽 1천 리에 있어 남쪽은 조선ㆍ예ㆍ맥과 접하고, 동쪽은 옥저와 접하고, 북쪽은 부여와 접하며, 땅은 사방 2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다.”
하고, 《북사》에는,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遼河)를 건너 2천 리에 이르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에 접하여 1천 리나 뻗쳤다.”
하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주몽(朱蒙)의 후손 연(璉)이 비로소 후위(後魏)와 우호를 맺었으며, 그 땅은 동쪽은 신라에 이르고, 서쪽은 요하를 건너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북쪽은 말갈ㆍ요동ㆍ현도 등 수십 성(城)을 인접하여 모두 관사(官司)를 두었다.”
하고, 《수서(隋書)》에는,
“동서는 2천 리, 남북은 1천 리이며, 수(隋) 때에 이르러서는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 리였다.”
하고,
【안】 6천 리는 먼 데서 들은 관계로 사실에 어긋났다.《당서》에는,
“동쪽은 신라에 접하고, 남쪽은 백제에 접하고, 서북쪽은 요하를 건너 영주(營州)에 접했다.”
하였는데,
【안】 당(唐)의 영주는 지금의 성경(盛京)인 금주(錦州)이다.《성경지》를 상고하면,
“의주(義州) 광녕(廣寧) 이동, 개원(開原) 이남의 요동 전역이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다.”
하였다.
【안】 고구려는 맨 처음 중국의 동북에서 일어났다. 한(漢)은 애제(哀帝)ㆍ평제(平帝) 이후로 호령이 약해지고 거기다 왕망(王莽)과 경시(更始)의 난리 때문에 고구려는 그 틈을 타서 전 강역을 얻었던 것이다. 또 부여는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 격파되었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兇奴)인데, 흉노는 오선우(五單于)와 남북선우(南北單于)의 난을 겪고 도망하여 그 땅이 비자, 고구려는 이때를 틈타서 남북으로 침벌(侵伐)하니 국토가 날로 확장되었다. 건무(建武) 때에 우북평(右北平)ㆍ어양(漁陽)ㆍ상곡(上谷)ㆍ태원(太原)을 침략하였다. 이상 4군은 다 한(漢)의 북새(北塞)인데, 흉노의 침공과 고구려의 침략을 당하면 이 4군을 경유한다 하였으니 고구려가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여 점점 서쪽으로 뻗어서 4군과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때문에 고구려가 호(胡)라고 칭하였는데 그 땅은 실로 북쪽에 가까워서 지금의 압록강 동쪽 지대와 처음에는 서로 멀리 막혀 있었다. 뒤에 비록 동방에 군사를 투입시켜 살수(薩水)로 경계를 하였지만 또한 그 나라의 변방이 되는 데에 불과하였다. 그후 삼국(三國)이 중토(中土)와 대치하였는데, 공손강(公孫康)은 해외(海外)에 세력을 떨치고 관구검(毌丘儉)은 환도(丸都)를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결국 약해졌다. 《통전》에,
“고구려가 조위(曹魏) 시대에 이르러 남북의 땅이 점점 줄어들어서 겨우 1천 여리에 불과하였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 그 뒤에 모용씨(慕容氏)가 요(遼)의 북쪽에서 일어나 근공술(近攻術)을 사용하매, 고구려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읍하니, 드디어 동방의 나라가 된 것이다. 또 그 뒤에 모용씨가 잔멸하고 풍씨(馮氏)가 와서 투항하고 두 위(魏)가 서로 다투어 중국이 전쟁에 피폐하니, 고구려가 다시 강성하게 되어 이에 국토가 확장되었다. 《통전》에 또,
“수(隨) 때에 이르러 점점 커져서 동서의 땅이 6천 리였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첫댓글 동사강목 ! 정확하네요 고구려가 모용씨 의 원교근공술 때문에 동천하였는데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읍하였다/ 이 말 이 참으로 정확하네요 그 평양이 트루판 입니다 트루판은 들판이라는 말이고 한자로 쓰면 평양이 됩니다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넜다니 그 압록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열개정도 되는 되는 열수입니다 물이 있다 없다 하는 강들이고 오리대가리처럼 푸른 빚이라 압록수라고 합니다 이부분 최남석의 졸고[ 박달산은 졸본(트루판= 평양)) 에,,,, ] 에서 말한 적 있습니다
두 분의 열 띤 글을 보니, 가슴이 뜁니다. 선대 역사에 대한 관심은 곧 사랑이며, 조상에 대한 존경심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우리가 재야라는 어정쩡한 공간에 서 있기는 하지만, 조상의 역사에 대한 탐구는 후손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지, 특정집단의 전유물이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좋은 열매가 맺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