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말하는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맞는지요.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에 ‘평화’를 주고자 함이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반목과 다툼과 전쟁을 그치고 서로 화목하며 평화롭게 지내자고 말하며, 평화의 도구가 될 것을 권면합니다.
과연 그래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러나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이러한 바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결코 평화의 세계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한 해를 마감하면서는 늘 아쉬움을 토로하며 또 한 해를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교회가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평화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몰아내고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반목과 다툼과 전쟁을 그치게 하는 것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 보내셔서 다윗 왕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가 전하게 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보내실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인데, 그는 다윗 왕권을 가지시고 이스라엘을 영원히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라고 하셨으며(눅 1:26-33), 마리아는 자신의 복중에 뛰어노는 아기를 보며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자신에게 큰 일을 행하셨음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대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시며 자비를 베푸셨다고 찬송하며 기뻐하였습니다(눅 1:46-55).
이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 천사들의 찬송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라고 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 예수님의 탄생이며,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는 일이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있는 이 평화는 세상에서 시기, 질투, 미움, 반목, 다툼, 전쟁 등 이러한 것이 없어지는 것에서 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자신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이루고자 하는 평화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주신 구주를 보는 복에 있게 하시므로 그들의 마음이 그 복을 기뻐하며 누림에 있게 하시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 반목, 다툼, 전쟁 등에서 온갖 강포가 그치지 않고 횡행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은 억눌림을 당함에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빛을 보는 기이함에 있습니다. 이 구원의 빛을 보는 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있었던 앞선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자신들도 있을 것이기에 자고 일어남이 평화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요 참 안식인 하나님의 나라에 그가 주 예수님과 함께 항상 있으니 말입니다.
사람은 말이죠. 눈에서 눈물이 그칠 날이 없으며, 귀에서 듣는 것이 멸시와 모욕이 그칠 날이 없으며, 온 몸은 멍들고 터져 상함이 그칠 날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날이 한숨과 탄식뿐인 험난한 세월에 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종식시키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심(계 22:14)에 있는 참으로 안연히 있으면서 영원토록 왕처럼 살 수 있게 하심(계 22:5)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있게 하신 평화의 결국이 있습니다. (*)
첫댓글 아멘입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