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른/는/곡/나/의/사/랑/나/의/생/명
*위의 사진은 아프리카 지역의 기아 홍보를 위하여 찍은 실제의 작품으로
세계 사진 작가 수상작 중의 하나이다.
사진의 내용은, 오랫동안 기아상태로 굶어 죽어가는 한 어린아이의 모습 뒤로
어린아이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에
세계인들이 기아문제에 관심을 이끌어 냈던 사진이었다.
해마다 600만명의 어린아이가 5살도 채 안되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가아대책기구자료) 8억 4천만명이
현재 기아로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설움중에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그런데, 배고픈 설움으로 끝나지 않고 배고픔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어디 있을까?
먹을수 있다는것 그것도 배부르게 먹을수 있다는것, 맛있게 먹을수 있다는것
언제든지 냉장고를 열면 그래도 먹을 것이 있다는것
그것은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이며 행복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배불러 죽겠다' 그런다.
그리고 끼니마다 '무엇을 먹을지?'행복한 고민을 하며 산다.
바로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실제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아니라, 맛이나 배부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찾아 들짐승처럼 헤매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이 부분을 끌어 안고 중보기도 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남는 음식물 처리를 놓고 고심하는 동안
북한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결식 아동들이 수천 수만에 이른다.
인간의 기본 욕구중에서 먹어야 하는 욕구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옷을 못입고, 못 배우고,성공하지 못해도 살수는 있다.
그러나, 먹지 못하면 죽는다.
먹지 않고 살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피조물인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안 먹고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땅의 대부분의 싸움도 먹는 문제 때문이다.
먹는 문제는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문제이다.
누구든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생명은 피다.
그 피를 만드는 자원이 음식이다.
그러기에 음식의 공급이 중단되면 더 이상 피를 생성할수 없고
심장에서 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생명 줄은 끊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코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곧 생명이다.
그 생명은 말씀으로 유지되고 자라게 된다.
말씀의 공급이 중단되면 곧 바로 탈진,탈수,영양실조로 이어지게 되고
얼마되지 않아 영적 기아상태로 생명줄은 끊어지게 만다.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가 굶어 죽기를 학수고대하는 존재가 있다.
아프리카 사막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 뒤에는
반드시 독수리가 기다리고 있듯 말이다.
그 독수리가 사단이다.
하나님의 코드는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이다.
반대로 사단의 코드는 굶어 죽으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다 보면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내 새끼들) 잘 먹고 많이 먹는 것을 보고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먹어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모로써 자녀들을 향하여 최고로 속상할때는
아이들이 안 먹을때와 적게 먹을 때이다.
왜냐하면 안 먹거나, 적게 먹으면 곧 영양실조가 되어
생명을 풍성히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안먹는 아이들과 끼니마다 전쟁을 치루는 부모들을 보노라면(아빠들은 좀 다르지만)
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려나?....코 끝이 찡해온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이 안 먹으려 하면,
온갖 회유와 협박...그리고 때려서라도 먹이려 애쓴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똑 같으시다.
노심초사 우리가 끼니마다 잘 먹기를 바라신다.
때려서라도 얼러서라도 먹을 것을 챙겨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동안을 하루같이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먹을것을 챙겨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하여 생명을 이어 갔을뿐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수가 있었다.
만나가 유일한 생명의 끈이었다.
지금 우리도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존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만나뿐이다.
그 만나는 지금도, 오늘 새벽에도 동일하게 우리 곁으로 충만하게 내렸다.
만나의 특징중에 하나는
매일 먹어야 된다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먹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나는, 만나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고, 직접 내가 내 손으로 먹어야 한다.
아무리 만나가 광야에 지천을 한다해도 나가지 않으면,
내가 먹으려 하지 않으면 먹을수 없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것과 먹지 않아서 굶는 것은 다르다.
요즈음은 은혜의 시대이다.
어디가나 만나 덩어리가 있다.
만나의 질도 향상 되었다.
내가 조금만 수고를 하고 사모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지 어떻게든지 배부르게 먹을수 있다.
우리나라 1960년대,70년대는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시대이다.
학창시절에 계란 하나 후라이해서 덮어 가면 최고의 반찬이었고
그날 하루는 최고의 인기를 얻을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계란 하나로 최고의 인기도 얻을수 없고,
그것은 최고의 반찬도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먹을 것은 너무 많은데 먹지 않을 하고
가려(편식) 먹으려 함이 문제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옛날에는 말씀 한번 듣기 위하여 수십리씩 걷기도 했었다.
나도 어린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몇시간 밤길을 걸어
말씀 들으러 갔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문만 열면 교회가 있고
안방에서 인터넷으로 세계적인 교회들을 마음껏 만날수도 있다.
그뿐인가?
어디서든지 맘만 먹으면 많은 양의 만나와 질 좋은 만나를 접할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너무 가리지 않고 많이 먹기만 하여(배우고 듣기만하여)
영적 비만에 걸린 분들도 적지 않다.
영적비만에는 다이어트가 특효이다.
적게 먹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고,가려 먹어야 하고,
먹는 일보다 운동(적용,행함,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비만이 아니라 영적빈곤 내지는 기아상태이다.
우리의 영적 입맛에 문제가 생겨 도무지 먹으려 하지 않고
조금 먹으면 실증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생명은 힘을 잃어 가게 된다.
다른 길이 없다.
음식을 먹어야 겉 사람이 살듯이, 말씀을 들어야 속 사람이 생존할수 있다.
이 세상에는 말씀을 대신할 그 무엇도 없다.
찬양,봉사,기도,선교,전도,선행,구제....로도 안된다.
중환자실에 가보면 많이 아프신 분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아파도 음식섭취가 가능하다면 소망이 있다.
그러나, 먹지 못하고 먹지 않으려 하면 생명은 꺼지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아무리 중한 환자라 할지라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식도를 통해서라도 음식을 주입시켜 생명의 끈을 연장시키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의학보고에 의하면 건강한 남자의 경우에는 7일, 여자의 경우에는 9일 동안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 섭취없이 일주일을 견딜수 없어야
건강한 영적상태라 할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말씀 공급 없이도
일주일이 뭔가? 7개월도 넉넉히(?) 견뎌 내는 분들이 부지기수다.
말씀없이 보내는 세월에 대한 뼈저린 아픔과
영양실조로 생기를 상실한 자가진단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자각증세마져 잃어버린 식물인간처럼 위장된 평안과 위선의 십자가를 지고
하루 하루를 버겁게 살아내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개중에는 자가진단과 자각증세로 인하여 말씀의 자리로 나오려 해도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병자처럼 너무 오랜 세월 기진하고 쇠하여
스스로는 한 발자욱도 움직일수 없는 분들도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거들어 주어야 할터인데...누가 누구를 거들겠는가?
나는 씨름을 전혀 할줄을 모르고 그렇 힘도 별로없다.
그렇지만 일주일 정도 굶어 탈진한 천하장사와 씨름을 한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이 말은 아무리 힘이 장사인 씨름선수라도 굶으면 힘을 쓸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공급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길들여지고 이빨 뽑힌 맹수에 불과 하다.
으르릉~ 대지만 아무 힘도 공격능력도 없는 맹수 말이다.
오늘날에 죄와 문제와 사단의 공격에 대하여
야성을 잃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동물원에서는 맹수의 야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짐승이나 생고기를 먹이로 던져 주곤 한다.
그렇다.
성도가 야성을 회복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려면
살아 있는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야성을 유지 할수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이고
우리가 살아야 할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야성과 능력의 회복은 절실히 필요하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함이며
마귀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과 야성을 배앗아 결국은 서서히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밥만 먹고 그것만을 연구하고 생각한다.
벌에서 침을 빼면 더 이상 벌이라 할수 없다.
뱀에서 독을 제하면 더 이상 뱀이라 할수 없다.
맹수에서 발톱과 이빨을 뽑으면 맹수가 아니듯
그리스도인에게서 말씀을 빼버리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은 될수 없다.
말씀은 예배를 통해서도 공급 받을수 있다.
그러나, 사실 예배는 공급받는 채널이 아니라, 드려지는 채널이다.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구원의 감격을 올리고, 나의 삶을 헌신하는 시간이다.
뿐만아니라, 예배시간의 말씀은 대중적일 때가 많다.
물론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이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각자에게 말씀하시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를 통하여 주어지는 말씀은
개인진단과 처방에 극히 제한적일수 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말씀과
나의 속사람을 성장케 하고, 변화 시키고, 충만케하는 말씀의 공급은
큐티든,성경공부이든 예배와 별개의 채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 주신다.
이제 예배는 물론,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운동하시기 때문이다.
한 주간 한 두번의 예배만으로는, 생명을 풍성히 얻을수 없다.
어떻게 일주일에 밥 한두끼 먹고 버티겠는가?
말씀은 매일 매일 공급 받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일용할 양식이라 말하지,
주용할 양식이나 월용할 양식이라 하지 않는다.
이제, 탈진과 허기짐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나
말씀이 끓어 오르는 베데스다로 나아가자.
멀리있던 성경책을 꺼내어 가슴에 품으라.
말씀만이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이며, 비젼이며,길이며, 해답이며 생명의 근원이다.
할수만 있다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공부 채널을 확보하라.
복음적이고 건강한 공동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쓰라.
그것이 어렵다면 '푸른초장화요모임'이라도 두둘겨라.
어떻게든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살리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먹으려 하지 않는 당신을 향하여
속상해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굶어 탈진해 가는 당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좋아하는 사단의 검은 미소를 멈추게 하라.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좋은사람, 좋은환경도 배고프면 다 소용이 없다.
아이들이 보채고 우는 이유의 대부분은 배고프기 때문이다.
성도가 보채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지면 보채게 마련이다.
지금도 날 위해 준비하여 차려 놓으신 하늘의 신령한 밥상 앞에서
'제발~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무럭 무럭 자라라고' 애원하시는
주님의 숟가락과 밥그릇을 거절치 않음이 진정 효도가 아닐까?
주부의 바램은 차려놓은 음식 아무말 없이 싹~싹 먹어 주는 것이듯
주님의 바램도 다르지 않다.
차려 놓은 광야의 식탁 앞에서 아무말 없이 맛나게 아-멘으로 먹어 드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맛있는 음식을 찾아 원정을 다닌다.
하물며 생명의 양식 얻기 위하여, 무엇인들 장애가 될수 있을까?
우리 푸른초장 성경공부에도, 일산과 안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신다.
왕복 4시간 걸려 한 시간 말씀 듣고 가시는 뒤 모습을 보노라면
언제나 감동 그 자체이다.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물며 주님은 어떠하실까?
주님의 감동과 시선은 언제나 말씀에 욕심내며 사는 자녀들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듯 하다.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셨듯 말이다.
이제,
먹을때마다 감동하자.
먹을때마다 지구촌의 기아들을 위하여 중보하자.
먹을때마다 속사람도 굶기지 말자.
세상의 코드는 아는게 힘이며 돈이 힘이다.
그러나, 하늘의 코드는 먹는게 힘이다.
우리는 먹기 위하여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살고 잘 믿기 위하여 잘 먹어야 한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 아닐까?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기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요.
흐/른/는/곡/나/의/사/랑/나/의/생/명
*위의 사진은 아프리카 지역의 기아 홍보를 위하여 찍은 실제의 작품으로
세계 사진 작가 수상작 중의 하나이다.
사진의 내용은, 오랫동안 기아상태로 굶어 죽어가는 한 어린아이의 모습 뒤로
어린아이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에
세계인들이 기아문제에 관심을 이끌어 냈던 사진이었다.
해마다 600만명의 어린아이가 5살도 채 안되어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국제가아대책기구자료) 8억 4천만명이
현재 기아로 허덕이고 있다고 한다.
설움중에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그런데, 배고픈 설움으로 끝나지 않고 배고픔이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또 어디 있을까?
먹을수 있다는것 그것도 배부르게 먹을수 있다는것, 맛있게 먹을수 있다는것
언제든지 냉장고를 열면 그래도 먹을 것이 있다는것
그것은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이며 행복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배불러 죽겠다' 그런다.
그리고 끼니마다 '무엇을 먹을지?'행복한 고민을 하며 산다.
바로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는 그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실제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
뿐만아니라, 맛이나 배부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을 찾아 들짐승처럼 헤매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이 부분을 끌어 안고 중보기도 해야 한다)
선진국들이 남는 음식물 처리를 놓고 고심하는 동안
북한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결식 아동들이 수천 수만에 이른다.
인간의 기본 욕구중에서 먹어야 하는 욕구는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옷을 못입고, 못 배우고,성공하지 못해도 살수는 있다.
그러나, 먹지 못하면 죽는다.
먹지 않고 살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피조물인 우리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안 먹고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땅의 대부분의 싸움도 먹는 문제 때문이다.
먹는 문제는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의 문제이다.
누구든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생명은 피다.
그 피를 만드는 자원이 음식이다.
그러기에 음식의 공급이 중단되면 더 이상 피를 생성할수 없고
심장에서 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생명 줄은 끊어 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코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곧 생명이다.
그 생명은 말씀으로 유지되고 자라게 된다.
말씀의 공급이 중단되면 곧 바로 탈진,탈수,영양실조로 이어지게 되고
얼마되지 않아 영적 기아상태로 생명줄은 끊어지게 만다.
언제나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가 굶어 죽기를 학수고대하는 존재가 있다.
아프리카 사막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 뒤에는
반드시 독수리가 기다리고 있듯 말이다.
그 독수리가 사단이다.
하나님의 코드는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이다.
반대로 사단의 코드는 굶어 죽으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다 보면 행복한 순간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내 새끼들) 잘 먹고 많이 먹는 것을 보고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먹어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모로써 자녀들을 향하여 최고로 속상할때는
아이들이 안 먹을때와 적게 먹을 때이다.
왜냐하면 안 먹거나, 적게 먹으면 곧 영양실조가 되어
생명을 풍성히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안먹는 아이들과 끼니마다 전쟁을 치루는 부모들을 보노라면(아빠들은 좀 다르지만)
저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려나?....코 끝이 찡해온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이 안 먹으려 하면,
온갖 회유와 협박...그리고 때려서라도 먹이려 애쓴다.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똑 같으시다.
노심초사 우리가 끼니마다 잘 먹기를 바라신다.
때려서라도 얼러서라도 먹을 것을 챙겨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동안을 하루같이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먹을것을 챙겨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하여 생명을 이어 갔을뿐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할수가 있었다.
만나가 유일한 생명의 끈이었다.
지금 우리도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존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만나뿐이다.
그 만나는 지금도, 오늘 새벽에도 동일하게 우리 곁으로 충만하게 내렸다.
만나의 특징중에 하나는
매일 먹어야 된다는 것과, 하나님이 직접 먹여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나는, 만나가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고, 직접 내가 내 손으로 먹어야 한다.
아무리 만나가 광야에 지천을 한다해도 나가지 않으면,
내가 먹으려 하지 않으면 먹을수 없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것과 먹지 않아서 굶는 것은 다르다.
요즈음은 은혜의 시대이다.
어디가나 만나 덩어리가 있다.
만나의 질도 향상 되었다.
내가 조금만 수고를 하고 사모하기만 한다면
어디서든지 어떻게든지 배부르게 먹을수 있다.
우리나라 1960년대,70년대는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시대이다.
학창시절에 계란 하나 후라이해서 덮어 가면 최고의 반찬이었고
그날 하루는 최고의 인기를 얻을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계란 하나로 최고의 인기도 얻을수 없고,
그것은 최고의 반찬도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먹을 것은 너무 많은데 먹지 않을 하고
가려(편식) 먹으려 함이 문제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옛날에는 말씀 한번 듣기 위하여 수십리씩 걷기도 했었다.
나도 어린시절에 어머니를 따라 몇시간 밤길을 걸어
말씀 들으러 갔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런데 요즈음은 문만 열면 교회가 있고
안방에서 인터넷으로 세계적인 교회들을 마음껏 만날수도 있다.
그뿐인가?
어디서든지 맘만 먹으면 많은 양의 만나와 질 좋은 만나를 접할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너무 가리지 않고 많이 먹기만 하여(배우고 듣기만하여)
영적 비만에 걸린 분들도 적지 않다.
영적비만에는 다이어트가 특효이다.
적게 먹어야 하고,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고,가려 먹어야 하고,
먹는 일보다 운동(적용,행함,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비만이 아니라 영적빈곤 내지는 기아상태이다.
우리의 영적 입맛에 문제가 생겨 도무지 먹으려 하지 않고
조금 먹으면 실증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서서히 생명은 힘을 잃어 가게 된다.
다른 길이 없다.
음식을 먹어야 겉 사람이 살듯이, 말씀을 들어야 속 사람이 생존할수 있다.
이 세상에는 말씀을 대신할 그 무엇도 없다.
찬양,봉사,기도,선교,전도,선행,구제....로도 안된다.
중환자실에 가보면 많이 아프신 분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아파도 음식섭취가 가능하다면 소망이 있다.
그러나, 먹지 못하고 먹지 않으려 하면 생명은 꺼지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아무리 중한 환자라 할지라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식도를 통해서라도 음식을 주입시켜 생명의 끈을 연장시키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의학보고에 의하면 건강한 남자의 경우에는 7일, 여자의 경우에는 9일 동안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씀 섭취없이 일주일을 견딜수 없어야
건강한 영적상태라 할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말씀 공급 없이도
일주일이 뭔가? 7개월도 넉넉히(?) 견뎌 내는 분들이 부지기수다.
말씀없이 보내는 세월에 대한 뼈저린 아픔과
영양실조로 생기를 상실한 자가진단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자각증세마져 잃어버린 식물인간처럼 위장된 평안과 위선의 십자가를 지고
하루 하루를 버겁게 살아내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개중에는 자가진단과 자각증세로 인하여 말씀의 자리로 나오려 해도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병자처럼 너무 오랜 세월 기진하고 쇠하여
스스로는 한 발자욱도 움직일수 없는 분들도 적지 않음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거들어 주어야 할터인데...누가 누구를 거들겠는가?
나는 씨름을 전혀 할줄을 모르고 그렇 힘도 별로없다.
그렇지만 일주일 정도 굶어 탈진한 천하장사와 씨름을 한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이 말은 아무리 힘이 장사인 씨름선수라도 굶으면 힘을 쓸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공급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길들여지고 이빨 뽑힌 맹수에 불과 하다.
으르릉~ 대지만 아무 힘도 공격능력도 없는 맹수 말이다.
오늘날에 죄와 문제와 사단의 공격에 대하여
야성을 잃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동물원에서는 맹수의 야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살아 있는 짐승이나 생고기를 먹이로 던져 주곤 한다.
그렇다.
성도가 야성을 회복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려면
살아 있는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
그래야 야성을 유지 할수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이고
우리가 살아야 할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야성과 능력의 회복은 절실히 필요하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함이며
마귀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과 야성을 배앗아 결국은 서서히 굶어 죽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밥만 먹고 그것만을 연구하고 생각한다.
벌에서 침을 빼면 더 이상 벌이라 할수 없다.
뱀에서 독을 제하면 더 이상 뱀이라 할수 없다.
맹수에서 발톱과 이빨을 뽑으면 맹수가 아니듯
그리스도인에게서 말씀을 빼버리면
더 이상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은 될수 없다.
말씀은 예배를 통해서도 공급 받을수 있다.
그러나, 사실 예배는 공급받는 채널이 아니라, 드려지는 채널이다.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구원의 감격을 올리고, 나의 삶을 헌신하는 시간이다.
뿐만아니라, 예배시간의 말씀은 대중적일 때가 많다.
물론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이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각자에게 말씀하시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를 통하여 주어지는 말씀은
개인진단과 처방에 극히 제한적일수 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말씀과
나의 속사람을 성장케 하고, 변화 시키고, 충만케하는 말씀의 공급은
큐티든,성경공부이든 예배와 별개의 채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 주신다.
이제 예배는 물론,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임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운동하시기 때문이다.
한 주간 한 두번의 예배만으로는, 생명을 풍성히 얻을수 없다.
어떻게 일주일에 밥 한두끼 먹고 버티겠는가?
말씀은 매일 매일 공급 받아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일용할 양식이라 말하지,
주용할 양식이나 월용할 양식이라 하지 않는다.
이제, 탈진과 허기짐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추스리고 일어나
말씀이 끓어 오르는 베데스다로 나아가자.
멀리있던 성경책을 꺼내어 가슴에 품으라.
말씀만이 우리의 미래이며, 희망이며, 비젼이며,길이며, 해답이며 생명의 근원이다.
할수만 있다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공부 채널을 확보하라.
복음적이고 건강한 공동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일에 힘쓰라.
그것이 어렵다면 '푸른초장화요모임'이라도 두둘겨라.
어떻게든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살리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먹지 못하고 먹으려 하지 않는 당신을 향하여
속상해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굶어 탈진해 가는 당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좋아하는 사단의 검은 미소를 멈추게 하라.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좋은사람, 좋은환경도 배고프면 다 소용이 없다.
아이들이 보채고 우는 이유의 대부분은 배고프기 때문이다.
성도가 보채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기지면 보채게 마련이다.
지금도 날 위해 준비하여 차려 놓으신 하늘의 신령한 밥상 앞에서
'제발~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무럭 무럭 자라라고' 애원하시는
주님의 숟가락과 밥그릇을 거절치 않음이 진정 효도가 아닐까?
주부의 바램은 차려놓은 음식 아무말 없이 싹~싹 먹어 주는 것이듯
주님의 바램도 다르지 않다.
차려 놓은 광야의 식탁 앞에서 아무말 없이 맛나게 아-멘으로 먹어 드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맛있는 음식을 찾아 원정을 다닌다.
하물며 생명의 양식 얻기 위하여, 무엇인들 장애가 될수 있을까?
우리 푸른초장 성경공부에도, 일산과 안산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신다.
왕복 4시간 걸려 한 시간 말씀 듣고 가시는 뒤 모습을 보노라면
언제나 감동 그 자체이다.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하물며 주님은 어떠하실까?
주님의 감동과 시선은 언제나 말씀에 욕심내며 사는 자녀들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듯 하다.
말씀에 푹~ 빠져 있던 마리아를 칭찬하셨듯 말이다.
이제,
먹을때마다 감동하자.
먹을때마다 지구촌의 기아들을 위하여 중보하자.
먹을때마다 속사람도 굶기지 말자.
세상의 코드는 아는게 힘이며 돈이 힘이다.
그러나, 하늘의 코드는 먹는게 힘이다.
우리는 먹기 위하여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잘 살고 잘 믿기 위하여 잘 먹어야 한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 아닐까?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기위하여
최고의 하나님을 만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