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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 이진희
안녕하십니까?
올해 제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맡은 이진희입니다.
지극히 저 개인사가 제주의 4.3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그리고 강정의 문제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1966년 제주시 오등동에서 태어나 아라초등학교를 나왔고, 신성여중을 졸업했으며,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졸업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927년 태생으로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하신 분이며 현재도 오등동에서 가족을 이룬 오빠와 함께 87세 나이로 사시고 계십니다. 저의 어머니가 스물두 살 되던 해 4.3사건을 맞았는데 그 때 어머니는 제주시 정실 마을에 시집 가셨고 큰 언니가 세 살 이었습니다. 그해 4.3사건으로 마을은 모두 불탔으며, 큰 언니의 아버지는 붙잡혀 목포 앞바다에 수장 당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밭고랑에 함께 앉으면 4.3 당시 눈밭에서 생사가 엇갈리는 초조 속에 배고픔과 추위를 이겨내야 했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외동딸이셨는데 그 후 어린 손녀 하나 두고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던 친가의 어른들이 오빠 아버지를 소개시켜 주었습니다. 오빠 아버지는 전라남도 광주 분이셨는데 제주시 도남동에서 신접살림 시작한지 3개월 만에 고향으로 발령받고 떠나셨습니다. 오빠 아버지는 고등교육을 받은 분으로 제주 세무서에 발령을 받아 자신이 이미 결혼하여 가계를 이룬 사실을 숨기고 어머니와 정식 결혼 없이 함께 사셨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이미 오빠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오빠의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발령 받고 떠나며 주소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헌신짝처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셨습니다. 그 후 오빠는 호적상 고아였습니다. 오빠가 서른 살 되었을 때 오빠 아버지를 추적하여 호적을 찾았지만 오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고향 마을 오등동에서 4.3사건 당시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까지 수형생활7년 동안 하고 돌아온 저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같은 동네 냇가 하나 건너에 본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정식 결혼 없이 네 살 위 저의 언니와 저 그리고 한 살 아래인 여동생을 낳았습니다. 아버지 본부인 쪽의 자식도 2남 2녀로 저의 세 자매 연배와 거의 같습니다. 어머니는 폭도와 화냥질했다고 외할머니에게 심한 모욕과 구타를 서슴없이 당하며 낙태를 강요받기도 했다는 슬픈 이야기를 저는 어머니께 자주 듣곤 하였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의 상처는 치유하기 어려운 삶이었으며 큰언니 역시도 저의 아버지를 만나 우리를 낳은데 대해 어머니에 대한 감정의 골은 펴지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오빠 또한 고아라는 사실을 커가며 알아갈 때 어머니께 심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삶을 원망하였습니다. 시국을 잘못 만난 것이 죄라며 박복한 년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서 무슨 팔자가 이러냐며 당신 때문에 우리 자식들이 고생한다는 것을 늘 죄스러워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죄의식을 안고 저의 형제들을 거두기 위해 잠자는 시간 이외는 남의 밭을 병작하셨습니다. 소작료를 줄이기 위해 길이 없는 깊숙한 밭을 일궈 수확할 때면 그 수확한 곡식을 수레조차 없어 저의 세 자매가 등짐으로 달 빛 받으며 집으로 옮기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보다 밭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고 사는 집보다 밭이 더 말쑥했습니다.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면 어머니는 “먹어야 산다.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타박하시곤 했습니다.
살아생전에 아버지라고 단 한 번 불러본 적 없던 아버지는 동네 혼례나, 상례가 나면 술을 마시고 2박 3일 잔치 벌리던 예전 모습의 동네에서 술주정꾼이 되어 시비가 그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4.3이 주었던 정신적 충격이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웠을 것임을 한 참 후 성인이 되고 역사를 알면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외할머니와 어머니, 큰 언니와 어머니, 오빠와 어머니, 그리고 저의 세 자매와 어머니 사이에는 너무나 깊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학창시절엔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실태조사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저는 늘 그 종이가 고문처럼 여겨졌습니다. 분명 저를 목숨 걸며 먹여 살리시고 살을 맞대며 함께 생활하는 사람은 생모인 어머니인데 그 종이는 나와 전혀 상관도 없는 법적 보호자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본부인 이름을 적어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양심을 파는 것과도 같았고 어머니를 저버리는 것 같아 정신적 분열이 늘 멍에처럼 들씌워지곤 했습니다.
사생아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수치심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고 눌러 붙은 가난은 떨쳐내기 어려운 그 무엇이기도 했지만 더욱 저를 슬프게 한 일은 동네 어른들이었습니다.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돌아오는 길, 혹은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치면 저를 불러 세워 아버지 이름을 대라했습니다. 히죽거리던 그 남자 어른들이 참으로 미웠습니다. 우물쭈물 말 안 하는 저에게 너 000 딸이지 대놓고 수긍하라는 듯 빈정거리던 마을 어른들. 물론 지금은 그분들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마을에서 남자 어른들 음성이 들리기만 하면 그 속에 아버지라는 사람이 끼어 있을지도 몰라 돌 틈에서 망을 보다 골목길을 나서곤 했던 한량없는 슬픔이 때로 몰려오곤 합니다.
그냥 세상에 내던져진 짐승의 새끼나 다름없는 삶, 짐승이야 짐승으로써 부끄러움도 없으니 자유롭겠지만 저는 어린 시절 그렇게 저 자신이 부끄러웠고 저의 가정환경이 너무나 부끄러웠으며 어머니의 신세 한탄은 곧 제게 내면화 되며 그 원인이 술주정꾼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아버지를 살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으며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이 되자 저는 어머니가 아는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중학교 졸업식장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야간이라도 고등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초등, 중등 교육에 그쳐야했고 막내 여동생만 고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제주 4.3은 외할머니, 어머니, 저의 형제들 3대에게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고통을 당한 큰 언니의 아버지 쪽 분들과 저의 아버지 쪽의 형제들도 직접적이고 간접적 피해의 고통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아 마을에서 공동목장 당번으로 목장에 소를 돌보러 갔다가 큰 태풍을 만나 시신조차 찾지 못하다가 다음 해 움막이 있던 목장과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 들판에서 시체로 한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두 번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도 저는 물 건너 불구경과 같은 식의 일로 어머니께 들었으며 며칠 후, 퇴근하던 버스 좌석에서 라디오 지방 방송 아나운서의 쇳소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듣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이 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시켜 놓았습니다.
그 때 세상 처음으로 나는 누구냐를 묻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 3만 명의 무고한 학살이 자행된 제주의 4.3은 우리 도민들 누구에게나 큰 상흔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와 저의 가족뿐만 아니라 여기 모이신 여러분 중에도 많은 분들이 여러 형태로 4.3의 직간접적인 고통의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4.3은 3만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것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도민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학교라는 울타리를 나와 허허벌판에서 단 한 명의 스승도 만날 수 없었으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 참으로 삶은 갈팡질팡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를 쓰고 싶어 열망한 시는 시가 되지 않았고 유일한 낙은 책을 읽으며 언젠가 작가가 되리라는 작은 희망이 저를 책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문학과 철학, 역사, 사회과학 책들과 시사, 문학잡지들을 읽었으며, 신문을 교과서처럼 국어사전을 펴놓고 읽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저는 역사를 알 턱이 없었습니다. 저의 가장 오랜 교과서 역할을 해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 역할을 도와줄 고마운 한겨레신문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코흘리개 초등학교 친구의 안내로 1991년 제주민주청년회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정선 탄광 막장에서 돈을 벌기위해 갔다가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걸 막기 위해 친척들이 만류하여 제주로 오게 된 호남 출신의 건강한 노동자이며 현재 결혼생활 22년 째 두 아들을 낳아 함께 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저를 중심으로 저의 어머니 세대와 저의 세대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대에 대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놓고 생각해 봅니다.
4.3의 뼈아픈 상처가 제대로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민주적 절차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국가가 자본과 권력을 동원하여 해군기지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삼촌과 조카 사이의 마을 공동체를 갈라놓는 제 2의 4.3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그 이상의 성인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성인들의 가르침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 가르침은 하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왜 세상에 와 있는가를 알라고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답도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나 혼자 잘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연민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양심을 잃은 것이며 존엄한 인간의 품위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강정주민들이 단지 자신들의 고향을 이기심에서 지키고자 했다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강정주민들이 제주의 제물이 되어 희생되고 있습니다. 사실 도민들의 총알받이로 앞에 서신 것입니다. 생명평화를 바란다며, 환경을 지켜야 한다며, 자연은 아름답다며, 공동체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며 강정을 외면하면 그것은 이율배반과도 같습니다. 외면하지 말아야합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동정을 느낄 양심을 지녔다면 코앞의 이웃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사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법이라는 잣대로 수천만 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는 강정주민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입니다. 그래야 고향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훗날에도 우리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신문기자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미래를 그렇게 훤히 알 수 있느냐고. 그는 말했습니다. 매일 아침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이 새까맣게 되는데 여섯 개의 신문을 매일 읽는다 하였습니다. 매일 같이 그렇게 신문을 읽다보면 미래를 잘 보게 되지 않을 수 없다하였습니다.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전쟁과 자연의 파괴는 인간의 욕심과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로 모두 극복될 수 있는 일들이며 세상이 어두운 까닭도 이 두 가지를 극복하기 위해 공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 모두 시간이 닿는 한 책을 읽으며 공부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자격증을 위한, 돈을 더 잘 벌기 위한, 사회적 계급을 더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공부가 아닌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써의 공부를 말입니다.
마음의 해방이 이뤄지면 자유가 오고 그 자유는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으며 자연도 우리 인간에게서 보다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 결과는 전쟁의 무기가 되었고 결국 그는 노벨재단을 만들어 인류에게 공헌한 이들에게 상을 주며 그 죄책감을 씻고 있습니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역시 죽으며 자신이 다시 인간으로 살게 된다면 배관공으로 살겠다하였습니다.
이탈리아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말했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라고는 그 의지 밖에 없기에 그 의지를 늘 벼리며 살고 있습니다.
닭 벼슬에 지나지 않을 권좌의 자리와 죽으며 단 한 푼도 무덤 안에 담고 가지 못할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존경받기 어렵습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었거나 스스로 크게 양심에 위배된 삶을 사신 분들은 우리의 통치자로 나서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의 분단도, 4.3의 발발도, 강정해군기지의 문제도 단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도자의 양심을 판 통치에 있었습니다.
내년에 제주도민들이 선출하는 도지사는 강정의 아픔을 잘 떠안을 수 있는 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누구이며, 또한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이 아픈 현실을 끊을 수 있을지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 강국 대한민국!
과연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하고 있습니까?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합니까?
왜 똑 같은 고통을 반복해야만 합니까?
평화를 갈망한다며 왜 평화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에겐 위대한 평화의 지도자가 단 한분 나오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에겐 그런 지도자를 태양삼아 갈 수 있는 길들이 열리지 않는 겁니까?
민중의 뼈아픈 고통을 덜어줄 위대한 지도자, 평화의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진심으로 염원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공부합시다. 또한 행동합시다.
잊지 맙시다. 우리아이들이 조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역사의식을 꼭 붙들고 삽시다.
올해 제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맡은 저는 제주 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범도민 대책위원회와 함께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아줌마로서, 정성으로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의 딸로서 최선을 다해 여러분과 함께 끝까지 행동하겠습니다.
두려운 것은 오직 양심을 속일 때입니다.
그 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벼리는 의지가 약해지는 그 순간입니다.
깨어 있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2013년 3월 2일
- 제 16차 국민행동 강정집중의 날 발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