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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부모님 세대의 음악문화 ━ 50~60 대(代)가 즐긴 대중음악 ━
대담(對談) : 박 노 들 부녀(父女)
딸의 질문 1 : 아빠. 저의 인터뷰(interview)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저한테 아빠 세대가 즐기신 대중음악에 대해 원론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면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셨으면 해요. 아빠는 다른 어른들보다 우리 나라 대중’음악계(大衆音樂界)의 ‘뒷이야기’ 즉(卽)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 를 많이 아시는 편이니까, 그에 대해서도 약간씩 언급해 주시면 더욱 좋고요.^^* 자, 그러면 우선 첫 번째 질문 사항을 말씀드리겠어요. 에헴! (웃음). 예전에 아빠는 음악을 주로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고 대체로 어디서 들으셨나요?
아버지 답변 : 음, 좋은 질문이야. 우리들 어린 시절엔 유성기[留聲機 : 축음기(蓄音機)],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야외 전축(野外電蓄)과 라디오(radio) 프로그램[예(例) :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1970년대의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흑백 TV의 쇼(show) 프로그램[예(例) : TBC-TV의 ‘쇼쇼쇼’] 등(等)을 통해 새로운 음악들을 접목(接木)하곤 했단다.
딸의 질문 2 : 아빠의 유소년 시절(幼少年時節)이나 대학생 시절, 그때 유행했던 대중음악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유행에 관해 당시의 사회문화적 시선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셔요. 예를 들어 당시 체제(體制)나 사회(社會)가 대중음악에 어떤 제약(制約)을 가(加)했거나 새로운 음악에 대해 신기해하거나, 그리고 그 음악이 나타나게 된 배경은 어떠했는지를 말씀해 주세요.
아버지 답변 : 1940년대 후반기에 태어난 우리 세대(世代)의 유소년 시절은 1950년대였는데, 그 때엔 6.25사변이나 전쟁과 관련한 노래들이 많이 유행했었지. ‘전우의 시체를 넘어서(전우야 잘 자거라)’와 같은 군가(軍歌)라든지, 전쟁에 나가는 젊은이의 고뇌를 담은 출정가(出征歌) 같은 구전가요(口傳歌謠)를 많이 불렀어. 어디 ‘6.25 출정가(出征歌)’ 한 번 들려줄까?
6.25 출정가(出征歌) ━ 아버지, 어머니 ━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까마귀 우는 골에 저는 갑니다. 38선을 돌파하고 태극기를 날리며 죽어서 백골(白骨)이나 돌아오리다.
1940년대 후반기에 태어나 6.25사변을 거쳐 휴전이 성립할 때 유년기를 보낸 우리 세대는 제대로 된 ‘동요(童謠)’를 배우지도 못한 채 군가(軍歌)나 6.25와 관련한 노래 아니면 전후(戰後)의 퇴폐적인 내용을 담은 구전가요(口傳歌謠) ‘세태가(世態歌)’를 배우면서 자라난, ‘동요’를 잃어버린 슬픈 세대(世代)였단다.
6.25 전후(戰後) 세태가(世態歌)
신작로(新作路) 복판에는 다꾸시가 놀구요, 다꾸시 안에서는 운전수가 노누나.
운전수 무릎에선 양갈보가 놀구요, 양갈보 손목에선 금시계(金時計)가 노누나.
나냐 너녀 두리둥실 놀구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어떠냐? 너의 귀엔 이 노래가 ‘아프레게르[Apres-guerre : 전후파(戰後派)]’의 전형적 성격을 지닌 노래[속요(俗謠)]로 들리지 않느냐?……
대중가요, 즉 유행가(流行歌)로는 현인(玄仁) 선생의 ‘굳세어라, 금순아’나 이해연(李海燕) 여사의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 남인수(南仁樹) 선생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국민학교(國民學校) 학생들까지 모두 따라 불렀지. 휴전(休戰) 이후로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명국환(明國煥) 씨의 ‘방랑시인 김삿갓’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전쟁 당시 폭격으로 내가 입학한 국민학교가 통째로 날아가 버려 천막(天幕) 안에서 공부하며, 어린 나는 그 노래를 뜻도 잘 모른 채 불렀어. 1956년엔 제1야당 민주당(民主黨) 대통령 후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이 선거 유세(選擧遊說) 여행 중 갑자기 호남선 열차 안에서 돌아가셨는데, 곧바로 우리 국민들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노랫말과 손인호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의 노랫말을 패러디(parody)하여 추모가(追慕歌)로 불렀단다.
“세상이 싫던가요? 장면(張勉) 박사 버리고 …(중략)… 심장마비 원수로다, 떠나가는 신익희!……”
1950년대 말에는 박재홍(朴載弘)이란 가수가 부른 ‘유정천리(有情千里)’가 유행했는데, 이 노래 역시 1960년 2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미국 ‘월터리드(Walter Reed) 육군 병원’에서 위암(胃癌)으로 급서(急逝)하자, 누군가가 그 노랫말을 패러디(parody)하여 ‘유석(維石) 추모가(追慕歌)’로 온 국민을 울렸어. 아마 세계 역사상 연거푸 두 차례에 걸쳐 대중가요 노랫말을 패러디한 야당(野黨) 정치인 추모가(追慕歌)가 구전(口傳)으로 유행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었을 거야. 대중가요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는 사례(事例)였지. 고인(故人)을 추모하는 노래를 조가(弔歌) 내지 만가(輓歌) 또는 비가(悲歌)라고 하는데, 이를 서양에서는 엘레지(elegie)라고 하지. 오늘 날 슬픈 노래를 통틀어 엘레지(elegie), 즉 비가(悲歌)라고들 하지만, 원래 ‘엘레지(elegie)’란 말은 그 어원(語源)을 따져 올라가면 ‘죽은 이를 추모하는 노래’, 즉 조가(弔歌) 내지 만가(輓歌)를 지칭(指稱)하는 낱말이었어. 조가(弔歌) 내지 만가(輓歌)의 원형(原形)은 지금도 시골에서 장례식을 치를 때 종종 볼 수 있단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 때 그 동네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상두꾼들이 상여(喪輿)를 메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때 목청이 크고 좋은 선소리꾼이 상여 앞에서 요령(搖鈴)을 짤랑짤랑 흔들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오나!……”라고 메김소리를 메기었고, 상두꾼들은 “어허 어허 어루화!”라는 후렴(後斂) 소리로 수작(酬酌)을 하며 상여를 둘러멘 채 장지(葬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지. 상여가 마을의 중심지를 지나갈 때 동네 사람들은 고인(故人)을 추모하며 합창(合唱)하는 구슬픈 ‘상여 소리’를 듣고 눈물들을 흘려 댔어. 바로 그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구슬픈 ‘상여 소리’를 만가(輓歌)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상여 소리, 상엿소리, 상여가, 상여메김소리, 요령잡이소리, 행상(行喪)소리, 향도가(香徒歌), 해로가(薤露歌)’라고도 일컬었지. 아무튼 죽은 이를 추모하는 소박한 표현의 만가(輓歌)는 차츰차픔 그 표현이나 형식이 다듬어져서 나중엔 훌륭한 시가문학(詩歌文學)으로까지 발전했단다. 우리 나라 국문학사상(國文學史上) 가장 오래된 고전시가(古典詩歌) 작품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나 신라 향가(新羅鄕歌)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제망매가(祭亡妹歌)’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事例)야.
자, 내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빠졌는데 그 정도로 해 두고, 여기서 참고(參考)로 ‘유정천리’를 패러디(parody)한 ‘유석(維石) 추모가(追慕歌)’의 가사(歌詞), 즉 ‘유정천리’의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가사를 너한테 소개해 보겠다. 하도 세월이 많이 흘러가, 노래말의 정확성(正確性)을 100% 자신할 수는 없다만, 대충 이렇단다.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추모가(追慕歌)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海公先生) 뒤를 따라 장면 박사(張勉博士) 홀로 두고 조박사(趙博士)도 떠나갔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當選)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自由黨)에 꽃이 피고 민주당(民主黨)에 비가 오네.
세상(世上)을 원망하랴, 자유당(自由黨)을 원망(怨望)하랴. 춘삼월(春三月) 십오일(十五日) 조기 선거(早期選擧) 웬말이냐. 천리 만리(千里萬里) 타국(他國) 땅에 박사(博士) 죽음 웬말이냐. 눈물 어린 신문(新聞) 들고 백성(百姓)들이 울고 섰네.”
3.15 부정선거가 1960년에 일어났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候補) 조병옥 박사의 갑작스러운 별세(別世)로 인해 자유당(自由黨) 후보였던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대통령 당선은 확정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여당(與黨)이었던 자유당은 부통령(副統領) 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려고 과욕을 부린 나머지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결국 그로 인해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거지.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는 196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군가(軍歌)나 구전가요(口傳歌謠)에서 벗어나 방과후(放課後) 시간에 대중가요를 즐겼단다.
뭐니뭐니해도 당시의 대중가요는 트로트(trot)가 주류(主流)였는데, ‘신사동 그 사람’이나’ ‘어머나, 어머나’와 같은 요즘의 경쾌하고 빠른 트로트와는 달리 일제(日帝) 36년의 영향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느리고 비탄조(悲嘆調)의 트로트가 태반(太半)이었어. 1928년에 왕평(王平) 씨가 지은 노래말에 전수린(全壽麟) 씨가 작곡하고 이애리수(李愛利秀) 여사가 노래한 ‘황성 옛터’나’, 1935년에 김용호(金用浩) 씨가 지은 노래말에 이시우(李時雨) 씨가 작곡을 하고 김정구(金貞九) 선생이 취입(吹入)해 부른 ‘눈물 젖은 두만강’과 같이 왜정시대(倭政時代)에 나온 애수(哀愁) 어린 노래들이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까지도 여전히 널리 유행하였지. 1960년대 당시까지만 해도 기성세대(旣成世代)는 왜정치하에서 태어났거나 일본어(日本語)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거기에다 광복 이후에도 6.25나 4.19, 그리고 5.16의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너무 참담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에, 자연스럽게 청승맞고 애수 어린 트로트가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하지만 1945~1949년의 조국(祖國) 해방 공간(解放空間)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일본식 교육을 받은 선배 세대와 달리 초중고등학교 정규 과정 전부를 한글로 배우며 6.25 이후 이 땅에 주둔한 미군(美軍)들을 통해 보아 온 미국 문화를 동경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 세대 중에서 이른바 가방끈이 긴 고학력(高學歷) 세대는 왜색(倭色)이 흘러넘치는 청승맞은 트로트를 싫어하고 팝송을 더 좋아했었단다. 우리 말 가사(歌詞)로 이루어진 대중가요에 있어서도 백년설(白年雪), 이난영(李蘭影), 김정구(金貞九), 현인(玄仁), 고운봉(高雲峰), 남인수(南仁樹), 황금심(黃琴心), 송민도(宋旻道), 박재홍(朴載弘), 백설희(白雪姬), 명국환(明國煥) 제씨(諸氏)의 노래와 달리 ‘주한(駐韓) 미 8군(美八軍) 쇼(show)’ 무대를 통해 연예계(演藝界)에 데뷔(debut)한 가수들의 노래에 더 열광했었지. 이른바 ‘미8군(美八軍) 쇼(show)’ 무대 출신 가수들 가운데 서울대 법학과 출신 최희준[崔喜準 : ‘하숙생’으로 유명한 가수], 서울대 문리대 출신의 유주용[劉冑鏞 : 히트송(hit song)으로 ‘함께 가실까요’와 ‘부모’가 있고, 주(主)로 ‘라노비아(La Novia)’ ‘키쓰 미 퀵(Kiss me Quick )’ 등 번안가요(飜案歌謠)를 많이 불렀던 가수. 한국인 부친과 독일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키쓰 도둑’이란 노래를 부른 여자 가수 ‘모니카 유(劉)’의 친동생이자, 인기 가수 ‘윤복희’ 씨의 첫남편], 경기고(京畿高) 출신의 위키 리[Wicky 李 / 본명 이한필(李漢弼) : ‘종이배’와 ‘눈물을 감추고’라는 노래로 유명해졌으며, ‘송해(宋海)’ 씨보다 먼저 KBS 전국 노래 자랑 MC를 맡았던 가수], 박형준[朴炯俊 : ‘첫사랑 언덕’을 불렀으며, 노래를 아주 쉽고 편안하게 부른 가수] 등(等) ‘포 클로버스(four clovers)’ 동아리 가수들의 탈(脫) 트로트 노래는 1960년대 전반기와 중반기에 학생들에게 최고 인기(人氣)였어. 이 밖에도 8군 쇼(show) 출신 가수들 중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1960년대 가수들은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의 한명숙(韓明淑), ‘밤안개’ ‘떠날 때는 말없이’의 현미(玄美), ‘파드레(Padre)’의 패티김(pattikim), ‘키다리 미스터김’의 이금희(李錦姬) 등이 있었단다. 나는 이들 모두를 좋아했지만 특히 1962년경 ‘에드 훠(Edd 4)’ 악단(樂團)을 조직해 ‘빗속의 여인’을 발표(1964년 첫 앨범으로 발표)한 ‘작은 거인(巨人) 신중현(申重鉉)’에 열광했었다. 느리고 비탄적(悲嘆的)인 트로트(trot)가 싫어 뜻도 모르는 팝송(popular song)을 엉터리 발음으로 흥얼거리던 우리 세대는 당시로서는 기존 대중가요 문법을 파괴한 서구적 취향의 ‘빗속의 여인’을 부르며 ‘노란 레인코트(raincoat)’의 여인을 상상하고 열광했지. 몇 해 후 신성일(申星一)과 문희(文姬)가 주연한 ‘초우(草雨)’라는 영화가 정진우(鄭鎭宇) 감독에 의해 제작되어 상영되었는데 ━ 당시 정진우 감독이 이른바 영상영화(映像映畵)라고 자부(自負)를 한 ━ 그 영화의 주인공 문희가 입고 나온 레인코트가 신중현 노래와 맞아떨어져 화제(話題)가 되기도 했단다. 오늘날의 다양한 각종 전파매체(電波媒體)에 비해 빈약하기 그지없던 당시에 서구(西歐) 대중음악 스타일(style)의 새로운 음악에 굶주렸던 학생들이나 대중음악 팬(fan)들에게 신중현의 음악은 너무도 신선하고 충격적인 교사(敎師), 대중음악 선생님이셨지. 우리는 그를 통해 소울(soul) 음악이나 사이키델릭 사운드(psychedelic soud)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어. 그가 만든 소울 리듬(soul rhythm)을 통해 ‘펄 시스터즈(pearl sisters)’를, 그리고 이어서 소개한 사이키델릭(psychedelic) 음악을 통해 ‘김추자(金秋子)’라는 걸출(傑出)한 스타(star)를 만날 수 있었어. 사이키델릭 가요(歌謠)이기도 했던 ‘늦기 전에’라는 노래는 김추자가 일종의 국악(國樂) 창법(唱法)을 접목시켜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인데, 이 노래로 그녀는 일약(一躍) 대단한 신인 가수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단다. 이후(以後) 신중현은 그룹사운드(group sound) ‘신중현과 엽전(葉錢)들’을 결성해, ‘각설이패’ 분장(扮裝)을 한 채 무대(舞臺)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고, 전통적인 국악(國樂) 구전가요(口傳歌謠) 창법으로 자작곡(自作曲) ‘미인(美人)’을 히트(hit)시켰는데, 요즘 시쳇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이른바 ‘대박’을 친 셈이지. 당시(當時) 그의 대중음악(大衆音樂)에 대한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試圖)와 도전(挑戰)은 90년대의 ‘서태지 음악’의 실험정신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대중(大衆)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줌과 동시에 동경(憧憬)과 공감(共感)과 존경(尊敬)을 한 몸에 받기에 이르렀단다. 훗날 그의 고백(告白)에 의해 밝혀졌지만, ‘제3공화국’, 아니 ‘유신 정권(維新政權)’ 때 집권 세력이 요구하는 음악 작곡을 거부한 것을 계기로 권력층의 미움을 받아 대마초(大麻草) 사건을 빙자해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했던 신중현의 음악은 문자(文字) 그대로 고초(苦楚)의 연속(連續)이었어. 그렇지만 ‘고진감래(苦盡甘來)’란 말도 있듯이 민주화(民主化) 이후(以後)에 결국 신중현의 음악은 우리 나라 대중가요사(大衆歌謠史)에 우뚝 솟은 거봉(巨峰)으로 평가를 받게 되었지. 한때 너무 큰 시련을 겪어 좌절도 있었지만, 신중현이란 아티스트(artist)가 그 동안 이루어낸 음악적 업적들은 오늘날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그를 ‘록(rock)의 대부(代父)’로 추앙을 하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두루 인정(認定)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기존(旣存)의 것을 깨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록(rock) 음악의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신중현이란 명인(名人)에 의해 이미 대중에게 친숙한 농악(農樂)과 창(唱)을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녹여 부어 전세계(全世界)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한국적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을 새로 이루어냈으니, 이 얼마나 장한 일이냐?……
딸의 질문 3 : 당시 대학가요제(大學歌謠祭)의 열풍(熱風)은 어떠했어요? 아버지 답변 : 내가 대학을 다니던 60년대 후반기에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대학가요제는 없었지만, 대학별로 유명한 캄보(combo) 밴드(band)가 3~8명 내외로 조직되어 있어 자기 대학의 축제나 행사에 출연하여 스타가 되었고[예(例) : 한국항공대학의 ‘활주로(run-way)’, 건국대학교의 ‘oxen’], 다른 대학 축제나 행사에 초청받아 공연을 하기도 했단다. 1970년대 중반에 MBC-TV에서 대학가요제를 주최했지만 그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이후(以後)의 일이지.
딸의 질문 4 : 공연장 같은 데에 가 보신 적이 있다면, 에피소드(episode)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예를 들자면 ‘시민회관(市民會館)’이나 당시 유명했던 ‘음악 감상실’도 괜찮아요.
아버지 답변 : 대표적인 공연장은 ‘서울 시민회관(市民會館)’이었지. 오늘 날의 세종문화회관(世宗文化會館)은 예전의 ‘서울 시민회관’이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은 건물이란다. 불에 타기 전의 예전 시민회관은 각종 공연과 영화를 상영하여 청소년들과 대학생들이 애용하였어. 1969년 추석을 전후하여 시민회관에서 ‘추석맞이 가을 대공연’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공연을 했는데, 나는 그 날 시민회관 공연무대에 첫 선을 보인 김추자(金秋子)를 보았단다. 하하하. 나로서는 역사적 관람(觀覽)이었던 셈이야.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어 말총머리처럼 늘어뜨린 채 마치 처녀(處女) 뱃사공이 노를 젓는 제스처(gesture)로 신중현 씨가 작곡한 신곡(新曲) ‘늦기 전에’를 열창(熱唱)했는데, 비슷한 가사(歌詞)가 반복이 되고 비슷한 멜로디(melody)가 연이어 이어지며 기름지고 허스키(husky)한 음성에 서구적 창법과 국악 창법이 녹아든 기교로 노래를 부르는 김추자의 열창을 직접 내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그 날, 나는 그녀한테 ‘뿅’하고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그날부터 나는 요즘 흔히 사용하는 말로 그녀의 ‘광~팬(狂fan)’이 되고 말았어.
1970년 5월, 미국 라스베가스(Las Vegas)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던 ‘김 시스터즈(Kim sisters)’의 첫 귀국공연 쇼가 있었는데, 나는 그 역사적 공연을 시민회관에서 보게 되었단다. 김시스터즈는 바로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李蘭影) 여사의 딸들이자 작곡가 김해송(金海松)의 딸들이었는데, 온갖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인상적이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가수들은 이금희(李錦姬) 씨 등 한두 명을 빼고는 막대기처럼 한 자리에 꼿꼿이 서서 노래만 불렀는데, 환상적인 춤을 곁들인 김시스터즈의 공연에 관중은 비싼 입장료를 지불한 것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열광했었어. 당시 김시스터즈 공연의 사회(司會)는 서울대학교 음대를 중퇴한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comedian) 후라이보이(Fly boy) 곽규석(郭圭錫) 씨였단다. 지금은 작고(作故)한 고(故) 곽규석 씨는 훗날 제5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자 방송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가서 목사(牧師)가 되었다고 하더라. 어쨌거나 나는 그날 공연한 김시스터즈의 레파토리(repertory) 중에서 ‘챠리 브라운(Charlie Brown)’과 ‘김치 깍두기’를 아주 재미있고 인상 깊게 들었어.
나는 김시스터즈 공연 말고도 시민회관 공연은 제법 여러 차례 구경했었다. 엘레지(elegie)의 여왕 이미자(李美子) 씨의 ‘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recital)’도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는데, ‘리사이틀’이란 말은 재일교포 음악가 출신인 길옥윤(吉屋潤) 씨가 귀국해 패티김과 결혼한 후 공연을 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로서 오늘 날은 가수들이 ‘콘서트(concert)’란 말을 선호하는 바람에 거의 사라진 단어란다. 그건 그렇고, 이 ‘이미자(李美子) 1000곡 돌파 기념 리사이틀(recital)’에서 나는 찬조 출연한 신인 가수 ‘투 에이스(two ace)’의 멤버들의 노래 ‘비둘기 집’을 라이브(live)로 처음 들었어. 그뿐만 아니라 그 날 시민회관 화장실에서 앳된 얼굴의 ‘투 에이스(two ace)’들을 직접 마주치기도 했고, 그들과 함께 소변(小便)도 보았지. 하하하.^^* ‘비둘기 집’은 조선 황실(朝鮮皇室)의 후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 1877~1955) 전하(殿下)’의 아들인 이석(李錫) 씨가 불렀던 노래인데, ‘투 에이스(two ace)’도 이 노래를 불렀단다. 그들은 나중에 예명(藝名)을 ‘금(金)과 은(銀)’으로 바꾸었고, 멤버(member)도 중간에 바뀌었는데, 계속 ‘금과 은’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바로 나중에 탤런트(talent) 김자옥(金慈玉) 여사의 남편이 된 오승근(吳承根) 씨다. ‘금과 은(two ace)’은 리메이크 곡(remake曲)인 ‘처녀 뱃사공’을 불렀던 것으로도 유명하지. 가수 윤항기(尹恒起) 씨와 윤복희(尹福姬) 씨 남매의 부친이기도 한 윤부길(尹富吉) 선생이 노래말을 짓고, 한복남(韓福男) 선생이 곡(曲)을 붙인 이 ‘처녀 뱃사공’을 오늘날 대중들은 모두 ‘금과 은’이 편곡(編曲)한 창법(唱法)으로 부르고 있는데, ‘황정자(黃貞子)’ 씨가 처음으로 부른 오리지널 곡(original曲) 창법은 대부분 잘 모르더라!……
‘음악 감상실’로는 당시에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에 있던 클래식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Renaissance)’나 무교동(武橋洞) 스타다스트 호텔(Star-dust hotel) 안에 있던 대중음악 감상실 ‘세시봉(C'est si bon)’ 등이 유명해서 나도 몇 차례 가본 적이 있었는데, 가난한 대학생들은 자주 갈 수 없었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음악 광팬(狂fan)’을 제외하고는 일정 수입이 있는 사회인이 아닌 한(限) 음악 감상실에 일 년에 한두 번이나 갔을까?……
딸의 질문 5 : 아빠는 평소에 트로트(trot)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고, 좋아하시는 트로트 가수는 주로 어떤 분들이셨는지 말씀해 주셔요. 이를테면 배호(裵湖), 이미자(李美子) 씨 같은 분들 말예요.^^*
아버지 답변 :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예전의 트로트(Trot)는 너무 비탄적(悲嘆的)이고 느린데다가, 일본의 엔카(演歌) 들과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왜색(倭色)이 짙어,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트로트의 단조(短調) 5음계(五音階)는 비록 일본의 장-단조(長短調) 7음계(七音階)의 수용과정에서 얻어진 음계(音階)지만 지금은 많이 한국화(韓國化)되었다고들 하는데, 아직도 일본(日本) TV에 나오는 가요 프로그램의 노래와 너무 비슷한 것이 많아, 짜증스럽고 싫었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트로트는 우리나라 것이 아닌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 나라 방송(放送)이나 대중음악계에서 트로트를 가리켜 모두들 서슴지 않고 ‘전통 가요(傳統歌謠)’라고 부르는 데 대해, 나는 상당한 스트레스(stress)를 받고 있단다.
우리나라의 본래 ‘전통가요’는 트로트가 아니라, 민요나 창(唱), 시조(時調), 판소리 등이 아닐까?…… 지금도 대중목욕탕 욕조(浴槽) 안에서 노인들이 시조를 구성지게 부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시조창(時調唱)이야말로 우리 나라 전통가요 중에 고려(高麗) 중엽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가장 생명이 긴 전통가요 장르(genre)가 아닌가 생각해!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하면 제3국인(第三國人)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온통 화끈거린단다. 트로트는 문자 그대로 트로트지 우리 나라의 전통가요는 절대 아니야!
딸의 질문 6 : 작곡가 김민기(金敏基) 씨나 한대수(韓大洙) 씨를 비롯해 ‘트윈 폴리오(Twin Folio)’ 출신 가수 송창식(宋昌植)-윤형주(尹亨柱) 씨 등이 주도(主導)했던 통기타(筒guitar) 음악에 대해서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 답변 : 트로트에 식상(食傷)해하고 반발하여 팝송과 신중현의 음악에 기울었던 우리 세대는 기성세대나 기존의 것에 저항하는 면이 워낙 강해서 김민기의 ‘아침 이슬’이나 한대수의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 한국 포크송(folk song)의 시대를 연 통기타 음악의 첫 애호가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 최인호(崔仁浩) 씨는 젊은 시절 우리 세대[1940년대 후반기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태어났던 사람들이 70년대 젊은이들]의 특징을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筒guitar)’로 요약해 이른바 ‘청년문화(靑年文化)’의 정의(定義)를 내리기도 하였으니까, 우리 세대가 얼마나 통기타음악을 사랑했는지 너희들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통기타음악의 맏형으로는 유명한 ‘하얀 손수건’을 부른 ‘트윈 폴리오(Twin Folio)’ 출신 듀엣(duet) 윤형주와 송창식을 빼놓을 수 없을 거야. 그들은 주옥같이 고운 시적(詩的) 노랫말과 서정적인 곡(曲)으로 대표되는 포크송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어 한국 포크음악, 아니 통기타음악의 전성기를 연 사람들이란다. 그들과 더불어 김세환(金世煥), 이장희(李章熙) 등을 더 언급 할 수 있겠지.
딸의 질문 7 : 이른바 ‘신중현 사단(申重鉉師團 :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들의 음악에 사이키델릭(Psychedelic)한 특성들이 잘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버지 답변 : 흔히들 조금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약(藥)이든 술이든 뭔가에 취해서 몽롱한 상황, 그런 사람 그림 모양을 두고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란 표현을 쓰지. 어질어질한 상태나 제 정신이 아닌 환각의 느낌, 좀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뿅 간’ ‘뿅 가게 하는’ 느낌을 두고 ‘사이키델릭하다’고들 표현하지. 사이키델릭은 약물(藥物) 즉 마약(痲藥)과 관련이 있단다. 이 말이 등장한 1960년대 중반부터 ‘사이키델릭 사운드(Psychedelic sound)’라는 용어(用語)는 ‘의식을 확대시키는 마약에 의한 음악’에 국한(局限)해서 사용되었거든!…… 점잖은 성인음악(成人音樂)에선 어림도 없고, 반항(反抗)이 체질인 젊은이들의 음악, 말하자면 ‘록(rock)’에서나 가능한 음악이었지. 그래서 사이키델릭 록(psychedelic rock)이란 말도 생긴 거란다.
신중현은 사이키델릭이란 말을 미8군 방송에 출연했을 때 처음 들었대. 당시 AFKN 방송에서 구사한 사이키델릭 기법의 독특했던 촬영이나 화면처리에 매료돼 빠져들어, 때마침 그를 찾아온 미국 히피(hippie)들과 어울리며 마약과 사이키델릭에 심취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펄시스터즈(Pearl Sisters)’의 노래는 흑인(黑人) 소울 리듬(soul rhythm) 위주였고, 사이키델릭이 잘 들어간 노래는 이정화와 김추자, 그리고 김정미(金廷美)의 노래였지.
이정화 양(孃)의 데뷔 앨범(debut album)이자 신중현과 그의 친구들이 결성한 ‘덩키스(Donkies)’의 공식 데뷔(debut) 음반(音盤)에는 ‘싫어, 봄비, 꽃잎, 먼길, 내일, 마음’ 등 6곡이 수록되었는데 특징은 모두 두 글자의 노래 제목으로 구성된 것이 이채(異彩)로웠어. 그중 ‘봄비, 꽃잎’ 은 70년대 최고의 다이내믹 보컬(dynamic vocal)로 명성이 드높은 박인수(朴仁樹)와 김추자의 노래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오리지널(original) 가수는 ‘덩키스’의 보컬(vocal) 이정화였어. 무려 15분 53초의 ‘저주받은(?)’ 롱버전곡(long version曲) ‘마음’이 2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이 음반은 비상업적이고 실험적 음악성으로 무장 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이정화의 가수생명은 별반 길지 못했단다.
우리 고향 강원도 춘천여고(春川女高) 출신인 김추자(金秋子)의 기름지고 허스키한 음성에다가 서구적 창법과 국악 창법이 녹아든 사이키델릭 기교는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등에서 만개(滿開)한 꽃처럼 활짝 피어났지.
김정미(金廷美)의 사이키델릭한 노래 ‘간다고 하지 마오’는 그 독특한 반복적 점층적 창법으로 유명했는데, 그 독특함이 오히려 창법 저속으로 비쳐서 유감스럽게도 1973년 당국에 의해 금지곡이 되고 말았어. 어쨌거나 그녀는 ‘제2의 김추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다이내믹(dynamic)하게 노래한 최고의 사이키델릭 가수였지. 그뿐만 아니라 김정미는 이색적 ‘록 스타일(rock style)’ 노래들도 아주 잘 소화해냈어. 지금도 치마처럼 넓은 판탈롱(pantalon) 바지를 차려입은 ━ 늘씬하면서도 선(線)이 굵은 ━ 눈이 큰 미녀 가수 김정미가 날렵하게 춤을 추며 ‘간다고 하지 마오’를 공개방송 무대에서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단다.^^*
그러고 보니 신중현이 발굴한 가수들은 가창력도 뛰어났지만, 펄시스터즈, 김추자, 김정미 등이 모두 오디오(audio) 형(型)에 비디오(video) 형(型)을 겸비(兼備)한 미녀 가수들이었다고 회상되는구나. 새삼 신중현이 옛 중국의 명마(名馬) 감별사(鑑別師) 백락(伯樂)의 형안(炯眼)을 갖춘 실로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딸의 질문 8 : 요즘 우리 나라 대중음악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빠가 소싯적에 즐기셨던 대중음악문화와 비교해서 말예요.^^*
아버지 답변 : 내가 청춘을 구가(謳歌)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중음악이 트로트[이미자(李美子), 최숙자(崔淑子) 노래]와 팝송 및 재즈(jazz)[팝송과 재즈는 당시 ‘임국희-최동욱--피세영-이종환’ 등이 라디오(radio)에서 디스크 자키(disk jockey)를 맡아 진행한 음악 프로그램들과 ‘미8군(美八軍) 쇼(show)’ 출신 가수들의 번역곡(飜譯曲), 기타 해적판(海賊版) 음반(音盤) 등을 통해 널리 유행], 라틴 뮤직[Latin Music :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탱고(tango), 보사노바(Bossa nova), 차차차(cha-cha-cha), 삼바(samba), 맘보(mambo) 등이 주류(主流)인 음악], 포크송(folk song), 샹송[chanson : 최양숙(崔良淑)의 ‘황혼의 엘레지’ 등], 칸초네[canzone : 이태리(伊太利) 노래 ‘라노비아(La Novia), 논호레타(Non Ho L'eta)’ 등의 번안가요(飜案歌謠)], 요들송[yodel song : 1970∼80년대를 풍미한 ‘김홍철과 친구들’의 알프스풍(Alps風) 노래 ‘아름다운 베르네(Bern) 산골’과 ‘아름다운 스위스(Swiss) 아가씨’ 등], 민요조(民謠調) 대중가요[김용만, 김세레나데, 송춘희(宋椿嬉) 노래] 등등(等等) 무척 다양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10대(十代) 위주의 댄스 뮤직(dance music)이 판을 치는 등 너무 획일화(劃一化)되어 가는 것 같구나. 요즘 TV 프로그램(program)에는 어른들을 위한 프로(pro)가 거의 없더라. 밤늦게 하는 ‘가요무대(歌謠舞臺)’ 등 한두 개 프로그램 정도를 빼놓고는 말이야!…… 물론 세계적 가수 ‘보아(Boa)’나 ‘비[Rain : 정지훈(鄭智薰)]’ 등이 배출될 만큼 이른바 한류현상(韓流現象)도 있긴 하지만, ‘신화(神話 : Shinhwa), 동방신기(東方神起), 슈퍼주니어(Super Junior)’ 그 외에는 우리 나라에서 인기 가수들의 생명이 1~2년도 못 갈 만큼 너무 짧은데, 그 이유(理由)인즉슨 사랑받는 대중음악 장르(genre)의 단순화 내지 획일화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대중음악 장르가 공존(共存)하고 병행(竝行) 발전(發展)해 나가야, 미래의 우리 나라 대중음악 내지 대중문화가 더욱 발전하고 보다 널리 퍼져나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딸의 인사 : 아빠, 잘 알겠어요. 오늘 아빠 덕분에 부모님 세대(世代)의 대중음악에 대한 취향(趣向)은 물론, 우리 나라 대중음악의 역사까지도 개괄적(槪括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저한테는 정말 유익한 시간이 되었던 거 같아요. 저는 우리 아빠가 지금까지 걍(^^*) 얌전한 선비이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아빠도 젊으셨을 때는 굉장히 대중음악을 즐기신 로맨티스트(romantist)이셨나 봐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오늘 아빠의 해박(該博)하신 음악적 소양(素養)에, 저는 새삼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아빠랑 나눈 대화 자체도 저한테는 너무 행복한 일이었고요. 아빠! 사랑해요. 앞으로도 종종 오늘과 같이 즐겁고 유익한 부녀간(父女間)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2007 년 5 월 29 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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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저의 둘째 딸내미가 서울의 모(某) 대학교 3학년에 재학중(在學中)이던 2007년 여름에 '교양 과목(敎養科目)' 과제물을 작성하기 위해 저와 나눈 부녀지간(父女之間)의 대화(對話)를 그대로 녹취(錄取)한 원고 전문(原稿全文)입니다. 모처럼 만에 부녀지간에 음악(音樂)을 주제(主題)로 진지하게 오순도순 대화를 나눈 것도 값진 일인데다가, 대화 내용 전부를 녹음해서 A4 용지(用紙)에 속기록 형식으로 ‘대화록(對話錄)’을 정리해 놓고 보니, 단순히 학교 숙제 해결을 위한 일회용(一回用) 원고(原稿)로만 써먹고 곧장 사장(死藏)시켜 버리기엔 어쩐지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어 여태껏 고이 보관해 두었습니다.^^*
노들님 덕분에 해방부터 70년대까지 대중음악의 많은 비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이가 들어가며 트로트와 일본 엔카를 좋아합니다.
비탄조의 음색과 가사라고는 하지만, 다양한 노랫말이 조금은 퇴페적이면서도 이국을 떠도는 바람돌이의
심정을 많이 위로를 해 줍니다.
중남미의 경쾌하며 빠른 음악도 좋아합니다.
애절한 연가는 한 편의 시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지요....
제가 별로 중요한 일도 없으면서 공연히 바빠서, 정진욱님의 댓글을 뒤늦게 읽고 이제사 답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다 보면 온갖 신산(辛酸)을 다 맛보게 되기에, 아무래도 삶의 애환(哀歡)이 그 어떤 음악 장르(genre)보다도 더 잘 배어 있는 트로트(trot)에 더 큰 공감을 느끼게 마련이지요. 젊은 시절에 팝송과 포크송에 심취했었던 저 역시 요즘엔 트로트 음악에 자주 빠져들곤 한답니다. 우리 대한민국 땅엔 분명코 춘삼월이 찾아오긴 했습니다만, 뒤숭숭한 국내 정세와 더불어 아직껏 날씨가 심술을 부려 우리들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야말로 트로트 음악을 경음악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주 제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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