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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21 종전(終戦)
전쟁이 수렁 상태가 되면서 시멘트 생산 사정도 매우 답답해졌다. 생산 자재도 철강도 물론 시멘트 판매조차 할당매표제가 되어 공업조합의 일은 왠지 모르게 관료색이 짙어졌다. 이 무렵에는 시멘트에 관해 일본 내지와의 교류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싫든 좋든 모두 스스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오노다사에서도 금융에 대해서는 전부 일본 본사의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조선은행이나 식산은행에서 조달하는 일이 많아졌다. 쇼와 20년(1945년) 봄 무렵이 되자 카리노(狩野) 사장으로부터 오노다 본사에 귀임하라는 말이 나왔다.
나로서는 본사는 제대로 진용이 갖추어져 있고, 돌아가서 꼭 내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조선에서는 매우 바쁘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초가 되자 카리노 사장 자신이 갑자기 조선에 왔다. 목적은 나를 일본의 오노다(小野田)에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반대했다.
"사실 나는 혈압이 매우 높아 오래 자리를 감당할 수 없어서 후임 사장에 대해 모리(毛利) 가문에 상담했더니. 안도(安藤) 이외에는 안 된다고 한다. 만약 안도(安藤)가 싫다고 한다면 사외에서 들어가게 되며 그 후보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안도 군이 돌아오지 않으면 큰일이다" 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의는 아니지만 귀임하겠습니다. 다만 조선의 일은 마무리 중인 것이 있으니 12월까지 기다려 달라" 라는 부탁을 받아 들여주었다. 그런데 8월 15일 종전이 되었다. 나는 그대로 억류되었다가 1947년 7월에 송환된 것이다.
종전은 평양 공장에서 맞이했다. 15일 정오에 평안남도 도청에서 생산공장장 회의가 있어 평양의 회의장에 들어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즉 폐하의 방송 직후였다. 서둘러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거장에 가니 더 이상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조선어로 말하라면서 역무원은 매우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공장에 돌아가니 간부 일동에 조선인 직원도 가세해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룻밤 충분히 생각하자. 여하튼 조선인 직원, 공원의 이익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해 달라" 고 분명히 말해 안도하게 했다. 집에 도착하니 당시 만주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던 부인 다섯 명이 우리 집에 머무는 중이어서 모두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전에 나는 징용학도 숙소에 갔다. 그리고 모두에게 즉각 귀향시겨 주면서, 물론 여비 등은 회사가 지불한다는 뜻을 고했다. 이에 학도들은 지극히 평정한 태도를 취해 주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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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 지금까지 관계가 역전
다음 날인 8월 16일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 우선 조선인 사원의 책임 분담을 결정했다. 그리고 어제 조선인 직원 입회하에 조사해 둔 금고를 열고 학도 귀성 여비를 지불했다. 미리 평양의 조선은행 지점에서 예금을 인출해 두었기 때문에 당분간 지불에 지장이 없었다.
사업 자체의 신정부로의 인도에 대해서는, 일체 상대편의 지시에 맡겨 오노다측으로서는 목록을 만들어 현물과 대조할 뿐이다. 전달 서류 같은 건 전혀 없다. 대략 사유물 이외에는 그대로 국유가 되는 구조이지만, 사유물도 반쯤 수용된 것과 같았다. 사흘 후에는 공장도 휴업했다.
공장에서는 이미 일본인과 조선인의 지위가 역전되었으니, 조선인은 지배자였고 일본인은 하인이었다. 그러나 하인의 수는 지배자의 20분의 1, 일본인에게 부여되는 노동은 당연히 커졌다.
나는 고문(顧問)의 입장이 되어 분석소의 작은 도서실에 작은 책상을 놓고 앉았다. 새 지배자가 사정을 배우러 온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다만 조선인들 간의 역할에 대해서는 당분간 기존의 위치에 따라 정했기 때문에 세력 다툼으로 인한 어수선함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압수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장서(蔵書)는 전부 공장 도서실에 내놓았다. 작은 서적 두 권으로 백인일수 이야기(百人一首物語)와 지나 사십년사(支那四十年史)라는 당시의 전집(*円本)이었다. 이 두 권으로 나의 무료함은 얼마나 위로받았는지 헤아릴 수 없다. 경찰관은 경부보(警部補)가 주재하고 있었는데, 보안서(保安署)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조선인이 서장이 됐다. (*円本-えんぽん: 昭和 초기에 유행한 정가가 한 권에 1엔 균일인 전집. 총서본. 싸구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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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 "북한" 억류 생활
평양에서는 종전인 8월 15일에 일찍이 당시 조선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기독교인 조만식(曺晩植) 씨를 그 거주지 강서(江西)에서 초청하여 그를 수반으로 하여 평안남도 치안유지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후루카와(古川) 지사는 평안 남도의 행정을 이 위원회에 인계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이 위원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로 개칭, 조만식 위원장 이하 32명(반수는 공산당원)이 맡았다. 소련군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온 것은 8월 24일이다. 본대가 평양에 입성 후 27일경까지 조선 북부로 들어온 소비에트 병사는 12만 명이라고 한다.
치스차코프 육군 대장이 전군 사령관으로 평양에 주재했다. 일본인에 관한 포고는 당초 극히 온화한 것이었기 때문에 크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는 헛된 기쁨으로 곧 주요 관리, 군인, 요인은 모두 체포 투옥되었다. 완전히 전광석화의 빠른 작업이었다.
10월 13일 김일성 장군 환영회가 개최되었는데, 물론 일본인은 참가하지 않는다. 1946년 2월이 되자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생겨 김일성 장군이 위원장이 됐고 조만식 씨는 서울로 도망쳤다. 이후 전면적으로 김일성 통치가 시작되었다.
나는 김일성 씨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본 장군은 흰피부의 미청년이었다. 현재 사진에서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평양 공장에서 8월 20일경일까, 징용 학생이 나를 내습하는 낌새가 있으니 빨리 대피하라고 총무과장이 알려왔다.
하지만 도망가더라도 추적당하면 어차피 잡힐 수 있다. 그저 그런 줄 알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곧 몇 명이 찾아왔다.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지키러 왔다. 안심하세요" 라고 학생들은 말한다. 나는 감격해서 이를 받아들였다.
しかし、その後そのような危険なことはなく無事に過ぎたので間もなく引き取ってもらった。そのうも、日本人の旧悪を調べるといって工場の応接間に呼び出される人が多くなった。私もその一人として出頭すると、椅子の上からの尋問がある。
하지만 그 후 그런 위험한 일은 없이 무사히 지나갔기 때문에 곧 되돌아 가도록 했다. 차츰 일본인의 구악을 조사한다고 해서 공장 응접실에 호출되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도 그 중 한 명으로 출두하여 심문을 받았다.
잘게 뻐갠 장작들 위에 앉혀놓고 조사를 받았다. 주택도 일본인은 기존의 사택에서 작고 허름한 오두막으로 옮겨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방은 다다미 세 개와 다다미 네 개 반짜리 방으로 다다미 한 장의 임시 부엌이 딸려 있다. 이에 부부 두 명과 별도로 북쪽에서 도망쳐 온 사원 남녀 각 한 명이 동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여직원이 출산해 점점 더 비좁아졌다. 욕조는 물론 없다. 집 근처에 후쿠나가 군이라는 과장이 있었는데, 목욕통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밖에서 끓인 물로 노천 목욕을 하였는데 매우 고마웠다.
어느 날 별 용건도 없이 보안서로 호출됐다가 하룻밤 유치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미야자키(宮崎) 라는 사원과 둘이서 호출되었을 때의 일이다. 미야자키 군은 첫 경험으로 살해당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경험자인 내가 코를 골며 자는 것을 보고 그는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모든 일에는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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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 식량만은 차별받지 않았다
내 밑에 약 200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그래서 식량을 지급받는 것이 제일 큰 일이었다. 다행히 공장 청소와 허드렛일에 상당한 인원을 배당시켜 주어 식량은 조선인 수준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전쟁 중 공장의 방침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에게 식량과 의복 지급을 구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답례라는 이유로 이 점도 매우 고마웠다.
또 어느 날 평양 교외 사동(寺洞)경찰에 여러 명이 함께 호출되었다. 은닉한 금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건 있을 리가 없다. 우선 체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나도 심한 고문을 당했다. 등이 보라색으로 부어 올라 아내의 말에 의하면 더 이상 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맞으면 신경이 마비되는지 스스로는 그렇게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고문 도중에 이제 비행기식으로 한다고 해서 빙글빙글 휘둘릴 줄 알았더니 죽도(竹刀)같은 대나무를 프로펠러처럼 빨리 움직여 때리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횟수에 비해 타력이 약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원래 숨길 금붙이가 없는 생활이니 금을 뺏길 걱정은 털끝만큼도 없다.
또 그사이 간첩 혐의를 받고 매질을 당하고 유치장에 수감된 적도 있다. 이때는 11월로 밤에는 영하 10도나 되어 추위가 몸에 와 닿았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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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
1945년 말경에는 공장이 있는 승호리(勝湖里)에 소비에트병이 주재하게 되었다. 주임은 중위이고 병사가 둘. 내가 있던 사택이 숙소 겸 사무실이었다. 중위의 이름은 브라힌이라고 하고, 아버지는 모스크리 역장을 맡고 있는 대령, 어머니는 대학교수라고 한다. 스물다섯 살의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청년 장교였다.
어쨌든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조선어와 러시아어의 대조표부터 시작해서 일용어는 말하는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인은 독일어를 다소 이해한다. 둘 다 사용하면 의사의 소통은 할 수 있었다. 내가 베를린 공과대학에 일 년 반 동안 공부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나를 실력 이상으로 평가하고 아껴주었다.
그들에게도 벨린 공과대학은 매우 존경하는 대학이었던 것 같다. 다만 곤란한 것은 이 중위와 일본인 아가씨가 연인 사이가 되어 버려서, 그 여성의 아버지로부터 꼭 중매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따님도 중위도 꼭 부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개의 수고를 맡았다.
두 사람은 매우 사이가 좋은 부부였지만 중위가 귀국할 때 아무래도 동행 불가로 결정되어 비극으로 끝난 것은 유감이다. 이런 일도 있고, 하여 브라힌 중위의 일본인에 대한 태도는 시종 친절했다.
나의 일은 공장 운영의 고문인데 따로 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어 그곳의 선생님도 하게 되었다. 그때의 선생님 경험에서 느낀 것은 자신이 잘 아는 것은 오히려 어렵고, 모르는 학과라도 참고서에 의하면 지극히 쉽게 강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 북부에서는 기차 운행용 석탄은 산출하지 않았다. 기존에는 원료를 만주(현 중국 동북쪽)에서 수입하고 그것으로 연탄을 만들어 기관차를 움직였다. 종전 후 그 연탄이 떨어졌다. 그래서 나에게 정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져 서둘러 연탄 대용을 만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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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 연탄으로 기차를 움직이게 하다
시멘트를 섞어 굳힌 연탄에서는 회분(灰分)이 금방 녹아서 안 된다. 그래서 알루미나 시멘트로 굳히려고 원료를 조사했더니 다행히 진남 포 알루미늄 공장에 알루미나 원료가 이천 톤이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즈이 쇼이치로(水井彰一郎) 선생의 '규산염 공업(珪酸塩工業)'을 참고서로 하여 훌륭한 알루미나 시멘트가 생겼다. 알루미나 시멘트와 무연탄을 섞어 만든 연탄은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이로써 급행열차가 처음으로 움직이면서 일본인 기술자 일동은 대단한 감사를 받게 된 것이다.
1947년 봄, 오노다의 구마노(熊野季寿) 씨로부터 엽서가 와서 1946년 11월에 나의 아버지 히데요시(秀吉)가 서거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슬퍼해도 이국땅에서는 어쩔 수 없다. 조용히 명복을 빌 뿐이지만 이로써 귀국의 마음은 배가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여러 가지 호우(好遇)조건을 내걸며 오래 머물도록 요청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 당시 상공대신에게 귀국 청원서를 냈더니 여러 가지 위류(*慰留:달래어 머물게 함)를 당했지만 결국 허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급행열차 운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우리 귀환자 남녀 합하여 19명, 전부 일등차로 흥남시까지 보내지게 되었다. 흥남항(興南港)에서 노부요마루(信洋丸)를 타게 되었다. 귀환 인원은 흥남에 있던 조선 질소사(朝鮮窒素社) 사람들 등을 합쳐 약 오백 명, 내가 단장이 되었다.
부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나왔는데 함경남도 지사 참석 아래 송별 잔치가 벌어져 정중한 송별연을 베풀어 받았다. 이에 나도 크게 감사의 뜻을 표하며 새로운 나라의 앞날을 축복했다. 연회 축배에는 보드카 한말들이 네 통이 사용되었다. 또 선물로 보드카 큰통 여섯 병과 명태 건어 두 가마니를 받고 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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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 고국의 땅
"이제 드디어 공해로 나왔습니다"라고 선장이 말했을 때의, 한꺼번에 어깨의 짐이 내려진 것 같은 안도는 무엇에도 비유하기 어렵다. 재조선 25년, 인생의 전성기를 이곳에서 보내고 수많은 변천을 거쳐 수송선의 낡은 바닥 위에 누워 일본해(日本海)를 넘는다. 감개무량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1947년 7월 3일 아침, 노부요마루(信洋丸)는 마이즈루(舞鶴) 항에 입항했다. 고국의 산야를 접하는 마음은 남다르다. 그야말로 그저 감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곧 상륙할 수 없었고, 그날 밤은 선내에서 머물다가 다음날 아침 상륙하여 DDT의 일제 분사를 받은 후 샤워를 한 후에야 겨우 사바(娑婆:속세)로 나왔다.
일본의 모습은 비참하다고 조선에서 공산당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양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쁘고 기뻐서 그저 눈물만 나왔다. 오노다 시멘트도 아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중나온 사원을 만나니 이 또한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마이즈루의 집들도, 물자의 상태도 조선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미군의 모습도 공산군에 비해 훨씬 좋아 보인다. 오노다에 대해서도 사원에게 물어보니 이 또한 상상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았다. 교토(京都)의 역에는 마스다 에이이치(増田英一)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마침 더운 날씨라 그가 수고를 마다않고 얼음과자를 열 개 정도 사왔다. 풍부한 물자에 놀라 마치 현대판 우라시마(浦島:동화속의 궁전) 같은 느낌이다. 이것도 조선에서 일본을 필요 이상으로 비참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열차 안에서는 외국인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동석한 일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고생해온 만큼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무슨 말을 하느냐" 고 대갈했더니 완전히 얌전해진 듯한 장면도 있었다.
7월 5일에 오노다 본사에 귀착했다. 회사는 그대로 운영되고 있었다. 미토 야스마사(三戸康正) 씨가 수석 상무로 회사 대표였다. 그 외 상무로는 미쓰타니 교(光谷尭), 이시다 쇼조(石田昇造), 기요키 미치오(清木通夫) 씨 등이 있었고 오야마(小山) 군도 이사로 건강하게 일하고 있었다. 이미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위원장으로 오타 후미아키(大田文亮) 씨가 군림, 그의 위세는 대단하게 여겨졌다.
어차피 나는 추방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틀 동안 본사에 있었을 뿐, 고향 오이타현 우메초마치(宇目町)로 돌아갔다. 아버지 히데요시(秀吉)는 이미 돌아가셨다. 고향에서 밭이라도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8월 도쿄(東京)의 미군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상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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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 사장 없는 실권자
상경해서 가장 먼저 간 곳은 긴자 거리다. 소문으로는 아사자(餓死者) 다수라고 들었다. 그 상황이라도 봐두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보니 물론 단 한 명의 아사자도 없다. 종전 직후라면 몰라도 2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는 것 같았다.
이것도 귀국자의 지식 부족인 것 같았다. 어쨌든 미군의 조사라는 것은 조선의 상황을 캐내기 위해서였고, 담당관의 태도도 무례하지 않고 정중했다. 미군은 확실히 신사적이었다. 며칠 도쿄에 머문 후 귀향, 빈둥거리고 있었는데, 확실히 9월 12일의 일이다. 오노다(小野田)에서 전보가 왔다.
퇴출되지 않았으니 돌아오라는 것이다. 9월 17일에 오노다(小野田)로 돌아갔다. 오노다(小野田) 시멘트의 속사정은 좋을 리가 없다. 이익이 있던 공장은 거의 사라졌고, 게다가 외지에서 천 명 이상의 직원이 귀국해 왔다.
남아 있는 것는 손상을 입은 공장들뿐이었고, 그것도 능력의 몇 분의 1로 가동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정을 더 깊이 들어보면 상태는 더 나쁘다. 나는 당시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이런 나쁜 상태의 회사는 세계에 둘이 없을 거라고.
1945년 봄, 카리노(狩野) 전 사장과 한 약속대로라면 나는 사장으로 추대될 터였다. 카리노 씨와 상의하니 지금 사장이 되면 미군의 눈총을 받을 수 있다. 이참에 먼저 전무로 취임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래서 11월 1일에 이사회를 열고 전무 대표이사에 올랐다. 사장 없는 전무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인생
● 19-29 천황의 행차
전무로 취임해 회사를 둘러보았지만 상황이 나쁜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나는 시멘트 업계의 미래에 대해서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와서 보니 종전 후의 정리 방법으로 기타큐슈의 야와타(八幡) 공장과 쓰네미(恒見)공장은 폐쇄로 내정되어 있었다.
이는 노동조합도 동의한 뒤였다. 나는 해당 공장에 폐쇄 선고 역할을 맡았지만, 우선 쓰네미 공장에 가보고 부흥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 예정을 바꾸어 공장의 제군 앞에서 "이 공장은 존속한다" 라고 말했다. 그때 직원들의 기뻐하는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야와타 공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폐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947년 12월 22일 오카야마현의 아테츠(阿哲) 공장에 천황 폐하가 행차하게 되었다. 마침 그날 눈이 내려 상당히 마음을 졸였는데, 폐하 도착 몇 분 전에 눈은 그쳤다. 나는 오노다 시멘트의 현황에 대한 보고담당이었다.
처음에 오카야마현 지사는 보고의 말을 종이에 써서 낭독해 달라고 했지만, 나는 폐하의 얼굴을 보면서 말씀드리지 않으면 진실이 통하지 않는다며 내 생각대로 했다. 물론 실수도 없었다.
그때 폐하는 노동조합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고 조합장에게 특히 말씀이 계셨다. 조합장은 매우 감격했고 이후 조합 운동도 온건해졌을 정도다. 폐하께서는 약 40분 시찰 후, 기분 좋게 떠나셨다.
아테츠 공장은 행차 후 두 차례에 걸쳐 증설 개량 공사를 하여 실적도 순조로웠으나 1973년 오일쇼크 이후의 오랜 불황에 견디지 못하고 1979년 말에 폐쇄, 마쓰시타전공(松下電工)에 매각하였다. 마쓰시타는 이를 전자공업 공장으로 고치고 종업원도 늘려 더 크게 확장했다.
덕분에 현지 니이미시(*新見市-아테츠공장 소재 도시)에 대해 비로소 체면이 서게 되었다. 아테츠 공장이라고 하면, 1948년 2월, 나로서는 첫 경영 협의회를 연 적이 있었다. 이름은 협의회이지만 실질은 단체교섭이다.
아직 노사 체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수준이라 때로는 호통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 무렵 오노다는 결손이 계속되어 배당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고, 임금은 물론 낮았다. 분명히 20% 정도의 임금 인상 요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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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 활기 저하에 역요법(逆療法)
이에 대해 나는 과감하게 30% 인상의 답변을 내놓았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당시 공장 내 노동 의욕은 극도의 저하 상태에 있었다. 어차피 저임금이니 공장 물건을 조금 가져가도 될까 싶어 회사의 기자재 등이 자주 분실되었다.
이런 상태로는 운전상으로도 문제가 있고, 재해까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공장의 물건은 없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합 측도 이를 양해하여 그 후, 분실은 거의 없어졌다. 임금 인상분을 보충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나는 1948년 8월 3일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1956년에는 천황 내외를 야마구치현 오노다의 본사 공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양 폐하께서는 공장에 약 한 시간 동안 머무르셨고, 점심 식사도 하셨기 때문에, 그 준비는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궁내청, 현청, 경찰, 신문사, 지방 유지 등 동반자도 백 수십 명을 넘었다. 천황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부축하며, 공장의 좁은 나선 계단을 수십 개나 오르시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노다 공장은 시멘트 공장으로서는 물론 다른 공업을 합쳐도 거의 현존하는 공장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또한 그때는 동일 구내에 있는 오노다 화학 공업이 신공장을 막 완공한 직후였고, 이 신공장에는 당시 일본의 최신 기술이 담겨 있었다.
양 폐하께서는 이들을 열심히 견학하시고, 상당히 깊이 있는 기술상의 하문을 해 주셔서 황송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그때 설명자였던 야마구치 오노다 화학 사장(후일 취임)의 명쾌한 설명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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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 만철 조사부(満鉄調査部) 탄생의 주역
저는 1948년 8월,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그것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清次郎 1872~1954) 대선배에 대해 언급해 보고 싶다. 다나카 씨는 메이지 5년(1872년)생으로, 제 아버지와 동년배이며, 오노다 시멘트 제4대 가사이 사장보다 1년 선배로, 오노다의 사외 중역을 1931년경부터 8년간 역임하셨다.
매년 두 번의 총회에는 반드시 참석하시고, 오노다의 클럽에 2, 3일간 숙박하셨다. 저는 공장장으로서 총회 전후의 미팅에 참석하여 다나카 씨와 아마 통산 40일 가까이 동숙했다. 그동안 거의 매일 밤 다나카 씨의 해박한 식견을 접했다. 다나카 씨의 풍부한 지식에는 카사이 사장도 인정했을 정도이다.
다나카 씨는 메이지 29년(1896년) 도쿄대 법과를 졸업하고 미쓰이물산(三井物産)에 입사하여 러일 전쟁 무렵에는 홍콩 지점장을 맡고 있었다. 그 발트 함대가 (*베트남의) 캄란 만을 떠난 이후 소식이 없을 때, 다나카 씨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 행방을 밝혀내 해군에 알리고 일본해대해전의 승인(勝因) 중 하나를 만든 사람이다.
그 후,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 백작에게 발탁되어 만철의 초대 이사가 되었다. 물론 40세 전이다. 야마구치현 하기(山口県萩)의 사람이기에 동향의 이토 히로부미 공으로부터도 인정 받아, 하얼빈 역두 사건 때 프랑스어 통역으로 수행, 본인도 흉탄을 발에 맞았다.
다이쇼 3년(1914년), 만철 이사에서 물러났지만, 그 후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1880~ 1946) 총재의 요청으로 다시 부총재 대우의 이사가 되어 유명한 만철 조사부를 만들었다. 마츠오카 씨가 외무대신이 되었을 때에는 그의 상담역으로서 크게 대신을 도왔다고 한다.
제가 오노다 시멘트 사장이 될 때, 누구의 추천이었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은근히 다나카 씨가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다. 물론 다나카 씨는 그런 말을 전혀 꺼내지 않았다. 어쨌든, 다나카 씨로부터 받은 은혜는 사장 취임과는 별개로 매우 큰 것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교우(交友)로 떠오르는 것은 일본공영(日本工営)의 구보타 유타카(久保田豊 1890~1986) 회장에 대한 것이다. 쿠보타 씨와의 교제는 조선 시대에 시작되었다. 조선전력 회사의 대전력(大電力) 개발로, 우선 30만 킬로와트 정도의 것을 4군데나 완성하고, 이어서 압록강 유역 200여만 킬로와트의 개발을 수행했다. 유명한 수풍 발전소 70만 킬로와트도 그중 하나이다.
쿠보타 씨는 더 나아가 하이난섬(海南島) 철광석 개발, 수마트라의 토바 호수의 대수력 발전을 계획하고, 전쟁 말기에는 대황하(大黃河)를 막아 단숨에 1,500만 킬로와트의 발전소를 만들려고 했다. 만약 전황이 당분간 순조로웠다면 쿠보타 씨의 대사업은 더욱 웅장해졌을 것이다.
나는 쿠보타 씨의 대계획의 준마꼬리(驥尾)를 붙잡아 시멘트 일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 쿠보타 씨가 전후, 야쿠시마라는, 쿠보타 씨가 보기에는 아마 벼룩 정도의 일이겠지만, 그 일을 나에게 해달라고 해서 맡은 적이 있다. 그것이 야쿠시마 전공(屋久島電工-1952년설립)이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2 GHQ(연합군 총사령부)에 직소
사장 취임 후, 1949년경이었을까, 당시 상공성 국장으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진주군(進駐軍)으로부터 안도 씨는 사장으로서 부적절하니 퇴임시키라는 메모가 왔다. 안타깝지만 즉시 퇴임해 주었으면 한다" 라는 것이었다. 1950년경까지는 미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나로서는 오노다의 경영이 어려운 만큼 그걸 면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지만, 이유 없이 퇴임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것이다. 게다가 양심적으로 후임을 맡을 만한 사람도 없는 상태었다. 그래서 어쨌든 GHQ 책임자를 만나보려고 상공성 국장이 말려도 듣지 않고 담당 대령을 만났다.
그 대령은 제 질문에 대해 "안도 씨, 당신은 사장 부적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대로 계속 맡아도 좋다고 했다. 대령의 말에 따르면, 그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차석자가 멋대로 보낸 것 같다고 했지만, 나중에 차석은 퇴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딘가에 그런 일이 벌어진 진정한 원인은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추궁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해 그냥 넘어갔다.
그 당시에는, 다소 백귀야행(百鬼夜行: 세상이 혼란함의 비유)의 시대이기도 했다. GHQ라고 하면, 집중배제(集中排除-사업집중화 배제)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는 미국의 정책이 적어도 시멘트 사업에 관해서는 무리이다. 어떻게든 분할을 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 목적을 달성했다. (*GHQ-연합군 총사령부: 1945년 제2차 대전후 대일 점령 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도쿄에 설치하였던 관리 기구로 1952년의 대일 강화 조약 발효시까지 일본을 지배하였음)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3 업태(業態)의 확대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급성 맹장염에 걸려 나고야 대학 병원에서 도다(戸田) 교수의 수술을 받고 9일간 입원해 있었다.
불황의 밑바닥에서 입원해 있었더니, 그 사이에 동란이 시작되어 경기는 일거에 완전히 달라졌다. 그 후 시멘트 산업의 회복은 그야말로 일사천리, 이른바 삼백(三白)시대라는 경황(経況)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의 경험으로 볼 때, 이 전쟁은 2, 3년은 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참에 과감하게 공장 증설, 정비에 착수했다. 이것은 추측대로 전개되어 당사는 일단 전쟁으로 잃은 것을 회복하는 단계가 되었다. 그 자세한 경과는 생략한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4 본사 기능을 도쿄로 이전
1951년 8월, 본점 업무를 도쿄 마루노우치의 철강 빌딩으로 이전하여 실질적으로 도쿄 본사를 두었지만, 그때까지 당사는 도쿄에 전혀 기지(基地)다운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루미(晴海: 東京 中央区)에 미국 극동 공군 용지가 있는데, 그중 4천 평(약 1만 3천 2백 제곱미터)을 매수하여 이곳에 서비스 스테이션을 두고 도쿄의 영업 근거지로 삼았다.
그 후, 주변 6천여 평을 더 매입하여 이를 중심으로 전국에 수십 곳의 시멘트 저장고를 설치하고, 이들을 자가용 기선(汽船)으로 연결되도륵 정비했다. 지점망도 처음에는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영업소를 포함해 여러 주요 도시에 설치하였다.
생산 설비는 점차 커지고 있으며, 현재는 1,500만 톤을 넘는 능력이 되었다. 관련 콘크리트 브랜드는 700개 이상의 공장이며, 여기에 사용하는 믹서 차량은 수천 대에 달하고 전국에 걸쳐 콘크리트 공급망이 구축되어 있다. 이 일에는 미츠타니(光谷) 이시다(石田) 키요키(清木) 세 상무가 크게 기여했다.
제조 방법은 개량 소성법(改良焼成法), SP킬른, 더 나아가 RSP킬른의 공정을 따라 한 가마(窯)에 의한 생산량도 하루 5천 수백 톤에 달했고, 필요하다면 1만 톤의 킬른을 설치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시멘트 종류도 여러 종류의 신형 시멘트, 더 나아가 응용 제품의 확대도 현저히 진척되고 있다.
컴퓨터 이용에 대해서는 1955년경부터 기초 연구를 시작하여 미나미자와(南沢)군의 천재적인 노력을 근간으로 하여, 다른 곳보다 앞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현재도 소형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컴퓨터를 운용하고 있다. 컴퓨터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독일 유학 당시부터의 경위도 있어서, 나는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제작까지는 못했지만, 응용면에서는 충분히 생각해야 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당시 오노다가 분수에 맞지 않는 많은 관련 인원을 보유한 것도 소위 소프트 부분을 빨리 체득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더 나아가 일본 전체가 이 방면의 기술을 빨리 개발해 주었으면 하고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1965년, 불황을 겪으며 이 부분을 크게 축소했다. 이로 인해 결과론이긴 하지만, 일본 컴퓨터의 많은 분야에 당사 기술자들이 분산 취업하여 이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1951년, 당사는 창립 70주년을 맞이했다. 이때 본사를 비롯해 각 사업소에서 축하행사를 열었다. 그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오노다시(小野田市)에서 처음으로 가부키(歌舞伎) 공연을 했다. 엔노스케(猿之助) 극단의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도쿄에 실질적인 본사 기구를 만든 데 이어, 회사명도 오노다 시멘트 제조 주식회사에서 '제조' 두 글자를 뺐다. 여기에는 많은 향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긴 회사 이름 때문에 곤란했던 점도 있어서 과감하게 결정했다. 다행히 회사 업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56년, 일본은 유엔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1957년 9월, 처음으로 일본은 옵서버가 아닌 정규멤버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회의의 일본 대표로 시멘트 협회에서 나와 달라고 했다. 모두가 사양하는 바람에 당시 협회장이었던 내가 억지로 맡았다.
개발도상국의 기업 경영에 대한 원탁 회의이다. 기 개발국에서는 영국, 미국, 프랑스, 덴마크, 일목, 이탈리아 등이, 개발도상국에서는 브라질,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 등이 참가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과의 회의에 가는 것이니, 사전에 각 참석자들을 만나본 후 가기로 하고 마닐라, 캘커타, 카라치, 로마, 코펜하겐, 파리 등에 들렀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절반 정도의 사람을 만났을까? 나는 일본 출발 당시부터 몸 상태가좋지 않았다. 설사가 계속되어 스위스 루체른에서 결국 호텔에 열흘간 머물며 요양하는 처지가 되어 완전히 여정을 망쳐 놓았다. 그럼에도 런던에서는, 이전부터 약속해 둔 잉글랜드 은행의 케직 중역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이야기 순서의 앞뒤가 맞지 않지만, 여기서 양해를 구하고 약간의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앞서 언급했듯이, 저는 1948년 8월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20년 동안 장기간에 걸쳐 사장으로 근무해 왔다. 문자 그대로, 전후 혼란으로부터 고도 성장기를 경험해 왔다.
당연히, 스스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적어야 할 것이 정말 많다. 하지만, 한정된 지면 속에서 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중복되지만, 지난 글에서 다 이야기하지 못했던 점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보충해 드리고자 한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5 폐쇄보다 "재건 분주"
전후(戦後) 혼란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공장 내 도난이 두드러지고 기업 내 근무의욕이 저하되어 있었다. 사원들의 사기 진작을 기대하며 대폭적인 임금인상(30%)에 나선 것은 앞서 언급했다. 이후 오노다에도 공장 폐쇄의 이야기가 나왔다.
노조도 나서서 공장폐쇄 방안을 내 놓으라고 내게 요구해 왔다. 현재의 기타큐슈 공장에 관해서이다. (당시에는 가키미와 야하타 공장으로 분리 상태) 하지만 실제로 시찰해 보니 공장 폐쇄의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실, 여러분께, 공장폐쇄 요청이 있어 부탁드리려고 왔는데, 공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 공장은 충분히 재기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폐쇄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제 얼굴을 보고 이걸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테니, 안심하고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오히려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내 판단에 노조가 격분했다. 당시 사장보다 '영향력이 컸던' 오타(大田) 조합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당신은 큰 실수를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아니. 내 판단으로는 여러가지로 도움이 되는 공장이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렇게 했다" 고 반박했다.
"당신들(노조),은 그 두 공장을 폐쇄시겨야 한다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노다 본사 공장이 제일 비효율적이어서 오히려 본사 공장을 폐쇄시켜야 제일 좋은 것 같지만 이 공장은 오노다 시멘트 발상지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도 싫어할 거고, 저로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굳이 (공장 폐쇄를) 말한다면, 이 본사 공장이다"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주장했다.
훗날 조합장도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배경이 있어 폐쇄하는 공장도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7년 무릅의 이야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독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밀어붙인 셈인데, 지금이라면 어려운 일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비상시국이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직원 모두가 분발한 덕분에 결과가 좋았던 것 같았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6 '하늘은 나의 편'
하지만 경영은 곤경이 극심한 수준이었다. (1947~48년경) 언제 월급이 멈출지, "이제 더 이상 급여를 줄 수 없다"는 지경까지 몰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사장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급여 지급을 늦추어야 겠습니다." 라는 경리 담당자의 비통한 목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을까? 그럴 때마다 돈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신기하게도 급여일 3~4일 전에는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행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복의 신도 달아났는지, 1948년에는 어쩔 수 없는 사태에 빠졌다. 당시 배를 곯을 수 없어 다른 일에도 손을 댔지만, 그다지 이익이 되지는 않았다. 시멘트는 통제품목이기도 해서, 허가 없이는 직접 사외에 팔 수도 없었다.
개중에는 무허가로 팔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오노다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 무렵 오노다만이 흰색 시멘트를 만들고 있었다. 흰색은 보통 시멘트보다 가격도 세 배나 비싸고, 게다가 사치품이라는 이유로 통제 대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보통의 백색 시멘트를 A백색 시멘트라고 하고, 우리는 B백색을 만들었다. B 백색이라고 하는 것은 A백색과 석회석 가루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강도는 보통 시멘트의 절반 정도이다.
색은 흰색의 중간색 정도의 회색이며, 그것을 B백색이라고 했다. 시멘트 공급이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에 잘 팔렸다. 게다가 가격은 세 배이다. 그래서, 회사에 B백색 시멘트가 기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은 통제법 위반이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7 후지모토 군의 오노다 구제(救済)
어느 날, B백이 통제 위반인 것이 발각되어, 오노다 공장의 차장이었던 후지모토(켄지) 군이 붙잡혀갔다. 원래라면 우리 사장 이하 대부분의 간부들이 잡혀가야 할 텐데, 후지모토 군의 대응에 우리는 구원받았다. 후지모토 군은 단호하게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나 혼자 한 일이다. 사장도 모르고, 공장장도 모르고, 전부 나 혼자 한 일이고, 아무도 모른다." 조사에 참여한 검사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을 텐데, 그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거짓말이라고 간파했어도 대단한 남자라고 생각했는지 결과는 무죄(위반이 아님)로 풀려났다. 이 결과에는 또 하나의 지원군이 있었다.
감정을 담당했던 한 대학교 선생님이 이 이야기에 동정심을 느꼈는지 "아니, 이건 확실히 흰색이다" 라는 감정의 옹호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통제 위반 문제는 후지모토 군의 대응으로 일단락되었고, 오노다의 누구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후지모토 군의 대응 결과로 그 후 몇억 엔을 벌어 곤경에 빠져 있던 오노다를 구제한 것이 되었다.
전후(戦後) 공장 분리로 소송을 당해, 반대로 공장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전(戦前), 소위 전시 경제로 육군으로부터 오노다는 세 개의 공장을 인수하게 되었다. 하나는 후쿠오카 공장, 다른 하나는 노자와석면(野沢石綿)의 히코네(彦根-滋賀県)공장, 그리고 다하라(田原-愛知県)공장으로 1948년경, 이 인수 공장을 "원래 경영자에게 돌려주라"는 통산성 통달이 있었다.
히코네 공장은 저가 귀국하자마자 돌려주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지만, 다하라 공장의 경우는 소송 문제가 일어났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통산성의 통달에 따라 공장을 반납하려고 했더니, "직원이 원래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그 이유를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경영자가 끔찍한 짓을 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돌아가게 해야만 했다.
"돌아가 주기 바란다. 원래는 군(軍)의 통제로 그렇게 된 거니까" 라고 설득했지만,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통산성 등에 조합장이 진정서를 냈다. 통산성에서는 "안도 씨, 돌려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닌가"라는 오해도 있었지만, 그러던 중 원래 경영자가 내게 찾아왔다.
당시 오노다의 도쿄 본부는 건축회관 내 50평 정도 되는 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전(戦前)의 기세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 원래 경영자가 찾아와 "다시 한번 천천히 이야기하자"라며 그날은 화해하고 헤어졌는데 그 후 바로 제소당했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응소했고, 결과는 우리 쪽의 완전 승소로 끝났다. 판결에서는 "다하라 공장은 돌려주지 않는다", "수십만 엔을 지불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후, 오노다의 공장으로 현존하고 있지만, 다소 플러스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8 노사 공방의 나날
전후(戦後)의 영향인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쇼와 20년대(1945년 무렵)의 노사 공방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조합은 "사장은 저리 가라"고 말할 정도로 강했다. 제가 사장으로 취임했을 무렵에는 "사장집을 어느 사택으로 할 것인가" 같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라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결정할 테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노동조합이 그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안 된다. 내 집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할 거니까" 라고 말한 이후, 중역의 사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합에서 일절 관여하지 않게 되았다.
이 때문에, 약간 조합에서 미움을 받은 것 같다. 게다가 오노다에서는 단체 교섭아란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중앙경영협의회'란 이름으로 여러 노사 교섭을 진행해 왔다. 1946년부터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
1947년경, 협의회에 나가보니 조합장이 거만하게 굴며 회사 중역 연합 참석자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광경이 자주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제지하는 것을 최대한 피하고 노사 협조의 원칙으로 대하며 회사의 입장을 설명해 나갔다. 하지만 이게 정말 참기 어려웠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라도 나는 끈기 있게 협의회에 참여했다. 1960년경까지는 계속 출석하여 주장해 왔다. 강경했던 조합이었지만,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너그러운 면도 있었다. 어느 날, 가족 수당 인상 요구가 나왔다. 조합은 "별거 수당을 올려달라"고 한다. 이에 대해 나는,
"별거 수당을 올리라는 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별거를 장려하는 것과 같으므로, 너무 심한 요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올려도 좋지만, 별거는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그것을 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자 조합장이 "사장님은 전혀 사원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합니다"라며 매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조합장님, 당신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별거의 슬픔의 노래 사노사' 를 지어둔 것이 있어요. 한번 읇어 볼까요?"라고 했더니, "그런 가사를 할 수 있다면 말해보시오."라고 조합장이 말했다. [*사노사부시'는 메이지 30년(1897년)경에 유행한 속요의 일종으로, 노래의 끝에 '사노사'라는 추임세 단어가 붙는 것이 특징이다.]
"동서(西東)로 멀리 그렇게 헤어져 있으면, 혹시 마음도 느슨해지지 않을까, 그래서는 안 될 일인 줄 알면서도, 항상 내 마음에 걸린다." --- 이것은 사노사의 한 구절이다. 당신 알고 있냐 물으니, "그래요, 그건 알겠어요" "그렇다면 됐어요"라고 말하며 통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39 오코치(大河内)도쿄대 총장의 눈물
당시 조합의 공세도 강했지만, 전후 공산당도 심각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통하지만, 이는 이론의 좋고 나쁨은 별개로 하고 '북한 억류'에서 공산당의 실태를 봐온 것도 배경에 있다.
어느 날, 제 지인이기도 했던 공산당원이 오코치 도쿄대 총장의 중매인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도 결혼식에 초대받아 축사를 하게 되었다. 물론, 오코치 총장 다음 차례의 축사이다. 오코치 총장은 두 사람이 함께된 이야기라든가, 두 사람이 동지로서 결혼하는 이야기 등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식은 모든 면에서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경사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오코우치 선생님 말씀대로, 모두 좋은 이야기입니다만,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위해 동지가 결혼하고, 평생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나. 결혼이란 그런 게 아니다. 남녀가 정말 서로 아껴주면 그것으로 되니까,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하물며, 공산주의의 좋고 나쁨은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그런 주의를 바탕으로 결혼한다고 말할 거라면 그만두는 게 낫다" 라는 내용의 축사를 했다. 그리고, 또다시 오코치 선생님께 한마디 했다.
"선생님은 이론적인 말을 했지만, 왜 당신은 눈물을 흘렸는지, 이론과 눈물은 일치하지 않아요. 하물며 백 년 전의 공산주의가 왜 그렇게 오래 지속되는 걸까요? 지금도 너무 낡은 사상이라고 저 스스로 생각할 정도이고, 저도 고고 시절에 일단 공부는 했지만, 그런 건 안 된다는 걸 바로 알았어요. 내가 겨우 스무 살 정도에 알았을 정도니까, 당신들은 사흘만 지나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산주의와 결혼이라니!)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나요" 라고.
그러자 오코치 선생님은 입장이 난처했던 것 같았다. 측근들은 특히 격노했다. "안도는 용납할 수 없어, 그대로 둘 수는 없다."라며 떠들썩하게 말했다. 나 자신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렸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녀석들이니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어. 대응하지 않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이 이야기는 이후로 시들해졌다.
그 후, 선생님과 만날 기회도 있어서, "지난날은, 아무래도 조금 실례를 범했네요"라고 말씀드리니,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셔서, 문예춘추에서 대담한 적도 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40 오노다 방식 OA(사무자동화) 선구
이야기를 회사 경영, 기술, 연구와 같은 방향으로 바꿔 보충해 본다. 오노다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이 도입도 사내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는지 묻는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당시로서는 무리가 있는 일이었기에, 꽤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미나미자와(南沢)군의 등장은 큰 도움이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컴퓨터 도입은 1930년 이래 나의 소망이었다. 사장 취임 후, 이 기계를 도입하기 위해 경리 담당자에게 상담해 보았다.
"전기 계산기라는 것이 있다. 당신들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들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그걸 사서 새로운 장부 형식을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하니까, 한번 검토해 보자"라고 말했지만, 부장, 과장은 "글쎄요"라고만 할 뿐, 반응이 시원찮았다. 속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는 표정들이었다.
모두가 시쿤둥하였다. 그러는 동안, 모두가 "사장님 절대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당신들이 안 된다고 하면, 나 혼자서는 할 수는 없고, 그럼 잠시 기다려 보자"라고 하였다. 미나미사와 군은, 이러한 사내 분위가 넘쳐흐르고 있을 때 등장했다.
미나미사와 군은 1950년에 입사했지만, 도쿄대 경제학부 최고의 수재였다. 나도 도쿄대에 가서 알아보고 놀란 정도였고, 모든 것이 최고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수재가 일본은행 입사에서 채용 연령 문제로 거부당했던 이력이 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전기 계산기(당시에는 아직 컴퓨터가 되지 않았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입사 후, 1년 정도 조용히 그를 봐왔지만, 수재라서 다른 사람들과 잘 맞지 않는다. 부장, 과장 등 상사와도 안 맞는다. 그 무렵 그에게 "전기 계산기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사용해서 새로운 장부 조직을 만드는 것을 자네가 해보지 않겠나"라고 말했더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도입해야 할 전기 계산기를 검토하여 IBM 기종을 구입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전기 계산기라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할 수 없지만, 전표 분류가 가능하고 인쇄가 가능하다. 그래서, 막상 모두에게 시키려고 했더니, 전부 반대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전기 계산기의 하드웨어를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두 하드웨어를 이해해야한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지식을 발휘하게 하려고 조용히 지켜보니, 해도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다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후, 미나미자와 군에게 생각대로 하게 했다. 그러던 중, 현재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가 완성되어 1959년에 일본에서 처음 도입했다. 현재 컴퓨터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것이었지만, 반대가 있더라도 도입에 나선 것이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19-41 '구로베4호기용 댐' 컴퓨터의 위력
이 컴퓨터가 위력을 발휘한 것은 구로베 댐에서였다. 그것도 구로베4호기용 댐 건설 무렵, 프랑스에서 건설하던 아치 댐이 무너져 399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구로베4호기용 댐도 같은 아치댐이다. (*黒四ダム : 長野県と富山県を結ぶ立山黒部アルペンルートにある黒部ダムは関西電力が着工7年後1963年6月5日竣工)
따라서 미국의 세계은행이 "아치 댐 계산을 다시 하라"고 요구해 왔다. 세계은행으로부터 구로베4호기용 댐 건설을 위해 1억 달러 정도 빌렸기 때문에, 다시 계산하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한다.
계산을 다시 하는 데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면 족히 3년은 걸린다. 그래서, 간사이(関西) 전력에서 저희 쪽에 컴퓨터로 계산해 달라는 의뢰가 왔다. 우리 쪽의 미나미자와 군, 간사이 전력의 다카노 군이 협력하여 구로베4호기용 댐 계산에 임했다. 약 3개월 동안 계산을 마무리하고 세계은행의 승인도 얻어 공사는 무사히 계속되었다.
이 효과는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나 자신도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사내 컴퓨터 반대파도 "과연 컴퓨터라는 것은 효력이 있는 것이다. 대단한 것이다"라는 인식이 퍼져 오노다에서도 전면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때 오노다에는 컴퓨터 관련 요원이 약 160명 정도 있었다. 따라서 쇼와3~40(1955~ 1965)년까지는 우리 회사에서 배출한 컴퓨터 요원의 상당수가 일본의 많은 분야에 들어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1965년 불황에, 앞 절에서 언급했듯이, 안타깝게도 그 규모를 축소하게 되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42 연구 투자의 속사정
그 시대에는 기술연구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경영자들은 그랬다. 하지만 경리 입장에서 말하자면, 불필요한 연구투자를 해서 경영에는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은행출신 경리 담당자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했던 것 같다.
그들은 연구투자에 대한 안목이 없거나, 단견적(短見的)이기도 했다. 연구를 싫어하고, 예를 들어 백 엔짜리 물건을 만들어 천 엔에 팔면, 차익이 얼마인가 하는 그런 계산을 좋아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서서히 변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그 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연구소를 만들 때에도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창설했다.
연구소를 만들어서 처음에는 시멘트 연구부터 시작했다. 그 후 제조 방법은 물론이고 기계 개발까지 다루었다. 성과 중에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연구 자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용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실패에서 배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성공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중에는 잘못해서 대발견을 하는 것도 있다. 적어도 우리 연구에서는 그러한 점이 곳곳에 있었다.
세계적인 대발명이라고 불리는 것의 6할은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어쨌든, 연구를 하는 것은 전체적인 지식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다. 기술적으로, 혹은 학문적이라고 할까, 그런 것의 수준이 올라간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불필요한 일이라도 연구를 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기술자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사장의 입장으로서는 그것을 드러내놓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손해를 봐서는 되지 않겠지만, 손해를 보면서라도 연구를 해 나가야 긴 미래가 있다. 그러한 연구소를 만든 배경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1965년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렇게 적자만 나고 수익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라며 수익성이 없는 연구소 축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런 말을 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참아 주세요"라며 축소파를 설득했지만, 때마침의 불황으로 이 말이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연구소 인원을 절반으로 줄였는데, 이유도 "수익이 안 나서 줄이는 게 아니야고 일시적으로 연구를 축소하는 것" 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연구 인력이 부족하다. 현재 130~40명의 연구원이 있지만, 물론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나의 중학교 시절 후배 미타라이 타케시(*御手洗毅 1901~1984 캐논 창업) 군이 캐논 카메라를 하고 있다. 그 회사는 대졸자 1,600명 중 대부분이 연구 부문을 맡고 있다.
업종이 달라서 함께 비교할 수는 없더라도, 연구에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 얼마 전에도 가보니 벌써 엄청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컬러 복사 같은 것은 캐논이 처음이고, 이에 필적하는 연구는 오노다에서는 할 수 없다. 지난 1965년 불황에 따른 성급한 축소결정을 좀 더 장기적으로 생각했더라면 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43 메트로포리탄-클럽의 추억
보충 설명으로부터 본고로 돌아가겠다. 1957년, 저는 정 멤버로서 처음으로 유엔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9월 중순부터 2주 동안, 휴일 외에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열렸다. 각국 참가자는 국영 개발 회사 사장, 은행장, 철강 회사 사장 등이었으며, 미국은 수출입 은행 총재인 워 씨가 대표였다.
회의는 모두 확실히 정진(精進)에 힘썼고, 논의도 나오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의장은 이틀씩 교대했고,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국제 회의인 만큼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유엔 사무국에서 경제부 차장인 룰리에 씨가 와서 마무리해 준 덕분에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 회사 나카오(中尾) 상무, 후지마키(藤巻)군, 그리고 전임(専任) 통역사의 신세를 졌다. 일본으로서는 유엔에 신입 회원이기 때문에 각 대표단을 초대하기로 하고, 장소를 메트로폴리탄 클럽으로 잡았다. 나는 우연한 인연으로 이 클럽의 임시 멤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클럽은 미국 최고라고 불리며, 내부 장식은 베르사유 궁전 그대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호화로운 것이었다. 행사장이 좋았던 탓인지, 파티에는 모두 부부와 함께 참석해 주었다. 요리는 몇 주 전 프랑스 대사의 초대회에 준하는 것으로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
그 당시 미국 내 일본인의 지위는 아직 낮았고, 이 클럽에 들어온 적이 있는 뉴욕 주재 일본인은 유엔 대사 한 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기회에 주요 대사관 직원, 주요 일본 회사, 은행 등의 지점장 등을 두 번에 나누어 클럽에 초대하였더니 크게 기뻐하였다. 1957년 당시 미국에서 일본인의 상태는 이 한 가지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는 천양지차이다.
회의 후 여러 곳을 둘러보고, 10월 말 하네다에 도착하여 두 달 반의 여행을 마쳤다. 시멘트 업계에도 기복은 있었다. 시멘트 업계에서 3기 6년간 협회장을 역임했고, 다행히 제 임기 동안은 대개 경기가 좋은 시기에 해당했다. 요업(窯業)협회, 일본화학회 회장도 1년씩 맡았다.
회장직에 머물면서 특이한 점은 스모의 한 단체인 도키츠카제베야(時津風部屋)의 후원회장을 수년간 역임한 것이다. 게이단렌(経団連)의 상임 이사는 1949년부터 1978년까지 맡았다. 그동안 운수위원장, 국토개발위원장을 전후(前後) 20년간 맡았다. 도쿄 상공회의소 의원은 1960년부터 1970년까지 맡았다.
내각, 자민당, 통산성, 운수성, 건설성 등 각종 심의회 위원을 다수 맡았지만, 도움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외국에는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 거의 전부, 공산권 국가도 10개국 가까이 돌아보았다. 거의 대부분이 정부 혹은 재계의 사절단 임무였다.
외국 방문으로는 십여 차례의 회의 참석으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 제일 많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고매한 인격과 용기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유고는 티토 대통령을 댁으로 방문하여 친밀하게 뵈었지만, 지금은 중환으로 타계하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3장 오노다 재흥 칠천일 - 기업 창조의 삶
● 19-44 사업 성공의 열쇠
창립하였거나 또는 어느 정도 관련된 사업도 꽤 있다. 야쿠시마 전공(屋久島電工), 일본 원자력사업, 오노다화학공업, 제국(帝国)흄관, 센트럴유리, 협화발효(協和醱酵), 무쓰오가와라(むつ小川原)개발, 미쓰이(三井)시멘트, 규슈석유, 아사히석면공업, 아사히규산공업,
사가미(相模)중앙화학연구소, 일본카니젠, 오리엔탈콘크리트, 오무라내화, 아즈마카이운(東海運), 일본콘크리트공업 등이지만, 사업은 처음부터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거의 없었다.
우연히 창립 때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것은 정확하게 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면, 결국에는 반드시 성공하는 것이다. 오노다시멘트의 경우도 39년간의 근무기간 중 큰 부침이 있었다.
특히 1965년을 전후한 불황 시대에는 오랫동안 무배당을 계속하여 주주와 거래처, 금융처 여러분께 큰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여러 선배님들, 여러 동료, 사원, 거래처 등의 깊은 이해와 응원 덕분이다. 정치권 인사들에게도 많은 신세를 진 일도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제 건강은 미수(88세)를 맞이한 지금도 양호한 상태이다. 노령으로 인한 여러 기능의 퇴화가 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오노다 재흥 7천일'이라는 이름으로 기업 인생의 일면을 피력하여 보았지만, 저에게 60여 년의 기업 인생은 그야말로 '기업 창조의 인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章「理外の理」を読む. 173p
● 4장 "이외의 이치"를 읽다. 17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