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川の流れのように
作 詩 : 秋元 康 / 作 曲 : 見岳 章
시라즈시라즈 아루이떼기타 호소쿠나가이 고노미찌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 この道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 왔네 길고도 좁은 이 길을
후리카에레바 하루카 도오쿠 후루사또가 미에루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 만치 멀리 고향이 보이고
데코보코미찌야 마가리구넷다미찌 치즈사에나이 소레모 마따 진세이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 人生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지도조차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아~가와노나가레노요우니 유루야카니 이꾸쯔모 지다이와 스기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아 ~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어느새 세월은 흘렀네
아~가와노 나가레노요우니 도메도나쿠 소라가 하소가레니 소마루다께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아 ~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그저 하늘이 황혼에 물 드는 것 뿐이라네
이끼루 고또와 다비스루고또 오와리노나이 고노미찌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りのない この道
살아 간다는 건 길을 떠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을
아이스루히또 소바니쯔레데 유메사가시나가라 아메니후라레데 누까룬다미찌데모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ぬかるんだ道でも
사랑하는 이와 함께 꿈을 찾으며 비에 젖고 실패한 길이라도
이쯔까와 마따 하레루 히가 구루까라
いつかは 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언젠가는 다시 비가 개인 내일이 올 테니까
아~가와노나가레노요우니 오다야까니 고노미오 마카세데이타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가와노 나가레노요우니 우쯔리유쿠 기세츠 유키도케오 마찌나가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하는 계절,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아~가와노 나가레노요우니 오다야까니 고노미오 마카세데이타이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 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아~가와노 나가레노요우니 이쯔마데모 아오이세세라기오 기끼나가라
ああ 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른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미소라 히바리의 최후의 히트 곡 '川の流れのように(흐르는 강물처럼)'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해 자신의 모든 걸 담아 불렀기에 듣는 사람들을 감동 시켜 왔다고 합니다. 이 노래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듣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인생이 있고 그것을 동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가 인생을 한번쯤 돌이켜 보는 노래인 "川の流れのように(카와노나가레노요오니, 흐르는 강물처럼)"는 미소라 히바리가 보물처럼 여기는 노래로, 일본 방송에서 아무 가수나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라고 한다, 엔카라기 보다는 '스탠다드 팝'에 가까운 노래입니다.
'川の流れのように(강물의 흐름처럼)'는 영화로도 유명한데, 미조라히바리의 일생처럼 어촌을 배경으로 영화가 만들어 졌다. 노인들이 쓸쓸히 살고 있는 어촌에 여류작가가 이사를 온다. 여류작가 유리꼬에 동화되어 노인들은 차차 활기를 찾게되고 계절에 맞추어 그들도 봄을 노래하게 됩니다.
영화 "러브레터"에서 산을 타다 조난당한 '후지이 이츠키'가 늘 불렀다는 노래의 주인공이 바로 '미소라히바리'다. 한국계로 알려진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히바리.
미소라 히바리가 1989 년 향년 52 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일본 전국의 신문과 방송은 국상을 다루듯 그녀의 죽음을 다뤘다. 일본의 한 작가는 그녀를 "일본주식회사의 사가(社歌)를 불러 온 여인"이라고 칭했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1949 년, 12 세의 나이로 일본 엔카계에 데뷔해 무려 1700 여곡의 노래를 남겼는데, 그녀의 노래는 일본 국민에게 있어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그녀에게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국민영예상'을 추서하는 것으로 그에 보답했습니다.
특히 "川の流れのように(카와노나가레노요오니, 흐르는 강물처럼)"는 일본 방송에서 아무 가수나 부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보물처럼 여기는 노래다. 엔카라기 보다는 '스탠다드 팝'에 가까운 이 노래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면서 강한 공감을 얻어 냈습니다.
우리나라의 김연자가 1990 년대에 일본으로 진출 해, 아무나 출연할 수 없다는 "NHK 홍백가합전"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우리 가수 김연자의 실력을 인정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한국인인 한국계 일본인이라든가 그저 수 많은 일본 엔카 여가수 중의 한 사람이라기보다,전후 일본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며 투철한 삶을 살다 간 미소리 히바리는 유일하게 제가 가끔 찾아 듣는 일본 여가수인데,그가 부른 "川の流れのように(흐르는 강물처럼)"의 노래와 동영상까지 웹상에 참 많이도 보이지만
어린 시절에 후랑크 나가이와 함께 미소라 히바리의 오래를 우연히 자주 들을 수 있어 후랑크 나가이와 함께 가수 이름을 알고 일본 노래를 들은 유일한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여가수이고 "항구의 13 번지" 를 올려 놓았습니다만 그녀가 살고 간 생(生) 의 족적을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들로 대충 더듬어 보며 그녀가 마지막에 불렀고 미소라 히바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는 "흐르는 강물처럼"을 올려 놓습니다.
일본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89 년 6 월 24 일. 일본 엔카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던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향년 52 세의 한창 나이로 타계하자 전 일본 국민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일본 열도가 애도의 물결로 흔들렸으며. 일본 전국의 신문과 방송은 마치 국상을 다루듯 그녀의 그녀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녀는 1949 년, 9 세의 나이로 일본 엔카계에 데뷔해 무려 1400 여곡의 노래를 남겼다. 158 편의 영화와, 89 편의 연극의 주연을 맡아 온 일본 여자 가수 중 최고의 엔터테이너로 그녀의 노래는 전후의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일본국민과 함께 희노애락을 나누며 살아 온 일본의 국민 가수. 세간에는 아버지가 한국인이란 소문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그녀에게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국민영예상'을 추서하는 것으로 그에 보답했다. 그녀는 지금도 일본인들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는 1937 년 생선가게를 경영하는 가또 마스키치(加藤增吉)와 프로듀서였던 어머니 가또 키미에(加藤喜美枝)의 장녀로 태어났다. 출생 별자리는 쌍둥이 자리, 혈액형은 O형. 본명은 가또 카즈에(加藤和枝).
아버지 마스키치는 멋을 아는 사람으로 외출을 할 때에는 생선 냄새가 나지 않도록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는 버릇이 있었고, 음악적 성향도 풍부하여 1945 년 딸인 미소라 히바리를 보컬로 ‘미소라 악단’이란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가 어렸을 때는 어린 소녀가 엔카를 부른다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고, 음악활동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는데, 원래 말이 없던 미소라 히바리는 오만하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출석일 수가 부족하여 쉬는 날 혼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기고 했다고 그녀의 자전 ‘흐르는 강물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에서 털어 놓고 있다.
투철한 프로정신
9 살 때 데뷔, 풍부한 표현력과 뛰어난 미모, 호소력 짙은 가창력에 매끄러운 무대 매너로 일본 전국민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았던 미소라 히바리는 생전에 총 1035 곡을 발표하였다. 이 숫자를 월평균으로 잡아보면 한달에 2 곡은 발표해 왔다는 얘긴데, 이는 가요계의 깨뜨릴 수 없는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항상 바쁜 연예생활에 임하면서도 프로의식이 투철했던 그녀는 모든 무대를 완벽히 소화해내는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자서전‘흐르는 강물처럼’에서 그녀는 이러한 말을 남기고 있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다. 내 혼자만의 책임으로 끝까지 해내야 한다. 나도 인간이기에 때로는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물론 너무 아파서 쉬고 싶을 때도 있었고, 열이 심하게 나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무대 위에 서 왔고, 무대 위에 서는 것, 그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미소라 히바리’의 모습임을 잊지 않았다.
팬이 미소라 히바리에게 염산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10 대 소녀는 히바리의 얼굴을 망치면 인기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콘서트를 준비하던 미소라 히바리 얼굴에 염산을 부었다. 목이 따갑고 얼굴이 뜨겁게 부어 오른 미소라 히바리에게 스태프들은 물을 뿌리려고 했는데 미소라 히바리는“지금 물을 뿌리면 무대 위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콘서트는 중지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 때 일을 생각하며 히바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그녀를 아직도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은 팬이 아니죠. 아주 불안한 대상이죠. 무엇보다도 저를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한 것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에게 투철한 프로정신을 가지게 한 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히바리를 연예계로 이끈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연예계에 들어 간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어머니 키미에는 히바리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였고, 히바리가 100 번 무대에 서면 100 번 다 무대 뒷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미소라 히바리는“항상 어머니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가 없었고, 긴장해서 좋은 무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훗날 고백하고 있다. 1981 년 키미에가 타계하자 히바리는 버팀목을 잃은 슬픔에 잠겨야했으나 그래도 공연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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