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김 기 덕
바람 속에서 춤추던 4g의 고무공들이
빛을 뚫고 세상에 나온 0.1초의 순간, 운명은 결정되었다.
비너스의 몸에서 나온 60억분의 일의 확률로 나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닌,
가난과 굶주림의 전장이 아닌
대한민국 언제까지나 살고 싶은 과천에 산다.
당첨번호는 62, 10, 2, 8
권천성, 수천성, 귀천성, 예천성의 별들이 반짝이고
날마다 다이아몬드 태양이 떠오른다.
상금으로 받은 재산과 아이들, 최고의 행운은 그녀의 과녁을 맞힌 화살이었다.
황금 달과 지폐다발을 세는 바람
평생 쓰고도 남을 물과 공기 속에서 나는 또 다른 화살을 쏜다.
서울역 근처 와이티엔 빌딩 앞 명당에서 로또를 사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녹번동 은평구청 사거리
편의점 바이더 웨이에서 즉석 행운을 긁는다.
시간의 통 속엔 64궤의 공들이 돌아가고 384의 효들이 춤춘다.
지금 내가 뽑은 공은 33번째
천산둔(天山遯), 세상을 피해 잠시 몸을 숨겨야 한다.
백 번째 사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우레가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대는 밤
벼락 맞을 확률에 돈을 걸고
돼지나 불타는 집이나 물난리 꿈을 꾸진 않았어도
회차와 당첨금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린 이미 꽃이 된 산을 꺾고, 눈물이 된 강을 마시고
백지 같은 땅을 구겼다 폈다하며
맘껏 누리는 복권(福權),
언젠가 빈털터리 바람으로 떠날 때까지
하루하루 긴장의 연속, 빗방울 하나에도 환성과 탄식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