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대에 사지 묶고 정관수술”
“수술대에 사지 묶고 정관수술”
최근 우리나라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해 강제불임수술을 실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고 있다. 물론, 1989년까지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질환의 유전 또는 전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임수술을 행하는 것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보건복지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불임시술이 가능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문제는 법의 근거규정이 있었지만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느냐다. 그런데 한나라당 김홍신 의원이 불법 또는 강제적으로 불임수술을 한 사실을 밝혀냄으로써 그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종족이 아닌 것은 폐품이 되고 만다”고. 하지만 모든 인간이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인종주의는 참으로 위험하지 않을까.
어느 운전기사의 제보
“동의 절차도 없이 정관수술이 강제로 이뤄졌다. 반항하는 사람들은 때려서 데려갔고, 수술대에 사지가 묶여진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다"
서울에서 대중교통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40대 중반 유씨의 제보는 얼마전 ‘장애인 불법·강제 불임 수술 실태'를 조사·보고한 김홍신 의원을 더욱 흥분하게 했다. 김 의원은 곧바로 유씨가 피해를 당했다는 광주광역시 은성요양원으로 내려가 현지조사를 했다. 피해자인 유씨와 동행, 당시 원장과 대질조사를 거쳐 제보내용을 확인할 결과 모든 내용은 일치했으나, 수술피해자 숫자에 대해서만은 주장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상과 해외여행에 눈멀어
유씨가 불임수술을 당한 때는 83년 가을. 당시 가족계획사업이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사업 추진의 최일선에 있던 각 보건소에는 관조직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추궁과 보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보건소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집단적으로 시술이 가능한 곳을 찾아나서게 됐고, 사회복지시설이 그 타깃이 된 것.
“동구 보건소에서 가족계획 이동시술반을 편성했다. 당시 은성요양원에서 정관수술을 실시한 바 있으며, 기억이 불분명하나 남성원생 20여명에게 시술했다. 여성의 경우에는 의료기관으로 이송해 시술했으며 10여명으로 기억된다"
당시 보건소 가족계획사업을 담당했던 조우순씨의 진술이다. 그는 또 “실적이 좋으면 포상도 하고 해외여행도 보내줬다"고 덧붙였다.
미혼·기혼 구별없이 시술
강제불임 수술의 그 심각성이 더욱 증폭되고 있는 이유는 대상자의 상당수가 미혼자들이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제보자 유씨 또한 당시 미혼이었으며, 시설직원이었던 김재선씨도 “미혼자들을 주로 수술했으며 20∼30대였다"라고 말했다. 가족계획사업은 미혼자에게 금지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은성요양원 집단 수술에는 기혼자와 미혼자의 구별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신원확인이나 배우자·보호자 동의서 없이 수술을 했다는 사실. “부모에게 동의를 받은 것은 10명미만이었다. 구두로 동의를 받았다"고 당시 시설 조리사가 증언했다.
반항하면 구타당했다
불임수술이 이뤄지는 것을 당일 아침에야 알 수 있었던 피해자들은 반항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수술대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원장을 비롯한 관련자들 6명은 30∼40명정도를 선발해 시술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유씨는 당시 아침마다 원생이 있는지 없는지 이름을 호명하는 ‘점호'를 담당했기 때문에 그 명단에서 피해자의 수를 알 수 있었다며, 남자 60여명 여자 40여명정도가 피해를 당했다고 단언했다. 그가 이처럼 확신을 하고 있는 이유는 82년부터 87년까지 5년동안 아침마다 같은 사람의 이름을 여러 명 불렀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사회복지시설에서도 불임수술이 있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집단 수술이 가족계획실적 올리기에 활용됐고, 또 그럴 것으로 추측되는 다른 시설에 대해서도 김 의원은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고. 따라서 전국적인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계적 사례 부지기수
우리나라가 ‘가족계획'이라는 미명아래 인간 존엄을 묵살한 강제 불임. 역사적으로 볼 때 이같은 사례는 세계 도처에 부지기수다. 1933년 나치독일이 강제불임법을 통과시켰으며 미국은 이민규제법의 근거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아야 한다"며 강제불임법을 만들어 60년대까지 흑인 인디언 등 약 6만명을 시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나 빈곤 등 각종 사회문제가 일부 유전자 때문이라며 “우수한 자질의 남녀끼리 짝을 이루면 인간개량이 이루어진다"는 우생학을 근거로 강제불임 시술이 자행된 것.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요즘의 상황에서 볼 때 15, 6년 국내에서 벌어진 일련의 강제불임시술은 21세기를 앞두고 시대적으로 범한 퇴보중 하나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