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시사해 주는지 한번 묵상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병든 사람들이고 또 그들은 자신의 병이 낫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오늘날처럼 병원이라든지 의료와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정이고 또 치료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극히 일부 사람들에게만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은 시대적인 배경입니다.
결국은 사회적인 약자에게는 재력이 있지 않는 이상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꿈과도 같은 현실이고 그렇게 치료를 하지 못하다 보면 원래 처음에는 사소한 병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병을 키워 큰 고질병 같은 병으로 중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중병이 되면 아마 병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그 병이 어떻게 되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경험이 있고 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게 되면 판단을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점차 사라지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이런 처지에 몰리게 된 사람이라면 어떤 심정일까요? 절박하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사정인데 마침 들리는 소문이 있어서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그간 많은 사람들에게 병을 치유해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실제 그게 사실이라는 게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면 그때 그 사람들에게는, 절망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실낱 같은 희망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 보면 일단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물어 물어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주십사 하고 간절한 간청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어떻게 여차여차해서 예수님을 뵐 수 있는 지근거리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을 때 그때 그 사람들이 그들 마음속에 품었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오늘 복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청한 것은 병을 고쳐주십사 하는 그런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는 병을 고쳐주십사 하는 그런 말을 먼저 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조금은 맞지 않을까 합니다. 그들은 실제 일어났던 풍문의 기적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 같은 소문 외에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르긴 몰라도 엄청 많았을 거라고 추측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 기적의 손길이 자신에게 올 수 없다는 불길한 생각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저 치유 기적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들 마음엔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이라도 만질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테고 그 마음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하는 애절함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만 해도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다는 희망에 찬 확신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그런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게 인지상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여기서 결론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하는 결론은 언급이 되지 않고 다만 복음사가의 시선으로 그렇게 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됐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금 표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이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를 전체 이 상황과 결부시켜 그게 왜 그런가를 묵상하며 마무리지으려고 합니다. 단순히 오늘 복음의 내용만 놓고 봤을 때 구원의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색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영혼이 죽음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걸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원을 받기 위한 일반적인 조건 같은 게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와 같은 것은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조건도 없었습니다. 결과는 무상의 은혜밖에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은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구원의 손길은 그렇다고 가치 없이 무조건 백지수표를 남발하듯이 마구 주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갈구하고 간절히 원하려고 하는 간절함과 애절함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은총이 무상의 은혜로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는 우리의 공로도 수반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건 달리 표현해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다고 표현한다고 하면 하느님의 구원은 별가치 없는 그런 가치로 격하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로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이런 게 없다면 그저 구원이라는 게 감나무 아래 감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얻으려고 하는 형국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이 공로는 사실 구원을 받을 만한 합당한 기준에는 충족이 되지 않을 정도로 또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보면 아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그게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과 비교를 하면 공로라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공로이기 때문에 감히 공로라고 말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묵상해봐야 할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장난 같지만 그 말 속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숨어 있을 거라고 저는 묵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