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돈녕 안공 묘갈명(同敦寧安公墓碣銘)
나는 말세에 태어나 요행히 옛사람과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동지돈녕부사 안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은 휘가 구(絿), 자가 자유(子柔)이며 죽산(竹山) 사람이다. 먼 선조는 고려 소부감 준(濬)이며 그로부터 대대로 공훈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연창위(延昌尉) 맹담(孟耼)이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를 맞이하였다.
그의 아들 상계(桑雞)는 영조께서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돈녕부 도정을 지냈으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증조 휘 응하(應河)는 훈련원 부정을 지냈고, 조부 휘 대재(大梓)는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정찬(廷燦)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공은 숭정 신묘년(辛卯年,1651, 효종2)에 태어나 숙종 임술년(壬戌年,1682) 진사시에 합격했다.
계사년(癸巳年,1713) 명릉 참봉(明陵參奉)에 임명되고, 종묘서 봉사, 선공감 직장에 조용되었으며, 상의원 별제,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 지금 성상 을사년(1725), 조지서 별제에 임명되고 의빈부 도사로 옮겼다.
병오년(丙午年,1726), 전 참의 유척기(兪拓基) 등이 상소하여,
“신들의 시골 서당 스승 안 아무개는 어린 학생을 가르쳐 성취시킨 사람이 많아 급제한 사람이 5인, 생원과 진사가 8인입니다.
규례대로 포상하소서.”
하니, 마침내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당일로 오위장,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여름, 둘째 아들 상휘(相徽)가 지평이 되었는데, 시종신의 어버이로 나이 일흔이 넘었기에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곧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동지돈녕부사로 옮겼으나 돈녕(敦寧)이 다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경술년(庚戌年,1730), 여든이 되었다는 이유로 가의대부로 승진하였다. 갑인년(甲寅年,1734) 6월 18일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그 이력의 시종이다. 공은 나이 여섯 살에 모친의 명으로 고을의 어른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어른에게 일이 있어 공에게 공부를 쉬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머니가 꾸짖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어른이 말하기를,
“내가 나갔다고 말하면 꾸지람을 면할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속여도 됩니까?”
하니, 어른이 몹시 놀라 감복하였다. 한번은 국화를 읊으라고 하니, 공이 즉시 대답하기를,
만물이 모두 쓸쓸한데 / 萬物皆蕭索
국화만 홀로 피어 향기를 뿜네 / 菊花獨開香
하니, 사람들이 모두 안기동(安奇童)이라 지목하였다. 교관 조봉원(趙逢源)에게 수학하게 되었는데, 함께 배우는 사람 중에 영재가 많았으나 조봉원이 공을 가장 기특하게 여기고 아꼈다. 손님이 질문하면 공에게 먼저 나서서 대답하게 하였다.
일찍 부친을 잃고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살았다. 상을 마치자 모친이 시골집이 외지고 누추하다는 이유로 공을 데리고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공은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독실한 뜻으로 공부하였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경전과 사서를 통달하니 문명이 몹시 자자하였다. 집이 장의동(藏義洞)에 있었는데, 동네에 이름난 재상과 큰 선비가 많았으나 모두 자신을 굽히고 교유하였다.
한번은 두세 동지와 태백산, 소백산을 유람하였는데, 태백산이 전쟁을 피할 만하다고 여겨 곡식을 모아 쌓아놓고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산 가까운 몇 고을 사람들과 결사(結社)를 맺고 낙산계(洛山契)라 이름하였다. 평소에는 산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오면 서울 사람이 도와주고, 난리가 나면 서울 사람이 산에 사는 사람에게 귀의하기로 하였다. 그의 조처가 대부분 이와 같이 원대하였다.
기사년(1689), 중전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시자 공은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과 함께 대궐에 호소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오 양곡(吳陽谷 오두인)을 비롯한 여러 공이 상소하여 극력 간언하다가 대궐에서 심문을 받았기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소두(疏頭)가 되려는 자가 없었다. 진사 성규헌(成揆憲)이 강개하여 스스로 맡았으나 어떤 이가 헐뜯었는데, 공은 그가 중지시키려는 것을 미워하여 의리에 근거하여 준엄히 책망하였다. 얼마 후 어떤 조정 관원이 와서 무익하고 화를 보탤 뿐이라고 말하니, 공이 분개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며,
“우리들은 본디 우레 같은 주상의 위엄을 피하지 않소. 이것이 얼마나 중대한 의리인데 조그마한 일개 조정 관원이 감히 저지할 수 있겠소. 더 이상 말하지 말고 속히 나가시오.”
하니, 좌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낯빛이 바뀌었다.
병자년(1696), 모친상을 당했는데, 예제를 넘을 정도로 슬퍼하여 몸을 상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모두 희어졌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정도였으나 공은 홀로 태연하여 터럭 하나도 구차하게 남에게 취하지 않고 오직 책을 보며 스스로 즐겼다. 고을의 어린이들이 배우러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은 영재를 교육하는 것도 한 가지 즐거움이라 여겨 사람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면서 한결같이 성심을 다하였다. 비록 몹시 어리석고 노둔한 사람도 반드시 반복하여 깨우치느라 날이 저물도록 자기가 배고프고 목마른 줄도 몰랐으니, 오래지 않아 성취시킨 인재가 많았다.
경인년(1710), 바다에서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상께서 구언(求言)하였다. 광주의 선비들이 공을 소두로 추천하여 공이 대궐에 나아가 먼저 나라를 지킬 방책을 논하고 겸하여 평소 걱정하던 일을 덧붙였는데, 상소가 모두 수천 자였다. 성상께서 가상하다는 비답을 내리셨다.
처음 명릉 참봉에 임명되었을 때 늙었다는 이유로 게을리하지 않고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직분을 다하고야 말았다. 내가 예조 참의로 명릉에 가서 봉현(蠭峴) 길이 열렸는지 막혔는지 간심(看審)하였는데, 공은 짚신을 신고 걸어서 따라다니며 편리 여부를 몹시 자세하게 말하였다. 형조 좌랑을 지낼 때는 젊은이보다 부지런히 직무를 수행하여 판결이 적체되지 않아 형조에서 강직하고 현명하다고 추켜세웠다. 우리 중부 귀락공(歸樂公 이만성(李晩成))이 장관으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송사가 있으면 번번이 공에게 맡겼는데, 권세가와 관계된 일이라도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법으로 결단하였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사손(嗣孫)이 자주 끊겨 마침내 서인이 되자 공은 종중의 한 사람을 골라 종가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건의하였다. 먼 선조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묘소가 평산(平山)에 있었는데 거의 무너지자 공이 종인들의 앞장을 서서 다시 수축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부정공(안응하)이 절행을 세우고도 정려를 받지 못한 점을 통탄스럽게 여기고, 또 인몰되어 일컬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아들에게 고하기를,
“이 묘표를 세우기 전에는 부모의 묘표도 세울 수 없다. 나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네가 도모해라.”
하여 마침내 소원대로 하였다. 선조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상휘가 영천(榮川)의 수령이 되자 공을 모시고 임소로 왔다. 공은 소백산을 유람하며 종종 수레를 버리고 도보로 다녔는데, 경쾌하게 다니면서 사흘 동안 피로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나이 여든이었기에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다고 감탄하였다.
신해년(1731), 공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영천의 여든, 아흔 먹은 노인들이 각기 자제를 데리고 와서 수레를 막고 지켰다. 또 거의 열흘 동안 번갈아 관청 문을 지켰다. 공이 근심하여 새벽을 틈타 말을 타고 혼자 갔다. 공의 부고가 알려지자 영천의 관례(官隷)들 역시 서로를 이끌고 망곡(望哭)하였으니, 어진 마음을 미루면 자연히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든다는 점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공은 일찍부터 세상을 다스리는 업적을 자임하며 항상 강개하여 천하를 모두 구제할 뜻을 두었다. 그러나 영락하고 불우한 신세가 되자 매번 시의(時宜)를 헤아려 권력자에게 말하여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랐다. 의론이 평이하고 실질적이었기에 요컨대 지금도 쓸만하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흉금을 터놓고 천하 일의 성패와 역대의 흥망, 손익과 득실을 말하였는데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고, 끝없이 이어져도 듣는 이들이 피로한 줄도 잊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지성에서 나와 국가의 명령에 하나라도 불편한 점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때문에 밤새도록 불쾌해 하였다.
아, 만약 공이 일찍 등용되었다면 그 충성스러운 계책과 넓은 식견, 기개와 문장으로 필시 한 시대의 명신이 되었을 것이며, 아래로 백 리 고을을 맡았다면 정사와 교화를 시행하여 필시 볼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60년 동안 곤궁하게 지내다가 비로소 미관말직을 얻어 끝내 포부를 조금도 시험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부인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나 74세에 세상을 떠났다. 공의 관직에 따라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덕을 좋아하여 군자에게 걸맞았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징(相徵)은 일찍 죽었고 딸은 김대수(金岱壽)에게 시집갔다. 상휘(相徽)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을 지냈다. 나는 평소 공의 아름다운 덕에 감복하였기에 지금 묘갈문을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곤궁할수록 더욱 굳세야 하고 / 窮當益堅
늙을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 / 老當益壯
예전에 이 말을 들었는데 / 昔聞斯語
지금 안씨 어른에게서 보았네 / 今見安丈
반드시 옛도를 행하여 / 必行古道
지금 풍속에 구애되지 않았네 / 不拘今俗
실천은 자기에게 달렸으니 / 爲之在我
그저 힘을 다할 뿐이었네 / 但當盡力
이 의리를 미루었으니 / 推此義理
어디를 간들 그렇지 않았으리 / 何適不然
덕을 컸으나 지위가 낮았으니 / 德鉅位細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은 천명이라네 / 不我者天
명을 지어 밝히니 / 銘以昭之
먼 훗날까지 전하리라 / 有來億年
[주-D001] 동돈녕 안공 묘갈 :
이 글은 안구(安絿)의 묘갈명이다. 안구의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자유(子柔)이다. 1651년(효종2) 태어나 1734년(영조10) 6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주-D002] 돈녕(敦寧)이 다하였다는 이유 :
돈녕은 왕실의 친인척을 말하는데, 왕의 동성친(同姓親)은 9촌, 이성친(異姓親)은 6촌, 왕비의 동성친은 8촌, 이성친은 5촌, 세자빈의 동성친은 6촌, 이성친은 3촌 이상에 해당한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돈녕이 다하였다고 한다.
[주-D003] 곤궁할수록 …… 한다 :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빈객들에게 “장부의 뜻은 곤궁할수록 더욱 굳세야 하고 늙을수록 더욱 씩씩해야 한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