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 21일 새벽 면목동 기독교병원 응급실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숨이 멎어 하늘이 된 당신을 죽은 듯이 아주 영 죽어버린 듯이 당신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눈을 감고 무엇을 보시나요 입을 다물고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나의 이 더러운 손 당신의 거룩한 이마에 얹어 보았습니다 지금은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이마 오싹하며 나는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떨림은 광주였습니다 홍기일 열사였습니다 그것은 조국이었습니다 두 동강 나 찢어지는 아픔 몸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결코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픔 딛고 서서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절망을 불살라 가슴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질크러진 당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이번엔 내가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의 감은 눈에 무엇이 보이나 나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자 당신이 내 눈 속에서 와짝 눈을 뜨시더군요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수도 없는 눈으로 초등학교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눈으로 먼지가 덕지덕지 앉아 숨막히는 풀이파리들 위에 아침 이슬로 내려 맑게 맑게 빛나는 양심으로 치고 받고 따라가며 찌르고 찌르고는 짓밟는 그러고도 모자라 미쳐 버리는 세상 활활 무작정 타오르는 불길 고지식한 사랑의 외곬으로 번득이는 핏발 선 눈으로
그래서 계훈제 선생은 꾸부정한 몸으로 당신 앞에서 나는 가짜구나고 일생일대의 고백을 했던 거군요 물론 이 문익환이도 당신 앞에서 죄인일밖에 그러자 당신이 내 속에서 속삭이는군요 뭘하고 있어 뭘하고 있어 그렇군요 우리의 입을 아예 꿰매버리는 게 좋겠군요 당신 앞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모닥불이 훨훨 타오르면 부나비야 뛰어들면 되는 거니까요
당신의 어머니는 이제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몸부림도 치지 않습니다 고요히 어린 손자를 보듬고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중얼거리십니다 이상하여 눈만 감으면 광영이 뛰어다니는 게 여기도 저기도 보이니 저기 다 내 아들 아닌개비여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게 여기도 저기도 보이는구만 저 아우성이 모두 광영이 아닌개비여 저 한숨도 슬픔도 아픔도 앞산 뒷산 메아리도 모두 광영이 아닌개비여 오 자유 오 자유 저 노래는 또 뭐여 그것도 광영이구마 그렇습니다 광영이는 겨레입니다 한 맺힌 휴전선입니다 휴전선 위에 쏟아지는 피눈물입니다 철조망에 걸려 펄럭이는 바람입니다 어머니의 옷자락에 매달려 우는 깃발입니다 민주주의의 깃발입니다 민주주의인지 뭔지 난 무식해서 모른당께 광영의 마음이사 아시겠지요 내 속에서 나온 새끼 맴이사 알지라우 그러면 됐습니다 광영의 마음이 바로 민주주의랍니다 내 치맛자락에 매달려 펄럭이는 광영의 맴 그게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 만세다 광영아 내 아들 광영아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 광영이는 이젠 말도 못하는디 말이여 제 몸에 불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 어쩌자고 모두들 이 지랄이여 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 오게끄럼 막는당가 왜 문목사랑 계선생이랑 이목사랑 끌어낸당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디 그기 정말인개비여 꼭 제 방귀에 놀라는 토끼 꼴이랑께 광영의 굽힐 줄 모르는 마음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지 그렁개비여 광영의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겄어 어림반푼 없는 소리지 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 그 맴이 어찌 식겄어 그 맴이 식는다면 당신들이 떠들어쌌는 조국이고 민주주의고 다 거짓말이여 거짓말 자유고 진리고 정의고 다 개나발이여 개나발 맞습니다 어머니 그 마음이 식으면 모든 게 개나발이라는 말 천번 만번 옳은 말입니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거짓말이라고는 몰랐응께 이기 돌이라 하면 그기 돌인 거고 이기 나무라 하면 그기 나무인 거고 난 형들처럼 안 살 것이여 하더니만 이렇게 제 몸에 불 팍 지르고 죽지 안히였겄어 그렇군요 어머니 죽음으로 산 그의 진실이 그리도 무서운 거군요 거짓말로 살이 피둥피둥 오른 것들이 우리 아들 광영의 그 거울 같은 마음씨가 어찌 안 무서울 것이여 그의 진실 앞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이 숨을 수 없이 된 거지요 그렇다문사 을매나 좋을 것이여 내 아들이사 대학교 졸업장 못 받아 보고 장개도 못 가보고 땅속에 들어가 썩어버리겠지만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