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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13 - 영국군과 네델란드군에 맞서 독립전쟁을 치룬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8,200개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 섬나라이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파푸아
뉴기니, 동티모르, 호주와 가까우며 인구는 2억 8천만명으로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위" 로
87% 가 무슬림이니 아라비아 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무슬림이 많은 국가입니다.
국어는 Bahasa Indonesia 로 알려진 인도네시아어로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에서
사용하는 말레이어와 비슷해 상호 의사소통이 대개는 가능하며.... 대부분의 인니인들이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알지만 그 외에 수많은 지방 언어들이 산재하는데, 일본 점령군이
영어와 네델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바람에 수백개에 달하던 언어가 통일된 면이 있습니다.
땅도 중국- 인도- 카자흐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아시아에서 5번째로 크고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는 세계 여느 나라들이 그렇듯 별로 좋지않은 편으로 말레이시아
와는 건국 초기에 영토 설정을 두고 전쟁까지 했으며.....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근로자들의 처우문제, 말레이계 문화권 정통성 논란을 이유로 자주 싸웁니다.
호주와의 관계도 동티모르 독립문제, 해상난민을 둘러싼 갈등, 호주인 마약사범 사형 집행으로
갈등이 심각하며 싱가포르와는 말레이시아 견제에 있어서 협력 등으로 관계가 좋은 편인데
1957년부터 1998년까지는 독재정치가 이루어졌고..... 1998년에 민주화되었으며 정상적인
의미의 국가원수 선거가 이루어진 것은 1999년이며 최초의 직선제 정권교체는 2014년 입니다.
인도네시아 군도의 문자 기록은 토착 국가들이 서기 2~ 4세기경 인도에서 온 상인들과 교류를
통해 인도의 종교, 문화를 받아들여 인도의 문자를 차용해 남긴 비문에서 시작되니 최초의
국가로는 서부 자바 지역의 타루마 왕국(358~7세기 후반) 과 동부 칼리만탄 지역의 쿠타이
왕국(4~5세기경) 이 있었으니..... 남인도의 팔라와 문자로 된 산스크리트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수마트라섬에는 서기 3세기 중국 오나라 기록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 에 따르면 3세기에 가영(歌營)
이라는 말레이 국가가 중부 잠비 지역에 있었다고 하며..... 5세기 중반에는 중부 잠비 지역에 칸달리
왕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으니 유송에 454~464년 사신을 보냈고 519년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외에 6~7세기 북부 수마트라에 나구르, 남부 수마트라에 툴랑바왕등 국가가 있었다고
하며..... 수마트라섬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헌기록은 682년경 팔렘방 부근에서 기록
되어 1920년에 발굴된 크두칸부킷 비문으로 이 석문은 팔라와 문자로 된 고대
말레이어로 쓰여 있었으며, 여기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보르네오/칼리만탄 지역에 14세기 자바 문헌 《나가라크르타가마》에서 마자파힛의 속령
으로 재등장하며 사라왁강 삼각주 지역은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 경유지로서
6세기 부터 1300년 전후까지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느데 마자파힛이 지방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브루나이 술탄국(1368–1888) 등이 마자파힛 제국으로 부터 독립을 합니다.
말레이계 불교국가 스리위자야 왕국은 7세기에 건국되었으니 8세기 중반 대승불교가 정치적, 사회적
주류를 이루었으며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거점으로 자바섬, 말레이반도 전역, 칼리만탄(보르네오)
까지 영향력을 행사햇는데 아랍–인도–동남아–중국–신라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해 중계무역으로 번창
하였는데, 먼저 군도에 전래된 힌두교 기존세력이 구축한 해상 무역로를 잠식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동시대 자바섬 서부에 순다 왕국(669–1579) 과 자바섬 중서부에 갈루 왕국(669–1482)이 있었으며,
자바섬 중부 및 동부에는 마타람–므당 왕국(732–1016), 카후리판 왕국(1019–1045), 크디리
왕국(1045–1221), 싱하사리 왕국(1222–1292) 등이 마자파힛 제국 등장 이전까지 존재하였습니다.
1025년 촐라 제국의 라젠드라 촐라가 함대를 이끌고 스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기습해 궁성과
사원을 점거하고 막대한 재물을 약탈했을 뿐더러, 국왕 상라마를 생포하기에 이르며 톡톡히
재미를 본 촐라는 수마트라 북동부의 파나이, 말레이 반도 서부의 크다 등지에서 스리위자야의
항구들을 점령해 약탈하니 타밀 상인들이 촐라의 보호하에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로 들어옵니다.
싱하사리 왕국은 13세기에 크르타나가라 치하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보낸 몽골군이 무서운 속도로 기세를 올리며 아시아를 정복하고
있을 때니 칸은 싱하사리 왕국도 원나라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기 위해 맹기(孟琪) 라는
관리를 보냈으나 크르타나가라 왕은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는, 귀를 자르고 쫓아내 버립니다.
격노한 쿠빌라이는 군대를 일으키니 남송인으로 구성된 3만의 병사와 1천척의 함선, 1년 치의 보급품으로
원정을 준비했지만, 1291년, 싱하사리 왕국 자바의 크디리 영주 자야캇왕이 크르타나가라왕에게 반기를
들고 크디리 왕국을 세우니 크르타나가라왕의 사위 라덴 위자야의 군대가 북쪽에서 쳐들어온 크디리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남쪽 방면에서 기습해 온 자야캇왕이 무방비 상태였던 수도 쿠타라자에 입성합니다.
원나라 군대의 침공을 앞두고 크르타나가라 왕은 자야캇왕에게 살해당했고 싱하사리를 병합한 크디리의
자야캇왕 왕이 안심한 동안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섬 동부 수므늡 지역의 지배자였던 아랴 위라라자
의 도움으로 마두라섬으로 피신했으니...... 지역의 마자라는 과일이 쓴 맛을 냈다고 해서 이름을
'쓴 마자', 즉 '마자파힛' 이라 짓게되니 인도네시아 최강국이 되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입니다.
한(漢), 몽골 혼성의 2만 군대와 1천척으로 취안저우를 출발한 원나라 함대는 베트남과 참파 해안을
따라 남진해 말레이 반도를 지나니 여러 군주들은 몽골 군대의 위세에 겁을 먹어 조공을 바치며
복속했고 몽골군은 다루가치들을 남기며 마침내 멀리 떨어져 있는 자바섬까지 근접하고 있었습니다.
자야캇왕에게 도전했으나 승리하지 못해 물러난 라덴 위자야는 몽골과 동맹을 맺고 자야캇왕을 쳐부수기
위해 군세를 모으고 몽골군에게 크디리 왕국의 지도를 넘기는등 적극 협조했으니..... 격전의 날에 라덴
위자야군을 선제공격하려던 자야캇왕의 군대는 몽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가하자 속수무책으로 패합니다.
몽골–라덴 위자야 연합군은 다하 전투에서 3만 군세로 10만에 달하던 자야캇왕의 군대를 분쇄했고, 2천명
이 넘는 적군을 사살하고 익사시켰고... 자야캇왕 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도망쳤으나 몽골군에게 생포되니
승리를 거두자 라덴 위자야는 조공을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자파힛으로 돌아갈수 있게 허락을 구합니다.
원나라 장군 시비와 위구르인 장군 예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가 돌아갈수 있도록 허가했으나 한족 장군
인 고흥(高興) 만은 반대하고 경고했는데.....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이백명의 최정예 병사는 라덴
위자야의 초청에 따라 조공을 받기위해 비무장 상태로 마자파힛으로 왔으니 기회만 노리고 있던
라덴 위자야는 몽골군을를 공격해 무찔렀고, 나아가 기습 공격으로 몽골군 본대마저 패퇴 시킵니다.
정예 군인이 3천명 이상 숨진 사건에 원(元)군은 분노하면서도 군인과 전리품을 수습해 퇴각해야
됐고, 덴 위자야는 싱하사리–크디리 멸망 이후의 권력 공백을 틈타 자바에서 세력을 넓혀
1299년 자파힛을 수도로 하는 왕국을 세우니.....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마자파힛 제국이 됩니다.
하얌 우룩 황제시대 마자파힛 제국은 세력을 확대해 경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으니 해상원정으로
자바섬뿐 아니라 말레이 반도 부터 수마트라섬, 보르네오섬, 술라웨시섬, 술루 제도, 말루쿠 제도,
소순다 열도와, 뉴기니섬의 서해안 지역까지 이르러 현대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확대됩니다.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은 중국(원나라)–동남아–인도–아라비아–투르크와 이집트–베네치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해상교역 루트의 한 축을 장악하고 번영을 누렸으니 마자파힛의 궁정어인 자바어로는 수많은
시와 연대기가 쓰였으며, 자바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막대한 유물운 제국의 영화를 가늠할수 있게 합니다.
17세기 자바섬 발리의 겔겔 왕국은 1651년 지방이 독립해 클룽쿵등 9개의 소왕국들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는 중에 북부 해안지대의 불렐렝 왕국은 자바 및 여러 군도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였는데.... 1718년에는 수라바야와 연합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블람방안 왕국은 겔겔 왕국이 분열된 후에도 존속해 타왕 알룬 2세 전성기에 발리에 영향력
을 미치기도 하였는데 1743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마타람 군주였던 파쿠부워노
2세는 파수루안 동쪽의 마타람 속령을 해방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동인도 회사는
블람방안 지역에 자유로이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획득했으나 바로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18세기 중반, 블람방안 왕국은 믕위왕국의 간섭으로 쿠타 브다가 블람방안을 통치하였으며, 울루팡팡
지역에는 믕위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영국 세력이 상관을 설치하고 교역활동을 전개하자
네덜란드는 1766년 8월부터 자바와 발리 사이 발리 해협을 순찰하며 영국 상선을 나포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네덜란드는 블람방안 지역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1767년 2월 20일 3,300명 규모의 원정군
(유럽인 335명, 자바 및 마두라계 병력 3천명)을 모아 블람방안으로 파병했고 3월까지
네덜란드 원정군은 파나루칸등을 점령하자 윙 아궁 윌리스는 1년을 더 항쟁하였으나
1768년 5월 18일 패배하여 세력이 와해되었고, 동인도 회사의 블람방안 정복은 완성 됩니다.
자가파티는 1771년 12월 18일의 전투에서 네덜란드 편에 선 마두라의 수므늡군과 싸우다 부상
을 입고 다음날 사망하였으나, 전쟁은 계속되었고 동인도 회사는 몇 차례 패배를 겪는 등
고전하였으며 1772년 8월에는 전황이 불리해져 군대를 철수시키기도 했지만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더 큰 규모의 원정군을 보냈고, 1772년 말까지 네덜란드의 승리로 종결됩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와 수마트라 경략에 집중하다 19세기 중반부터 발리 왕국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으니 7차례의 원정(1846–1908)을 거쳐 발리 왕국들은 네덜란드 보호국이 되었는데
최초로 네덜란드의 표적이 된 것은 유일한 발리의 무역항인 싱아라자(Singaraja) 를
소유하고 적극적 상업 교류를 지속했던 발리에서 가장 개방적인 왕국 불렐렝 이었습니다.
1846년, 발리 해안으로 밀려간 난파선이 약탈된 사건으로 네덜란드가 포함을 앞세워 북부 해안 불렐렝
을 침공하고 교역항 싱아라자를 점령, 왕궁을 파괴한후 불렐렝에 불리한 협정을 맺고 돌아갔으니.....
이를 치욕으로 여긴 불렐렝의 실권자인 재상 즐란틱은 협정 이행을 거부하고 불렐렝인들을 규합하여
항전 태세를 취하자 네덜란드는 1848년 다시 불렐렝을 침공하였지만 불렐렝군에 패퇴하고 돌아갑니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아예 불렐렝을 지배하에 두고자 1849년 본격적인 원정을 개시하였으니
격렬한 전투 끝에 불렐렝은 패퇴하였고, 싱아라자는 점령되어 네덜란드령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 자가라가에서 수많은 불렐렝인은 진격하는 네덜란드군 앞에서 숭고한 자살 의식
으로 품위를 유지하며 죽었는데 이것이 네덜란드에 대한 최초의 푸푸탄(Puputan) 이었습니다.
즐란틱과 불렐렝의 왕은 카랑아슴 왕국으로 도피해 반네덜란드 세력을 규합하고자 하였으니 네덜란드는
카랑아슴의 숙적 롬복섬의 마타람 왕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발리 남해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니
네덜란드 선박을 타고 발리로 이동한 롬복군은 카랑아슴-불렐렝 세력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
었고 즐란틱과 불렐렝 왕, 카랑아슴의 왕은 전사하니 의식적인 집단 자살(푸푸탄)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연속된 승리에 고무되어 네덜란드는 내친김에 발리 전체를 복속시킬 요량으로 발리의 명목상 수도인
클룽쿵으로 진격하니 카냐 여왕은 쿠삼바에서 야습으로 네덜란드군 지휘관 안드레아스
빅토르 미힐스를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 네덜란드군 잔당은 클룽쿵과 클룽쿵에
호응하는 바둥, 기아냐르, 타바난등 3만 3천에 달하는 연합군에 쫓겨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부 쿠타(Kuta) 에서 바둥의 왕에 고용되어 교역하던 덴마크인 마스 랑에가 네덜란드와 클룽쿵 간에
중재자로 개입하여, 1849년 7월에 불렐렝과 즘브라나 지역을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롬복 세력이
카랑아슴을 지배하는 조약이 체결되니 네덜란드는 싱아라자에 발리 최초의 영구적인 네덜란드 정청
을 설치하였으며.... 1855년부터 네덜란드 지방 총독은 불렐렝과 즘브라나의 토착세력 위에 군림합니다.
1891년, 롬복섬 동부의 무슬림 사삭인이 마타람을 거점으로 하는 발리계 구 지배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전쟁은 1894년까지 이어졌고, 사삭 반란군은 1894년 2월 네덜란드
에 지원을 요청하자..... 세력 확장을 노리던 네덜란드는 1894년 7월부터 11월까지의
롬복 원정을 통해 마타람 세력을 제압, 롬복 및 그 속령인 카랑아슴을 지배하게 됩니다.
롬복의 압도적인 패배를 목격한 발리의 방리와 기아냐르도 곧 네덜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함으로써, 9개
소왕국 중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력은 이제 3개(클룽쿵, 바둥, 타바난)뿐이었으니 9왕국 중 믕위
왕국은 부기스 용병 소총대를 앞세운 1891년 바둥–타바난 연합군의 원정으로 멸망한 상태 였습니다.
네덜란드는 난파된 자국배를 약탈한 바둥에 대해 1906년 6월, 남부 해안 봉쇄를 시작하고 네덜란드에
반항하는 세 왕국에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1906년 9월 14일 네덜란드 원정대가 사누르
해안에 상륙하자 바둥군은 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네덜란드군은 수월하게 내륙으로 진격합니다.
네덜란드군은 바둥의 수도 덴파사르에 당도해 궁전으로 들어가니 바둥의 라자가 흰 옷을 입고
가마꾼 4명이 메는 가마에 올라 앉아, 흰 옷을 착용한 신하들과 함께 장례의식을 거행
하며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이때 라자를 수행하던 브라만 사제가 검을 라자의
가슴에 찔러 넣었으며, 뒤이어 동시에 수많은 신하들이 집단으로 자살하기 시작합니다.
당황한 네덜란드군은 발포하니 라자의 행렬은 전멸하고 네덜란드군이 궁성을 약탈,
파괴하였으니 이것이 바둥의 푸푸탄이었으며, 이로써 바둥은 멸망하는데 타바난
역시 네덜란드군에 항복한후 수용소에서 푸푸탄을 거행했으며 네덜란드는
클룽쿵으로도 진격하려 했지만, 클룽쿵의 라자는 요새를 파괴하고 항전을 멈춥니다.
1908년, 발리에서 아편 생산을 독점하려는 네덜란드 시도에 반발해 카랑아슴의 라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클룽쿵과 방리의 라자도 합세하니 반란군은 자바인 아편 거래 중개인을 참살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자 네덜란드는 신속하게 진압군을 보냈고, 반란군을 분쇄하고 발리의 수도 클룽쿵을 포격합니다.
1908년 4월, 클룽쿵의 라자, 데와 아궁 잠베 2세는 수행원 2백명 및 부인 6명과 함께 흰 옷을
입고 전설적인 단검을 들고 절망적으로 네덜란드군을 향해 돌격했는데 예언에 따르면
네덜란드군이 물러갈 것이라고 믿었으나, 네덜란드군이 발포하자 라자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여섯 왕비와 신하들은 들고 온 단검으로 푸푸탄을 수행하니 네덜란드군은 약탈후
클룽쿵 궁성을 불태웠고 방리와 카랑아슴은 항복하였으니 네덜란드의 보호국이 됩니다.
보르네오섬의 해안 지대에서는 타 군도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문명이 발달하였고, 남칼리만탄주
(보르네오 동남부) 지역의 반자르 술탄국(1526–1862)처럼 근세에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고 자바, 수마트라, 발리처럼 전통예술 및 기록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킨 국가도 있었습니다.
동칼리만탄 해안에서는 쿠타이마르타디푸라 라는 고대 국가가 기원후 4세기에 생겨났고 칼리만탄(보르네오
중남부) 는 반자르 술탄국이 중부칼리만탄주의 해안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지배하기도 하였으니 중부
칼리만탄주 해안 지대에는 반자르 술탄국의 술탄 무스타인 빌라(1595–1642)가 아들을 군주로 세운
코타와링인 왕국(1615–1948)이 존재했으며 보르네오 북부에서는 브루나이 술탄국이 한때 번성했습니다.
말루쿠 제도는 트르나테, 티도레, 할마헤라에서 산출되는 정향과 반다제도에서 산출되는 육두구
로 인해 향료무역 수출지역이니 부유한 해상무역 국가들이 발달했는데 고대 향신료
무역은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들의 해양 무역로를 따라 이루어졌으니 정향은
기원전 부터 인도와 중국의 기록에 등장했고, 기원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도달합니다.
육두구는 기원후 6세기부터 인도를 거쳐 동로마제국에 수출되었는데 희귀 향신료들, 특히 육두구
의 원산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13세기에 인도양 무역에서 아랍계 상인들이 육두구의
원산지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어느정도 특정했으니 이런 귀중한 정보는
아랍 및 인도 중개상을 거쳐 향료를 수입한 유럽인들에게는 훨씬 나중에 공개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암본을 트르나테 술탄국에서 얻어 차지하고 말루쿠 거점으로 삼았으나 17세기에
진입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포르투칼과 영국 동인도 회사를 물리치고 반다지역을 지배하게 되니
얀 피터르스존 쿤 총독은 토착민을 학살하고 노예화하여 지역에서 토착민 인구는 전멸하다 시피
했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68개 구획으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육두구 생산기지로 개발됩니다.
일본 제국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석유를 위해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를 침공하니 1942년 3월
자바 해전에서 승리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는데 중국 대륙과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치할 때는 괴뢰국
으로 통치했지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군정으로 통치했으니 인도네시아인들은 대동아 공영권
에 속아 일본군을 네덜란드로 부터 해방자로 알고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그랬듯 열렬히 반겼습니다.
일본도 네덜란드의 지배 때 보다는 나아졌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고, 인도네시아의 민중을 동원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 자치권을 허용하였고, 인도네시아인
군대를 조직할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섬에 유배되었던 수카르노는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건에 석방되었으니 민중총력결집운동을 조직해 일본군에 협력해 네덜란드군과 싸워서 몰아냅니다.
인도네시아는 일본 제국의 항복 이틀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지만 일본군은 10월경까지는
치안을 유지하다가 영국군이나 네덜란드군에 항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군 지휘관들은 잔류
일본군을 이끌고 통제를 거부하는 인도네시아군과 스마랑 전투를 벌이거나 반대로
인도네시아군에 동조해 수라바야 전투에서는 어차피 포기할 일본군의 남은 무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동인도에 진주한 연합군 포로가 된 일본군은 한동안 연합군에 억류되어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1946년 6월까지 대부분 일본으로 송환되었지만 그러나 상당수 일본군(25,000명?)
은 연합군 통제를 벗어나 인도네시아 독립파와 적어도 일시적으로 협력했고
그중에 3천명 정도는 아예 그들과 함께 식민통치자인 네델란드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짧은 점령기 동안 인도네시아 형성에 기여한 바가 없지는 않았으니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사용금지
되고 인도네시아어가 유일한 공용어로서의 지위를 얻게되자 7천개 섬에 인도네시아어가 보급되는
놀라운 성과가 있었으며 유럽어, 일본어 기술 문헌자료를 일본의 지원으로 인도네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또한 인도네시아를 회유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7일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독립
국가로 만들어주겠다는 발언을 했으니 실제로 1945년 3월 1일에는 일본 점령당국에 의해 독립준비
조사회가 설립되었고 1945년 8월 7일에는 21명의 인도네시아인들을 위원으로 하는 독립준비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니....... 일본이 조금만 늦게 항복했어도 "일제의 괴뢰국" 이 설립되었을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어의 발전은 독립 후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인도네시아어를 공식어로 사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도네시아와 일본의 관계 개선에도 한몫 하게 되는데 점령기간이 3년으로
짧기도 하고, 이전의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이나 이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 때문에 반
네덜란드 감정이 심한지라..... 수탈이 심했던 일본점령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악감정은 없다시피 합니다.
제2차세계대전시 네덜란드는 온 국토가 잿더미가 된데다가 나치 독일의 심한 패악질로 점령기동안
20만명의 자국민이 학살당했고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했으며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 나라를 재건하는 중이라 본토를 수습해야 될 상황에서도..... 식민지을 잃지
않겠다고 수만명의 병사를 동원해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여 전쟁을 벌였으니 국제여론이 악화
되어 유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미국등 서방 강국들의 압력으로 독립을 허용하는 망신을 당합니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재침략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프랑스
가 베트남을 재침공해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도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일어나고 있었으니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수카르노가 활동을 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에 의해 본국 네덜란드가 점령당하자, 인도네시아는 권력 공백상태가
발생하는데 물론 식민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소수의 병력은 남아있었지만 치안, 질서 유지였지
적극적인 군사행동이 가능하거나 식민지 수비가 가능한 병력은 아니었으므로 사실상 유명무실했습니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일본령 동인도를 설립해 군정을 실시하는데 한때 동남아 해방자로 여겨
졌던 일본도 점령지에서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통치를 펼쳤지만, 그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에 기여한 면도 있었으니...... 일본은 행정, 군사, 제도적으로 네덜란드 식민통치
체제를 배격했고, 언어 또한 네덜란드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권장 합니다.
일본어를 권장하되 이게 싫으면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으며 또한
일본이 '의용군' 으로 써먹으려고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작게는 아리사카 소총부터 치하 전차, 하고 전차, 크게는 G4M 폭격기까지 일제 무기
를 많이 남겨놓고 갔는데, 이 또한 나중에 네델란드와의 독립전쟁때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네덜란드에게 빼앗기느니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으며.... 인도네시아는
일제가 항복한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독립을 선언하게 되고 수카르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인도네시아 중앙국가위원회(KNIP)'는 일제의 항복으로 발생한 행정 공백을 메꾸려
했으나 동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이, 자바섬을 비롯 중앙 인도네시아는 영국군이 상륙합니다.
네덜란드는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국왕은 영국에 망명가 있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야욕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으니.... 프랑스 식민제국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를 재지배 하려는 야욕을 보였고, 변화하는 시대를 가장 순순히
받아들인 영국 조차도 "수에즈 운하는 계속 가지면 안될까?" 정도의 집착은 있었습니다.
본국 인구와 영토 보다 큰 동인도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네덜란드
입장에서 자바 설탕, 수마트라 석유와 고무등 네덜란드가 오랜 기간 투자하여 개발해둔
동인도의 상품작물과 원자재 산업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이를 관리하며
거둔 수익은 네덜란드의 전후 재건에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되었으며 영국은 원래
연합국의 일원이자 식민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네덜란드의 동인도 재점령을 지지" 했습니다.
영국이 네덜란드를 지지한 이유는 영국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인의 독립의지는 일부 토착 엘리트
층에 국한된 문제이며, 식민지 민중들은 네덜란드의 합리적 통치를 여전히 원하고 있을 것'
이라고 오판했기 때문이니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5년 말 동인도에 진주한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단순 소요로 치부하고 네덜란드를 도와 진압에 들어갑니다.
영국군은 네덜란드령 동인도군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파 인도네시아인
들을 살해 및 납치했으며, 영국은 협상을 중재했으나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는 한반도 해방
직후 처럼 혼란기가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를 본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본국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인도네시아 문제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영국군은 우선 인도네시아 인민치안군을 비롯한 민중들의 무장해제를 명했으며 무기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내렸지만 오히려 인도네시아측을 자극하는 기폭제 역할이 되었고, 급기야 인도네시아인
들은 영국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무장을 한 상태에서도 걸핏하면 인도네시아 독립세력과
인민 치안군을 공격하여 잡아들였는데, 무기가 없으면 더 쉽게 잡혀들어갈 것은 불보듯 뻔했습니다.
"어이 영국군 놈들! 우리 인도네시아 청년, 인도네시아의 성난 황소들에게 흰옷을 적실 붉은피가 흐르는한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동지들이여, 투사들이여, 인도네시아 청년이여, 우리는 계속해서
싸운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국 인도네시아 땅에서 식민주의자를 모두 몰아낼 것이다. 오래도록 우리는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짓밟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시간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신은 가장 위대하시다('Allahu 'Akbar)! 자유를!" 수라바야 전투중 붕 토모(25세)의 연설, 1945년 11월 9일.
자카르타 다음 가는 제2도시 수라바야에서 영국군은 독립 지지파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으니 주요 항구
와 공군기지가 있어 전략적으로도 자바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으니 수라바야를 관리했던
일본군 중장 시바타 야이치로는 10월 3일 도시로 온 연합군 대표인 네덜란드군 대령에게 항복했지만,
인도네시아 독립파에 동조하였고 일본군의 남은 무기를 나눠주어 인도네시아군의 무장을 도왔습니다.
이어 10월 내로 파견된 영국군이 수라바야에 도착했고, 인도네시아군과 교섭하며 궁극적으로 인도네시아
측 무장 해제를 요구했는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군 연설가 붕 토모의 애국적 라디오
설이 연거푸 흘러나오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많은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으니 협상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 오해와 불신이 겹쳐 현장을 통제할수 없게 됩니다.
10월 27일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간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수카르노와 하타는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며 전투 개시후 10월 30일 영국군과 휴전을 가까스로 이끌어냈지만, 10월 30일 휴전
합의 직후 영국군 준장 오버틴 맬러비가 현장의 영국군에게 휴전 소식을 알리려고
이동하다가 전투 중인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조우해 피살되면서....... 휴전은 불가능해 집니다.
수라바야 전투(1945년 10월 27일~11월 20일)에서 영국군은 12만명에 달하는 독립군(10만 은 무장
수준이 빈약한 민병대)에 맞서, 최대 3만명의 정규군 및 해군의 엄호와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
해서 힘겹게 승리하는데 영국측 사상자는 최소 600명, 최대 4000명 이상이었고 무장과
훈련이 빈약했던 인도네시아군은 훨씬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전사자는 6,000~ 16,000명
이었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20만명에 달하는 수라바야의 민간인들이 피난을 갔습니다.
중부 자바 암바라와(Ambarawa)에서 벌어진 암바라와 전투(1945년 10월 20일~12월 15일)에서는 영국군이
처음에는 독립군의 저항 없이 주둔한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암바라와 지역을 점거했지만, 11월 말
시작된 독립군의 조직적 공격으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암바라와를 인도네시아군에 넘겨주고 퇴각하고 맙니다.
자바에 도착해 인도네시아군과 전투를 치른 영국군 일부도 동요하고 있었으니 영국군 병사들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그저 일본군 부역자들이 세운 단명할 괴뢰국이고, 이상한 사상을
따르는 극단주의자들에 불과하다는 편향된 네덜란드측 정보를 접하고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즉 당시 영국군들 입장에서 독립파는 '인도네시아 국민' 이 아니라 '추축국의 잔당' 이라고 교육
을 받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니 직전까지 독일, 일본 등 추축국들과 죽기살기로 싸워
갔던 영국군인 만큼 그 잔당을 소탕한다고 하니 전쟁 초기 영국군의 사기는 당연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지에서 싸우다보니 자기들이 싸운 상대는 진심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을 침략자로 인식하고 죽기살기로 처절하게 대항했던 것이니
자바에 동원된 인도 제국군들은 자신들 역시 식민지인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모순을 느끼기도 했으며, 아예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독립파가 추축국의 잔당이라는 판단이 오판임을 인정하고, 네덜란드 식민지 유지는 불가능한 만큼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킨 뒤 친서방 진영으로 편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으니 영국 세력은 1946
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협상을 중재하면서 1946년 11월과 12월에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습니다.
인도네시아군으로 전향한 인도군의 수는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 수라바야 전투에서 발생했고, 무슬림
이 대부분으로 1천명 정도로 추산되니 이들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끝난후 죽거나 실종되지
않고 남은 인원은 75명뿐이었으니 전쟁후 고향으로 돌아간 자도 있었지만, 많은 인도 제국군 전향자
들은 인도네시아 독립후 인도네시아에 남기를 선택했고, 새로 정비된 인도네시아군에 정식으로 편입됩니다.
수라바야 전투에서 영국군이 맬러비 준장의 피살에 대한 대규모 보복 공격을 벌여 인도네시아군
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11월 10일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지정되었으며, 인도네시아의 국가 기념일중 하나인데 자바 동부나 수라바야에서는 이
11월 10일을 단체명으로 따오거나 여러가지 방식으로 특별히 기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45년 말부터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에 상륙하기 시작했는데, 1946년 11월에는 규모가 12만, 자바
에만 5만 5천에 이르렀으니 이들은 우선 동인도 진주 과정에서 자카르타(1946년 1월), 보고르 등 일부
주요 도시 지역을 재점령하고 기존의 네덜란드령 동인도 민정부를 재수립했으니 인도네시아군은
1946년초 자카르타 방어를 위해 노력했으나 8천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 도시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1946년 시점에 모든 도시가 재점령된 것은 아니어서 자바 중부 욕야카르타나 수마트라 동부
프칸바루, 잠비처럼 인도네시아가 계속 보유한 도시도 있었으니 특히 수마트라 서북부
아체 지역은 반네덜란드 정서가 강해 네덜란드군이 한번 반다아체로 진입을
시도했다가 민심이 흉흉해 쫓겨나온 후에는 다시 진입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습니다.
영국군은 1946년말 철군 전까지 점령지역을 순차적으로 네덜란드군에 인계했는데, 특히
1946년 4월 17일에는 제3 도시 반둥이 영국에서 네덜란드 관할로 이전되었는데
반둥과 스마랑, 메단, 마카사르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자카르타 및 수라바야
와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인도네시아군의 후퇴와 영국/ 네덜란드의 점령이 이루어집니다.
스마랑을 제외하면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우선 스마랑에서는 1945년 10월 15~19일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잔류 일본군간 전투가 벌어졌고, 여기서 일본군이 승리해(인도네시아군
전사자 2천명, 일본군 전사자 150~850명, 일본군 실종자 231명) 스마랑의 관할권은
그대로 10월 19일 스마랑에 진입한 영국군에 인계되었고 이후 네덜란드군에 스마랑을 넘깁니다.
수마트라의 도시 메단에서는 1945년 10월 9일 네덜란드-영국 연합군이 도시로 진입해 인도네시아군
과 전투를 벌였으니 12월 초까지 양측은 도시를 부분적으로 점유하고 대치했지만 12월 중순
부터 전투가 격해졌고, 1946년 4월 결국 인도네시아군은 패배해 도시를 내주고 후퇴했는데
마카사르를 비롯한 남술라웨시에서도 처음에는 독립파가 지역을 장악했지만.....
1946년 4월 초까지 귀환한 네덜란드군이 독립파에게서 행정 기구를 대부분 빼앗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북수마트라와 남술라웨시에서는 산발적인 독립파의 게릴라 항쟁이 이어졌고, 남술라웨시
에서는 1946년 12월이 되면 네덜란드가 통제 가능한 지역은 마카사르시 영역 뿐인
상황으로까지 가기도 했으니 네덜란드는 비정규전 전문가 라이몬트 베스테를링이
이끄는 특공대를 투입해,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잔혹한 즉결처형을 하니 네델란드측
주장은 1,500명의 인도네시아인을 살해했다지만 인도네시아측은 40,000명으로 주장합니다.
반둥에서는 1945년 10월 영국군이 북쪽을 일본군에게서 인계받았고, 남쪽을 점유한 인도네시아
군과 대치했는데 인도네시아군이 11월말 공세를 펼치며 12월 초까지 시가전이 벌어졌으니
시가전 도중 발생한 홍수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구호 활동을 벌이는 인도네시아
군을 영국군이 공격했으니.... 반둥 북부에서는 인도네시아 민간인 10만명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영국군이 대규모 공세로 나오면 버틸수 없음을 알았던 나수티온(Nasution)의 인도네시아군
은 퇴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인도네시아군과 민병대, 남부 지역의 민간인
들은 3월 23일 밤, 함께 도시를 떠나면서 영국군이 도시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반둥 남부의 가옥과 상점 등에 고의로 대규모 방화를 벌여 도시 남부를 초토화했습니다.
소위 반둥 불바다(Bandung Lautan Api) 사건이라고 하니 이로 인해 반둥 시가지의 3분의 1이 파괴되고
수만~수십만명의 주민이 피난을 갔는데 이때 과격한 인도네시아 민병대 청년 2명은 영국군에
피해를 입히기 위해 퇴거하지 않고 다이너마이트를 안고 영국군 탄약고로 뛰어들어 자폭하기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48만명에 달하던 반둥의 인구는 1946년 영국군 및 네덜란드군의 접수후 10만 정도로 감소
했고, 반둥 남부는 완전히 파괴되어 1947년말 한 미국인 역사가는 반둥을 방문하고 "거리에 풀이
자라는 죽은 도시" 라는 평을 남겼으나....... 반둥의 인구는 독립전쟁이 끝난후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반둥 불바다 사건은 전력을 보존하고 적에게 항전 의지를 각인시킨 전술적 판단의 결과인 동시에 민족적
의지의 상징으로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높이 평가받았으니 인도네시아 작곡가 이스마일 마르주키는
이 반둥 불바다 사건을 테마로 '할로 할로 반둥'(Halo, Halo Bandung) 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1946년 11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기전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는 링가르자티 협정을 맺었으니 네덜란드
는 자바, 마두라, 수마트라 지역에서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반대로 인도네시아
는 보르네오와 동인도네시아(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 에서 식민 정부를 인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협정체결 직후에도 네덜란드군은 아직 독립파의 준동이 정리되지 않은 동인도네시아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하여 술라웨시 남부와 발리 등지에서 독립파를 진압해나갔으니 특히
네덜란드군은 발리에서 응우라 라이 중령이 이끄는 인도네시아군이 1946년 내내 네덜란드군
을 괴롭히던 상황에 주목하여 11월 20일 마르가라나(Margarana) 지역에서 최종 공세를 취합니다.
'마르가라나의 푸푸탄'(Puputan Margarana)으로 불리게된 전투에서 응우라 라이의 인도네시아군 96명
은 수적으로 우세한 네덜란드군에 4배가 넘는 전사자를 강요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응우라 라이 중령
을 포함한 96명 전원이 전사하였는데 이후 위협적인 인도네시아군 세력이 사라지고 발리가 안정화됩니다.
네덜란드는 발리의 덴파사르에서 1946년 12월 토착민 유력자들과 덴파사르 회담을 열고,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를 포괄하는 '동인도네시아 자치국' 을 수립하니 모두 친네덜란드파는 아니지만 결과적
으로 동인도네시아 지역은 네덜란드에 보다 가깝고, 독립파의 세력이 미치기 어려운 제3지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준비를 완료한 네덜란드군은 1947년 7월 20일,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12만 병력을 동원
하여 링가르자티 협정을 깨고 전면 공세에 나섰다. 이 작전(Agresi Militer Belanda I,
Operatie Product)은 네덜란드 측의 전략, 전술적 대성공이었고 인도네시아 측
사상자는 최대 15만에 달했지만 네덜란드 측 사상자는 6천명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커져버린 전쟁은 국제적 주목을 끌었고, 기대와는 달리 네덜란드도 독립파를 완전히
소탕해버릴 수는 없게 되었으며 공세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않은 1947년 8월 부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인도네시아에서 재개된 전쟁에 주목했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호주가 8월 1일 즉각 휴전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기하여 통과됩니다.
8월 29일, 네덜란드는 휴전선 판모크선을 발표하니 북수마트라의 위쪽 절반, 팔렘방을 중심으로 한
남수마트라, 방카블리퉁 제도, 서수마트라 해안의 일부 지역은 네덜란드 측에 귀속되고, 제외한
전부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귀속되며 동인도 핵심 지역 자바 주요 대도시 및 비옥한 농경지는
네덜란드 측에 귀속되고 칼리만탄, 술라웨시, 말루쿠, 소순다 열도 지역도 네덜란드 측으로 남는다.
영토 문제에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후퇴해 1947년 7월 공세 시작전의 경계로 돌아가기를 주장
하였으나 네덜란드는 완강하게 반대하였고 협상 도중인 12월 19일, 네덜란드는 동인도네시아
자치국과 유사하게 수마트라의 네덜란드 점령지역인 메단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동수마트라
자치국을 수립해 향후에 동인도 연방(인도네시아 합중국)에서 네덜란드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습니다.
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파 세력은 1948년말부터 미국의 외교적 지지를 획득하니 미국 정치권은 어느정도
반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수카르노의 독립 투쟁을 동정하는 편이었지만 미국은 1948년 중순
까지는 수카르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며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관망하는 입장이었는데, 공산주의 내지 공산 세력에 대한 수카르노의 입장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는 친서방 자본주의 계열의 인도네시아 정권수립, 차악은 네덜란드 식민
제국의 유지, 최악은 인도네시아의 공산화였으니 만약 수카르노가 '친공산주의 성향' 을 보이면
미국은 수카르노 및 독립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또 네덜란드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1948년 9월 18일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수카르노의 무장해제 요구에 반발해 마디운에서 마디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일본과 미국의 노예' 인 수카르노 및 하타 지도부에 대해 반란
사건, 일명 마디운 사태를 일으키게 되는데 공산당이 일본을 지목한 이유는 일본의
동인도 점령 시기에 수카르노는 일본 점령군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수카르노는 미국에 대한 확실한 지지를 얻기위해 공산당이 일으킨 이 반란을 확실하게 진압하고자
했으니 수카르노 일파는 12월 초까지 가혹하리만치 잔혹하게 처리했고, 반란 주동자
무소(Musso)를 10월 31일에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니 이 사건의 추이를 지켜본 미국은
마침내 "수카르노의 반공 의지" 를 확신하고는 수카르노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공산당의 성급한 봉기가 없었다면 2년후 한국전쟁으로 미국이 개입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니,
네덜란드와 독립파의 분쟁은 지지부진 했을 가능성이 높고 베트남 전쟁이나 그 이상의
수렁에 빠졌을 확률이 높았으니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은 독립파의 전술적 열세를
외교적 우세로 뒤엎은 것이기 때문에 전개에 미국의 개입이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1948년 12월 19일, 네덜란드 측에서 휴전을 먼저 깨뜨리고 자바 및 수마트라에서
독립파 지역으로 재공세에 나서니 여기서도 독립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전술,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독립파의 수도 역할을 하던 욕야카르타가 점령되었지만 동인도의
상황이 연일 서방 언론에서 주목받았으며 네덜란드에 가해지는 국제적 압박이 거세집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중요 전략목표를 대부분 달성하고 나서, 자바에서 1948년 12월 31일, 수마트라
에서 1949년 1월 5일 휴전을 선언하니 이제 인도네시아군의 저항은 게릴라전에 주로 의존하게
되었고, 명목상 휴전 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적대 행위는 1949년 중순 인도네시아
와 네덜란드 간 협상이 시작되면서 재차 적대행위 중지가 발효되기 전까지 멈추지 못합니다.
독립군 지도부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세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기위해, 욕야카르타에 대해 공세
를 취해야 한다는 안이 지지를 얻었으니 수디르만 장군이 주도하는 독립군 세력이 1949년 3월
1일 욕야카르타를 공격하는데 수카르노 등 공화국 지도부 주요 인물들은 당시(1948년 말부터
1949년 중순까지) 네덜란드에 체포되어 방카섬에 유배되어 있어 직접 작전입안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중령이었던 수하르토이니 이때 독립 지지파였던 욕야카르타
술탄 하믕쿠부워노 9세는 궁전을 독립군의 은신처로 제공하였으니이 공세는 전술적으로는 인도네시아
군의 패배였지만...... 미국, 영국, 소련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오히려 반네덜란드 여론을 자극
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이 욕야카르타에서 철수하여 독립군의 외교적 승리로 끝납니다.
공세가 시작되자 독립파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 네덜란드군은 수세에 몰렸지만, 여전히 화력 및 전술
측면에서 우세하였으므로 방어전을 펼쳤으니 전투는 적대행위 중지가 발효되기 직전인 10일에
절정에 달했고, 인도네시아군은 여전히 네덜란드군보다 큰 피해를 입었는데 네덜란드군과
인도네시아군 양측 자료에서 전투참전자 수와 사상자 수를 각자 유리하도록 다르게 집계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이 독립을 쟁취했을때 누구 지원으로 독립했느냐도 중요한데,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한다면 공산 국가가 될 것이 뻔했으니 그렇게 되면 주변의 동남아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고, 인도네시아가 공산화가 되어버리면 직접
맞닿은 호주가 '최전방' 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아픈 일이었습니다.
'마셜 플랜으로 엄청난 자금 지원을 받고있는 서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재획득 전쟁을 벌이는 것' 자체가
'미국 돈으로 전쟁하는 것' 이며, 2차대전 이전부터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비중이 커지고, 소련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자금 지원까지 시도하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이
열강 국가들의 편을 들어버리면 신생 독립국들이 죄다 공산진영으로 넘어가 버릴 위험이 컸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카르노의 '반공 노선 천명' 은 미국의 확실한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으니 미국은 수카르노
주도 하의 인도네시아라면 공산화는 막을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본격적으로 네덜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으니 미국은 네덜란드 측에 '협상하지 않으면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 는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양칠성등 한국인이 소수 포함된 일부 일본군 패잔병 3천명은 전후에 인도네시아군에 입대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당시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싸우기도 했는데.... 실제로 일부 일본군들은
점령지에서 안나가고 현지에서 중국계로 신분을 세탁해서 사는 경우도 소수 있었다고 합니다.
네델란드군은 18만명을 투입했고 영국군 3만에 영국 지배하의 인도군 6만등 27만명에 대해 인도네시는
공화국군 18만명에 페뮤다군 6만, 영령 인도군중에 귀순한 1천명과 일본군 3천명등 24만 4천으로
유럽군이 1만명이 전사한데 비해..... 인도네시아군은 독립군 5만에 민간인 5만등 10만명이 죽었습니다.
독립후 군부독재 시기, 수하르토의 30년 철권통치 기간동안 동티모르 강제 병합과 아체, 서파푸아
분리주의 운동 탄압및 국내 공산주의자 색출 과정에서 최소 50만~100만 명이 학살당했으나
그후 이루어진 민주화 이후에도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과거사 청산
이 미흡한 것과는 별개로 민주주의 자체는 개발도상국들 중에 그럭저럭 굴러가는 편에 속합니다.
경제적으로 GDP 규모는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나라들과 큰 격차로 역내 1위를 달리고
있으나 1인당 GDP는 4천달러 중반대로 상당히 낮은 편인데.... 1인당 국민소득을
비교했을때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브루나이, 호주 보다는 낮고 파푸아뉴기니,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라오스 보다는 더 높으며 동티모르 와는 비슷한 수준 입니다.
이슬람이 전파되는 14~17세기 이전에는 인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힌두교, 불교 문화의 뿌리가
깊으며, 지금도 2% 남짓한 인구가 힌두교/불교 신자로 이슬람 도래 이후에는 사회/정치/문화적으로
이슬람화되긴 하였으나 인구 과반이 거주하는 자바 지역에는 인도 문화와 융합되어 형성된 자바,
순다 토착 문화가 기층에서 정통 이슬람과 조화를 이루었고.... 독립 후에는 수하르토 시대에 이슬람
정치세력 및 이슬람 원리주의가 탄압 내지 견제를 받은 탓에 중동 국가들에 비하면 매우 세속적입니다.
또 도서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와 서구 국가들의 오랜 선교, 이주민인 화교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기독교도 전 인구의 약 10% 에 달하는데... 특히 자바섬 화교들의 경우
네덜란드에 동화되어 거진 루터교 신자이고 성명도 인도네시아식 + 영어 성명을 섞어쓰니
수마트라의 화교들은 아직까지 도교와 불교를 믿기도 하며 또 민남어로 된 성명을 사용합니다.
전통적으로 중세 때부터 '많은 섬들의 나라' 라는 뜻에서 "누산타라(Nusantara)" 라 불렸으며
인도네시아라는 국명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인 19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니
이 명칭은 1850년대 영국인 조지 얼과 제임스 로건이 동인도 제도를 지칭하기 위해
인도라는 뜻의 'Indo' 와 섬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nesos' 를 합성하여 창안한 것입니다.
이후 독일의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안이 이 용어를 마다가스카르와 타이완 섬 사이에 위치한
도서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면서 학술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인도네시아' 가 점차 대중화되었으며, 1920년대 토착민 민족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적
표현으로 전유되어..... 1928년 10월 28일 선언된 〈청년의 맹세〉 에 쓰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인도네시아의 한자 준말은 인니(印尼) 이니 인도네시아를 한자로 표기한 인도니서아(印度尼西亞)
의 준말이며..... 현지에서 '인도(Indo)' 라고도 하지만, 인도 와는 전혀 다르니 영어로는 인도가
'인디아(India)' 라는 것을 생각하면 구분이 쉬우며, 또 섬이 많은 광대한 국토라 네델란드 식민
통치 때문에 통일이 되었고..... 일본 점령군 때문에 국어가 통일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필리핀, 말레이지아, 미얀마와 함께 인도네시아는 2차대전시
일본군의 침략이 없었다면 1945년 이후 독립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며... 그 중에 인도네시아는
일본군이 "보조 전력" 으로 삼으려고 인도네시아인들을 모집해 군대를 조직하여 훈련을 시키고
패전 후에는 무기까지 넘겨주었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인도네시아 독립군을 양성" 해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