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나 분자 단위에서 물질을 제어하고 합성, 조립하는 21세기 신기술
- 임지순 서울대 교수 · 물리학
1981년 스위스의 IBM 지사에 근무하던 로러(Rohrer) 박사와 비닝(Binning) 박사는 원자 단위의 크기를 관찰할 수 있는 주사형 터널링현미경(STM)을 발명하여 반도체 표면의 원자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을 학계에 발표했다. 이처럼 특수한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원자를 직접 ‘볼 수 있게’ 만든 업적으로 이들은 198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들이 만든 장치는 그후 단순히 원자, 분자들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이동시키고 조립시키는데도 쓰이게 되어 새로운 나노과학기술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나노는 10억분의 1을 의미하며 1나노미터(nm)는 원자 3~4개가 배열된 정도의 극미세한 크기이고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에 해당한다. 나노기술(Nanotechnology : NT)은 원자나 분자 정도의 작은 크기 단위에서 물질을 제어하고 합성, 조립하며 혹은 그 성질을 측정, 규명하는 기술이다. 일반적으로는 크기가 1내지 100나노미터 범위인 재료나 대상에 대한 기술이 나노기술로 분류된다. 참고로 유전자를 이루는 DNA 이중나선의 폭이 2nm로서 DNA, RNA, 단백질 등도 나노의 범위에 든다.
나노기술은 원자 ? 분자들을 적절히 결합시킴으로써 기존 물질의 특성 개선은 물론 신물질, 신소자 창출에 더욱 적합하여 그 응용분야가 전자, 재료, 통신, 기계, 의약, 농업, 에너지 ? 환경, 국가안보 등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 ? 기술적 파급효과가 막대하다. 나노기술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 클린턴 미 대통령이 국가나노기술구상(NNI : National Nanotechnology Initiative)을 발표하고 부터다. 이 연설을 통해 클린턴은 솜털 같은 무게로 강철보다 10배 강한 물질을 합성하고, 각설탕만한 부피에 미국 국회도서관의 자료 전체를 수록할 메모리를 만들며, 암세포가 만들어지자마자 곧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나노기술 개발에 연방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기술종주국의 위치를 고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어 일본, 유럽 각국들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종합계획 등을 마련하여 대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12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국가적 차원의 나노기술 개발이라는 정책방향을 설정한 이후 국가 주도의 나노연구센터 설립과 관련 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나노기술의 다양한 분야들
나노기술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어 정해진 분류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세 가지 핵심 분야와 기타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나노소재(nano material)로 극미세한 크기의 새로운 물질과 재료를 합성하는 기술이다. 이런 신소재는 여러 가지 유용한 특징을 갖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언급했던 대로 “솜털 같은 무게로 강철보다 10배 강한 물질”을 합성하는 것이 나노소재의 한 예에 해당한다. 둘째로 나노소자(nano device)인데 나노 크기의 재료들을 조합하거나 배열하여 일정한 기능을 발휘하는 장치를 제작하는 것이다. 클린턴의 언급에서 “각설탕만한 부피에 미국 국회도서관의 자료를 수록할 메모리”를 제작하는 것이 나노소자의 한 예다. 그리고 셋째로 나노-바이오라 불리는 나노기술을 생명공학에 응용하는 것인데 클린턴의 언급 중 “암세포가 만들어지자마자 곧 감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측정, 이론 정립, 컴퓨터 시늉내기(simulation), 환경생태(일부는 나노-바이오와 중첩) 등 기타의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나노기술로 많이 거론되는 분야는 차세대 반도체 및 차세대 전지에의 응용이다. 차세대 반도체는 특별히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지 않고도 현재의 top-애주방식(반도체를 미세하게 가공해 점점 더 작은 구조를 만드는 방식. 이에 반해 bottom-up 방식은 가장 작은 단위인 원자, 분자에서 출발하여 이들을 모아 조립해서 특별한 성능을 가진 장치, 예를 들어 기억소자 등을 만드는 방식이다)으로 반도체 공정을 계속 발전시켜 그 크기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2003년 현재 70nm 선폭 개발에 성공했다. 이는 bottom-up 방식과 더불어 나노기술의 주요 영역이다. 세계 최강의 반도체 메모리 기술을 보유하고 반도체 관련 수출액이 총수출액의 15%를 점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계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을 통해 이 부문의 선두자리를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한편 중국 등이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메모리 중심에서 벗어나 품목을 다양화하고, System on Chip 같은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인데 나노전자 소자처럼 아직 전망이 명확하지 않은 분야에도 창의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적은 비용으로 예측하지 못할 기술 발전에 대비하는 의미도 크다. 메모리만 하더라도 기존의 개념과 전혀 다른 MRAM, PRAM, FRAM, 그리고 플래시 메모리의 가능성을 가진 단전자 트랜지스터(탄소나노튜브 혹은 실리콘 와이어 등을 이용한) 등 여러 가지 신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와 있거나 혹은 기초 연구 단계에 있다.
차세대 전지도 나노기술이 적용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차세대 전지는 크게 차세대 재충전전지(소위 이차전지)와 연료전지로 나눌 수 있다. 차세대 재충전전지는 여러 가지 신물질이 그 전극 및 전해 물질로 제창되고 있으며 섬세한 첨단 나노 조작기술보다는 새로운 분자구성과 구조를 가진 신물질 개발이 중요한 관건이다. 이것은 나노소재의 한 분야로 볼 수 있다. 재충전전지 시장은 2003년 약 8억셀에서 매년 1억셀씩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국내 유수 기업들이 선두권인 일본 기업을 기술개발을 통해 따라잡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연료전지란 수소, 메탄올(알코올의 일종) 등을 연료로 써서 동력을 얻는 전지이며, 부산물로 물이 나오기 때문에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청정연료로 주목받고 있다. 가장 큰 시장이 될 자동차 연료전지는 기존의 가솔린기관과 겸용하는 소위 하이브리드형이 개발되고 있다. 100% 연료전지형기관이든 하이브리드형기관이든 2010년경 세계 자동차산업의 판도를 좌우할 연료전지 장착 자동차는 우리나라가 피해서는 안 되는 핵심 개발 대상품목이다. 탄소나노튜브 계열의 나노물질을 섞어 전극으로 쓰는 연료전지가 NEC에 의해 개발됐고, 곧 이어 일본 산업기술총합연구소도 개발 성공을 발표했다. 메탄올을 연료로 한 이들 연료전지는 자동차용으로는 아직 충분한 출력을 갖지 못하지만 사용시간이 기존의 몇 배 이상 되는 노트북 컴퓨터 전원으로 상업화가 멀지 않았으며 그 다음 단계로 휴대전화 전지로까지 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NEMS, 디스플레이, 나노소재…
차세대 나노기술의 두 번째 핵심분야는 NEMA(Nano Electro-Mechanical System)이다. 현재 반도체 공정을 이용해 극소화한 기계구조를 만들어 동력을 발생, 전달하거나 혹은 미세한 상호작용이나 외부의 힘을 감지하는 데 쓰이는 MEMS(Micro Electro-Mechanicl System)는 그 크기가 100nm 이하로 내려가면서 자연히 NEMA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반도체 기억소자 분야에서 나노 영역에 진입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이와 연관된 각종 인접 분야에 NEMA가 요구될 것이다.
NEMS의 또 하나의 응용은 바이오테크놀로지(Biotechnology)와 융합시키는 것이다. 2000년 미 코넬대 몬테마그노 교수팀이 제작에 성공한 나노 바이오모터(Nano Biomotor)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각 부품의 크기가 100nm 혹은 그 아래인 나노 바이오모터는 인체의 모세혈관 속을 잠수함처럼 다니면서 질병(암세포 등 각종 이상 세표, 이상 단백질,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진단하고 치료할 목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다만 이 분야는 너무나 복잡한 고도의 기술을 요하므로 완전한 실현에 이르기까지 2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측되며, 우선 가까운 장래에는 이보다 훨씬 구조가 간단하고 좀 더 단순한 목적에 나노기술이 이용될 것이다. 버클리대 앨리비사토스 교수가 나노 반도체의 크기에 따라 각각 다른 색을 발광하는 성질을 이용해 개발한 질병 진단장치 등은 비교적 간단한 나노기술의 예다. 인공장기, 인공관절, 인공신경 등도 나노기술의 발전에 따라 좀 더 인체에 조화되고 고도의 성능을 가지면서 내구성이 강한 기기로 대체될 것이다.
차세대 나노기술에서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는 분야는 TV, 컴퓨터 화면, 차량 내 표시판, 야외 전광판 등을 포함한 디스플레이 분야다. 차세대 기술로서 FED(전계방출 디스플레이)는 소비전력이 적고 혹독한 외부조건(날씨, 온도)에 내구성이 강할 뿐 아니라, 오나벽한 동영상, 넓은 시야각, 대화면 호가장의 용이성, 공정의 단순용이성 등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연구개발하고 있는 FED는 탄소나노튜브 등 나노소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노기술에 속한다.
삼성종합기술원과 삼성SDI는 1999년부터 기존 금속 전자총 대신 탄소나노튜브를 전자총으로 대체한 새로운 나노기술을 이용해 FED를 개발했다. 일본의 SONY는 이와 별도의 방식으로 2005년까지 FED를 상품화하겠다고 선언했고, 역시 일본의 캐논과 도시바가 합작하여 2005년까지 FED를 사용화 할 것을 발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미국의 모토롤러, 한국의 LG 등도 FED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삼성SDI, SONY, 캐논-도시바 등 선발 세 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 일본의 대표적 경제신문 ‘니혼 게이자이’가 2003년 2월11일자에 보도한 것처럼 나노기술 분야 중 유독 탄소나노튜브 FED 관련 특허에서 압도적 우세를 점하고 있다.
그 밖에 종이처럼 접거나 옷처럼 입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나 3차원 디스플레이도 미래의 가능성을 가진 유력한 분야이나 아직 기술적 불확실성의 정도가 심하고, 정확히 나노기술 분야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위생기기 부문의 응용은 우리나라가 앞서
나노기술에서 또 하나의 핵심 분야는 나노소재다. 물질을 1~100나노미터 크기의 극미세 입자로 만들 때 여러 가지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잘 이용하면 현재의 여러 산업기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거나 전혀 새로운 소재를 합성할 수 있다. 이미 쓰이는 나노소재로서 앞으로 10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로는 나노화장품, 자동차 연료탱크 플라스틱, 건강 및 의학용 기자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각종 화학공정과 석유 정제 등 에너지 관련 분야의 촉매에도 나노기술을 이용한 나노입자가 대량으로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기능성 화장품을 살펴보면 나노기술을 이용해 그 입자의 크기를 더 작고 균일하게 만들어 피부에 과민반응이나 염증을 일으키지 않고 잘 흡수되도록 만들 수 있다. 보호막의 유지시간을 조정하여 화장효과가 오래 지속되게 하는 연구도 꾸준히 계속되어 어느 정도는 효능이 개선되었으나 이 분야(Drug Delivery System의 한 분야로 볼 수 있음)는 더욱 고도의 나노기술이 요구된다. 그리고 연료탱크 및 연료관의 경우 정전기가 생기면 가솔린 폭발의 위험이 있으므로 전기 전도도가 높은 플라스틱을 써서 정전기를 즉시 제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탄소나노튜브가 응용되고 있어 빠른 시간 안에 전세계 대부분의 자동차에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나노 은(銀)입자의 경우 그 향균, 살균력을 이용하여 유아용 기구, 병원내 환자복 및 기기, 에어컨, 냉장고, 청정기 등에 코팅하거나 재료 속에 혼합시켜 위생기기로 쓰인다. 현대인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 분야도 크게 성장할 것이며, 우리나라가 앞서가고 있는 분야다. 또한 나노입자는 각종 화학공정, 특히 에너지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석유화학공업이나 환경오염제거 기술 분야에서 차세대의 촉매제로 널리 쓰이게 될 전망이다. 예를 들어 석유 정제과정에 쓰이는 촉매의 경우 입자 크기가 줄어들고 잘 제어되면서 그 효율이 향상되고 있다.
21세기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
결론적으로 나노기술은 21세기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 동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며 소재에서도 반도채의 뒤를 이어, 또한 반도체와 함께 차세대에 각광받는 새로운 재료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나노기술은 그 고유한 분야도 있지만 응용 분야가 넓어 IT 및 BT 발전의 도구로 많이 쓰인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기술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 등도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다.
철(鐵) 나노입자를 이용한 환경오염 물질 제거효과는 2003년 9월 미국과 학재단(NSF)의 기자회견을 통해 잘 알려진 바 있다. 또한 나노기술의 발달로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의 경우 출력을 대폭 줄일 수 있으므로 만약 전자파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해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전계방출 디스플레이는 열을 가하지 않고 TV 화면을 밝히기 때문에 이를 응용하면 에너지 소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대형 TV를 구입하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우리나라에서만 최소한 원자력 발전소 1개 이상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노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인간보다 우수한 나노로봇이 탄생하고, 이들이 자기복제하여 수백만, 수천만의 로봇이 만들어져 인류를 지배하게 되리라는 내용의 소설이 있다. 그러나 로봇의 자기복제는 분자의 고유한 성질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현재의 과학으로 볼 때 그릇된 추측이다. 만일 수백년 후에 과학이 현재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여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때에는 과학기술의 다른 측면도 아울러 발달해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이 나올 것이므로 자기복제 로봇의 시나리오를 걱정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어쨌든 새로운 기술은 그것을 좋은 모적에 쓸 때 환경, 생태, 건강과 우리 생활에 크게 공헌할 것으로 예사되지만 나쁜 목적에 쓰일 위험성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예를 들어 아직은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나노기술을 이용해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때는 생명윤리의 문제가 제기되므로 국민적 합의를 거쳐 일정한 제한을 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