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의 김동환 선도사님이 또 한 권의 역작을 출간하셨다. 홍암 나철 서거 110주기를 기리며 '홍암 나철 근대를 깨우다'라는 책이다. 916쪽의 상당한 볼륨의 책이다. 김 선도사님의 책을 펴내신 이유를 옮겨본다.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에는 청호촌(靑湖村, 靑湖, 靑坡湖)이란 마을이 있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조선족 마을의 전통이 오래 이어져 온 곳이다. 그 마을 동구에 내려 동쪽 신작로를 건너 올라가면 단산(檀山) 언덕이 보인다. 대종교 중광을 통해 우리의 근대사를 일깨운 홍암 나철이 스스로의 유언에 의해 묻힌 곳이다.
근대민족주의역사학을 갈무리한 무원 김교헌, 군교일치(軍敎一致) · 수전병행(修戰竝行)으로 무장투쟁을 지휘한 백포 서일도 함께 묻혔다. 세상에서는 그곳을 삼종사(三宗師) 묘역이라 부른다.
연길을 통한 백두산 여행도 주로 이 길을 지난다. 등산객, 관광객, 답사단, 트레킹족 등등, 수많은 한국인들이 백두산을 오가는 길섶이다. 가끔은 이곳을 찾아 절하는 이도 있다. 꽃도 드리고 헌수(獻水)도 한다.
나철을 아는 지, 김교헌을 아는 지, 서일을 아는 지는 별개다. 아무튼 왕래한 흔적이 있고 머무른 자취를 남겼다. 느껍도록 고마운 일이다. 짧으면 4박 5일 길면 6박 7일에, 지나치면 그만인 이곳까지 걸음을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애틋하고 감사할 일인가.
1916년 12월 14일(음력 11월 20일) 백두산 북녘 청호 단산에 3백 9십여 명의 인파가 운집하였다. 조선조 5백 년에 둘 없는 선비요, 반만년 한국종교사에 최고의 종사인 나철의 봉장례식이 거행되던 날이다. "영령은 신국(神國)으로 오르고 유해는 옛 강역에 남기라"는 호석 강우의 「계유문(啓由文)」이 있었다. "유해가 무덤으로 돌아가니 삼신산밑이요 편안히 모신 석함은 한밝뫼의 돌이로다"라는 우천 조완구의 「애사(哀辭)」도 읊어졌다. 그리고 백두산을 정방향으로 안으며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누운 나철의 신해(神骸) 앞에 "우리 대종사는 하늘이 보낸 스승으로 인간의 스승이요 만세의 스승"이라는 서일의 「애사」가 흘러나왔다. 그날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오열했다.
더 거슬러 1912년 청호의 기억이다. 나철은 그해 한가윗날 이곳 단산에 올랐다. 단산이란 청호나 단촌(檀村, 단골마을)과 마찬가지로 대종교에서 이름 붙인 지명이다.
당시 호석 강우와 은계 백순이 함께 올랐다.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니 추석날 추원보본(追遠報本)의 감회가 더욱 깊게 묻어났다.
나철과 두 사람은 '산(山)'자를 운(韻)으로 한시를 주고받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나철의 글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강우가 단산에서 백두산을 보며 남긴 칠언절구는 이렇게 전해오고 있다.
始見平生願見山
평생에 뵙고픈 산 이제야 처음 봅니다
靑天削出白雲間
하늘에 우뚝 솟아 구름 사이 걸렸구려
看看敬愛行行路
공경히 보고 봄이 가도 가도 한없는데
萬事商量三笑還
온갖 일 의논타가 시간 잊고 돌아옵니다
강우는 이 시를 읊을 당시의 감회를 "나철과 백순, 두 아우와 함께 청파호 단산(檀山) 상봉에 올라가 천산(天山)을 바라보니 기쁜 생각, 경애하는 마음 이를 데 없다."라고 적었다.
나철은 같은 해 10월 8일(음) 새벽 꿈을 꾸었다. 꿈에 단산에 오르니 꼭 한가위의 경치와 같았다. 이에 지난 8월 보름날의 '산'자 운을 따서 몽작시(夢作詩) 세 수를 지었다.
나철이 꿈에서 깨어 그 한시를 옮겼으나, 3연 셋째 구절의 두 글자가 생각나질 않아 "玉殿金花○○日"로 남기면서, 늘 애를 태웠다 한다.
시간이 지난 1915년 8월 보름날(음) 밤, 당시 대종교 동도본사 전리(典理)로 있었던 서일이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가경(嘉慶)'이란 두 글자를 얻어 스승 나철에게 드리니, 나철의 기쁨이 말할 수가 없었다.
이심전심으로 3년간 미완성으로 있었던 세 번째 시의 셋째 구절(玉殿金花嘉慶日, 구슬 대궐 금꽃 피는 아름다운 날)이 완성된 것이다. 나철은 청호에서 4년간 머물렀다. 이곳을 근거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던 때다. 수많은 궁리와 번민, 계획과 좌절,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던 시절이다. 그럴 때마다 도장(道杖) 짚고 찾은 곳이 이곳 단산이었다.
나철만이 아니다. 나철의 유명(遺命)으로 대종교 2세 교주가 된 김교헌 역시 이곳 단산을 주유하며 많은 사색을 했다.
강우가 김교헌을 추도한 글에 "청호 총본사에 계신 지 두어 달에, 지팡이 짚고 단산(檀山)을 거니시며, 때로 선종사(先宗師, 나철) 봉장소의 유적으로 가시어, 곡하시던 일을 내가 어찌 잊으리까."라는 내용이 그에 대한 근거가 된다.
이어 김교헌은 동도본사로 옮기어 2년간을 서일의 거처에서 총본사를 차렸다. 그리고 총회 모임도 대종교 동도본사(당시 중광단 본부에 병설함)가 있는 왕청현 덕원리(德源里) 시교당에서 개최하며, 대종교의 재도약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시절의 김교헌에 대한 감회를 강우는 이렇게 추모했다.
"청파호의 물소리 목 메이고, 왕청현의 물결 구슬픈데, 용정촌 바람비에서 미래의 화(禍)를 면하려고 하던 것을 혼령은 아시는지, 흥개호 사막에서 멀리 떠날 계책을 협정하던 사실을, 혼령은 아마도 아실 것입니다. 동불사(銅佛寺) 소운(小雲, 황병욱의 호)의 집에서 신인(神人)의 보호함은 정말 만세의 감명이 되는데, 태평구(太平溝) 은계(隱溪, 백순의 호)의 거처에서 선생과의 전별이, 그만 천고의 영결이 되었습니다. 산천이 무색하고 초목이 다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철·김교헌·서일·강우·백순·황병욱·조완구 등, 청파호(청호)의 물소리에 희로애락 했던 이들도 다 고인이 되었다.
어디 이들뿐이랴. 백취 현천묵, 백초 류완무, 보재 이상설, 예관 신규식, 백산 안희제, 남파 박찬익, 정재 박승익 등등의 수많은 선열들이 이곳 청호의 물을 마시고 단산에 올라 수작(酬酌)했을 것이다.
이러한 감명과 추억을 마음으로만 품고 산 이도 있었다.
평생 허당(虛堂, 윤세복의 당호)으로 살다간 단애 윤세복이다. 일지당(一之堂, 나철의 당호), 보화당(普和堂, 김교헌의 당호), 삼혜당(三兮堂, 서일의 당호)을 마음에 품고, 바람처럼 살다 구름처럼 간 이가 윤세복이다.
김교헌의 교통을 이어 대종교 3세 교주에 오른 뒤, 목단강 감옥에 갇혀 광복을 맞기까지 대부분의 삶을 숨고 쫓기고 갇히어 살았다. 그러면서도 늘 가고자 했던 곳이 청호 단산이다. 윤세복이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 대종교지도자 동시 구속 사건)으로 구속되어 영어(囹圄)의 몸으로 읊은 "이 몸이 옥사(獄死)하여 유해(遺骸)를 송출(出送)커든/ 원컨대 동지들아 그 당시 화장하여/ 목단강 흐르는 물에 남은 재를 던져주/또 만일 출옥되면 갈 곳이 어디메뇨/ 백두산 저 기슭에 한줌 흙이 되었다가/ 천진전(天眞殿) 신건축할 제 기와 받침 하오리"라는 옥중시조의 정서 역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끝내 경험하지 못했다. 광복 후 윤세복이 죽어서라고 가고자 했던 이유다, 자신을 화장하여 한강에 뿌려달라던 윤세복의 유언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걸림 없이 스며들어, 청호 단산 앞을 지나는 해란강 물줄기로 흘러가길 소망했을 듯하다.
이러한 서사(敍事)는 우리에게 있어 청호(청호촌)가 단순한 망명처나 독립운동의 거점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곳은 백두산과 만주의 대유적(代喩的) 가치로, 우리 정체성의 상징적 공간이다. 전래 단군신앙의 시간과 공간이 블랙홀처럼 결정화(結晶化)된 곳이 청호다.
백두산과 만주의 종교적 상징성이 옹글게 농축된 것도 그곳이며, 뜻을 품은 항일투사들이 그렇게 꿈꾸었던 배달국이상향의 중심축 역시 그곳이다. 나철에게는 세속을 씻고자 하는 치열한 수행공간이었던 동시에, 종교적 완성을 이루고자 했던 현실적 이상향과 맞닿은 곳이다.
나철은 이곳을 중심으로 배달국이상향을 구상하였다. 대종교총본사를 권설(權設)하고 사도교구(四道敎區) 설정도 이곳을 거점으로 구획하였다.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종교적 공간으로서의 성지 확보(혹은 성지로의 회귀)의 중요성을 언급하였으나, 청호는 막연히 종교적 낭만만이 깃든 곳은 아니다. 『산해경』과 같은 호기심에서 분출된 상상지리학(imaginative geography)적 공간은 더더욱 아니다. 어떤 집단이 특정 장소를 차지함으로 발생할 수 있는 장소의 효과, 그리고 그것으로 기대되는 과정 전체를 '장소권력'이라 한다.
'장소권력'으로서의 청호라는 곳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의 치열한 근거지였으며, 우리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했던 성찰의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의 내일을 도모하고자 한 미래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의 근대는 중화와 식민이 중첩된 혼돈의 시간이다. 노예와 망국이 겹쳐진 절망의 시대였다. 밝고 희망적이어야 할 근대가 중화의 청산과 일제에의 저항이라는 암울한 이중주로 울려 퍼진 배경이 된다. 근대에 들어 이러한 부끄러운 몰골을 깨부숴버린 인물이 나철이다.
그가 절규했던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이 그 각성의 구호였다. 정체성[道]의 망각으로 무너진 나라를 정체성의 부활로 되찾자는 외침이 담겼다. 나아가 그러한 주인의식으로 미래까지 담보해 보자는 통시대적(通時代的) 경구가 '국망도존'이다.
올해로 나철이 서거한 지 꼭 110주기를 맞는다. 그동안 나철에 대한 평가는 주로 독립운동의 대부, 항일의 선각, 저항의 지주 등, 주로 단시대적(斷時代的) 현상으로만 응시되어 왔다. 일각에서 그의 삶을 시대역할론으로 묻어버리려는 배경도 된다. 그러나 그러한 행적은 나철의 거대한 삶에서 흐르는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정신을 파헤치지 못한 행적 나열이 자칫 본질을 외면한 허수아비의 몸짓 묘사에 머물 수 있다는 의미다.
나철의 단군신앙(대종교) 중광을 우리 사상사의 정수로 내세우면서 애국·순교의 큰스승[祖師]으로 그를 추앙한 이유이기도 하다. 산운 장도빈이 나철이 백두산 기슭 청호에 묻히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항일투쟁이라는 현상 이면에 숨은 정신적 본질을 일깨우고자 한 암시였을 듯하다.
이 책이 나철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배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무너져가는 조국에서 우국의 길을 걸었던 그의 여정을 간략해 보고, '국망도존'의 종교적 부활체로서의 대종교 중광을 주의 깊게 응시하였다. 이어 일제와 건곤일척의 투쟁을 벌인 근원적 힘이 무엇이었는가를 나철의 영향력에 주목하여 파헤쳐 보고, 죽어서도 힘으로 작용한 그의 죽음의 의미도 되짚어보았다.
뒷부분에서는 우리의 근대를 일깨운 나철 사상을 근대정체성과 국학, 고유 철학과 수행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끝으로 분단과 다문화사회 그리고 세계화 시대를 맞아 갈등하는 우리의 현실을 응시하면서, 나철의 미래지향적 가치와 연결하여 마무리하였다.
한편 이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중광가』 해설은 해방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나철의 『중광가』는 한국문학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대서사시다.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문화요 사상의 강줄기다. 유구한 한민족의 삶 자체가 침잠되어 있는가 하면, 우리 민족사의 부침이 인과적으로 흐르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자긍심의 거울이요 정체성의 저수지이며 미래의 지남차다. 기록이 미래를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긍정한다면, 『중광가』는 그 선택이 아닌 필수 경험임을 새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