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한삼국지 324
(소설삼국지)
제3권 적벽대전
제34장 손권의 세력 확장
5) 형주와의 분쟁
건안8년(203년) 손권은 처음으로 서쪽으로 황조(黃祖)를 토벌했다. 황조는 유표의 번장으로 강하군을 맡아 이십 년 가깝게 통치해 오고 있었다. 사실상 독자성을 가지고 유표의 연합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황조는 손씨 집안과는 철천지원수였다. 양양에서 손견을 죽인 것이 바로 황조였다. 황조는 그 공으로 강하태수가 될 수 있었다.
손권이 서쪽으로 황조 토벌에 나섰다는 것은 그만큼 세력기반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황조는 강하에 오래 근거해 손책의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탄탄했다. 일찍이 손책은 유훈을 습격하고 나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황조를 격파하기는 했으나 그의 세력을 소멸시키지는 못하고 회군했었다.
이때까지는 형주와 강동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유표의 형주세력이었다. 강동정권은 형주세력이 강하군과 장사군 방면에서 서쪽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것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일찍이 손책이 강동정권을 맡고 있을 때에도 유표(劉表)는 자신의 조카 유반(劉磐)을 보내어 예장군의 서쪽 경계에 있는 여러 현을 공략하곤 했었다. 유반은 날래고 용맹해 장사군과 접경해 있는 예장의 애(艾) 현 등에 여러 번 침입해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래서 손책은 해혼(海昏)과 건창(建昌) 주변의 여섯 개 현을 다로 떼어내어 건창도위(建昌都尉)의 관할 하에 두고 태사자를 건창도위에 임명해 유반을 방어하게 했다. 태사자가 치소를 해혼에 두고 여러 장수들을 지휘 감독해 유반의 침공을 막아내자 유반이 다시는 쳐들어와 도적질을 못하게 되었다. 손권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에도 태사자가 유반을 제어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그에게 계속해서 건창도위의 임무를 맡겼다.
예장군 서안(西安) 현도 유표군의 침공에 의한 피해가 컸다. 손권이 반장(潘璋)을 서안현장에 임명했다. 반장이 유표군을 잘 막아냈으므로 그 이후부터는 유표의 군대가 함부로 서안현의 경내로 쳐들어오지 못했다. 반장은 자를 문규(文珪)라 하고 동군(東郡) 발건(發乾) 현 출신이었다. 손권이 양선(陽羨) 현장이 되었을 때 반장이 처음 손권을 찾아가 막하에 들어갔다. 반장은 성격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늘 외상술을 먹곤 했다. 빚쟁이가 집에까지 찾아오면 번번이 자신이 출세해 부귀해지면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손권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고 아껴 그에게 병사를 모집하게 했다. 반장이 백여 명을 모집하자 그를 그 부대의 장수로 삼았다. 반장은 산적들을 토벌하는 일에 공이 있어 별부사마가 되었다. 그 후에 반장이 오군의 큰 시장 한 복판에서 간사한 자를 찔러죽이자 도적들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명성을 얻고 예장군 서안(西安) 현장으로 승진했었다. 또 이웃 현인 건창(建昌) 현에서 도적들이 난을 일으키자 무맹교위(武猛校尉)로 임명되어 건창현장을 겸직했다. 반장이 악행을 일삼는 백성들을 토벌하고 다스려 달포 만에 다 평정했다. 반장은 흩어져 떠도는 자들을 모아 팔백여 명의 병사를 얻었고 그들을 데리고 건업(建業)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황조의 아들 황사(黃射)가 수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예장군 시상(柴桑)을 공격한 적도 있었다. 이 때 시상현장은 서성(徐盛)이었다. 서성은 자를 문향(文響)이라 하고 낭야(琅邪) 군 거(莒) 현 출신이었다. 그는 난을 만나 오군으로 와 객지생활을 했으며 용맹하기로 군내에 소문이 났다. 손권이 정권을 잡은 후 서성을 불러 별부사마로 삼고 병사 오백 명을 주었다. 그 후 손권은 서성을 시상 현장에 임명해 황조를 막게 했다. 황사가 쳐들어왔을 때 서성의 병력은 현의 관리와 사졸들을 모두 합해 이백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성은 물러서지 않고 성을 지키면서 황사를 맞아 싸웠다. 적병의 공세를 막아내며 화살과 돌을 쏘아 황사의 병사 천여 명을 죽고 상하게 한 후 성문을 열고 돌격해 황사의 군대를 대파했다. 이후로 다시는 황사가 공격하러 나타나지 못했다. 손권이 서성을 교위 겸 무호(蕪湖) 현령에 임명했다. 서성은 그 후 임성(臨城) 남쪽 변방의 산적들을 토벌해 공을 세웠고 중랑장으로 자리를 옮겨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손권의 군대는 황조의 수군을 격파하고 사선까지 진격해 황조의 본거지를 포위했다. 황조의 성을 아직 함락시키지 못했을 때 배후 지역에서 산적들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으므로 손권은 하는 수 없이 회군했다. 이것으로 손권의 일차 황조 공격은 끝이 났지만 형주에 대한 지금까지의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으로 돌아섰다는 의미가 컸다.
돌아오는 길에 손권은 예장(豫章)을 거쳐 오면서 여범(呂范) 등을 보내 파양(鄱陽)을 평정하게 했다. 파양에는 팽호(彭虎)를 우두머리로 하는 수만 명의 무장집단이 광대한 지역에 할거했다. 여범은 동습과 능통(淩統), 보즐(步騭), 장흠(蔣欽) 등의 장수들에게 각각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적을 토벌하게 했다.
이 때 동습의 공이 가장 컸는데 동습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적들은 차차 파괴되었다. 팽호 등의 무리는 멀리서 동습의 깃발만 바라보아도 바로 흩어져 도주했다. 동습의 무용과 용맹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동습은 불과 열흘 만에 파양의 적들을 다 평정했다. 이 공으로 동습은 위기교위(威越校尉)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손권은 또 정보(程普)에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 악안(樂安)을 토벌하게 했다. 정보는 손책이 죽은 후 장소 등과 함께 손권을 보좌했고 회계, 오, 단양의 삼개 군을 두루 다니면서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해 평정했었다. 이번에도 강하토벌에 종군했다가 회군하는 길에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악안을 토벌하게 되었다. 이때 정보는 태사자, 한당, 주태, 여몽 등의 장수들을 통솔했다.
악안이 평정되자 손권은 다시 태사자를 해혼에 보내 지키게 하고 주태, 여몽 등은 다 인근의 문제가 많은 현들의 현령이나 현장으로 내어보내 경내를 안정시켰다. 이 때 선등교위 한당은 자신의 부대원 이천 명을 이끌고 악안을 토벌하여 악안현장에 임명되었다. 주태 또한 황조를 토벌하는 싸움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주태는 이때의 공으로 선등교위(先登校尉)로 승진했으며 병사 이천 명과 기병 오십 기를 받았다.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파양을 토벌하고 악안 인근의 현장이 되었다. 산월족들이 다 두려워하며 그에게 복종했다. 태사자가 건안11년(206년)에 나이 사십일 세의 나이에 죽자 정보가 그를 대신해 해혼 지역을 방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