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태어난 한옥남 시인!
강릉여고 영어 선생님을 역임하시고
지금도 후학을 위해 가르침을 하시면서,
작가의 길을 걷고 계시는
한옥남 님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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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 산책
한옥남 시인
30년 전 잠실에 살던 나를 반포로 불러들인 사람은 시누이였다.
교회 주일 학교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있고, 명문고가 밀집해 있는 좋은 교육환경이니 아이들을 위해 이곳으로 오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시누이의 의견이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서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낡은 아파트 단지와 비릿한 물 냄새, 모기가 윙윙거리는 배수펌프장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이곳에 정착한 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어서, 지금은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던 배수펌프장은 운동 시설을 갖춘 종합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반포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내가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세 코스가 있다.
첫 번째 코스는 지하철 7호선 6번 출 구에서 시작되는 산책로이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나서기 좋은 길인 이곳은
반포천 둑길 아래로 잘 만들어진 흙길이 있다.
이것이 서울 도심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울창한 나무 사이로 고운 황톳길이 잠원초등학교 정문까지 이어진다.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며 걷다가 중간에 설치된 수도 시설에서 발을 깨끗이 닦으면 기분마저 상쾌하고 건강해진 느낌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천득로에 들어선다.
수필가이면서 영문학자셨던 고 피천득 선생님을 기념하여 만든 산책로이다. 생전에 그가 구반포에 사셨던 것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이 길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길이다.
봄이면 벚꽃 터널과 개나리꽃이 발길을 머무르게 하고, 여름에는 무성한 초록 잎 그늘이 쉼을 주고, 가을에는 고운 단풍이, 겨울에는 눈꽃 핀 설경이 나를 끌어들인다.
푹신한 탄성 바닥재가 깔린 길을 따라, 초로의 노부부가 담소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뒤를 줄졸 따라 걷다 보면,
피천득 교수님의 [인연]을 비롯한 주옥 같은 글귀들이 새겨진 조형물들이 중간중간 놓여 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작가의 대표 수필집 [인연] 속에 있는 <오월>의 한 구절인 이 글은 읽을 때마다 내 가슴을 뛰게 한다.
풋풋한 풀 향기를 맡으며 조금 더 걷다 보면 곧 허밍웨이(Humming Way)가 시작된다.
동작역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산책로이다.
현충원 뒷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향 긋한 아카시아 향이 코끗을 스쳐간다. 산책로 이름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다 보면 한강으로 길이 연결된다.
한강을 따라 갈대 무성한 숲길을 지나 서래섬에 이르면, 무심히 찌를 바라보며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다.
어쩌면 공허한 마음의 세월을 낚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쁜 꽃으로 장식된 서래섬 다리를 건너면 밤마다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새빛 둥둥섬의 화려함이 발길을 잡는다. 세빛섬은 수변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복합 문화공간으로 한강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부채浮體 위에 건물을 짓는 플로팅 형태의 건축물이어서 한강 위에 떠 있는 기분을 만끽하며 마시는 커피 한잔도 즐겁다.
주말이면 각종 이벤트로 젊은이들이 북적이고, 반포대교에서 뿜어 나오는 시원한 무지개 분수도 볼거리 중 하나이다.
세빛섬을 지나 한남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가족이나 연인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또한 요즘은 K-culture의 영향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와 한강 라면과 치킨 파티를 즐기고 있다.
바이크 동호회의 신나는 질주와 러닝 크루들의 힘찬 발걸음 소리, 한여름의 더위를 식혀주는 수영장, 테니스코트를 비롯해 풋살장 등 젊은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현장이다.
나의 두 번째 코스는 뉴코아 백화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이다.
꽃 상가를 시작으로 각종 옷과 인테리어 장식품, 먹거리까지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이다.
검소한 척 저렴한 옷과 물건들을 사겠다고 결심하고 나오지만, 몇 걸음 못 떼어서 나를 사로잡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금방 내 지갑을 털어버린다. 가끔은 버스킹을 하는 외국인들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 간다.
중간쯤 지나다가 신세계백화점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세계적 명품을 플렉스하는 부유한 사람들 옆에서 나도 부유한 척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기도 한다. 갑자기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얘! 우리가 지하상가에서 쇼핑을 하지만 눈은 높여 놓아야지 나중에 이걸 사지 않겠니?"
혼자 빙그레 웃고 이름마저 유럽 스타일인 "가족과 떠나는 맛과 멋의 출발역"이라는 의미의 파미에스테이션(Famille Station)에 들어선다.
밥값보다 비싼 디저트를 우아하게 먹으며, 열심히 사는 나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포장해 본다.
마지막 나의 반포 즐기기는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뒷길에서 시작하여 누에다리를 건너 몽마르뜨 공원을 지나 서리풀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때론 우리나라 최대의 도서관 중의 하나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기도 하고, 서래마을로 내려와 골목골목 가득한 파스타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프랑스 학교가 있어서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부르는 이곳을 지나다 보면 주택에서 키울 수 있는 대형 견犬들과 산책하는 외국인들을 만나 눈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조금 긴 코스이긴 하지만 효령대군 사당인 청권사(淸權祠) 까지 솔향을 맡으며 걷다 보면 마치 산골에 온 기분이다.
회색빛 하늘, 빽빽이 줄지어 서 있는 각진 건물 속 삭막하고 답답할 것만 같은 도시 생활이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그렇듯 적응하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곳은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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