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이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예컨대 남편과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다가
남편의 탄생 일기를 읽어보고 ‘기쁘다 우리 남편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하면
이런 아내하고 더 살맛이 안 날겁니다. 치매가 온 거죠. 초대교회는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 충만하여 이 악한 세대를 거들떠보지 않고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며 유무상통하면서 매일 주의 살아계심을 찬양했습니다.
심지어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도 살아계신 주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므로 옥문이
열리는 지진을 일으켜 간수가 자살하려는 소동까지 일어났습니다(행16:25-27)
그러던 초대교회가 시들해지고 힘을 잃고는 로마의 정치판에 이용되다가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2세기를 지나 3-4세기에 이르러
12월 25일로 성탄절을 정해 지키기 시작한 이윱니다. 기독교를 세력화 한 겁니다.
말씀이신 주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 왜 귀하지 않겠습니까.
천지창조 때에 천사들이 팡파레를 울리고, 주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찬양을,
그리고 한 영혼이 돌아올 때마다 하나님의 기가 막히는 실력에 천사들이 노래하고,
주님께서 구름 타고 오실 때에 또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찬양을 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예수의 탄생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로인해 아담 안에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서막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탄절을 지킬 때마다 주의할 일은 주님을
아기 예수로 고정시키고 마리아만 어른으로 소개하는 천주교의 미혹과 예수를
한 위인으로만 보는 휴머니즘과 또 계시가 없어 예수를 개인의 구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에 예수의 성탄의 사건보다
그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깊이 숙고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겁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한 것은 아기 예수에게 한 걸까요? 아니면 그분이 장차 유대인의 왕이
되실 것을 내다보고 엎드려 경배를 했을까요? 참고로 세례요한은 율법 아래의
마지막 선지자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보좌에
앉으실 어린 양이심을 알고 동시에 증거했습니다(요1:29, 36) 이미 주님께서
고난당하실 것과 고난당하신 후에 받으실 영광을 한 눈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고난 후의
영광을 다 멀리서 보고 증언을 했습니다(벧전1:11) 특히 사53장은 더욱 뚜렷합니다.
따라서 아기 예수의 탄생은 살아계셔서 보좌에 앉아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나아가면 온전하게 구원하시기 위해 간구하시는(히7:25)
만왕의 왕이 되신 자리에서 뒤돌아보고 말씀이신 주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자진비하 하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은 우리가 똥구덩이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낮아
지신 겁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특공대가 되셔서 죄와 사망의
감옥에 갇힌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사람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안에서 빛과 생명과 사랑이 되시는 주님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원죄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하나님을 바깥에
모시려 하는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종말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음성까지는 듣지만 그리스도를
안에 영접하여 모시지 않습니다. 빈방이 없는 건 초림이나 종말이나 같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지상사역은 그 토대로 지금도 행하시는 천상사역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아기 예수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입니다.
예수로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후에 보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고 성령의 인침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성탄은 성탄대로 의미가 있으나
성령이 임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가 성령의 기름부음 안에 있을 때는
없었던 예수의 탄생 기념을 왜 사람들이 소환하여 지키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세요.
그건 현재 살아 있는 믿음의 약화가 원인일 겁니다. 만약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셔서 그분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면(요1:14)
주께서 사람으로 나시기 이전에 태초 안에 계시던 그 말씀이셨다는 사실을 알고
날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될 겁니다. 그 분 앞에 주님이 아기 예수로 오실 때에 그 사건이
기억에 남아 아직도 그 감격이 살아 있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과연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인간으로 오신 사건보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이를 보고
주의 이름을 불러대므로 주께서 그의 산업이 되고 인생의 총소득이 되고 장래의
보장이 되었노라고 노래했습니다(시16:5) 주님께서도 이 다윗의 믿음을 최고의
믿음으로 소개하셨습니다(마22:41-46)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불교의 성철이
조계종 중들이 사월 초파일날 연등행사를 한다고 부산을 떠니까 ‘조계종 중놈들아
부처님이 사월 초파일 날만 오시냐 매일 오시지‘하고 일갈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만물의 근본이시며 만유이시며
만물의 생명의 기운이십니다. 항상 살아계시고 항상 오시고 항상 일하시는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하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임마누엘의 주님의 이름을 송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