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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새 공간으로...
사실 인야는 이 마을('빌랴누에바...')을 떠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좋은 기억을 안겨준 곳이었고, 그 인연으로 제 발로 찾아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까미노가 지나는 마을이라는 것도, 계속 머물고 싶게 만드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곳엔 자신이 머물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알베르게를 임시 거처로 쓰게 해주고, 폐쇄된 학교의 방 하나를 작업 공간으로 내어준 배려는 고마웠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 보름이 되어가면서는 너무 불편했다.
음식 해 먹기도 그랬고, 조리할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여기 드나드는 순례자들과 함께 지내거나 다른 방식으로 지내는 일이, 날이 반복될수록 번잡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일을 하러 온 사람으로서,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잠자는 곳과 인터넷 하는 곳, 작업하는 공간이 다 따로 떨어져 있다 보니...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부터가 산만했다. 인야 특유의 잠 시간 때문에 새벽에 일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깨어만 있고 정작 일은 못 하는 답답함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오스삐딸레로라도 된 듯, 나그네들에게 호흡을 맞춰줘야 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자꾸만 불만이 쌓였고, 어서 새로운 공간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결국 새로운 공간을 찾기로 마음먹었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일을 부탁하기에 너무 적합한 사람이 있었는데, 빵 차를 몰고 다니는 '루이스'였다.
이 시골 마을에 날마다(일요일만 빼고) 오전에 빵을 싣고 오는 빵 차가 있었고, 그 빵을 배달하는 친구는 처음부터 붙임성이 좋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었다. 마을 사람 누구와도 농담을 주고받는, 참으로 선하면서도 오지랖 넓은 친구였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인야를 대할 때도, 몹시 호감을 보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여기서 뭘 하려는지 등등을 궁금해했다(아마 마누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인야가 여기 온 이유였던 마누엘과도 아주 가까운 듯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는데, 이 루이스라는 친구는 그 누구와도 그런 사이였다.
그래서 인야는 그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 마을에서 머무는 게 너무 불편해서 힘드니, 그가 돌아다니는 이 근방 열세 개 마을 중... 적당한 집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그날, 인야는 사모라 쪽으로 걸어가 볼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아침에 마음을 바꿨다.
어제가 일요일이라 만나지 못했던 빵 차의 루이스도 만나 봐야 했고, 앞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누군가 함께 사모라까지 걸어가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과 동행하면 될 것 같다는, 어쩌면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야는 일단 인터넷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관청 건물로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FTP로 홈페이지를 올렸는데도 작업한 게 반영되지 않는 듯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도 방금 올린 글이 뜨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잘 됐었는데.
'뭐든 꼭 말썽을 일으키는구나.'
그렇게 인터넷과 씨름하다, 학교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이장 여자가 와서 탁구대만 내간다더니, 거기 있던 서랍까지 함께 들고 나간 것이었다.
"안 돼!"
인야는 뒤집어질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 돈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펴보니, 서랍만 가져가고... 안에 있던 내용물은 다 꺼내 바닥에 쏟아놓은 모습이었다.
인야는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 돈 봉투는 큰 상자 아래에 놔두었었는데......'
그런데 그 상자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낭패였다.
큰돈은 아니었지만(이미 대부분은 환전해서 산티아고의 계좌에 넣어두었고, 몸에는 자신의 카드만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적은 것도 아니었다. 돈 관리에 허술한 인야는, 한국을 떠나올 때 실수로 가져온 수표도 두어 장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언뜻,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건 아래로... 뭔가 봉투 같은 게 보였다.
아, 그 돈 봉투였다.
봉투 안에 들어 있었으니, 물건을 내놓으면서 그것까지 확인할 이유는 없었을 테고... 애초에 인야가 거기에 돈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그들은 알 리가 없었을 테니......
일이 이쯤에서 정리된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탁구대만 옮겨가겠다기에, 설마 서랍까지 손댈 리야 없겠지 싶어... 신경도 안 썼는데......'
인야는 스스로도 참 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돈을 그곳에 보관하고 있었다면, 그들이 탁구대를 내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적어도 한 번쯤은 그 생각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어두고 있다가, 이런 일을 겪은 것이다.
그 봉투가 그들 눈에 띄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말... 만약 잃어버렸다면 어쩔 뻔했겠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야는 자신의 '돈 관리'를 탓하지 않을 수 없었고... 썰렁한 의자에 앉아 카페에 올릴 글을 마저 준비했다.
밖은 오늘도 청명한 날씨였다. 이런 날씨가 스페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빵 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가 와야 집 문제 얘기를 나누고, 알베르게로 돌아갈지 어떨지... 정할 수 있을 것이니까.
결국 빵 차가 왔다.
인야가 학교 방 창으로 몇몇 부인들이 빵을 사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조금 늦게 나가려는데(그들과 함께 빵을 사려면 이것저것 자기들끼리의 얘기가 길어지는데, 거기에 우두커니 서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루이스가 차에 타려던 참이었다.
그는 인야를 보더니 차를 몰고 조금 다가와서는,
"인야, 내 친구 집이 하나 있긴 한데... 연 단위로만 세를 놓지, 달 단위로는 안 내놓겠다고 하던데?" 하더니, "근데, 왜 꼭... 우리 마을 '꼬랄레스'는 싫다는 거에요? 우리 마을에도 방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하고 묻는 것이었다.
사실 인야는, 그 꼬랄레스가 좀 번화해서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냐.' 하는 생각에,
"그럼 거기라도 한번 알아봐 줘, 루이스." 하자,
이번에는 엉뚱하게(?),
"근데, 인야... 그림은 안 그리세요?" 하고 묻는 거 아닌가.
의외였다.
더구나 그가 자신의 그림에도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해서,
"그래? 사실은... 여기 학교 건물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하면서, "그럼, 날 따라와봐요. 내가 여기서 그린 그림이라도 보여줄 테니......" 하자,
"정말요?" 하며 반갑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야는 루이스를 학교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신이 그렸던 그림 몇 점을 보여주었다.
"야, 좋네요!" 하고, 그는 감탄을 연발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누다, 루이스가 다른 마을에 빵을 배달하고 자기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인야를 태우고 가서, 그 방을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인야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하자,
"한, 12시 반에서... 1시 사이는 돼야 할 걸요? 그러니, 그때 쯤... 저기 마을 입구 다리께에서 기다리세요." 하더니,
"아, 내가 다른 마을에서 출발하면서 전화를 걸 게요." 하기에,
"알았어. 루이스!" 하고 대답을 하면서, 인야는 다시 학교 방으로 들어갔다.
12시 반이 되면서, 인야는 가방을 짊어지고 마을 입구 다리로 나가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비도 왔겠다, 본격적인 봄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을 입구 들판엔 유채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먼 곳엔 이미 노랗게 꽃이 핀 곳도 보였다.
한 시가 되자 루이스의 전화가 왔다.
인야가 다리에 있다고 하자, 곧 오겠다고 했고... 정말 10분쯤 뒤 그의 차가 나타났다.
차에 올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꼬랄레스에 닿았고, 둘은 바로 그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노파가 나왔는데, 약간 심술기가 있어 보였지만... 사람 속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이스는 바빠서 먼저 돌아가야 했고, 그 뒤로는 인야의 문제로... 그 집 방을 구경했다.
깨끗하고 좋았다.
아직 방에 침대는 없었는데, 전기를 새로 설치해야 한다면서... 월세는 300유로라는 것이었다. 방이 두 개라 그런지 조금 비싼 편이었다.
인야는 200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저는 혼자서, 아주 조용히 사용할 건데요... 250 정도로 낮춰줄 수 없습니까?" 하고 자신없는 어조로 물었는데,
어?
뜻밖에도 그러자는 대답이 금세 나오는 것이었다.
냉장고, 세탁기까지 다 갖춰진 깔끔한 2층 집이었다.
약간 도심이면서 삼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밤이면 젊은이들 오토바이 소리로 시끄러울 거리에 있긴 했지만... 빛이 잘 들고 혼자 살기엔 불편함이 없을 듯했다.
방이 하나 더 있으니, 누가 오더라도(?)... 꼴촌만 준비하면 그럭저럭 쓸 수 있을 것 같아,
인야는 나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결정을 했다.
"준비도 해야 하니, 사흘 뒤에 이사오겠습니다." 하는 약속을 하고 인야는 그 집을 나왔다. 스스로도,
'이렇게 집이 빨리 구해질 줄이야!' 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내 일에 더더욱 집중하라는 하늘의 뜻(?)일 수도 있어.' 하고 만족해 했다.
더구나 그 마을은 여기서 멀지 않은 데다(3킬로미터), 까미노와도 그리 멀지 않아 언제든 소풍 가듯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가까운 사모라나 살라망까로 가는 버스도 하루에 열 번 정도는 있어, 교통도 한결 편할 것이었다.
그런 뒤 인야는 루이스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빵 집으로 갔고, 간 김에 바게트를 사서는... 이제는 걸어서 '빌야누에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날이 청명해 마을이 어찌나 깨끗해 보이던지... 그 마을을 떠난다는 게, 조금 아쉬운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현지 주민들이 아무런 미련도 남겨주지 않았다. 그러니 더 머물 이유가 없어졌고, 다른 집을 알아보는 일도 막막할 터라... 이제는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돌아와 '빠따따 리오하나'를 만들었는데 맛이 별로였다.
점심을 먹는데 마리아가 왔다가, 저녁때 다시 오겠다며 갔다.
컴퓨터 작업을 하다 잠깐 자리에 누웠는데, 밖에서 소리가 나 나가보니... 사이클로 온 두 사람이 있었다.
빰쁠로나에서 왔다고 했다.
그들이 들어와 이런저런 일을 하는 사이, 밖에서 다시 소리가 나 나가보니... 마누엘이었다.
인사를 나누다, 인야가 떠날 거라는 얘기를 전하자... 그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갈 건데?" 묻기에,
"그날 아침 9시 반 차로 나가려고요." 하자,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내가 이사하는 걸 도와줄게." 하던데,
인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아름다웠던 한순간의 기억 속 마누엘과, 이 며칠 사이 마주한 현실의 마누엘 사이에는 얼마간의 거리가 있었다.
실망이라기보다는, 정 하나만을 쫓아 이 마을까지 찾아온 인야의 꿈이 그만큼 컸던 탓일 것이었다.
그래도 인야는 그의 호의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그에게도 이야기를 전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이 마을에 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이제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떠날 거라면 빨리 마음을 정리하는 게 나았다.
그날 저녁을 먹고 나니 누가 오는 기척이 있었다. 마누엘이었다.
오전에 말했던 대로 비노와 오루호 한 병을 가지고 왔다.
인야는 저녁상을 물리고 하몬과 낮에 사둔 올리브를 내놓으며 그가 가져온 비노로 한잔했다.
마누엘은 자전거를 타고 온 스페인 젊은이들과 이 근방의 농업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9시 반쯤 되자... 저녁 시간에 안 들어가면 마누라한테 혼난다며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