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된 양버즘나무 숲
아침에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 순간 맞이한 건, 엊그제까지 그랬던…… 사우나 문 열고 들어갈 때처럼 숨을 콱 틀어막는 그런 바람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더위가 끝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숨 쉬는 건 충분히 편안합니다. 해 떨어지면 마을 주변의 근린공원 산책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바람 따라 계절은 흘러갑니다. 기록적인 더위를 기록했다는 영천에서의 날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달에는 뜨거운 도시 경북 영천을 찾을 일이 잦았습니다. 다녀올 때마다 뉴스에서는 오늘 최고기온 기록을 갱신한 곳으로 영천시를 꼽곤 했지요. 처음엔 38.7도였고, 나중엔 40.3도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영천을 대표하는 임고서원 은행나무 곁의 숲 ○
최고기온이 40.3도라는 놀라운 더위를 기록한 그 날, 영천시의 임고초등학교를 찾았습니다. 영천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임고서원 은행나무 바로 곁에 있는 초등학교입니다. 임고서원 은행나무는 자주 찾아 보았습니다만, 그 나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걸어서 고작 오 분 남짓하면 닿을 수 있고, 새들이라면 날갯짓 한 바탕으로 너끈히 이를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임고초등학교는 처음이었습니다. 임고서원 은행나무를 빼면 영천시에서 찾아볼 특별한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아 늘 여유로운 여행 길이었으면서도 그랬습니다. “필경 영천시 어디엔가도 분명히 남다른 나무가 있을텐데…….” 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입니다.
낮 기온 40.3도라는 기록적인 무더위를 기록하던 그 날, 임고초등학교를 찾은 건, 지난 여름 동안 영천시로 자주 불러주신 분들의 안내에 따라서였습니다. 영천시를 그 사이에 네 차례를 찾았는데, 그때마다 임고초등학교를 더불어 찾아보려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미루다가 결국은 이 여름 중에 가장 무더웠던 날, 그것도 그곳에서 뜨겁게 살아가시는 고마운 분들의 안내로 찾게 됐습니다. 그 분들이 가장 먼저 이야기하신 건 학교 운동장의 플라타너스, 즉 양버즘나무였습니다.
○ 백 년 전에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양버즘나무 ○
북아메리카 지역이 고향인 양버즘나무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건, 1910년 무렵으로 전합니다. 칠엽수라는 이름보다 마로니에라는 이름이 익숙한 것처럼 양버즘나무 역시 우리말 이름보다는 ‘플라타너스’라는 학명으로 더 많이 알려지며 익숙한 나무입니다. 버즘나무과의 나무로 양버즘나무 Platanus occidentalis L.와 가까운 친척 관계인 나무에는 버즘나무 Platanus orientalis L. 와 단풍버즘나무 Platanus x hispanica Mill. ex Munchh. 가 대표적인데, 우리가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양버즘나무입니다. 양버즘나무와 버즘나무는 생김새와 특징이 거의 비슷해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양버즘나무는 하나의 대궁에 하나의 열매가 매달리지만 버즘나무는 하나의 대궁에 세 개 정도의 열매가 한꺼번에 열린다는 차이가 있는 정도이지요.
이 땅에서 살아온 양버즘나무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보니, 양버즘나무 노거수는 보기 어렵습니다. 워낙 속성으로 빠르게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크게 잘 자란 양버즘나무에 대한 기대는 가짐직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도시에서 가로수의 운명을 띠고 자라는 거개의 나무가 그렇듯이 양버즘나무 가로수 역시 도시의 환경에서 그리 크고 울창하게 자라기를 기대하는 건 언감생심입니다. 그나마 울창하게 잘 자란 양버즘나무를 생각할라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충북 청주의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 정도입니다. 청주의 양버즘나무 가로수길은 1950년대에 심어 조성한 거리 숲입니다. 불과 오십 여 년 만에 지금의 아름다운 거리 숲을 이룬 겁니다.
○ 삼십미터를 훌쩍 넘는 양버즘나무들이 이룬 숲 ○
청주 가로수 양버즘나무를 만난 뒤로 어느 깊은 숲의 절집 극락전 곁에 서 있는 매우 아름답게 자란 양버즘나무를 본 적은 있습니다만, 청주에서만큼 장하게 큰 양버즘나무가 줄지어 이룬 큰 숲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바로 이 영천 임고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백 년 된 양버즘나무 숲을 만났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양버즘나무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게 백 여 년 전이고 보면, 임고초등학교의 양버즘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양버즘나무라고 해도 됩니다. 오십 년 쯤 된 청주 양버즘나무 가로수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나무인 겁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나무들이었습니다.
임고초등학교 숲이 양버즘나무만으로 이뤄진 건 아닙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개잎갈나무 등이 운동장 사방에 늘어서 있고 한켠에 아담한 교사 건물이 자리했습니다. 임고초등학교는 그러니까, 학교의 숲이라기보다는 숲 속의 학교라 하는 게 더 맞춤해 보입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모두 빼어난 숲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나무는 양버즘나무였습니다. 그 동안 제가 보았던 양버즘나무 가운데에는 규모에서 가장 큰 나무입니다. 모두 같은 시기에 심은 나무여서 높이는 대략 비슷합니다. 얼핏 가늠해 보니, 30미터를 훌쩍 넘는 높이입니다. 대략 15미터 안팎인 청주 가로수 양버즘나무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셈입니다. 나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조금씩 사정은 다르지만 가지를 펼칠 공간이 충분한 나무는 가지도 무척 넓게 펼쳤습니다.
○ 학교를 처음 열던 그 때의 아이들이 심은 나무 ○
이 나무는 임고초등학교를 처음 연 1924년 즈음에 심은 나무입니다. 그때 이 학교에 입학한 어린 학생들이 십 년 쯤 된 양버즘나무 열한 그루, 십오 년 된 느티나무 열다섯 그루, 오 년 자란 은행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몇 그루는 오래 전에 명을 다해 스러진 모양입니다. 운동장 가장 안쪽을 빙 둘러서 서 있는 양버즘나무는 이 학교 숲에서 가장 돋보이는 나무입니다. 우선 규모에서 바라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학교 운동장이 결코 작은 것도 아닌데,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때문인지 운동장이 협소하다고 느낄 만큼입니다.
2003년에는 '산림청'과 '생명의 숲 국민운동' '유한킴벌리'가 함께 주최하는 전국 아름다운숲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숲은 그리 오래 된 숲도 아닙니다. 불과 1백 년만에 이만큼 아름다운 학교 숲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여느 나무에 비해 빠르게 자라는 양버즘나무가 중심을 이룬 숲이기에 짧은 시간에 이처럼 울창한 숲이 이루어진 건 사실이지만, 다른 나무들이라 해도 특별히 느리게 자라는, 이를테면 백 년 자라야 겨우 십미터 정도 자라는 주목 같은 나무가 아니라면 이 땅의 어디에서라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의 일입니다. 하긴 백 년이라 해도 사람의 시간으로 생각하면 한 평생을 넘는 긴 시간이긴 합니다.
○ 전국 아름다운 숲 대회에서 전국 대상을 수상한 숲 ○
이 큰 나무들의 속내를 일일이 톺아보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나무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햇살이 지나치게 뜨거운 날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아마도 도시에서나 또 다른 어떤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이 지어낸 매연을 빨아들이며 살아가는 슬픈 양버즘나무를 만나게 될 때마다 나는 이 숲의 양버즘나무들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고는 어디에서라도 이 양버즘나무들을 그리워하는 날들이 이어지겠지요. 깊어진 그리움 가슴에 안고 다시 이 숲을 다시 찾아올 날은 아마 그리 멀지 않을 겁니다. 그때는 조금 더 천천히 더 오래 나무들을 바라보겠습니다. 더불어 넓은 잎 하나하나에 담긴 임고초등학교 아이들의 아우성도 함께 바라보게 될 겁니다.
끝으로 지난 주 《나무편지》에서도 알려드렸던 서강대 평생교육원의 《나무 인문학》 강좌 소식 아울러 전해드리며 오늘의 나무 이야기 마무리하겠습니다.
○ 올 가을엔 서강대에서 나무의 향기를 바라보세요 ○
지난 해 이맘 때에 처음 개설한 강좌입니다. 서강대 평생교육원의 《나무 인문학》 강좌는 봄 학기와 가을 학기에 제가끔 다른 내용으로 일년 내내 이어갑니다. 올 가을 강좌는 〈나무의 역사〉라는 부제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나무,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꽃,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나무 등 나무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으로 구성해 진행합니다. 학기 중에는 두 차례의 현장 답사 실습도 계획되어 있습니다. 오늘 낮부터 아래의 강좌 신청 페이지가 열릴 겁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bit.ly/2LV6Oil <== 서강대 평생교육원 《나무인문학》 강좌 신청 페이지
말복이 코앞인데, 뜨거운 날씨는 꼼짝 않고 그대로입니다. 태풍을 비롯한 날씨에 영향을 미칠 여러 변수들도 맥없이 스러져가는 맹렬한 더위의 여름입니다. 그래도 말복 지나고 다음 주의 처서까지 지나면 어김없이 이 땅에도 여름 가고 가을 오겠지요. 마음 평안히 다독이면서 이 여름 건강하게 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 된 양버즘나무 숲을 그리며 8월 13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