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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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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문을 주목하는 이유 2. 김정문의 생애와 一家 3. 사승관계 4.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 |
1. 김정문을 주목하는 이유
남원은 동편제의 고향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유파를 넘나들며 소리를 배우는 현상이 일반화되면서 制를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하게까지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制에 따라 소리의 법도가 달랐던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또한 개인적인 편차가 있겠지만 오늘날에도 制에 대한 구분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소리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남원이 동편제의 고향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원에는 동편제를 고수하는 소리꾼 강도근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 전인삼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制를 구분하는 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있다. 물론 강도근이나 전인삼이 지켜나가고자 한 동편제의 소리 법도가 우조를 중심으로 하여 이른바 대마디 대장단으로 짜 나가는 전통적인 동편 소리 그대로라고 할 수는 없다. 사실 각 制가 지니고 있는 소리 법도에 대한 원칙적인 구분은 가능하겠지만, 소리의 구체적인 구현 양상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소리 법도에 변화가 생긴 것 또한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와 서편제를 지향하는 양상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강산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원에서는 동편제를 지켜내려 한다. 논자에 따라서는 강도근의 소리에 육자배기 가락과 계면 성음이 묻어 있어 동편소리라고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지적은 소리의 법도를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볼 때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소리의 법도가 지닌 변별적 특성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오늘날에도 制의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남원의 소리꾼 강도근 역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동편제가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동편제를 고수하려는 노력은 전통적인 소리를 지켜내려는 장인 정신의 발로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원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명창들 가운데 동편제의 형성,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명창으로 권삼득, 송흥록, 송광록,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김정문, 이화중선 등을 꼽을 수 있다. 판소리의 비조라 할 수 있는 권삼득을 비롯하여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 수준의 기량을 지닌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이들 명창 중에서 김정문만이 최초의 광대열전인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들어있지 않다. 김정문의 제자인 박녹주도 여류 명창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박녹주’ 조에서도 그녀가 송만갑과 정정렬의 敎鞭下에 여러 해 수련을 쌓았다는 사실과 <춘향가>와 <흥보가>에 長하다는 점만 기록해 두고 있다.1) 박녹주의 특장으로 소개된 <흥보가>는 김정문으로부터 배운 것인데,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를 배웠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김정문이 비록 근대 5명창의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당대의 명창이다. 이런 그가 조선창극사에 빠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김정문이 완숙한 기량을 펼칠 기회를 그다지 많이 갖지 못 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선창극사의 서술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이야말로 명창으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데, 명창은 명창이되 자신의 명성을 전국적으로 떨칠 기회가 짧았던 것이다. 김정문과 비슷한 이유로 조선창극사에 소개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이가 박봉래(1900-1932)이다. 박봉래는 김정문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박봉술의 친형이다. 그는 송만갑과 김정문으로부터 소리를 배워 나중에는 김정문과 백중을 겨룰 정도의 기량을 쌓아2) 명창이 된 인물이다. 그의 이름이 남도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였지만 서울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구례를 중심으로 지방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다.3) 게다가 박봉래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역시 조선창극사에 소개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는 조선창극사의 저자 정노식의 견문에 한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첫째로 지적한 이유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를 기술할 때 대부분의 정보를 전도성으로부터 얻었다. 따라서 아무리 정노식이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고 조예가 깊었다 하더라도 정보의 수집에 일정한 제약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김정문이나 박봉래와 같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활동 영역도 특정 지역에 치우친 명창에 대해서는 미처 정보를 수집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더욱 많은 것이다.
김정문은 판소리사에서 마땅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명창이다. 우선 그는 송만갑, 유성준 등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부터 소리를 배워 그 역시 명창으로서 손색없는 기량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는 박녹주, 강도근 등과 같이 뛰어난 명창을 제자로 길러내었다. 이 점은 그의 소리가 판소리의 전승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는 명백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근대에 들어와 변모하는 판소리사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명창이다. 따라서 그의 명창으로서의 활동은 근대에 있어서 판소리가 보여준 변모 양상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로서 검토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본고는 몇 차례의 현지 조사와 기존에 조사 보고 된 사실 등을 바탕으로 김정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고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김정문의 생애와 一家
김정문은 1887년 父 金俊萬과 母 劉俊 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原戶籍地가 전북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143번지인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4) 그는 1921년 전북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 672번지로 옮겨 왔다. 그가 남원군 주천면 상주 마을에 온 것은 1931년이다. 그의 부인은 장봉선이며, 1919년 東先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그는 말년에 아편에 중독되었으며, 결국 1935년 5월 19일 경성부 관훈동 4번지 11에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사망을 신고한 이가 동거자 嚴錦珠로 되어 있는데, 엄금주는 관훈동 요정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양해인이라는 부자 한량이 그의 시신을 서울로부터 남원으로 운반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하며, 그의 묘는 현재 상주 마을 뒷산에 있다. 대부분의 명창은 신분적인 이유로 천대를 받거나 혹은 평장을 한 까닭에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밝혀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歌王의 칭호를 받은 송만갑조차도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에 비해 김정문의 묘는 제법 커다란 봉분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이례적이다.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김정문이 남원에 거주한 시기는 호적상 4년 정도이다. 그런데 주천면 상주 마을로 오기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상주 마을에 정착하기 전에도 그의 형제가 살고 있는 고촌 마을을 왕래하면서 남원, 운봉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상주로 오기 전에 고촌에서 살았다는 제보가 있었으나, 현지 조사 결과 그가 고촌에 살지는 않고 자주 내왕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구룡 폭포에서 독공하기도 하였으며, 상주 마을에 거주할 때는 뒷산 ‘가매바위’라는 곳에서 주로 소리 연습을 하였다. 그러니까 그가 기량을 연마하고 명창으로서 활동한 공간은 남원이었음에 틀림없다. 상주 마을에는 대부분 진주 蘇 氏가 살고 있는데, 김정문이 어떤 이유로 상주 마을로 거주지를 정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거주지를 여러 번 옮긴 이유는 소리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찾아서 혹은 신분적인 이유로 옮겨 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많다. 거주지를 옮기면서 활동한 것은 대부분의 역대 명창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거주지를 옮기는 경우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한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옮기는 이유도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 명창의 경우, 득음을 위한 수련의 목적으로 옮겨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판소리 명창은 신분 사회가 엄존하던 전통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최하층의 신분인 광대 출신으로서, 그 출신 성분이 당골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때문에 명창의 반열에 오르기 전에는 신분적인 차별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을 터이고, 이러한 이유로 인해 거주지를 옮기게 되는 일이 잦았다고 생각한다. 김정문이 여러 지역 가운데에서도 상주에 정착한 것은 이 곳이 판소리 공연 환경이 비교적 좋은 남원, 운봉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원이나 운봉은 예부터 많은 명창을 배출하였으며, 또한 소리를 즐길 줄 아는 귀명창이 많았다. 특히 운봉은 지리산 자락 아래에 위치해 있으면서 넓은 들이 있어 천석지기가 많았으며, 이들이 소리꾼들의 후원자 노릇을 하였다. 게다가 남원과 운봉은 지리산과 인접해 있어 수련하기에 안성맞춤인 폭포나 사찰이 주변에 많이 있다. 명창이 되기 위해 폭포나 사찰을 찾아가서 독공을 한 후 득음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일화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의 부인은 당골이었으며, 경제적인 형편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4칸짜리 집에서 그럭저럭 살았다. 현재 그의 집터는 밭이 되었다. 김정문은 다음의 세 가지 활동을 통해 소리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첫째는 협률사 활동이다. 박황에 의하면, 김정문이 김채만에게 <심청가>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도 1908년 송만갑 협률사에 참여하여 통영에 갔다가 그 곳에서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5) 둘째는 남원 권번의 소리 선생이다. 남원에 권번이 설립된 해는 1921년이다. 그런데 김정문이 언제부터 소리 선생을 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원 주천면에서 거주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말년까지 소리 선생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뿐이다. 셋째는 생일 잔치나 요정 등에 불려가 소리를 하고 보수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문의 이와 같은 활동 양상은 당시 명창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당시 대부분의 판소리 唱者는 협률사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창극 공연을 하였다. 이 때 창극은 판소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여러 배우가 등장 인물의 역할을 분담하여 창을 한다는 정도의 변별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판소리는 창극의 형태로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대중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권번이나 고관대작 그리고 부자 한량 등이 또한 판소리 창자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남성의 경우 권번의 소리 선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성의 경우 권번을 통하지 않으면 명창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막힐 정도였다. 그러니까 권번은 그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근대에 있어서 판소리의 전승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명창이 난 집안에서 또 다른 명창 나기가 정승 난 집안에서 또 다른 정승나기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다. 명창을 배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宋 氏 家系(송흥록송우룡송만갑송기덕)와 鄭 氏 家系(정재근정응민정권진), 그리고 金氏 家系(김성옥김정근김창룡)는 판소리로 일가를 이룬 대표적인 명문 집안이다. 김정문은 이처럼 뚜렷한 계보를 형성할 만한 명문 집안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그의 일가 친척을 두루 살펴보면 그의 집안 역시 소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김준만 씨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김정문은 유성준의 甥姪로서, 그의 어머니 劉俊은 유성준의 누이로 생각된다. 김정문의 형제로는 김정식과 김정근이 있다. 김정식이 형이고 김정근은 동생이다. 정식과 정근 형제는 남원군 주천면 고기리 고촌 마을 241번지에서 살았다. 김정식은 소리를 잘하는 편이 못 되었고 장단은 잘 쳤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당골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그 속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김영운은 남원과 운봉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고 한다. 고기리 고촌 마을에 현지 조사를 갔을 때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김영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김영운은 어려서부터 소리를 배운 것이 아니고 중년에 들어서 배웠으며, 특히 <흥보가>를 잘 불렀다고 한다. 김영운에 관해서는 그의 자손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김영운의 아들이 金寅煥(34세)인데, 그는 현재 광주 무등일보 편집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김정문의 후손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현 시점에서 김인환 씨는 작은 할아버지 김정문의 유일한 방계 혈족이기도 한 셈이다. 김인환 씨에 의하면, 김영운은 호적에는 金奇淳으로 되어 있는데 강도근의 누이와 결혼을 하여 1남을 두고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고기리 고촌 마을에 거주할 때, 작은 아버지인 상주 마을의 김정문에게 가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주로 고수로 활동했는데 안숙선 씨도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적이 있으며, 그 역시 남원국악원의 소리 선생을 하였다.6) 그는 1975년 59세 때 세상을 떠났다. KBS 라디오 방송국 ‘오작교의 밤’이라는 프로에 출연하여 소리한 적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7) 전국적인 지명도는 얻지 못 했지만 적어도 남원과 운봉에서는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는 사실을 고촌 마을 제보자의 제보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정문과 비교해 볼 때, 김정문이 무대 소리였다면 김영운은 목은 좋지만 방안 소리였다고 한다.8)
3. 사승관계
김정문이 몇 살적부터 판소리를 공부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처음 삼촌인 유성준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유성준(1874-1949)은 구례 출신으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했다. 김정문은 그에게서 <수궁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문은 소리를 받아내는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원래 ‘괄음목’이었다. 목이 잘 쉬어 소리가 탁하고 상청이 나오지 않는 것을 소리판에서는 ‘괄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괄음목’은 목이 쌩쌩히 나는 게 아니라 궂은 목이라는 뜻이다. 박봉술 일가도 ‘괄음목’이었는데, 기예를 연마하여 명창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김정문 역시 그다지 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판소리 공부 방식은 스승이 한 대목을 하면 제자가 따라 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김정문이 스승의 소리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자 유성준이 참나무 북채로 김정문의 목덜미를 후려갈겨 김정문의 목에 상처가 생겼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 인해 김정문은 유성준을 떠났다. 그는 송만갑(1865-1939)을 찾아가 그의 고수 노릇을 하면서 소리 속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명창이 되었다고 한다. 김정문은 김채만(1865-1911)에게서도 소리를 배웠다. 김채만은 피를 토하는 두견새 울음이 진달래 꽃잎을 빨갛게 물들이듯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였다는 서편제의 절창이다. 김정문이 송만갑의 협률사에 참가하여 통영에 갔을 때 그 곳에서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이에 반하였는데, 후에 송만갑의 협률사가 해체된 후 광주 속골로 김채만을 찾아가 그에게서 <심청가>를 배웠다고 한다. 김정문은 송만갑과 김채만의 소리를 비교하여, “송만갑의 소리는 금벽이 찬란한 高樓巨閣인데, 김채만의 소리는 문방사우 아정하게 맞춘 한옥의 품격과 같다”고 평한 바 있다. 그러니까 그는 동편 소리를 주로 배웠지만, 서편 소리도 함께 배운 셈이다. 김정문이 어느 정도 소리를 잘했는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이동백 선생이 당시 최고 명창이었는데, 김정문 선생이 40무렵 인가부터는 대단했다 그러대요. 이동백, 김정문, 송만갑, 이진영 씨 그리구 누군가 하나하고 다섯이서 원각사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대요. 그런데 송만갑 선생은 그때 그렇게 제자들한테 미루어버렸다 하데요. 김정문 선생 때문에. “나는 소지하러 나왔습니다.” 그랬대요. 원래는 제자가 먼저하고 스승이, 연장자가 나중에 하는 게 소리판의 예의거든요. 그런데 송만갑 선생님은 제자 앞에 소리를 꼭 하셨대요. 김정문 선생하고 같이할 때는, 김정문 선생이 소리를 잘했으니까요.9)
당시에는 이동백 선생이 최고 명창이라고 그랬는데, 김정문 선생이 세 번짼가 나와 소리를 했대요. 그런데 김정문 선생 소리가 끝나고 나서 삼창 사창을 받고 나갔는디, 이동백 선생이 나가니까 이동백 선생 들어가고 김정문 선생 나오라고 난리가 났었대요. 그렇게 대단했었대요.10)
과장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일화라고 해도, 김정문이 대중의 취향에 맞는 소리와 극적 표현 능력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제자를 가르치는 데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제자로는 김철원, 박녹주, 박초월, 강도근, 이소희, 장혜순(김혜순?)11), 김영운 등이 있다. 제자가 소리 공부를 하려면 학채를 지불하든가 아니면 그 집에 기거하면서 일을 해주면서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박녹주는 학채를 내면서 공부를 했고, 강도근은 거의 머슴처럼 일을 해 주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운봉에서 온 장혜순은 운봉의 천석지기가 소리채를 대주어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남자 수제자는 김철원이고, 여자 수제자는 박녹주였다. 김철원은 스승보다도 소리를 더 잘한다고 할 만큼 출중하였는데, 중간에 목이 부러져 소리를 못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녹주는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를 배웠는데, 2년 간 공부하였다. 그런데 정광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문의 <흥보가>에는 ‘제비노정기’가 없으며 박녹주는 이 대목을 김창환으로부터 배웠다.
<흥부전>의 제비노정기는 양화집에서 나왔다는 게 뿌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어지기 쉬운 것이요. 지금 박녹주 씨한테서 배운 사람덜이 전부 제비노정기를 허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김창환 씨 집에서 가사와 곡조가 나왔다는 것을 잘 모르거든요. 박녹주 씨는 단성사에서 의관님을 모시고 소년 시절을 보낼 적에 그 노정기허는 것을 보니 좋거든. 그래 이걸 영감님한테 배왔어요. 배왔으나 소년 시절에 잠깐 배운 것이라, 그것이 똑바로 나갔다고 볼 수 없는 점이 있으나, 어쨌든지 간에 서울서 박녹주 씨가 김창환 씨한테 단성사에서 배왔기 때문에 그 흥보전에 대해서 그 제자들이 그걸 알죠. 박녹주 씨가 김정문 선생한테서 공부를 했다는디, 거기(김정문)는 제비노정기가 없어요.12)
실제로 박녹주 명창의 <흥보가>에 들어있는 제비노정기와13) 김창환제 <흥보가>의 제비노정기14)를 비교해 본 결과 사설이 같았다. 다만, 김창환제에서는 늦은 자진모리로 부르는 데 비해, 박녹주는 이 대목을 중중모리로 부르는 점만 다르다.
김정문은 제자들에게 소리를 가르칠 때 상당히 엄격하였다. 박녹주가 자꾸만 고갯짓을 하면서 소리를 하니까 고갯짓을 하지 못하도록 박녹주의 머리에 큰 돌을 올려놓고 소리를 가르친 것은 엄격한 김정문의 풍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김영운도 작은아버지인 김정문으로부터 소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혼이 나곤 했다고 한다. 강도근(1917-1996)15)은 열대여섯 살 무렵 임실의 박중근으로부터<네 그른 내력>, 단가 <공도란니> 등을 배우고 난 후 바로 주천면의 김정문을 찾아가 소리를 배웠다. 그가 김정문에게 간 이유는 박중근이 양성음이고 육자배기 성음이어서 이런 성음을 배워서는 안 되겠다 판단하고 동편소리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 그가 김정문에게 소리를 배운 시기는 1933년 전후이다. 그는 김정문으로부터 <심청가>와 <흥보가>, 그리고 <적벽가>를 배웠다. 그런데 <흥보가>의 경우, ‘놀부 박타는 대목’은 가르쳐 주지 않아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까지만 배웠으며, ‘놀부 박타는 대목’은 순천 인근에 있는 부용관이라는 요릿집에서 부용이의 도움으로 생활하고 있던 이진영으로부터 배웠다. <수궁가>는 가르쳐 주지 않아 후에 유성준에게 배웠다. 강도근 역시 유성준의 성질이 고약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정문이 유성준에게 맞은 것과 유사한 경험을 강도근도 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강도근 역시 목덜미에 상처가 남아 있다. 강도근은 유성준이 가르쳐 주지 않은 대목을 임방울로부터 배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도근의 소리에 육자배기 성음과 계면조가 많이 섞여 있는 것이다.
4.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과 소리의 특징
김정문은 단가 <홍문연>을 잘 불렀으며, <흥보가>를 특히 잘 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소리가 지닌 특징은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유성기 음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김정문은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음반도 그다지 많이 남기지는 못하였다. 그가 남긴 유성기 음반의 목록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1928년 <흥보가> 박타령(上) Columbia 40027-A(20703-1)
<흥보가> 박타령(돈타령)(下) Columbia 40027-B(20704-1)
② 1934년 <춘향전> Chieron 501-512 (12장)
③ 1934년 단가 <홍문연 上, 下> <西漢演右> Chieron 189-A․B
<홍문연>은 초패왕이 홍문연 잔치에서 한나라 유방을 죽이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담은 단가로서, 대부분의 단가와 마찬가지로 우조에 중모리 장단으로 불리고 있다. 김정문은 단가의 분위기에 맞게 단아한 소리로 영웅들의 면모를 잘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런데 단가의 끝부분인 “장검을 어루만져 실수를 기다리던 홍포은갑 저 장사는 항장일시가 분명허다 ---” 이후 대목에는 계면가락으로 기교를 부린 흔적이 엿보인다. <흥보가>의 박타령과 돈타령은 이흥원의 장고 장단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진양 장단으로 흥보가 박을 타는 대목에서는 구성진 목으로 흥보의 원망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상청으로 쭉 뻗어주어야 할 부분에서 좀 밀리는 느낌을 주고 있다. 돈타령에서는 박을 탄 후 박에서 쌀과 돈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 하는 흥보의 모습을 휘모리와 중중모리장단에 얹어 맛있게 부르고 있다. 씨에론판 <춘향전> 전집은 김정문이 신금홍과 배역을 나누어 소리를 하고 심영과 남궁선이 신파조로 해설을 하는 식으로 짜여져 있다.17) 모두 12매로 되어 있는데, 1926년 이동백, 김추월, 신금홍의 일축판 <춘향전> 이후 두 번째로 나온 <춘향전> 전집물이다. 12매의 구성은, 第一編 南原의 春色(上)(下), 第二編 廣寒樓의 佳緣 (上)(下), 第三編 鴛鴦枕에 사랑가(上)(下), 第四編 紅淚惜別(上)(下), 第五編 첫公事가 妓生点考(上)(下), 第六編 피에 젓는 十杖歌(上)(下), 第七編 獄中吉夢(上)(下), 第八編 李道令御使拜命(上)(下), 第九編 一刻千秋南原行(上)(下), 第十編 獄中相逢(上)(下), 第十一編 御使出道(上)(下), 第十二編 李花春風(上)(下)로 되어 있다. 각 대목마다 서두에 “춘향전 전집 제일편 광한루에서 이도령이 춘향이를 처음 만나는 데이올시다---” 하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그리고 사설의 짜임도 전체적으로 축약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은 당시에 나온 유성기 음반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발매된 일축판 <춘향전>과 비교해 볼 때, 일축판은 비록 분창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판소리로서의 <춘향전>의 본래 모습을 상대적으로 많이 갖추고 있는 데 비해서, 씨에론판은 분창 형태에다가 아니리와 몇몇 대화 부분을 심영과 남궁선이 변사와 같은 목소리로 재현하고 있어 극적 구성이 한층 강조되어 나타난다. 같은 동편제에 속하면서 당시 김정문에게 소리를 가르치기도 했던 송만갑의 <춘향가>와 소리대목 구성을 비교해 보면, 씨에론판 <춘향전>의 특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송만갑판 <춘향가>는 박봉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18)
<송만갑판 박봉술 창 <춘향가>와 씨에론판 <춘향가>의 소리대목 구성>
송만갑판 박봉술 창<춘향가> 씨에론판 <춘향가>
기산영수 기산영수
나귀안장 나귀안장
적성가 적성가
앉었다 일어서 안젓다 이러나(‘백백홍홍 난만중’ 포함)
춘향화용 금옥사설
방자 춘향 부르러 가다 아주 짤막함
네 그른 내력 네 그른 내력
춘향 방자 따라 가는데 없음(방자가 춘향 대신, 춘향모 에게 허락받음)
춘향 거동 없음(춘향은 끝내 가지 않고 이도령보고 오라고 함)
춘향집 가리키는데 없음
몽룡 동헌에 없음
천자풀이 없음
퇴령소리 길게 나니 퇴령소리 길게 나니
방자 춘향집에 없음
도련님 먼저 오르시오 없음
방치례 없음
달타령 없음
성등사또 자하골 성참판 영감
음식차림 없음
몽룡 꾀병 없음
긴 사랑가 없음
자진 사랑가(금옥사설 형식) 사랑가(자진사랑가 앞대목 + 음양가)
업기 타령 업기타령
정짜 노래 없음
궁짜 노래 없음
타기 타령 없음
말농질 타령 없음
이별차 가는데 이별차 가는데
춘향이 깜짝 놀래 춘향이 깜짝 놀래
이별가 이별가(간략)
춘향모친이 나온다 춘향어머니 이말 듣고 (간략)
춘향 이도령 이별 없음
신연맞이 신연맞이
긴 기생점고 긴 기생점고
자진 기생점고자진 기생점고
군로사령 군로사령
갈까보다 없음
백구타령 없음
행수기생 없음
사또님 듣조시요 없음
춘향 내리는디 없음
십장가 십장가
열을 치고(남원골) 없음
여러 기생이 나온다 없음
옥으로 내려가는데 없음
옥중가 옥중가
과거장 과거장
어사남행 어사남행
어사행장 어사행장
긴 농부가 농부가(상사듸야 계열의 농부가)
자진 농부가 없음
젊은 농부 냅더서 없음
경전야숙 없음
방자 길소리 없음
방자 문안 없음
어사 탄식 없음
박석틔 박석틔
향단 기도 없음
어사와 장모 어사와 장모
춘향모 탄식 없음
향단이 밥상 차림 없음
바루 치는 데 없음
옥중 상봉 옥중상봉
이튿날 평명후의 이튼날 본관사또
벌떼같은 군로사령 금군나졸이 매달니고
수청하든 통인이며 없음
어사 술상 어사 술상
어사 출도 어사 출도
옥사정이 옥사정이
춘향이 아뢰다 춘향이 아뢰다
대상에 올라간다 춘향이 춤추고 노래하다
어디 가야 여기 있다 어디가야 여기 있다
춘향모 춤추는데 춘향모 춤추는데
뒷풀이 뒷풀이
이상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씨에론판 <춘향전>에는 많은 소리 대목이 빠져 있다. 빠진 대목은 천자풀이, 방치례, 달타령, 음식타령, 정짜노래, 궁짜노래, 타기타령, 말농질타령, 백구타령 등과 같이, 대부분 사건 전개에 있어서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이른바 ‘비고정체계면’19)에 해당하는 대목들이다. 그리고 방자가 춘향을 데리고 이도령에게 가는 대목이 빠진 대신 춘향이 방자에게 이도령보고 오라고 전하라고 말한 후에 집으로 가는 내용이 나오며, 이도령이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춘향이 편지를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가던 방자를 만나는 대목도 씨에론판 <춘향전>에는 빠져 있다. 작품의 중간 부분에서 사건 전개에 필요한 대목을 중점적으로 수용하였으면서도, 서두와 결말 부분은 대체로 충실하게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비고정체계면에 해당하는 소리 대목이 많이 빠진 이유는, 한 면에 2-3분 정도에 걸쳐 부르는 양만을 녹음할 수 있는 유성기 음반의 특성에 맞추기 위해 사설을 축약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로 이해된다. 그러면서도 기산영수, 적성가, 사랑가, 신연맞이, 기생점고, 십장가, 옥중가, 어사출도 등 <춘향가> 가운데 뛰어난 소리대목으로 꼽히는 대목은 모두 들어있다.
김정문이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에 오면 유파에 대한 구분 의식이 약화되고 계면 위주로 소리를 짜는 서편제가 주도적인 창법으로 대두하게 된다. 송만갑이 가문의 소리법제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킨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일화는 판소리가 근대로 접어들면서 어떤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송만갑이 유성기 음반에 남긴 소리는 오늘날 동편제로 일컬어지는 소리와는 또 다른 동편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송만갑은 목구성이 철성인데 상청을 내지를 때에는 끝까지 쳐올리며, 엇붙임을 별로 쓰지 않고 대마디 대장단에 古拙하게 소리를 짜나간다. 이러한 그의 소리는 동편제의 전통적인 모습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배연형은 송만갑의 소리를 판소리의 구심점이자 꼭짓점이요 동편제의 기준이라고 말한다.20) 물론 송만갑 이전의 동편 소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송만갑의 소리가 동편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일화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송만갑 역시 변모해 가는 동편제 소리의 한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오늘날의 동편소리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古制 동편소리에 가깝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정문은 그의 스승 송만갑에게 소리를 배웠으면서도 송만갑과 비교해 볼 때 古制 동편소리에서 한 발 더 멀어져 있다. 송만갑은 꼿꼿하게 서서 소리를 했으며 구성진 데가 없었다. 송만갑의 이러한 특성은, “송 선생님은 발림은 거의 안 하셨고 가끔 손을 들 뿐, 뻣뻣하게 서서 소리만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김소희 명창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21) 이에 비해 김정문은 발림을 잘 했으며 구성지게 소리를 하였다. 김소희 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김정문 씨의 소리는 송 선생님의 소리보다 장식음이나 잔기교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김정문 씨는 목청이 연하고 가벼워서 송 선생님처럼 소리를 하면 힘이 모자라서 맛이 없으므로 좀 더 기교를 부려야 하기 때문입니다.22)
협률사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창극 형태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던 당대에 있어서 김정문의 이러한 면모는 대중들의 취향에 좀 더 부합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문이 <춘향가>를 할 때 춘향모 역할을 맡으면 수건을 쓰고 나가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고촌 마을의 한 할머니 생신 잔치 때 김정문을 초청하여 소리를 시켰는데, 이 때 김정문이 <심청가>를 불렀다. 그런데 특히 봉사 흉내를 잘 내어 진짜 봉사 같았으며, 소리를 듣던 노인들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23)
이처럼 김정문은 동편제의 계보에 속해 있으면서 그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좋은 소리가 있으면 유파를 가리지 않고 배우는 판소리 전승 환경에서 동편과 서편의 상호 침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대중의 취향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강산제가 강세를 보이는 이유는 성음을 중시하고 사설이 단정하여 상대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24) 그리고 안숙선과 같이 배우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명창이 인기 있는 것 역시 판소리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적인 배경 때문이다. 이러한 판소리 전승 환경 속에서 동편제를 고수하려는 노력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정문은 당시 많은 국악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편에 중독 되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다. “만일 김정문이 5년만 더 살았어도 남원에 명창 여럿 났을 것이다”라는 양해인 씨의 말은25) 그의 죽음이 남긴 아쉬움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예술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26) 그리고 안숙선과 같이 배우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명창이 인기 있는 것 역시 판소리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이 일반화된 시대적인 배경 때문이다. 이러한 판소리 전승 환경 속에서 동편제를 고수하려는 노력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정문은 당시 많은 국악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편에 중독 되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다. “만일 김정문이 5년만 더 살았어도 남원에 명창 여럿 났을 것이다”라는 양해인 씨의 말은27) 그의 죽음이 남긴 아쉬움을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참고사항
기생청 [妓生廳] 가무(歌舞)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시·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儒生)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가 8·15광복 이후 사라졌다.
권번[券番]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대동권번(大東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조선권번(朝鮮券番), 평양에는 기성권번(箕城券番) 등이 있었고, 그 밖에 부산·대구·광주·남원·개성·함흥·진주 등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이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많은 명기(名妓)가 배출되었고, 한때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던 이화자(李花子)도 권번 출신이었다.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할 무렵 일제의 강압 정책으로 폐지되었다.
협률사 [協律社] 발생에 관한 확실한 문헌은 없으며 다만 판소리 연구가인 박황(朴晃)이나 한말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에 의하면, 협률사라는 이름은 1902년(광무 2)에 설립된 희대(戯臺 : 舞臺)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며, 1860년을 전후하여 판소리의 명창들이 중국 청(淸)나라의 협률창희(協律唱戯)에서 따온 것으로 주장한다. 이 단체에서 상연한 내용은 주로 판소리·줄타기·가무음곡·재담·농악 등의 연예물로서 창극은 상연되지 않았다. 이처럼 창악인들의 연예 활동이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자연히 대중의 연희(演戯)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정부에서도 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1902년 고종의 어극사십년 칭경례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을 대대적으로 가질 계획을 세우고, 고종의 칙허를 얻어 희대를 만드는 한편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協律司)를 두게 되었다. 협률사에서는 가무녀(歌舞女)를 조직했고 한편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金唱煥)·송만갑 등은 전국의 명인(名人)·명창(名唱)을 서울로 모았는데, 그 수가 17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연예계에 처음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나 했으나 그 해의 콜레라 만연에 이은 농산물의 흉작, 그리고 일본·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문제로 이러한 꿈은 사라지고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1903년에는 경영권도 정부에서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 사설 극장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예술 단체인 협률사가 연희하던 희대도 똑같이 협률사로 부르게 된 듯하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진다. 이후 협률사는 공연장의 풍기 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았고 따라서 예술 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벌써 서양의 새로운 문물 바람이 점차 일면서 개방적이 되어 갔고 연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어 1908년을 전후해서는 원각사(圓覺社)를 비롯하여 광무대(光武臺)·단성사(團成社) 등의 연극 전용 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생겨났다. 이해 이인직(李人稙) 등이 중심이 되어 협률사를 연희장(演戯場)으로 다시 사용하도록 정부의 인가를 얻어 이름도 원각사로 바꾸었다. 앞에서 말한 원각사는 바로 이 원각사를 일컬으며 새롭게 단장한 원각사는 주로 신극만을 상연하였고 이에 생업에 위협을 받게 된 전속 창극 단체이던 협률사는 지방 순업(地方巡業)으로 전락하여 해산되었다.
우조 [羽調] 오지(五指)라고도 한다. 우조 가곡의 음계는 황(黃)·태(太)·중(仲)·임(林)·남(南)의 5음 음계이며, 가곡의 우조는 청황종(淸黃鐘)을 중심음으로 하는 평조선법으로 되었다. 이밖에도 우조는 각각 다음과 같은 뜻을 지녔다. ① 중국 음악의 5조(五調) 가운데 다섯 번째 선법명. 우조는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의 5성(五聲) 중에서 우를 중심음으로 하여 만든 선법명이다. ②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곡에 쓰였던 악조명(樂調名). 그 당시의 평조와 함께 거문고의 187곡에 쓰였다. ③ 조선 성종 때 향악(鄕樂)의 7조(七調) 중 높은 음을 중심음으로 삼은 4개 조의 총칭. ④ 현행 판소리에서 쓰이는 악조명. 담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며, 흔히 느린 진양조장단에 맞추어 부른다. ⑤ 현행 산조에서 쓰이는 악조명. 가야금산조의 경우 대개 평조(平調)·계면조(界面調)와 함께 쓰인다.
동편제 [東便制] 판소리는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 크게 세 유파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 동편제는 섬진강 잔수(전남 구례)의 동쪽지역 명창들에 의해 완성되어 구례, 남원, 순창, 곡성, 고창 등지에서 성행한 판소리를 말한다. 명창 가왕 송흥록(宋興錄)이 발전시켜 국창 송만갑이 완성시켰다. 웅장하면서 호탕한 소리인 우조를 많이 사용하고 발성초(發聲初 입을 열어 처음 내는 소리)가 진중하다. 통성을 쓰며 소리 끝을 짧게 끊는 등 대마디 대장단의 특징이 있다. 동편제의 명창으로는 가왕 송흥록을 비롯해 송광록, 박만순, 송우룡, 송만갑, 유성준, 박봉래, 박초월, 김소희, 김정문, 임방울, 정광수, 박봉술 등이 있다.
서편제 [西便制] 조선 정조 ·순조 무렵 8명창 중의 한 사람 박유전(朴裕全)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로, 광주 ·나주 ·보성 ·강진 ·해남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며 이 지역들이 섬진강의 서쪽에 자리한다고 하여 서편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소리제의 특징은 유연애절(柔軟哀切), 즉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고 애절하며,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진 이른바 꼬리를 달고 있는 점이다. 또한 계면조(界面調)형의 가락이 많다. 이는 활달하고도 우렁찬 동편제(東便制)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서편제에 어울리는 노래로는 《심청가》를 꼽고 있다. 서편제의 명창으로는 박유전을 비롯하여 이날치(李捺治) ·김채만(金采萬)·정창업(丁昌業)·김창환(金昌煥)·정정렬(丁貞烈) 등이 알려졌으며, 이는 다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의 예능보유자인 김소희(金素姬)·김여란(金如蘭) 등으로 이어졌다.
중고제 [中高制] 명창 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창법으로 경기와 충청 일대에서 성하였다. 창법상 동편제(東便制)와 서편제(西便制)와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다. 상하성(上下聲)이 분명하고 경(京)드름조(調)가 많다. 중고제의 명창은 모흥갑(牟興甲)·고소관(高素寬)·김재철(金齋喆)·한송학(韓松鶴)·김석창(金碩昌)·김정근(金正根)·김창룡(金昌龍) 등이다.
강산제 [岡山制] ‘江山制’로도 쓰며 다른 유파들에 비하여 체계가 정연하면서도 범위가 넓다. 원래 박유전은 판소리 서편제(西便制)의 수령으로 궁중 및 귀족들의 사랑방을 드나들며 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다 만년에 여생을 보낸 전남 보성군 강산리(岡山里)에서 자신의 오랜 경험과 유생들의 조언을 토대로 이 제(制)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제의 특징은 박유전 자신이 서편제의 수령이었던 만큼 서편제를 그 바탕으로 하면서, 서편제 자체의 지나치게 애절한 면은 지양하고, 동편제(東便制)의 웅건함과 중고제의 분명함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놓은 점이다. 그리고 사설의 내용도 가능한 한 삼강오륜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이 제의 대표적 판소리로는 《심청가》가 있고, 명창으로는 박유전을 위시한 정재근(鄭在根) ·정응민(鄭應珉) 등이 꼽힌다.
육자배기 [六字-] 서도의 《수심가》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이다. 원래 농요(農謠)의 갈래이며, ‘육자배기’라는 이름은 이 노래의 장단 진양의 1각인 6박을 단위로 하는 노래라는 뜻에서 생긴 듯하다. 이 진양은 민요에서는 보기 드문 장단이며 그 박자가 매우 느려서 한스럽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나 억양이 강하고 구성진 멋이 있다. 그리고 그 선율이 유연하면서도 음의 폭이 넓고 장절의 변화가 다양하여 그 예술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흘러내리는 미분음(微分音) 및 시김새에 따른 목구성이 독특하여 ‘육자배기조’라는 선율형을 낳았는데, 이 선율형은 전라도 사람이 아니면 제 맛을 낼 수 없다. 가사는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몰려 들어온다. 우장을 두르고 지심 매러 갈거나, 진국명산 만장봉에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며 송죽 같은 굳은 절개 매 맞는다고 훼절할까…”로 되어 있다.
육자배기조 [六字-調] 곧 토리의 하나이며 전라도의 《육자배기》와 같은 선율형이다. 구성음은 계면조(界面調)와 같은 미 ·라 ·시의 3음으로 구성지고 슬픈 느낌을 준다. 남도의 무속음악(巫俗音樂)과 《육자배기》 《남도흥타령》 《강강수월래》 《농부가》 《진도아리랑》 등 민요 ·시나위 ·판소리 등이 이 선율형을 쓴다.
자진육자배기 《육자배기》에 이어서 부르는 빠른 노래로 《육자배기》의 6박을 3박으로 축소한 느린 세마치장단으로 부른다. 선율형은 《육자배기》와 같으나 전체적으로 보다 구성지고 흐느적거리는 느낌을 준다. 사설은 "영산홍록(暎山紅綠) 봉접비(蜂蝶飛)하니 혹가혹무(或歌或舞)하는구나. 우줄우줄 진달화며 웃고 피는 모란화라, 낙화(落花)는 점점홍(點點紅)이요. 나는 언제 죽어 꽃되며, 우리임은 어느 시절에 죽어 나비될거나"로 이어진다.
계면조 [界面調]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이후 쓰이고 있는 선법명으로 평조(平調)와 대립되는 이름이다. 원래 《악학궤범》 당시의 계면조는 기음(基音)이 다른 7개의 조, 즉 7조가 있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모두 없어지고 임종(林鐘)을 기음으로 한 임종계면조와 황종(黃鐘)을 기음으로 한 황종계면조 2종류만이 남게 되었다. 현재도 이 2음계가 통용되나 그냥 '계면조'라 하면 황종계면조를 이른다. 계면조의 음계도 《악학궤범》 당시에는 5음으로 구성된 5음음계 계면조였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두 음이 잘 쓰이지 않게 되어 3음음계 내지 4음음계로 변하였다. 3음음계를 예로 그 음렬(音列)을 살펴보면, 첫째 음과 둘째 음 사이는 6률(律), 즉 완전4도에 가까운 음정이고, 둘째 음과 셋째 음 사이는 3률, 즉 장2도에 가까운 음정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3음을 첫째 음은 굵게 흔들어 주고, 둘째 음은 담담히 그대로 내주고, 셋째 음은 음을 낸 즉시 음정을 떨어뜨려 줌으로써 계면조선법 특유의 기분을 살리고 있다. 흔히 서양음계의 단조와 비슷하다 하여 '라선법(la旋法)'이라고도 한다. 계면조는 《영산회상(靈山會相)》·가곡·가사·시조·민요·판소리 등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권삼득 [權三得, 1772~1841] 본명 정( )이며, 전라북도 완주에서 태어났다.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판소리 창본(唱本)에는 권삼보·권선달·권생원 등의 이름으로 나오고, 《광대가(廣大歌)》에는 권사인(權士仁)으로 나온다. 하한담(河漢潭)에게 소리를 배웠으며, 타고난 성대는 듣는 사람을 황홀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흥보가》를 잘 불렀고, 그의 더늠(스스로 작곡하여 뛰어나게 잘 불렀던 대목)은 《흥보가》 중 제비후리러 나가는 대목이며, 그의 제(制:음악적 특징)를 설렁제·덜렁제 또는 드렁조(調)라고도 한다.
송흥록 [宋興祿, 1801~1863]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 출생. 8명창의 한 사람으로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았다.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로서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는 한편, 매부인 김성옥(金成玉)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그의 창법은 발성초(發聲初)가 극히 신중하였고, 웅건·청담한 창법을 가진 동편제(東便制)를 이룩하였다. 특히 《춘향가》 중의 〈옥중가(獄中歌)〉와 《변강쇠타령》 《적벽가(赤壁歌)》 등을 잘 불렀다.
송광록 [宋光祿, ?~?] 우룡(雨龍)의 아버지, 만갑(萬甲)의 할아버지이다. 전북 함열(咸悅) 출신. 처음에는 형 흥록(興綠)을 따라다니며 고수노릇을 하다가 뒤에 제주도로 건너가 노래공부에 전념, 명창이 되었다. 신재효(申在孝)는 그의 《광대가(廣大歌)》에서 9명의 명창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춘향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춘향가》에서 긴 사랑가<만첩청산(萬疊靑山)>이 더늠(장기)으로 알려졌다. 그의 소리재는 아들 우룡에게 전해져 판소리 동편제(東便制)의 큰 인맥을 형성하였다. 만년은 후진을 양성하며 구례에서 살았다.
송우룡 [宋雨龍, 1835~1897] 아명 우렁. 전라남도 구례 출생. 명창 광록(光祿)의 아들이며 만갑(萬甲)의 아버지이다. 동문인 박만순(朴萬順)과 함께 동편제(東便制 : 宋興祿의 소리조를 이어받은 판소리 유파)의 법통을 이어받아 철종·고종 연간에 활약하였다. 《수궁가》를 잘 불렀고, 특히 배 가르는 대목에 뛰어났다. 더늠으로 토끼가 용왕을 속이는 대목이 전해진다.
송만갑 [宋萬甲, 1865~1939.1.1] 전남 구례 출생. 명창 우룡(雨龍)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판소리를 배워 10세 때 벌써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창법은 종조(從祖) 흥록(興祿)의 전통적 법제(法制)에서는 많이 벗어났으나 통속(通俗)과 평이(平易)를 신조로 한 동편(東便)의 명창으로 알려졌다. 어전(御前)에서 판소리를 불러 감찰(監察)을 제수 받았다. 192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김정문(金正文)·김광순(金光淳)·박녹주(朴綠珠)·박초월(朴初月) 등의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또 《춘향가》《심청가》를 창극화했으며, 특히 《춘향가》 중에서도 <농부가(農夫歌)>를 잘 불렀다.
유성준 [劉成俊, 1874~1949] 전라남도 구레(求禮)에서 태어났다. 명창 송우룡(宋雨龍) 등에게 소리를 배우고 동편제[東便制:송흥록(宋興祿)의 소릿조를 따른 판소리 유파]를 이었다. 한때 참봉직을 맡았으며 만년에는 진주(晉州)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수궁가》를 잘 불렀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자라가 토끼를 만나는 대목에 뛰어났다. 명창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가 그의 《수궁가》를 전수하였다.
김정문 [金正文, 1887~1935] 전북 남원 출생. 유성준(劉成俊)·송만갑(宋萬甲)에게 사사하고, 당시 유행하던 신제 판소리의 성음을 써서 인기를 모았다. 그 뒤 협률사(協律社)에 참가하였다가 김채만(金采萬)을 만나 다시 그에게 사사하고 그때부터 동편제(東便制)에 서편제(西便制)의 맛을 곁들인 독창적인 소리를 내어 명창 소리를 듣게 되었다. 창극에도 출연하여 갈채를 받았으며 《천하태평》 등 몇 곡은 음반에 담겨 전한다. 《흥보가》《심청가》《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이를 박녹주(朴綠珠)·김준섭(金俊燮)·강도근(姜道根)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화중선 [李花中仙, 1898~1943] 부산 출생. 17세 때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고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에게 사사하였다. 1940년대에 대동가극단(大東歌劇團)을 조직하고 축음기에 많은 취입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3년 재일교포 위문 공연차 일본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객사하였다.《심청가》를 잘 불렀으며, 그 중에도 특히 <사랑가> 대목에 뛰어났다.
정노식 [鄭魯湜, 1899~1965] 1899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1910년 김제의 영명학교(永明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12년 도쿄[東京]의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마친 뒤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였다. 1916년 김철수(金綴洙) 및 중국인과 함께 항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하였고, 신익희(申翼熙)·안재홍(安在鴻) 등이 유학생의 단결과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1912년 10월에 결성한 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1918년에 가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3·1운동 때 48인의 한 사람으로 가담하여 2년 간 복역하였고,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4월 김윤식(金允植)의 사회장(社會葬) 문제로 조선청년회연합회의 내부 개혁 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 집행위원, 같은 해 3월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4년 4월 김사국(金思國)·이영(李英)·한신교(韓愼敎) 등이 주도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이 되었다. 1946년 2월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에 선임되었고, 그해 6월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좌우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좌우합작위원회 좌익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2월에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3당이 합당되어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월북하여 1949년 6월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 북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우익의 정당 및 사회단체가 망라되어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조선노동당 검사위원, 1958년 3월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박녹주 [朴綠珠, 1906.2.15~1979.5.26]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 출생.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유성준(劉成俊)·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정정렬 [丁貞烈, 1876~1938]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생. 7세 때 정창업(丁昌業)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14세 때 이날치(李捺致)에게 2년간 사사하였다. 그 후 익산의 신곡사(神谷寺),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 공주(公州)의 갑사(甲寺) 등지를 전전하며 독학, 명창으로 성공했다. 1915년 이후 마산(馬山)에서 남녀 악인(樂人)들을 지도하다가 상경, 1933년 이동백(李東伯)·송만갑(宋萬甲) 등과 '조선성악연구회'를 창립, 상무가 되어 창극정립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서편제(西便制) 소리의 성음과 능한 부침새로 《춘향가》를 많이 개작하였으며, 특히 그의 《춘향가》는 "정정렬 낳고 춘향가 났다"고 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가 취입한 음반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신년맞이》 《어사출두》 《광한루 경치》 등이 걸작이다. 김연수·김여란 등이 그의 소리제를 이었다.
박봉래 [朴奉來, 1900~1933] 전남 구례 출생. 11세 때부터 3년간 송만갑(宋萬甲)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혼자서 공부하다가 뒤에 다시 김정문(金正文)에게 2년간 배웠다. 1920년 송만갑협률사(宋萬甲協律社)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공연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1929년 이후는 낙향하여 주로 소리를 닦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시골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하였으나 《흥부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적벽가》 중의 <삼고초려(三顧草廬)> 대목에 뛰어났었다 한다. 그의 소리제는 아우 박봉술에게 전해졌다.
박봉술 [朴奉述, 1922~1989.12.11]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중방리에서 박만조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동향 출신의 명창 송만갑(宋萬甲)과의 오랜 교류로 판소리에 조예가 깊어 소리를 가르치던 아버지와 송만갑의 제자였던 맏형 박봉래(朴奉來)의 영향으로 7세 때 판소리에 입문했다. 그 후 13세 때부터는 동편제의 대가인 명창 이선유(李善有)·송만갑·유성준(劉成俊) 등에게 배웠다. 특히 그가 살던 곳이 송만갑의 집이나 유성준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 자연스럽게 송만갑으로부터 이어지는 동편제의 소리를 익힐 수 있었다.
'아이 명창'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어릴 때부터 소리를 잘하던 그는 명창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16세를 전후해 서울로 올라왔다. 그 뒤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 등과 함께 판소리를 가르치던 송만갑을 찾아가 1년 정도 소리를 공부를 하였다. 이 시기에 변성기를 맞은 그는 소리를 너무 심하게 닦다가 목이 상하게 되었다. 소리가 탁해지고 상청이 나오지 않게 되자, 주위에서 독공을 권해 지리산과 쌍계사 등에 칩거하며 공부를 했는데, 오히려 성대가 상해 목이 꺾이고 말았다. 이후 잠시 고향에서 쉬기도 했으나 곧 명창 임방울(林芳蔚)을 따라 일본 공연에 참가하고, 유성준의 가르침을 받았다. 광복 후 정읍의 정악원과 순천의 국악원, 부산의 국악원 등에서 소리 선생으로 제자를 가르치며 좌절과 실의를 겪기도 한 그는 칠전팔기의 자세로 소리 공부를 계속해 비록 목은 꺾였어도 소리 공력으로는 그에 맞설 소리꾼이 없을 정도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1961년 신세기레코드사에서 판소리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음반취입을 했으며, 1970년 거처를 서울로 옮긴 후 더욱 활발히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을 모두 익혔는데, 그 중에서도 《춘향가》 《수궁가》 《적벽가》에서 능한 솜씨를 보였다. 특히 《수궁가》는 전통적인 동편제의 더늠을 모두 간직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며 제자양성에 힘쓰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송만갑제(宋萬甲制)에 정통한 동편제의 명창이며, 광복 이후의 소리꾼 가운데 정응민(鄭應珉)과 함께 한국 최고의 판소리 명창으로 평가된다. 현재 《적벽가》의 예능후보자로 활동하고 있는 송순섭(宋順燮)·김일구(金一求) 등은 박봉술의 문하에서 양성된 판소리 동편제의 명창들이다.
김채만 [金采萬, 1865~1911] 전남 화순군 능주(陵州) 출생. 철종 때의 명창 이날치(李捺致)에게 소리를 배웠다. 서편제(西便制)를 가장 서편제답게 부른 명창으로, 특히 유연애절(柔軟哀切)함과 계면조(界面調)적 성음을 잘 살려 그 기교가 매우 뛰어났다. 고운 목소리와 절묘한 기교는 가히 송만갑(宋萬甲)을 능가할 정도로 대중을 사로잡았으며, 특히 《심청가》 중에서도 심봉사를 소개하는 첫머리를 잘 불렀다. 그의 더늠은 한승호(韓承鎬)가 이어받았다.
정재근 [鄭在根, ?~?]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생. 보성(寶城)에서 살았으며 철종·고종 때 박유전(朴裕全)의 문하생으로 어전에 나가 소리하고 홍패를 받았다. 이날치(李捺致)와 함께 박유전 소리제를 전한 공이 크다.
정응민 [鄭應珉, 1896~1964]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생. 박유전(朴裕全)의 소리를 이어받은 국악의 명문에서 태어났다. 정재근(鄭在根)의 조카이며, 현존하는 강산제(江山制) 보유자 정권진(鄭權鎭)의 아버지이다. 어려서 백부인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이동백(李東伯)과 김찬업(金贊業)에게 사사했다. 소년 명창으로 고종 때 어전에서 소리를 할 정도로 촉망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고향에 은거하면서 문하생을 양성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심청가》를 특히 잘했고,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는 정권진에게 전해졌다.
김성옥 [金成玉, 1801~1834] 충청남도 강경(江景) 일끝리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여산에서 사망하였다. 좋은 성음을 지니고 있었으나 병으로 고생하다가 34대에 요절한 천재 판소리 명창이다. 젊은 시절 계룡산 암굴에서 고생하며 수련했던 탓에 다리는 뼈만 앙상하고 무릎은 부어올라 통증이 심한 학슬풍(鶴膝風)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다. 다리를 쓰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판소리를 연구하여 처음으로 판소리에 진양조장단을 창시하였다. 김성옥의 진양조를 듣게 된 그의 처남이자 명창인 송흥록(宋興祿)이 판소리의 새로운 발견이라 여겨 수년간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 이후 진양조는 중고제라 이름하게 되었고 김성옥은 중고제의 시조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소리는 아들인 김정근(金定根)에게 이어지고 김정근의 두 아들인 김창룡(金昌龍)·김창진과 이동백으로 이어졌다.
김정근 [金定根, ?~?] 충남 강경 출생. 철종 ·고종 때의 명창으로 판소리 진양의 창시자인 김성옥(金成玉)의 아들이고, 일제강점기의 명창 창룡(昌龍)의 아버지이다. 소리는 중고제(경기 남부와 충청도 일대에서 발달한 판소리의 유파)를 이었고 《무숙이타령》을 잘 불렀다. 판소리 연구에도 관여하여 《상궁점》이라는 새로운 곡조를 창시했고, 황호통(黃浩通) ·이동백(李東伯) ·김창룡(金昌龍) 등의 명창을 길러 냈다.
김창룡 [金昌龍, 1872~1935] 충남 서천(舒川) 출생. 경기 ·충청 소리제인 중고제(中高制)의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났다. 곧 처음으로 진양조를 판소리에 도입한 김성옥(金成玉)이 그의 조부이고, 고종 때의 명창 김정근(金定根)이 그의 아버지이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고, 후에 이날치(李捺致)에게 1년간 사사하였다. 30세 무렵에 상경하여 연흥사(延興社) 창립에 공헌하였고, 이동백(李東伯)·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설립하여 창극의 보급과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적벽가(赤壁歌)》를 잘하였으며, 특히 《적벽가》 중의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심청가》 중의 <꽃타령[花草歌]> 등을 잘 불렀다.
이동백 [李東伯, 1867~1950] 본명 종기. 충청남도 비인 출생. 중고제(中高制)의 명창으로 김정근(金定根)·김세종(金世宗)에게 사사하고 한때 경남지방을 전전하다가 1900년 상경하여 고종 황제의 어전에서 판소리를 불러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 등과 원각사에서 공연하였고, 1934년 연흥사(演興社)·협률사(協律社)·광무대(光武臺)·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서 중진으로 활약하다가 1939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은퇴공연을 한 후 물러났다. 《새타령》의 독보적 존재였고 《춘향가》 《적벽가》에 뛰어났다.
김창환 [金昌煥, 1854~1939] 전남 나주(羅州) 출생. 정창업(丁昌業)에게 판소리를 배웠으며, 이날치(李捺致) 이후 서편제(西便制)의 창법을 이었다. 풍채가 좋고 너름새에 능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고 의관(議官) 벼슬을 제수 받았다. 1908년(융희1) 원각사가 설립되자 주석이 되고, 그 후 협률사(協律社)를 조직하여 공연에 힘썼다. 《흥보가》를 잘 불렀으며, 특히 <제비노정기> 대목에 뛰어났다. 제자 박녹주(朴綠珠)가 그 성음을 이었다.
중모리 산조에서는 중모리장단에 의한 악장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통 빠르기의 12박으로 1박을 4분음표로 나타내면 4분의 12박자가 된다. 첫 번째 박과 9번째 박을 강하게 치며 빠르기는 ♩=84∼92이다. 판소리와 산조, 《긴농부가》 《긴강강술래》 《긴난봉가》 《몽금포타령》 등 민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판소리에서는 서술적인 대목이나 서정적인 대목에 중모리장단을 쓰는데, 중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 중의 〈쑥대머리〉, 《박타령》 중의 〈가난타령〉 등이다
휘모리 산조(散調)에서는 휘모리장단에 의한 악장(樂章)의 이름을 가리키기도 한다. 매우 빠른 8박으로 1박을 4분음표로 나타내면 8분의 12박자가 된다. 빠르기는 ♩=208∼230 정도이며 빠른 정도에 따라 휘모리·단모리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주로 판소리와 산조 등 민속악에 쓰이며 판소리에서는 급하고 분주한 대목이나 절정을 묘사한 대목에 쓰인다.
중중모리 산조에서는 중중모리장단에 의한 악장(樂章)을 가리키기도 한다. 조금 빠른 12박으로 1박을 8분음표로 나타내면 8분의 12박자가 된다. 첫 박과 9번째 박을 강하게 치며 빠르기는 ♩=80∼96이다. 판소리·산조를 비롯하여 《새타령》 《남원산성》 《자진강강술래》 《자진농부가》 등의 민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인다. 판소리에서는 흥겨운 대목에 주로 쓰이며 때로는 통곡하고 애통해 하는 대목에도 쓰인다. 중중모리 장단으로 유명한 판소리 대목은 《춘향가》의 〈기산영수〉, 《심청가》의 〈심봉사 통곡〉, 《박타령》의 〈제비〉, 그리고 《수궁가》의 〈토끼화상〉 등이다.
당골 [명사][방언] ‘무당’의 방언(전남).
독공 [獨功] 독공창(獨功唱)은 폭포 소리를 이겨내게 하거나, 외부 소리와 섞이지 않는 토굴 속에서 반사음으로 창법을 교정하는 등 실로 몇 년이 걸려야 이룩할 수 있는 판소리 특유의 피나는 발성수련이다. 조선 후기 판소리의 중시조(中始祖) 송흥록(宋興祿)을 흠모하던 관기(官妓) 맹렬(孟烈)은 3년간 폭포 뒤에 숨어서 이 명창이 피를 토하며 부른 독공창이 폭포 소리를 이겨내기를 기다린 끝에 득음한 후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일화나, 역시 조선 후기의 명창 이날치(李捺致)가 일체의 잡음을 차단한 동굴 속에서 신기(神技)에 가까운 성질수련(聲質修鍊)을 쌓아 이로써 터득한 그의 새타령을 듣고 뭇 산새가 날아들어 그 소리가 노래 소리인지 새소리인지 분간하지 못하였다는 시인 임규(林圭)의 증언은 실로 독공만으로 터득할 수 있는 판소리의 신비스런 경지를 말해준다.
1982년 8월 한국방송공사(KBS)는 “판소리는 비과학적인 민중의 소리인가”라는 가설을 세우고 국내의 학자 및 20여 명의 가객을 동원하여 학술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발표, 판소리의 폭포 ·동굴 독공에서 나오는 성량(聲量) ·성질(聲質) ·음역(音域) 등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여 주목을 끌었다. 음성학자 ·전자공학자와 음압(音壓) 레벨측정기 등을 동원해서 실시한 이 실험 결과 ① 토굴 독공은 가객의 소리를 외부 소리와 섞이지 않도록 감싸는 오늘날의 스튜디오와 같은 구실을 하고, 요즘 가수들이 헤드폰을 통해 자신의 소리를 들어가며 창법을 교정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가객의 소리를 계기로 측정한 결과 가장 큰 소리(100데시벨)와 벽에 부딪쳐 나오는 반사음(90데시벨) 및 가객의 귀밑으로 들리는 소리(90데시벨)가 서로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② 폭포에서의 독공은 소리를 익히는 가객들이 폭포 소리보다 더 큰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성량을 키우고, 음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는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 등 과학적인 수련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실험 결과 독공으로 득음한 명창들의 소리는 폭포 소리(82데시벨 : 공사장의 불도저 엔진 소리와 유사)보다 훨씬 음량이 큰 107데시벨로, 이 소리는 300명이 일시에 터뜨리는 소리에 해당한다. 음역에 있어서는 벌이 윙윙거리는 듯한 가장 낮은 소리(31.5Hz)에서 초음속기의 엔진 소리(1만 6,000Hz)에 해당하는 고음까지 폭이 매우 넓으며, 성역은 3옥타브 반 정도, 음성 지속 시간도 평균치(남자:20∼25초, 여자:15∼20초)를 훨씬 넘는 것으로 밝혀져 독공을 통한 판소리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게 되었다.
득음 [得音] [명사]노래나 연주 솜씨가 매우 뛰어난 경지에 이름.
조선창극사 [朝鮮唱劇史] 1940년 조선일보사에서 간행되었다. B6판, 257면. 책머리에는 여러 사람의 서문이 있고 서언(緖言)으로 신위(申緯)의 <관극시(觀劇詩)>, 이유원(李裕元)의 <가오악부(嘉梧樂府)>, 정범조(丁範祖)의 <해좌집(海左集)>, 이건창(李建昌)의 <배령이수(裵伶二首)> 등 조선 후기의 시문에서 판소리(창극)에 관계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등 창극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분석검토하고 창극의 유래와 변천, 창극조 광대에 관한 내용 등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역대 광대들, 8명의 여류명창을 포함한 88명의 역대 명창들의 약전에 이어 그들의 더늠을 집필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명창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소개하였으며, 부록으로는 유명한 고수였던 한성준(韓成俊)과 신오위장소전(申五衛將小傳)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구술에 의거하여 작성된 부분이 많고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판소리에 대한 이론과 역사를 개관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첫댓글 학문적 깊이가 있는 좋은 글 올려줘 감사하고, 시간이 나면 자세하게 읽어보겠다.
글씨가 너무 작어 읽기가 곤란하면 자료실에 아래한글로 올려놓았으니 찬찬히 한번 읽어보면 마음의 양식이 될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