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교실
주일 예배 후 교회 뒤 학교를 들러 살펴봤다. 휴일이어서 입구에 수위가 지키고 교무실과 교실엔 선생님과 학생이 없어 적막해 보였다. 건물 앞 화단엔 오래되어 큼직한 상록수가 가득했는데 다 베어지고 말끔히 단장됐다. 붉은색 건물도 벗겨내 회색으로 칠해졌다. 지붕도 서쪽 슬라브에서 동쪽 일부는 둥근 철판으로 덮여있다.
30여 년 생활한 직장을 가끔 지나면서 봤지만, 오늘처럼 들어와 본 건 오랜만이다. 퇴직한 지도 어언 20년이 다 돼 간다. 수십 년 가르치며 부대꼈던 언덕이다. 높은 곳을 오르내린 지난날이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시내를 지날 때면 저기 보인다고 소리쳤다. 높은 산 중턱에 성처럼 우뚝한 건물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서울 어느 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 세웠다. 길거리에 앉아 생선 파는 교장을 만난 교사와 제자들이 수업할 교실 터를 찾아다녔다. 산자락이나 기슭을 오르면 반반한 터가 가끔 나타난다. 빈터만 있으면 먼저 차지해서 수업을 시작한 전국의 천막 학교들이 수두룩하다.
공부할 자리를 찾다가 사대부고 옆 낭떠러지가 있는 아슬아슬한 절벽 언덕에다 거적을 치고 흑판을 걸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몇 번 졸업하고 전쟁이 끝나자 다니던 서울로 모두 올라갔다. 그 자리를 물려받아 남은 학생들의 수업이 끊기지 않고 잘 이어 나가도록 다독여야 했다.
전망이 뛰어나다. 영도와 남항, 중구와 서구가 한눈에 내려다뵌다. 저 찰랑찰랑한 대한해협을 지나는 배들이 그림 같다. 전쟁 후 살기 바빠 공부는 무슨, 그러다 좋아지면서 학생이 모자라 중학교와 야간에다 남학생도 받아들였다. 사라호 태풍 때 건물이 서구 쪽으로 다 날아갔다. 덜렁 남은 빈터에서 햇볕을 가리며 공부하는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자 군이 도왔다.
운동장을 군 장비로 평평하게 넓혀 천막 치고 흑판을 걸어줬다. 여군도 스리쿼터를 타고 와 야간수업을 받았다. 큰길에 내려 줄 맞춰 씩씩하게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렸다. 참으로 멋진 풍경이었다. 도와준 것에 감사의 대가로 중졸 여군에게 고졸의 기회를 준 교장과 사령관의 배려이다.
배워야겠다는 열의가 강해지면서 학생이 넘쳐났다. 교육청에서 남자 고등으로 허가하자, 팔 가지를 잘라내야 하는 아픔이 뒤따랐다. 2년 뒤 마지막 졸업생이 나가면서 절벽 계단을 다 내려가도록 울었다. 후배 배웅 없는 중학 졸업생과 오글보글 정들었던 야간 고등학생들의 마음이 허전했다. 특히 여군들이 경례하며 떠나는 모습이 안됐다.
한 교사가 여러 과목 가르치던 것도 교과과정 전공 자격으로 제한했다. 학생이 늘어나면서 입학이 어려워졌다. 이름난 공립과 사립은 시험을 거쳐 들어갈 수 있다. 과열이 나타나자 평준화를 했다. 집 가까운 학교로 추첨을 통해 배정해나갔다. 대학도 수능시험을 통해 점수에 따라 학과를 찾았다. 모든 게 정상으로 잘 돌아가자 학력을 키우려는 시동이 켜졌다.
명문 대학에 많이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가르친다. 그러자니 보충수업을 앞뒤로 계속 넣었다. 거기다 자습을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자율학습이라면서 모두 시켰다. 집을 나서며 부모님께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가 아니라 선생님께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로 바뀌었다. 1교시 앞에 보충 수업하는 0교시까지 하니 불붙었다.
이래서 되겠나 교육 과열이 건강을 해친다는 사회 문제가 되었다. 자정이 일게 되고 숙지근해져 갔다. 여명의 새벽에 나와 한밤중 시간에 집으로 들어가는 바쁘고 힘든 시절이었다. 요즘처럼 학부모와 학생 발언, 인권이 좋아지고, 뛰어난 환경과 복지 혜택이 주어졌다. 머리, 복장 등 자율이 나아졌다. 교사의 지도 활동이 줄어들었다. 괜히 애쓴 그때가 억울하다.
‘어디 가느냐.’는 낯선 경비에게 양해를 구해 둘러봤다. 현관에서 현황판을 보고 놀랐다. 학생이 300여 명밖에 안 된다. 학급 수가 7학급씩 20여 반이다. 언제 이리 줄었나. 이래서 학교가 되겠나 싶다. 휴일에도 자습하러 온 학생들로 붐볐는데 이리 조용하니 이게 뭔가. 공부하는 장소가 맞기나 하나.
한 학년이 8반에서 10반으로, 다시 12반이 되니 교실이 부족하다. 운동장 끝을 파 12 교실을 만든 뒤 1학년을 내려보냈다. 본관은 2, 3학년을 앉혔다. 36개 반으로 2천 명 가까운 전교생이다. 조례 때 운동장이 가득하다. 교직원도 1백 명 가까워 쉬는 시간이면 매점과 화장실 복도가 온통 북적북적한다.
지금은 한 반 두 반 줄어들다가 절반 정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줄어들지 모른다. 본관에서만 수업해도 교실이 남아돈다. 학생 지도를 위해 교무실을 서쪽 끝으로 보냈는데 다시 가운데로 돌아왔다. 한 반에 두 줄씩 네 개 분단 5, 60명씩이었다. 저 뒷자리까지 앉았다. 교실이 꽉 찼다. 지금은 15명 정도로 헐렁하다. 앞자리만 앉았다. 뒤는 텅 비어 사물함 청소도구함이 자리했다. 천장에 냉난방 기기와 선풍기, 전면에 방송과 멀티 기기가 보인다. 깨끗한 화장실과 복도마다 냉온수 시설 등 온갖 것을 갖춰 그때와는 달라도 많이 달라졌다.
연간 1백만 명 출산이 줄어 줄어서 30만 아래다. 초등부터 폐교가 생겨나다가 이젠 대학으로 번진다. 수백여 개 중 상당수가 통폐합으로 시끌벅적하다. 초중등 수만여 개 교가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시골 잡초 무성한 폐교를 쉽게 볼 수 있다. 교사 수와 학생 수가 비슷한 곳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5천만이 멀잖아 줄어들 날이 온다. 이 모든 게 예전 10대 결혼이 늦어져서 3, 40대에나 하고 자식 낳아 기르는 게 힘겨워졌다. 편하게 살자는 독신이 늘어나는 이유에서다. 그 막강하던 스파르타 멸망을 겪지 않으려면, 출산을 돕고 성장 과정을 살펴줘야만 한다. 시도가 경쟁적으로 장려금과 출생 지원에 나섰다.
어느 회사는 귀한 생명을 낳으면 직원 가정에 억만금을 준다는데 놀랐다. 그런 사회 분위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1학년 빈 교실에 우우 학생들이 몰려 들어갈 날이 오려나.
첫댓글 격세지감입니다
어디에나 바글바글하던 그 시절
헐 벗은 빈민국을 탈피해보자고 했던
산아 제안의 구호가 어제 일인데 세계 최하위
출산율에 지구 상에서 사라질 나라라는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는...
시골 학교도 그 때 국민학교는 천 명이 넘었는데
이젠 겨우 전교생 열 명 미만 정말 어디로 가는지요
수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더 줄지 않고 늘어날 기미입니다.
지자체가 앞장서서 출산을 돕는다니
아기 낳아 키우는 일이 즐거움이 됐으면 합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인구소멸 지역에 부산이 들어있어서요..ㅠ
제 생각속의 부산은 서울 못잖은 대도시같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부산으로 내려갈때도 설마 부산의 학령인구가 줄어들겠나...싶었거든요.
예전에 듣던 아이들떠드는 소리가 정말 그리운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