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 민주화투쟁위원회 활동
증 언 자 : 김대홍(남)
생년월일 : 1958.(당시 나이 22세)
직 업 : 대학생(현재 하남공단)
조사일시 : 1988. 10
개 요
김대홍 씨는 1980년 당시 조선대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민주화투쟁위원회에 참여한다. 5월 19일, '민투' 동료들과 함께 전주-서울로 피신해 있다가 자수하여 국가 내란부화 수행죄로 수감되었다 석방된다.
민주화투쟁위원회
1980년 당시 나는 조선대학교 전기공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크리스찬 집안에서 자라 어려서부터 성당을 다녔으며 대학에 입학해서도 줄곧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했다. 또한 남동 천주교 청년회 일을 봤는데 주로 기도하고 성경 공부를 모임이었다. 그러나 성서 모임의 내용이 조금 다른 점은 전체적으로 정치, 사회, 역사, 문학 등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함축된 교회문헌이라 할 수 있는 공의회 문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지식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별히 책을 선정해 공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세계의 평화와 자유, 정의 등에 대한 의견교환이 활발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적 정의감 또한 대단했다. 이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도덕감과 관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서클 일로 서울을 자주 올라다니다 보니 사회의 변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신부님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식이기도 하다. 대학 때 만난 김성룡 신부님께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79년말 나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이 되었다. 내가 회장직을 원했다기보다는 1, 2학년 때부터 열심히 서클활동을 했기 때문에 추천과 선거에 의해 당선된 것이다. 10·26이 발생하자 너무나 기분이 좋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그 후 분위기가 자유스러워지고, 1980년 서울의 봄이 되었을 때는 '대중의 힘을 업을 시기가 아닌가? 대통령 직접선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1980년초 여느 학교와 마찬가지로 우리 학교도 학내문제로 싸움이 치열했다. 박철웅 총장 사퇴와 어용교수 퇴진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초기에는 호응이 거의 없어 주도하는 사람들이 외롭고 힘들었다. 나는 가톨릭학생회 회장이었으므로 서클연합회에서 함께 일했다.
당시 전체적인 분위기로 봤을 때 학내문제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일을 맡아온 서클연합회에서 정치적 이슈를 내걸고 전국 학생과 연대하는 민주화 투쟁위원회(이하 민투)를 만들게 되었다. 민투는 복적생들과 서클 회장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정치문제로 전환하면서 핵심멤버도 없었고 역할분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일을 해나갔다. 학내집회 주도, 인원동원, 유인물 제작, 피켓 만드는 일 등을 했으며 어느때는 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학내집회시 보통 3천-5천 명이 참여했으므로 대열 사이사이에 끼어 분담 리드하는 방식을 썼다.
이렇게 서너 달을 합숙하고 농성하느라 집에 들어가지 않아 한때 집안에서 불화가 생기기도 했다. 그때 나의 행동은 정의감도 있었지만 약간의 영웅심리와 서클회장이라는 의무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5월 13일 광주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조선대공전이 가두 진출한 것으로 기억된다. 5월초부터 가두진출을 위해 투석전을 벌이는 등 싸움을 많이 했으나 나중에는 경찰도 협력해 주는 입장이었다.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도 나왔으며 만약 북에서 넘어오면 자원 입대하겠다는 서명까지 받았다.
5월 16일 산수오거리-유동삼거리-임동-광주천 쪽으로 횃불시위를 벌였다. 두 갈래로 나뉘어 시내 전역을 돌았다. 우리는 화재 등의 불상사에 대해서 약간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있어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17일과 18일은 남동성당에서 화정동 피정센터로 피정을 갔다. 나는 그때 19일부터는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다. 16일 이후 전체적으로는 계엄을 예감했지만 서울 등 많은 지역에서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겠다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18일 아침 성당 수사가 잠을 깨우면서 "계엄이다"라고 말하자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돈과 책, 가방 등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우연히 민투 동료들을 만나 전남대, 조선대 앞, 시내 등지를 돌아다녔다. 대인동 박인천 씨 집 부근에 있는데 공수부대가 한 쌍의 남녀가 타고 가는 오토바이를 무작정 걷어차더니 여자를 때렸다. 남자가 덤벼들자 그에게도 무차별 구타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나는 주로 금남로4가 국민은행 앞에 있었다. 군인들은 사람들만 보이면 최루탄을 던지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위기의식 때문에 적극적인 참여는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날 저녁은 방림동 아는 사람 집에서 잤다.
19일 민투활동을 하는 동료 세 명과 함께 학교사정이 궁금해 조선대 앞에 가보았다. 군인들이 착검한 채 위협시위를 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연행되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환자로 위장해서 학교로 들어가려고도 해봤지만 끝내 실패하고 전날처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3, 4시쯤 광주고속터미널까지 밀려간 우리 네 명은 무조건 광주를 벗어나는 차를 탔다. 전주에 도착해 보니 너무나 조용하고 평온했다. 사람들에게 광주 상황을 얘기했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의심했다.
돈은 있었지만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여관에도 못 가고 우체국 앞에서 헤매다가 우연히 전북대 의대생을 만났다. 그 학생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0일 10시 쯤 서울로 갔다. 그때는 불심검문을 해서 주민등록증이 광주로 되어 있으면 무조건 연행하던 시기라 서울에서도 위험했다.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광주 상황도 얘기하며 그들 집에서 6월 10일까지 지냈다. 그동안 광주상황은 신문을 통해 접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함께 올라간 친구들(앞서 말한 민투활동 동료)은 장성까지 내려왔다가 광주에는 못 들어가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내란부화수행죄
6월 10일 나주를 거쳐 광주로 들어와 사레지오수도원에서 숨어 살았다.
6월 24일 아침 어머님이 수도원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에 내 거취가 밝혀졌고 권고 자수하게 되었다. 보안대에서 이유도 없이 하루 종일 맞은 후 상무대로 옮겨져 천막에서 잤다. 이튿날부터 시작된 수사는 김대중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자백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 김대중 씨로부터 500만 원을 건네받은 정동년 씨가 다시 우리 학생들에게 30만 원씩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빨갱이들아! 너희들이 학원 간첩 아니냐?'며 날마다 두들겨팼다. 멍든 몸에 살이 일그러질 정도로 물고문, 고춧가루고문을 당했고 바늘로 손톱을 뜨는가 하면 형장에 매달아놓고 때리기도 했다.
10월 25일, 1심재판에서 내란부화 수행죄로 실형 4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한방에서 150-200명이 함께 지내는 동안 단식 등을 하면서 서로 친해졌다. 교도소에서의 생활 역시 말로는 다 못 할 정도로 생지옥이었다. 개밥보다 못한 밥을 먹었으며, 슬라브 지붕 아래서 열사병에 걸린 사람도 많았다. 어느 토요일에는 특별식으로 지급된 라면을 먹고 전원 설사하는 일도 있었다.
12월 29일, 2심재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풀려났다. 한달 가량 집에서 쉬고 있다가 성당에 나가 중고등학교 교과서 번역과 가톨릭학생회 일을 도와주었다. 그 후 '가톨릭학생회 전국협의회' 일을 보며 김양래 씨와 함께(현 광주지역 정의평화위원회 사회교육부장) 강학을 했으며 틈틈이 배운 컴퓨터 기술로 약간의 용돈을 벌어 썼다. 유학갈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돈이 없어 못 갔다. 일반 기업체에 취직하려 해도 서류전형으로는 합격해도 신원조회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능력부족 탓도 있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과 돈에 대한 비애를 많이 느꼈다.
생산직에 근무하며
1986년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은 취직공부를 했다. 지금은 하남공단 내에 있는 대우 캐리어에 근무하며 30-4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있다. 1년 늦게 입사했기 때문에 동년배과의 지위 차별의 갈등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신성한 노동의 즐거움이 더 크다. 생산직에서 일하는 데에도 기쁨을 느낀다. 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통해 함께 근무하는 생산직 근로자들의 의식이 변화되는 것을 보면 무엇보다도 즐겁다. 사회단체나 현장에서 농민,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성실하고 평범하게 살면서 직장내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과거에 운동했던 사람들은 취직 못 한다는 한계를 극복, 실무능력이 조금도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조사.정리 양선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