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대 청소년기) 놀고 또 놀며, 나무하고 풀 베고
성공한 사람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 바라고 있다. 자신이 할 수 있을 만한 때를 놓치지 말고 해내라. 삶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로맹 롤랑 - 핫바지는 내 별명
아침이 밝아온다. 우리 삼 형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문 쪽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저건 고양이, 저건 제비, 저것은 뭘까?” “곰, 그리고 저건?” 셋째 동생이 가리킨 손가락 쪽을 바라본다. “돼지다, 돼지!” “그래, 돼지 맞다!” 그때만 해도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요, 동화책이나 만화책이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다. 읍내에 속하긴 하지만 이름 모를 산자락 끝에 붙어 있는 옥평리 3구의 새터(新基)라는 작은 마을은 어디 면단위 작은 마을 보다 못한 산골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비록 비바람에 찢기고 구멍 난, 그리고 땟자국으로 얼룩진 창호지로 범벅된 쪽문이지만 아침이 밝아오면 우리 형제들은 온통 그 곳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그 좁은 창호지 바른 문만이 밝게 보여 우리에겐 그것이 지금의 텔레비전이요, 동화책이며 요술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마치 캄캄한 극장 안, 무대가 서서히 밝아오면 온 관중의 시선이 그 곳에 집중되듯 아침을 알리는 신호는 작은 시골 오두막 집 단 하나 있는 우리 집 창문 쪽으로 모여진 것이다. 그리고 방바닥에 누운 채로 우리 형제들은 온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다. 부엌에선 어머니가 아침을 짓느라 불을 지피고 있는 사이 그 당시만 해도 위로부터 줄줄이 아들만 셋인 우린 레슬링이 벌어진다. 서로 얽히고설키며 힘자랑으로 구들장이 꺼질듯 하자 부엌에 계신 어머님이 소리치신다.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방 꺼진다.” 하지만 이제 우리들은 겨우 3회전이 끝났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조용히 할 것을 주문하나 우리들이 아침밥을 먹기 전 까지는 어머니의 바램은 희망사항일 뿐 이다. 아침밥을 먹기가 바쁘게 ‘놀자!’ 하고 동네 아이들이 시끌벅적 몰려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집은 울타리도 없고 사통팔방이 휑하니 터진 데다 손 한 뼘만 한 마당이 있고 바로 황토 흙으로 된 언덕과 연결된 넓은 공터가 있었다. 우리는 그 땅을 공판이라 불렀다. 공판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몰려 축구도 하고 자치기도 하고 ‘ㄹ’자놀이, 진돌이, 구슬치기, 땅따먹기, 비석치기, 딱지치기 등 많고 많은 놀이로 해지는 줄 모르고 놀고 또 놀아 댔다. 또 때까치가 소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며칠이 지나면 알에서 새끼가 깨어난다. 동네 아이들은 그 새끼를 꺼내기 위해 나무 위를 오르고 떼 까치 어미는 악을 쓰며 침입자를 막아보려 하나 아이들의 의도를 꺾을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그 떼 까치를 와가리라고 불렀었고 그 귀여운 와가리 새끼를 키우기 위해 주위의 파리며 메뚜기 등을 잡아 입을 억지로 쫙 벌려 먹이곤 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키웠지만 안타깝게도 몇 날을 못 넘기고 죽이고 만 것이다. 우린 그 새끼가 죽을 때 마다 너무 애석하고 안타까워 무덤을 써 주고 고이 잠들기를 빌기도 했었다. 우리 마을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이들은, 나 외에 니짜 라고 불렀던 말쟁이 병진이(니짜는 넷째의 사투리이다), 두인이, 상운이, 점성이었고, 여아로는 호적상으로 할머니 벌인 기님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까지는 2km 남짓 된 거리인지라 두인이, 상운 이를 빼고서는 모두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었다. 우린 축구, 자치기 등 놀이를 할 때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는데, 나는 언제부턴가 핫바지로 통했다. 특히 어떤 일에 실패했을 때 “애기, 핫바지~”라고 할 때는 요새말로 쪽팔리는 소리였다. 이 별명은 동네에서만 통했고 학교에서는 아무도 나를 핫바지로 부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세터라는 마을에서만 이 별명이 불렸는데 두슬이라는 마을로 이사 온 후에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집에서 자취하는 중학교 선배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일을 능숙하게 못하자 “애기 핫바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매우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이 빨개졌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른이 되어서 어렸을 적 별명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핫바지’였다고 하면 깔깔대고 웃는데 정말 나를 잘 표현한 별명이 아니었나 싶다. 어렸을 때 나는 정말 천방지축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하루 종일 쏘다니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저녁 늦게까지 놀고서도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내일도 신나게 친구들과 놀 것을 생각하면 그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내가 ‘핫바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그게 좋은 지 싫은 지도 몰랐다. 세 살 땐가 네 살 땐가는 동백나무의 열매를 밤인 줄 알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배가 아파 밤새 토하느라 한 잠도 못 잤던 일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저수지에서 수영을 익히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깊은 저수지에서 자유자재로 헤엄을 칠 수 있었던 것 등이 핫바지에 어울린 행동이 아니었는가 싶다.
학교는 보내야지오
해가 서산으로부터 한 뼘쯤 걸려 있을 무렵 동네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에 방문을 열어보니 고리 땡 양복 입은 한 분이 ‘해평아!’ 하며 대문도 없는 우리 집을 불쑥 들어오신다. 6학년 1반 담임 김봉수 선생님이시다. 안방에서 일보고 계신 어머님께서 왁자지껄한 소리에 문을 열고 나오신다. “아이고! 이 멀고 누추한 곳까지 선생님께서 오셨군요.” “예, 어머님, 이제 졸업을 하게 되면 해평이도 중학교를 가야 되는데 학교를 안 보낸다는 말을 듣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예, 학교를 보내야 하겠지만 형편이 못 되어 보낼 수가 없군요.” “하지만 어머님, 해평이가 공부도 잘하고 또 여기서 빤히 보이는 곳에 중학교가 있는데 학교를 보내지 않는다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떻게든 학교는 보내십시오. 배움의 기회를 놓치면 평생 앞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저런 말로 설득도 하고 중학교를 가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덕분에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시골 읍내에 위치한 보성중학교라는 곳인데 이 학교가 설립된 지 16년 이래 처음으로 입학생의 반수 이상이 떨어지는 경쟁률을 보였다고 했지만 합격은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동기생들과 같이 당당히 입학식을 치루고 학교를 다니는 행운은 누리지 못했다. 입학금을 마련치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 늦어서 입학금을 지참하고 학교 문을 두드렸으나 내 대신 이미 다른 학생이 등록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장님한테 까지 찾아가 입학허락을 간절히 요구했지만 닭똥 같은 눈물만 쥐어짜다 나올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등록 기일을 어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보다 공부도 못한 친구 녀석들은 멋있는 교복에 중학교 모표가 달린 멋진 모자를 쓰고 보란 듯이 학교를 오가는데 나는 지게와 낫을 들고 산으로 들로 나무를 하여야만 하니 얼마나 맥 풀린 나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천우신조인지 다행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나의 이런 몰골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여수에 계신 작은 아버지께서 아시는 분이 학교 입학을 할 수 있도록 알아두셨다는 것이다. 한 달 여를 넘어서 여수여항 중학교라는 학교로 당당히 입학이 되었다. 얼마 후 하복을 입었을 때는 보성중학교 학생은 단순히 흰 상의에 쑥 색깔의 하의를 입었지만 우리 학교는 상하 동색의 당시 공군복장의 세련된 하복이었기에 보란 듯이 폼을 잡고 보성읍내 거리를 다닐 수가 있었다. 사실 겉모습은 조금 행복스런 모습의 연출이었지만 당시 학창생활의 나의 모습은 얼마나 고달픈 나날이었는지 모른다. 입학 당시만 해도 종고산 등선의 높은 고지에 작은 아버지 댁이 있었기에 학교와의 거리도 가깝고 하여 학교를 다니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가세가 기울어져 이것도 불과 2개월이 되지 못해 수정동이라는 여수역 쪽의 4~5평의 흙담집으로 옮겼으니 학교와는 3km가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등하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식량이 없어 굶기를 밥 먹도록 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당시 여수 동해안 쪽 해변에 나가면 멸치를 시멘트 바닥에 말리거나 갈치 창자를 훑어내어 말리곤 하였다. 갈치 창자를 꺼내는 작업을 해주면 얼마간의 수고비를 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재수가 좋은 날에 일감을 얻을 수 있지 마냥 아쉬울 때 바닷가만 나가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바닷가로 나갔고 일감을 얻는 날은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바닷가 갯벌과 돌 틈에는 많은 게들이 살고 있었는데 게를 잡아 볶아 먹는 일도 허기진 배를 채우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나는 이때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게들이 돌 틈으로 숨었을 때 이들을 몽땅 모아들여 잡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개구리 뒷다리를 막대기에 묶어 돌 틈에 밀어들이대면 그걸 먹기 위해 주위의 게들이 모여들 때 얼른 꺼내 잡는 방법이다. 여수에서의 배고픈 나날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고향 집에 오는 것이었다. 항상 집에만 붙어살다 고향을 등지고 사니 정말 동생들이 그렇게 보고 싶었다. 부둣가에 있는 학교에서 붕~ 하고 여객선이 떠나는 뱃고동 소리를 들을 때나,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기에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 거리네’를 부르는 음악시간에는 고향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려 울먹이며 노래를 부르던 생각이 난다. 한 달에 한두 번 기차를 타고 고향에 올 때, 그 상쾌한 바람과 여행객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최무룡이 부른 ‘복사꽃 능금 꽃이 피는 내 고향’ 생각을 하면 내 고향을 달려가고 있는 푸르디푸른 학생 시절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배고픔, 식구들과 함께 못하는 설움의 시간이 마감되는 날이 그렇게 빨리 다가올지 예상도 못했었다. 보성중학교에 처음 입학은 못했지만 다시금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되는 길이 열렸는데 2학기가 되어서 전학이라는 기회를 잡을 수가 있었다. ‘배곯고 산다’는 말에 부모님들은 어떻게든 이 일만은 모면해 주려고 애썼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의, 코앞에 학교를 두고 안보내면 안 된다는 설득과 염려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하는 데는 그렇게 큰 문제가 없었다. 이젠 또다시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친구들은 다들 보성지방을 벗어나 좀 더 넓고 큰 곳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광주 혹은 서울 등지로 입학원서를 내느라 분주했다. 대개 부모님과 같이 와서 담임선생님과 상의도 하면서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염려하는 것을 볼 때 참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저런 부모를 못 만났을까하는 원망도 가져봤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게는 큰 사치에 불과했다. 당장 보성읍내에 있는 실업학교지만 고등학교에 들어 갈 수만 있다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것은 친구들이 부모님과 별 상의도 없이 진학을 하니 나도 간다는 생각에서였던 것 같다. 또 하나는 그 당시 대부분 광주 등지로 진학을 가기 때문에 지방 실업고 입학률을 높여야 하는 중고 교장을 겸하고 있는 교장으로서 고민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도 나의 입학은 수월했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하면 비록 시골의 실업학교에 불과한 농업고등학교였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부모님께 감사하지 아니 할 수 없는 크나큰 혜택이었다. 그 당시 만해도 우리 보다 형편이 더 나은 사람들도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었다. 그럼에도 내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읍내에 살고 있었다는 지역적인 혜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것 역시 부모의 덕이요, 천운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고등학교에는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 편히 학교에만 다니면서 공부할 여건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6남매의 장남에다 논 한 마지기 없는 빈농 중의 빈농의 가정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다녀오면 가방 놓기가 바쁘게 돼지먹이를 해결하기위해 들로 나가 풀을 베어야 했다. 고마니똥이라는 풀을 돼지가 그렇게 잘 먹을 수 없었다. 지금도 등산가면서 들이나 산에 오를 때 지천에 깔려 있는 고마니똥을 보면 그 당시 돼지 기를 때가 생각나고 돼지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하필 가난한 우리 집에 들어와 음식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팔려가 죽었을 것을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프다. 그 뿐이 아니다. 차가운 겨울엔 돼지 울을 지푸라기 등으로 따뜻하게 꾸며 주어야 하는데 짚이 풍성히 없는 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난간과 같은 곳에서 기껏 식구들이 먹다 남긴 고구마껍질이나 밥그릇 씻는 물 등 구정물만 먹고 살았으니 그 배고픔이 오죽했으랴. 그래서 자꾸 돼지들이 집을 뛰쳐 나갔었다. 그 당시에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 집 돼지는 성질이 나빠 돼지 울에 갇혀있기를 싫어한다고만 여기고, 나갈 때 마다 우리 형제들은 몽둥이를 들고 뒤쫓아 우리에 가두곤 했었다. 그 돼지는 나에게 있어서는 학비를 보태고 우리 가정 살림살이에 큰 보탬을 주었기에 돼지가 나가는 날에는 우리 집엔 큰 비상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추운 겨울이면 ‘꾀에~꽥! 꾀에~꽥!’하고 사력을 다해 부르짖는 돼지 울음소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다. 오죽 춥고 배가 고팠으면 그렇게 울었을까! (흔히 돼지 울음소리를 ‘꿀꿀꿀, 꿀꿀꿀’로 표기하는데 이것은 행복에 겨운 돼지의 울음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돼지야 미안해! 하지만 이해해줘. 네가 그렇게 울고 배고파했을 때 우리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제들 모두 그렇게 배고파했고 추웠었단다. 단지 너처럼 그렇게 소리 내어 울지 못했을 따름이란다.’ 가끔 학창시절이 생각날 때 혹은 돼지를 보았을 때 혼자서 독백을 하고 돼지에게 하소연도 해본다.
공부보다 집안일에 더 바빴던 학생시절
중, 고등학교 때 내겐 공부하는 일 보다 더 많이 하는 일은 나무하는 일이었다. 비록 보리밥이지만 당장 먹고 살기 위에서는 땔감이 필요했다. 이 땔감은 자연 우리 형제들의 몫이었다. 당시 어머님은 할머니가 하시다 돌아가시자 그대로를 이어 받아 하셨는데 바구니에 참기름, 들기름, 볶은 참깨, 고춧가루, 화초 등 양념하는 재료를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서는 장이 서는 보성, 득량, 예당, 조성으로 다니시면서 장바닥에 놓고 파시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고추를 잘게 써셨다. 고향에선 그것을 실고추라 하기도 하고 화초라고 불렀다. 매운 고추이기에 썰 때 마다 매운 기가 눈에 들어가면 온 가족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찼지만 우리는 참아내어야만 했다. 논 한 뙤기 없는 우리 가족이 의지한 것은 오직 어머니의 그 바구니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리는 차라리 더 나았다. 직접 써시는 어머니는 어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머니는 한 번도 맵다고 탓하지 않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눈물을 흘리시며 고추를 곱게 써시는 것 이었다. 한편, 아버님은 집에 논, 밭도 없으시니 동네 부농가에 1년에 한 번 새경을 받고 고용살이를 하셨다. 그것도 기껏 1년에 쌀 열 가마 남짓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 집으로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일을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도 없었고 그저 아버지의 존재 가치는 무서운 분이라는 것과 우리는 숙명적으로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만 알았다. 낮엔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문을 잠글 이유도 없었다. 누구 하나 우리 더러 무엇해라고 지시하는 이도 없었고 그저 우리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 까지 죽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장남인 내가 바로 되어야 하고 책임이 크다는 것만은 그 당시에도 가졌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당시에는 나무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산이라야 민둥산을 겨우 면할 처지여서 여름에는 풀을 베어 말려서 땔감으로 쓰곤 하는데 그것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곳저곳 헤매야 겨우 한 나절에 한 짐을 베어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사 나흘이면 다 떨어지는 것이었다. 가을부터는 갈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마른 소나무 잎 등을 긁어모아 지게에 지고 오는 일을 했다. 나는 이러한 일도 이 일에만 전념하는 이들 못지않게 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봄철에는 ‘꽃 잔등’이라 부르는 나무뿌리를 괭이로 뿌리째 캐어 말려서 땔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꽃 잔등’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3km쯤 떨어진 지금 한참 녹차로 유명한 보성의 다원 근처 산에까지 가서 파오곤 했었다. 어느 해는 간벌을 하고 소나무 가지를 높은 산에서 가져오는 일을 했다. 한 번 가져오면 내 것이 되고 다음 것은 주인에게 주는 방식으로 하는 건데 정말 말이 쉽지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생소나무 가지를 한 지게에 지고 먼 산을 오르내리는 일은 참으로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었다. 나는 그 때 이후 이 세상에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거침없이 ‘생소나무 가지 한 짐을 지고 평지를 걸어가도 쉴 곳이 나오지 않을 때’라고 말하곤 한다. 그 나마 문중에서 배려해 준 밭떼기 100여 평이 있어 여기에 봄에는 감자를 심고, 그 감자를 거둬내기가 바쁘게 그 자리에 고구마를 심을 수 있어서 우리 식구가 먹고 살아 가는데 꾀 보탬이 되었다. 비록 작은 땅이었지만 농고생인 내가 몸으로 실습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요 이를 경작하면서 농부처럼 비를 기다리고 종자의 소중함과 식물에 따라 적합한 비료를 적기에 주어야 하는 것들을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 전교생 풀베기 대회를 하는 데 당당히 1등을 할 수 있었으니 나무하고 돼지 먹이 풀 베려 다니고, 벼·보리 등을 수확하기 위해 부지런히 낫을 놀렸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잊을 수 없는 일은 농업 기능 경기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썼던 일이다. 우선 학년별로 4-5명을 선발해서 두서너 달 동안 나무 이름 외우기, 농업 이론 공부하기, 경운기 운전하기, 농업기계 다루기 등 당시로써는 농업 현대화에 기여하기 위한 인재를 기르는 것 또한 농업학교가 해야 할 마땅한 사명이기도 했다. 해마다 학교대표로 선발되어 전라남도 대회를 나가게 되어 한 해는 광주농고에서, 다음 해는 강진농고에서 대회를 가졌었지만 우리 학교 대표들은 한 번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었다. 대회에 참가해 보면 생전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장비며 우리가 준비한 내용과는 상이하게 다른 것들이어서 정보를 얻는데서나 학교 시설 규모 등이 월등히 좋은 학교에서 거의 독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고
3살 아래인 바로 밑의 동생은 공부를 썩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이라 그냥 집에서 나무를 하며 그 날 그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당시 재건 중학교라는 정규 중학교가 아닌 4개월 정도면 마치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간신히 다닐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또 3살 터울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나무나 풀을 베러 가면 우리 3형제는 항상 함께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형을 따라 함께 일을 해준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저녁이 되면 일찍 잠에 떨어지곤 했는데 잠자는 동생들의 얼굴엔 굶주림과 피곤으로 찌든 모습이 영 안쓰럽고 내 마음을 한없이 우울하게 했다. ‘너희들은 나 때문에 더욱 고생을 하는 구나. 어떻게든 내가 너희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뚜렷한 방법은 없었지만 그런 각오가 내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고 ‘내가 너희들을 꼭 가르치고 말거야’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우선은 보답을 해야 한다고 여기며 졸음을 참아내며 책을 놓지 않았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도 아까워 화장실만 잠깐 갔다 와서는 내 눈은 항상 책에 쏠려 있었다. 동생들을 가르치려면 내가 공무원이 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려면 열심히 공부하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2학년이 되던 해 9급(당시는 5급) 농업직(국립농산물검사소)시험 공고가 나왔다. ‘바로 이거다!’ 열심히 하면 합격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1차 시험은 광주농업고등학교에서 치렀던 것 같은 데 상당히 경쟁률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시험을 치룬 며칠 후 발표가 났다. 깨알 같은 글씨로 신문 한 면에 합격자 명단이 나왔는데 그 곳에 ‘박해평’ 이름이 선명하게 나와 있지 않는가? 이젠 내가 돈을 벌어 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아직 온전한 합격은 아니었다. 2차 시험 공고가 났는데 시험 장소가 중앙청으로 되어 있었다. 생전에 서울이란 곳을 말만 들었지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곳인데 서울 그것도 중앙청이라니……. 서울엔 단 한 명의 피붙이인 사촌 누나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 형제들이 3형제에다 고모까지 모두 3남1녀 인데 하나 같이 가난을 면치 못했다. 모두가 똑같이 논 한 떼기 없는 조상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했던 것 같다. 자녀 두는 일은 가난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4분 모두 4남 2녀씩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고종사촌까지 합해 모두 24명의 형제자매가 있는 셈이었다. 그 중에 제일 맏 누나가 식모살이로 수도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어디 갈 수도 없어서 바로 그 큰 누나가 사는 곳의 주소를 물어물어 그 집을 찾아 갔다. 사촌 큰누나와 주인어른도 깜짝 놀라하며 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 못지않게,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 처음 올라와 시간상으로도 얼마 안 되어 찾아왔으니 참 기특하다는 것이다. 시골에 사는 학생 같지 않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학생 같다는 싫지 않는 말로 위로도 해주며 맛있는 음식도 해주며 그 날 밤을 잠도 자게 해주어 순 시골 촌뜨기 농고생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다음날 시험을 치르러 갔다. 면접관도 내가 학생복에 모자까지 쓰고 왔으니 참 대견하다는 눈치다. 2차 시험까지 무사히 치르고 시골로 내려와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염려와는 달리 합격이란 기쁨으로 화답해 주었다. 곧 발령이 날 것으로 여기고 까까머리인 다른 학생과 달리 머리를 기르고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발령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어도 발령 소식은 깜깜 무소식이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예상을 잘 못하고 사람을 뽑았다는 후문도 들렸다. 해를 넘겨 3학년이 되어도 발령은 나지 않았다. 나 뿐 만 아니라 시험에 합격했던 어떤 사람도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은 없었고 기다리다 지친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직종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3학년이 되자 친구들도 공부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떤 친구는 공부하고는 담 싼 녀석이라고 여겼었는데 진학 책도 사고 제법 공부 밖에 모르는 양 책에 매달리는 것을 보았다. 대학 입학을 목표 삼아 공부 하는 것을 볼 때 나도 은근히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마음 한 곳에서부터 튀어 오르고 있었다. 저렇게 공부도 못한 녀석도 대학을 간다는데 나라고 대학 못 간다는 법이 있나? 하는 오기 같은 것 때문이었으리라. 그 해는 유달리 대학입시에 관한 내용이 신문지상에서 많이 뉴스거리로 대두되곤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후년에 대학입학을 하려면 대학입학예비고사에 통과된 사람에 한해 입학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968년, 대학입학예비고사를 처음 실시한 그 해 우린 숙명의 고3 학생이었다. 학교 마다 우선 예비고사에 합격해야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기에 총력을 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대학을 가기 위해 고등학교를 간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을 가기위한 예비고사까지 치르려는 나의 심사는 지금 생각해 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공무원 시험까지 합격한 사람이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불합격할리야 없었겠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이 예비고사에 떨어진다면 그 창피는 말할 수 없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더욱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예비고사는 합격했으나 간신히 합격했다는 말이 맞았을 것이다. 실업학교의 설립목적은 입학을 전제로 한 학교가 아니었기에 1주일에 영어, 수학, 국어 2시간 수업으로 대학을 간다는 그 자체가 언어도단이었다. 비록 시골의 조그마한 실업학교에 불과했지만 응시자중 합격률이 54%였는데 광주 시내의 인문 고등학교의 평균합격률 36% 보다 높았었다. 기본 실력은 갖췄지만 가정이 빈곤하기 때문에 시골 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이 많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합격생이 한 20여명 되었는데 후에 삼성그룹의 이사도 나왔고 지금도 공무원, 교직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교수, 전문직의 국·과장, 교장만도 십 여 명에 이른다. 당시 진학사에서 나온 대학입학안내서를 보니까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을 합격만 하면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혀 학비를 받지 않음은 물론 우수학생은 덴마크 유학까지 보내 준다는 것이다. 축산대학 내에서도 축산학과생 전원은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에 나는 혹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험과목도 내가 공무원 시험을 대비한 과목과 거의 동일했기에 자신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도 돈이 들기 때문에 비록 후기 대학이지만 오직 건국대학교 축산학과에 합격하는 것이 나의 일차 목표요 꿈이었다. 대학입학예비고사에 합격을 하고서도 또 11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어야만 했다. 시험지를 받아보니 공무원 시험 준비 등으로 충분히 공부했던 과목이라 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큰 강당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수험 끝날 시간도 많이 남았음에도 자신 있게 맨 먼저 시험지를 감독관에게 내고 나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만용이었다. 서울에 오랫동안 있을 곳도 없기에 친구에게 수험번호 등을 말하고 합격여부를 알려달라고 일러두고선 그 날로 시골로 내려왔다. 합격여부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나에게 한 통의 엽서는 내게는 크나큰 실망감과 부모님께는 한없는 죄송함을 안겨주었다. ‘00 연대 합격, 해평 불합격.’ 친구가 보내온 개봉된 엽서에는 마치 법원에서 날라 온 판결문인 양 간결하고 선명하게 사실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좀 더 신중히 치렀어야 했는데, 뭐가 바쁘다고 시건방지게, 보란 듯이 맨 먼저 시험지를 제출했던가! 후회가 되었다. 합격했어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떻게 학교에 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면 차라리 잘되지 않았나하는 만감이 교차된 가운데서도 한편 섭섭한 마음을 어떻게 지체하기가 힘들었다. 분명 2지망에는 임업과를 선택했기에 합격권내에 들고도 남음이 있는데도 거기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 없이 그것도 개봉된 엽서에 아무리 자랑스럽기론 자기 이름을 먼저 넣어 자기는 합격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고 너는 떨어졌으니 꼴좋다는 투로 쓸 수 있느냐는 원망스러움이 꿈에 부푼 한 청년의 마음을 몹시 자극하고 있었다. 더더욱 우스운 일은 연대라는 그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친구도 나보다 2년 후에 교육대학에 들어왔고 지금도 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 그 친구는 그 때 일을 까맣게 잊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겐 잊으려야 잊혀 지지 않는데 어찌하랴. 그 친구에게 원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정말 원망이 있었다면 ‘너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떨어지고 넌 합격했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교대로 왔어?’ 하고 한 번쯤은 물어도 봄직한데 아직 그렇게 한 적이 없다. 친구가 무안해 할 것은 당연지사 일게고 스스로 한 말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니까….(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