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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엄전에서 내려오신 큰스님이 제일 먼저 법공양실로 가시다가 빈손으로 나오시는 스님들과 마주치셨다. 왜 법공양물은 안가져가느냐고 물으셨다.
“택배로 부칩니다.” 하고 스님들이 웃으며 말씀하시자 큰스님도 같이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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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의 책상마다 두 개씩의 화엄경 케이스가 놓여있었다. 지난 번에 이어서 20권부터 40권까지 화엄경강설 책을 넣을 수 있어서 이제 케이스만으로는 80권 화엄경의 절반이 담기게 되었다.
동안거 결제를 하고 학인스님들도 안나오셔서 자리가 많이 빌 것 같다고 말씀들을 나누시는데 지난달과 다름없이 범어사 학인스님들이 모두 오셨다.
“안온다고 얼마나 섭섭했는지 말도 못해”
하고 큰스님이 유쾌하게 웃으셨다.
“통도사 입재할 때도 가려고 합니다.”
학인스님 대표가 말씀드렸다.
“오후 2시에 하니까 미리 한 시간 전에 도착하라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통도사에서는 해마다 동안거 기간에 ‘매일 대덕 스님을 초청해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씩 불자들을 화엄의 세계로 안내하는 릴레이 정진 법회’가 열리는데 올해로 47회가 되고, 입재날 법문을 큰스님이 하시기로 되어 있다고 인터넷 다음까페 염화실 공지란에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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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스님이 오셔서 이번 포항지진에 천곡사도 땅이 갈라지고 기왓장이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건물에도 금이 갔다고 하셨다. 지진 발원지가 절에서 6킬로 정도 떨어진 곳인데
“우리는 건물을 너무 잘 지어놔서 이 정도지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천재지변에 그만하기가 다행이라고 “스님은 뭐든 야무지게 하잖아.” 하고 천곡사를 방문한 적이 있는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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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력 감상 좀 잘해봐”
큰스님께서 인사오시는 스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엄경 달력’을 보았느냐고 물으셨다.
지난 5월말에 큰스님이 법문을 하러 가셨던 다음부터 부산으로 공부하러 오시는 보광사 스님이 이번달에는 운문사 동기 스님과 함께 오셨다. 함께 오신 스님은 인터넷으로 큰스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인연이 되어서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스님 왔다고 선물이 많다.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가져가요.”
하고 큰스님이 환영하셨다.
“화엄경 달력이 다 나왔어 세상에, 얼마나 화엄경을 사랑하면.” 이라고 하시면서 화엄경 달력도 잘 챙겨가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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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에서 복사했지 원래는 색깔이 없고 흑백이야.”
팔만대장경 속에서 흑백으로 들어있던 <선재동자의 구법여행> 그림이 새롭게 색을 입고 2018년 달력이 되었다. 선재는 같은 얼굴이어도 옷스타일이 늘 바뀐다고 큰스님이 말씀해 주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八
十廻向品 第二十五之六
四,十廻向
오늘 본 강의에 앞서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45권 점안식을 간단하게 하겠다.
서문
광명에서 나타난 부처님 말할 수 없고
부처님이 설한 법문 말할 수 없고
법문 속의 묘한 게송 말할 수 없고
게송 듣고 생긴 지혜 말할 수 없도다.
말할 수 없는 지혜로 생각 생각 가운데서
참된 이치[眞諦] 드러냄 말할 수 없고
오는 세상에 나타나실 여러 부처님
법문을 연설하심 끝이 없도다.
낱낱 부처님 법 말할 수 없고
가지가지 청정함도 말할 수 없고
미묘하게 내는 음성 말할 수 없고
바른 법륜 굴리는 것도 말할 수 없네.
저러한 하나하나 법륜 가운데
수다라 연설함 말할 수 없고
저러한 하나하나 수다라에서
분별하는 법문도 말할 수 없도다.
저러한 하나하나 법문 가운데
모든 법문 또 설함을 말할 수 없고
저러한 하나하나 모든 법 중에
중생을 조복함도 말할 수 없네.
2016년 7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이 책에는 아승지품 여래수량품 보살주처품 세 품이 들어있다.
이 서문에는 아승지품의 내용만 간단히 실었다. 내가 늘 전법을 강조하면서 지난 시간에는 중국에서 보았던 법문 쪽지 이야기를 했었다. 오늘 청량사 법안스님이 그 때 내가 보았던 모양 그대로 법문을 적은 인쇄물을 만들어 왔다. 중국에서 본 것은 흑백이었고 종이도 조잡하였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이 다르고, 시대가 변하고 여러 사정이 다른 관계로 상당히 화려하고 좋게 만들어 왔다.
이렇게 법문을 적은 종이를 수백 장 찍어서 맨 위에 구멍을 뚫고 실로 엮어서 법당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걸어놓는다. 절에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곳이라든지 생수를 뜨는 곳이 있다면 그 부근에 걸어놓으면 좋다. 사람들이 그 종이를 읽어보다가 ‘삶에 교훈이 되겠다’ 싶으면 똑 따가서 집에 가면서도 읽고 집에 가서도 읽는다. 그런 것이 법을 전하는 일이다. 법안스님께서 참 잘 만들어 오셨다.
열반경에는 설산동자 이야기가 나온다. 설산동자는 자기 생명을 다 바쳐서 법문 한 구절을 더 듣고자 했다. 우리가 그 가치에 크게 감동하지 못하고 소홀해서 그렇지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의 가치는 생명보다도 소중하다.
금강경에서는 ‘삼천대천세계만한 금은보화로써 보시한 공덕보다도 금강경 한 구절의 가치가 훨씬 더 높고 많다’고 나와 있다. 그런 말씀을 우리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읽었다.
진정 그 가치를 안다면 스님들이 금강경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인쇄해서 사찰마다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곳에 걸어놓아서 보시하는 일을 몸소 실천할 것이다.
법문이 담긴 이 종이 한 장을 전하는 가치가 삼천대천세계 지구만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보다도 더 공덕이 많다고 하였다. 불교는 진리의 가르침을 빼버리면 사실 생명이 없다.
부처님 법을 전하는 일에 더 우리 마음을 쓸 필요가 있다.
법안 스님이 제시한 이런 모델이 하나 나왔으니 여러분들이 더 업그레이드 해서 좋은 말씀을 전하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감동한 말씀, 여러분이 그 한 구절에서 눈을 뜬 말씀을 적어서 법공양을 하신다면 참 좋은 법공양 운동이 될 것이다.
사찰의 법당마다 주련이 있다. 그런 것이 다 법공양이다.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주련으로 걸어 놓고 읽고 감동하고 눈을 뜨고 마음이 열려서 돌아가라는 뜻으로 걸어놓는 것이다.
법안스님에게 박수 한 번 보내자. 법안스님이 그동안도 법공양 거리를 많이 만들어 오셨는데 오늘 제일 박수 받을 일을 했다. 본보기로 요렇게 하면 ‘이거 별거 아니구나. 난 이보다 훨씬 잘 할거야’ 하는 생각들을 하실 것이다. 처음에 이런 아이디어를 내서 출발을 한다고 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다. 그만치 우리가 법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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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4-5년 전에 서울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해서 드디어 부산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부산 연합회 연탄불공회> 가 출발했다. 시대가 바뀌니 이런 불공이 있다.
연탄은 그 가스를 마시면 머리가 돌거나 멍청이가 되거나 아니면 생명을 잃게도 되지만 지금도 연탄으로 난방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근래에 우리 한국불교도 철이 많이 들었다. 우물을 파준다든지 학교를 지어준다든지 지진이 난 곳에 봉사활동을 간다든지 성금을 보낸다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한다. 사실은 그것이 불교다. 중생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돌보자고 하는 것이 불교다. 근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십회향품을 보면 전부 그런 이야기다.
여기 연탄불공회에 설사 동참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거주하는 사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서 힘자라는 데까지 도우시기 바란다. 동사무소에 가서 주변에 아직도 연탄을 때야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물어보고 연탄 한 장에 운반비까지 계산해서 천원쯤으로 계산하여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운다면 사회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 일이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하는데 일조를 하리라는 생각으로 곁들어서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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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는 268페이지(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제일 밑에 줄 ‘회향의 명’을 공부할 차례다.
8,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74) 廻向의 名
以何義故로 說名廻向고 永度世間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出諸蘊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度言語道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離種種想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斷身見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離依處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絶所作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出諸有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捨諸取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며 永出世法하야 至於彼岸일새 故名廻向이니라
“무슨 뜻으로 회향(廻向)이라 이름 하는가. 영원히 세간(世間)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여러 가지 쌓인[諸蘊]데서 영원히 뛰어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언어의 길을 지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갖가지 생각을 떠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길이 몸이라는 소견을 끊어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의지할 곳을 아주 여의어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짓는 일을 영원히 끊고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모든 유(有)에서 영원히 뛰어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모든 취(取)를 영원히 버리고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며, 세상 법을 영원히 떠나서 저 언덕에 이르게 하므로 회향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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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의 명(名) : 회향이라는 이름의 뜻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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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향이 상당히 길었다. 내가 계산해 보니 일년내내 십회향 가운데 이 한 가지 회향만 가지고 공부했다.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회향이라고 한다’‘회향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이 ‘회향의 명’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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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고(以何義故)로 : 무슨 뜻으로
설명회향(說名廻向)고: 회향이라고 이름하느냐? 우리가 회향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흔히 기도할 때나 불사를 할 때 ‘회향한다’고 하는 것은 ‘회소향대(迴小向大)’의 의미다. 그동안의 불사나 기도를 작은 공덕이라고 생각하고 그 작은 공덕을 돌이켜서 보다 더 큰 공덕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이 회소향대라고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주 본격적으로 ‘회향이란 무엇인가’ 하면서 여러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영도세간(永度世間)하야 : 영원히 세상을 건너서 이 세간을 건너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저 언덕에 이른다. 세간을 건너가면 출세간에 이른다. 세간을 건너간다고 하니까 얼른 듣기에 어디 멀리 가는 것 같이 들리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한 삶을 산다는 것이 출세간의 삶이다. 불교는 그것이다. 자리를 옮기는 것도 아니고 지역이나 절, 나라를 옮기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자리, 바로 앉은 그 자리에서 출세간적인 삶을 산다. 연꽃이 그것을 보여준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피지만 항상 향기롭고 아름답다. 그래서 불교의 꽃이다. 내가 늘 살던 자리, 바로 그 앉은 자리에서 출세간적인 삶을 사는 것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 그것이 고명회향이다. ‘진흙에서 피지만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자’그것이 회향이다. 참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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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출제온(永出諸蘊)하야 : 영원히 모든 온을 벗어난다. 우리는 이 오온, 육근 거기에 항상 구애되어서 그 한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그 오온을 벗어나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 저 언덕에 이른다. 오온을 벗어난 진아, 참나, 참생명, 차별없는 참사람의 경지로써 산다. 그렇게 살 줄 알아야 그것이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진짜 회향이다. 고명회향이다. 아주 좋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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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언어도(度言語道)하야 : 언어의 길을 건너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저 언덕에 이를새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고명회향이다. 세 구절씩 딱딱 떨어진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한 경지’에 들었을 때 고명회향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참사람, 참생명, 진여불성(眞如佛性), 차별 없는 참사람이 들어 있다. 이것을 떠나서 말 한마디 못하고 걸음하나 옮기지 못하고 눈 한 번 꿈쩍이지 못한다. 글자 하나 읽지를 못한다. 전부 차별없는 참사람 진여불성이 들어서 보고 듣고 만지고 걷고 움직이고,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한다. 그것을 떠나서는 우리 생활의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차별없는 참사람, 진여불성이 오온(五蘊)을 좌지우지 하면서 또 그 실체는 오온을 벗어나 있다. 그것이 언어도를 벗어난 경지다. 이러한 경지에 우리가 들어섰을 때 그러므로 회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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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종상(離種種想)하야 : 가지가지 생각을 떠나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피안에 이르렀을 때 그 피안은 뭐겠는가? 생각을 떠난 상태니까 무념무상의 경지다. 그것이 여기에서는 저 언덕, 피안이다. 거기에 이르렀을 때 그런 경지를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이름해서 회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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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신견(永斷身見)하야 : 몸에 대한 견해, 오온 그것만이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를 신견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끊어버린다. 오온 이전에 오온의 본질, 오온의 실상에 눈을 떠야한다. 그래서 오온이 나라고만 생각하던 집착에서 나온 소견을 영원히 끊어서
도어피안(至於彼岸)일새 : 저 언덕에 이를새, 참나, 진여생명, 차별없는 참사람, 그 언덕에 이르렀을 새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그러므로 회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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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의처(永離依處)하야: 영원히 의지하는 곳을 떠나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저 언덕에 이르렀을새, 이 오온은 모든 것에 의지하고 있다. 그래서 저 언덕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떠나서 이 신체가 참되고 항상하는 진여불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형탈근진(逈脫根塵) 체로진상(軆露眞常)’이다. 육근과 육진을 멀리 벗어나서 이 신체가 진상(眞常)을 드러내는 것이다. 근진을 멀리 벗어나고 참되고 항상한 우리의 진여불성을 드러냈을 때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그것이 회향이다. 회향을 차원높게 설명하고 있다.
화엄경에서의 회향은 이런 경지다. 회소향대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 스님들이 회향법문 같은 것을 하실 때 이 구절을 가지고 설명하면 좋은 회향법문이 될 것이다.
‘진정한 회향은 이런 경지다’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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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절소작(永絶所作)하야 : 영원히 짓는 바를 끊어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피안에 이르렀을새, 무작지임멸이다. 수행방법 중에 작지임멸(作止任滅)이 있다. 짓고, 그치고, 맡기고, 소멸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궁극적으로 따져보면 참사람의 경지, 진여생명의 경지에 이르렀을새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그러므로 이름해서 회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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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출제유(永出諸有)하야 : 모든 존재를 영원히 벗어난다. 삼계(三界) 이십오유(二十五有)를 제유라고 한다. 그런 것에서 영원히 벗어나서 영광(靈光)이 독로(獨露)하는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드러나는 것’에 이르는 것이 피안에 이르는 것이다. 회소향대가 회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모든 존재를 영원히 벗어나서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피안에 이른다. 그 피안은 영광이 독로한 경지다. 신령스러운 광명이 홀로 드러나 있는 경지다.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그러므로 회향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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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제취(永捨諸取)하야: 영원히 모든 취착을 버려서, 집착을 버려서
도어피안(至於彼岸)일새: 피안에 이르렀을새, 집착을 벗어나면 해탈이다. 해탈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우리가
고명회향(故名廻向)이며: 회향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이다. 참 회향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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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출세법(永出世法)하야: 영출세법하야
지어피안(至於彼岸)일새: 지어피안일새
고명회향(故名廻向)이니라: 고명회향이니라. 세상법을 영원히 벗어나면 출세간법에 이른다. 그것이 피안이 된다.
앞에서는 세간을 영원히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르는 것, 영도세간(永度世間)이 나왔다. 내가 연꽃으로 이야기 했었는데 그것과 뜻이 똑같다. 여기는 영출세법이라고 했다. 세법이나 세간이나 똑같은 것이다. 세상에 그대로 살면서 출세간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유마경에 ‘고원육지(高原陸地)에 불생연화(不生蓮花)하고 비습어니(卑濕淤泥)에 내생차화(乃生此華)라’는 말이 있다. ‘높은 언덕에 잘 다듬어진 정원에는 연꽃이 피지 않는다. 아주 낮고 습기 많고 진흙탕 이런 곳에서 비로소 연꽃이 핀다’는 뜻이다.
이 오온을 가지고 사는 이상 우리는 항상 진흙탕 속에 사는 것이다. 세속에 사는 것이고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매일 탁발을 해서 오온인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식사를 하셨다. 오온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원리원칙에서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좀 안하고 신선이 되어 살려고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교에는 탄하복기(呑霞服氣)라고 해서 아침에 해떠오르는 것을 보고 해의 기운을 받아들여서 양생하는 방법 같은 것이 있고, 벽곡(辟穀)을 한다든지 생식을 한다든지 등등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있다. 그러나 오온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오온의 한계를 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오래 산 사람도, 삼천갑자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도 결국은 돌아가셨다.
어떤 사람이 오래사는 것을 이야기 하면 나는 속으로 ‘그 사람 한 200살 한 300살쯤 됐나? 이백, 삼백살 살았다면 내가 인정해주지’라는 생각을 한다.
‘기껏해야 100살 전후로 살다가는데 무얼 그렇게 따질게 있느냐. 그렇게 자랑스러워 할 게 있느냐’ 사석에서도 나는 더러 그런 이야기를 한다. 이 오온을 가지고 사는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세계는 오온의 한계를 벗어나서 사는 길이 또 얼마든지 또 있다. 그것을 ‘생사를 초월했다’고 한다.
육신마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다. 육신마저 영원히 금강석처럼 사는 길은 있을 수가 없다. 설사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 가면 변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육신을 가지고 어떻게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육신은 오온의 원리대로 살되 그래도 우리 정신은 고결하게 진흙 속에서 피었지만 향기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연꽃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자의 삶이고 불교적인 보살의 삶이다. 진정한 회향이다.
화엄경의 이치이다 보니 여기는 거의 그런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75) 廻向時의 住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如是廻向時에 則爲隨順佛住며 隨順法住며 隨順智住며 隨順菩提住며 隨順義住며 隨順廻向住며 隨順境界住며 隨順行住며 隨順眞實住며 隨順淸淨住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회향할 때에 곧 부처님을 수순하여 머물며, 법을 수순하여 머물며, 지혜를 수순하여 머물며, 보리를 수순하여 머물며, 이치를 수순하여 머물며, 회향을 수순하여 머물며, 경계를 수순하여 머물며, 행을 수순하여 머물며, 진실을 수순하여 머물며, 청정을 수순하여 머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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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시(廻向時)의 주처(住處): 회향하여 머무는 곳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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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하여 어디에 사느냐에 대해 나왔다. 그동안 우리는 회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해왔다. 좋은 일을 하나 해놓고 그보다 열 배 스무 배 회향을 하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선용기심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서 작은 것을 보시를 했다 하더라도 그 보시한 것은 물론 중요하고 값지지만 그것보다 더 값진 일은 그 보시를 통해 중생들의 문제와 연관시키는 일이다. 마음으로 잘 생각하고 그 마음을 착하게 쓰는 것, 잘 쓰는 것이 선용기심이다. 그것이 우리가 쭉 보아온 회향의 방법이다. 여기는 회향할 때 어디에 머무느냐 하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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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여시회향시(如是廻向時)에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즉위수순불주(則爲隨順佛住)며 : 곧 부처님에게 수순하야 머무는 것이 된다. 회향한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과 함께 사는 것, 부처님에게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된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회향을 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수순법주(隨順法住)며: 법을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수순지주(隨順智住)며: 지혜를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수순보리주(隨順菩提住)며: 보리를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수순의주(隨順義住)며: 진리를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의는 뜻, 진리다.
수순회향주(隨順廻向住)며 : 회향을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뭐든지 회향하는 것이다.
수순경계주(隨順境界住)며: 경계를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이 경계는 깨달음의 경계, 보살의 경계라고 봐야할 것이다.
수순행주(隨順行住)며: 보살행 하는 것을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수순진실주(隨順眞實住)며: 진실을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되며
수순청정주(隨順淸淨住)니라: 청정을 수순해서 머무는 것이 된다.
회향의 결과로써 이렇게 머무는 것을 표현하였다.
(76) 一切法通達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如是廻向하면 則爲了達一切諸法이며 則爲承事一切諸佛이라 無有一佛도 而不承事며 無有一法도 而不供養이며 無有一法도 而可滅壞며 無有一法도 而可乖違며 無有一物도 而可貪着이며 無有一法도 而可厭離며 不見內外一切諸法이 有少滅壞하야 違因緣道며 法力具足하야 無有休息이니라 佛子야 是爲菩薩摩訶薩의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회향하는 것이 곧 일체 법을 분명히 통달함이며, 일체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이니, 한 부처님도 섬기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법도 공양하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한 법도 파괴할 수 없고, 한 법도 어길 수 없으며, 한 물건도 탐할 것이 없고, 한 법도 싫을 것이 없으며, 안과 밖에 있는 일체 모든 법이 조금도 파괴되거나 인연의 도리를 어김을 보지 아니하며, 법력이 구족하여 쉬지 아니하느니라.
불자들이여,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제6 견고한 일체 선근을 수순하는 회향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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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법통달(一切法通達) : 회향하는 것이 일체 법을 통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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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여시회향(如是廻向)하면: 이와 같이 회향하면
즉위요달일체제법(則爲了達一切諸法)이며: 즉위 일체 제법을 요달하는 것이 된다. 회향을 잘 하고 마음을 잘 쓰면 그 속에 모든 법을 다 깨달아 통달하는 이치가 있다.
즉위승사일체제불(則爲承事一切諸佛)이라: 또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된다.
회향을 잘하면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 따로 ‘부처님, 부처님’ 하고 법당의 멀쩡한 부처님에게 가서 먼지를 털고 닦고 할 필요 없이 회향을 잘하면 선용기심이다. 그 마음을 잘 쓰면 일체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이 된다.
무유일불(無有一佛)도 : 한 부처님도
이불승사(而不承事)며 : 승사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회향 잘 하는 것이 선용기심이다. 마음을 잘 쓰면 한 부처님도 받들지 아니함이 없다.
무유일법(無有一法)도: 회향을 잘하는 것, 선용기심이다. 마음을 잘 쓰면 한 법도
이불공양(而不供養)이며: 공양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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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유일법(無有一法)도 : 한 법도
이가멸괴(而可滅壞)며 : 소멸해서 파괴할 수가 없다. 회향이 그와 같이 중요하다. 회향은 선용기심이다. 비록 작은 공덕을 닦았더라도 그 뒤에 내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뭘 주면서 ‘오냐 잘 먹고 잘 살아라’ 속으로 그렇게 마음 썼다면 그런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작은 것을 보시하더라도 정말 마음속으로까지 빌어주고 잘되기를 바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어려운 문제이기는 한데 그렇게 해야 대승불교다. 화엄불교, 보살의 마음이다.
무유일법(無有一法)도 : 한 법도
이가괴위(而可乖違)며 : 어기거나 무너뜨리거나 어길 수 없다. 회향을 잘하는데 어떻게 한 법이라도 어길 수 있고 한 법이라도 소멸하고 파괴할 수가 있겠는가.
무유일물(無有一物)도: 한 물건도 어떤 바늘 하나 실 한톨이라도
이가탐착(而可貪着)이며 :탐착할 수가 없다. 회향하는 정신으로 이렇게 훌륭한 회향을 제대로 했다면 어떤 한 물건도 탐착할 수가 없으며
무유일법(無有一法)도: 한 법도
이가염리(而可厭離)며: 싫어서 떠날 수가 없으며
불견내외일체제법(不見內外一切諸法)이 : 내외 일체 모든 법이
유소멸괴(有少滅壞)하야: 조금도 멸괴함이 있어서
위인연도(違因緣道)며 : 인연의 도를 어김을 보지 아니한다. 어떤 작은 문제도 인연의 도를 어길 수가 없다. 어기는 것을 보지 못한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차원 높은 화엄경의 이야기를 읽다가도 늘 깔려 있는 것이 인연의 도리다. 연기의 도리, 인과의 도리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를 깨달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내 노래 주제가인데,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이치를 우리가 제대로 알고 그 원리에 입각해서 살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남을 향해서 악담을 하면 자기에게 악담이 돌아오고, 남의 재산이나 작은 물건 하나라도 손해를 끼치면 바로 자기에게 손해가 돌아온다고 하는 이치를 알고 그 반대로 행동을 한다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고 좋아지겠는가. 그래서 나는 늘 인과의 이치를 이야기 한다.
보통 선가(禪家)에서는 부처님은 뭘 깨달았느냐 하면 ‘마음을 깨쳤다’고 표현하고, 공부를 많이 한 불교학자들은 부처님은 ‘연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이야기 한다.
화엄경에는 연기의 이치가 쭈욱 깔려 있다. 공부를 하다보면 연기의 이치가 깔려 있는데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 이 세상은 어떻게 보인다’ 라고 하는 것은 연기와는 사실 관련이 없다. 연기의 이치가 그 속에 있기는 있지만 연기만 가지고 설명할 정도가 아니다.
‘시성정각(始成正覺)하니까 이 세상이 전부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엄청난 일이고 큰일이고 충격적인 표현이다.
‘깨닫고 보니 세상은 전부 다이아몬드고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은 전부 부처님이더라’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그것에 어찌 연기라는 말을 감히 붙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보살행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화엄경이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보면 세상과 사람은 이와 같이 비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살행을 할 수 밖에 없다.’ 화엄경은 딱 이 두 마디다. 그런데 연기의 도리가 시종일관 깔려 있다.
수행을 해서 성불에 이른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연기의 이치고 인과의 이치다.
그래서 인연의 도 어김을 보지 못한다.
어떤 작은 문제에서도 작은 멸괴함에 있어서도 인연의 도리, 인연의 길을 어김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인연의 도를 어길 수는 없다. 인연의 도는 우리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어야 되는 이치다.
법력구족(法力具足)하야 : 법력을 구족하야
무유휴식(無有休息)이니라 : 휴식함이 없느니라. 이러한 이치를 잘 아는 것이 법력이다.
인과의 도리에 대해서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우리가 끄떡하지 않고 소신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법력이다. ‘법력이 있다 없다’고 할 때 우리의 기본 상식으로는 법력이라고 하니까 남다른 어떤 힘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법력을 구족하야 그 법력이 한 번도 멈추거나 쉬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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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시위보살마하살(是爲菩薩摩訶薩)의 : 이것이 보살 마하살의
제육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이니라 : 제육수순견고 일체 선근회향이니라. 이 한 가지 회향이 우리가 일년간 공부한 것이다.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은 ‘견고한 일체 선근을 수순하는 회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77) 廻向의 地位
菩薩摩訶薩이 住此廻向時에 常爲諸佛之所護念하야 堅固不退하며 入深法性하야 修一切智하며 隨順法義하며 隨順法性하며 隨順一切堅固善根하며 隨順一切圓滿大願하며 具足隨順堅固之法하야 一切金剛의 所不能壞라 於諸法中에 而得自在니라
“보살마하살이 이 회향에 머물 때에 항상 모든 부처님들의 호념하심이 되며, 견고하고 물러나지 아니하여 깊은 법의 성품에 들어가며, 일체 지혜를 닦아서 법의 뜻을 수순하고, 법의 성품을 수순하며, 일체의 견고한 선근을 수순하며, 일체의 원만한 큰 서원을 수순하며, 견고한 법을 구족하게 수순하며, 모든 금강(金剛)으로도 깨뜨릴 수 없으며, 모든 법 가운데서 자재함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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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의 지위(地位): 회향의 지위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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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주차회향시(住此廻向時)에 : 이 회향에 머물 때
상위제불지소호념(常爲諸佛之所護念)하야 : 항상 모든 부처님의 호념하는 바가 되고
견고불퇴(堅固不退)하며 : 견고하고 물러서지 아니하며
입심법성(入深法性)하야: 법의 성품에 깊이 들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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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체지(修一切智)하며: 일체 지혜를 닦으며
수순법의(隨順法義)하며: 법의를 수순하며 법과 의 이렇게도 표현한다.
수순법성(隨順法性)하며: 기신론(起信論) 같은 데서는 법과 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법이 드러난 것이라면 의는 그 법에 내재되어 있는 이치를 말한다. 법성을 수순하며 여기도 법의나 법성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법성원융무이상 할 때도 사실은 냉정하게 해석하면 법과 성이다. 법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고 성은 본질이다. 그냥 법성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 한 구절을 상당히 구구하게 해석하고 있다.
내가 법성게를 공부하면서 조선의 제일 천재 김시습, 우리는 설잠스님이라고 해야하겠는데 설잠스님이 법성게를 선(禪)의 이치로써 주석한 내용까지 보았다. 거기에 보니 법(法)과 성(性)을 분명하게 나눠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법은 눈에 드러나는 현상이고 성은 그 본질인 실상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놓았는데 똑 떨어지는 해석이다.
법과 성은 원융해서 두 모양이 없다. 둘이니까 두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 본래 둘이 없는데 두 모양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두 모양이 있으니까 두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상과 본질은 두 모양이다. 둘이기 때문에 둘이 없다. 법성원융무이상이다. 논리적으로도 그것이 딱 맞고 이치는 더 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법성을 수순하며
수순일체견고선근(隨順一切堅固善根)하며 : 일체 견고한 선근을 수순한다.
그래서 수순견고일체선근을 견고한 일체 선근을 수순하는 회향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수순일체원만대원(隨順一切圓滿大願)하며: 일체 원만한 대원을 수순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보살에게는 대원이 살림살이고 힘이다. 큰 원력을 수순하며
구족수순견고지법(具足隨順堅固之法)하야 : 견고한 법을 구족히 수순해서
일체금강(一切金剛)의: 일체 금강의 소불능괴라. 어떤 견고한 다이아몬드도 그 견고한 법
소불능괴(所不能壞)라: 회향의 법에 대해서는 무너뜨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어떤 일체 금강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능히 무너뜨릴 수 없음이라.
어제법중(於諸法中)에: 그래서 모든 법 가운데
이득자재(而得自在)니라: 자재함을 얻는다. 회향인 선용기심(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쓰는 것이 그야말로 모든 법 가운데서 자유자재하다. 우리가 인간관계 가운데서도 진정으로 마음을 잘 쓰면 통하지 않을 일이 없다. 마음을 잘 쓰면 다 무사통과다. 마음 잘 쓰는 것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선용기심을 하면, 말로만이 아니고 진정 마음을 저 밑바닥까지 철저히 잘 쓴다면 사람을 감화시키고 감동시킨다. 그래서 자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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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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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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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이라 하며...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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